출근을 하려고 행거를 뒤지는데, 도무지 입을 적당한 옷이 없다. 긴 겨울 내내 입었던 어두운 옷은 이제 꼴도 보기 싫은데, 봄옷을 입기에는 아직도 불안하다. 걸어만 놓고 입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다 지칠 때쯤 해서, 이제는? 하고 한두 번 입으면 그걸로 끝인 것이 봄옷의 신세다. 보기에만 아름다웠던 그 옷들은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싶은 순간, 화사함보다는 시원함이 더 보기 좋은 여름이 곧바로 닥치기 때문이다.

 

   출근 시간은 닥쳐오고 마음은 급한데 선뜻 손 가는 옷이 없었다. 초조하게 행거에 걸린 옷들을 하나씩 밀치다가 못 보던 옷을 발견했다.

  ‘이게 웬 옷인가.’

  나는 옷걸이 째로 옷을 빼들고 눈높이까지 쳐들었다. 옷은 내 눈앞에서 흔들리며 기억을 일깨웠다. 아하, 지난주던가, 소형이가 사다 준 옷이었다. 아파트 앞에 새로 생긴 할인 매장에 갔다가 단비 너 입으면 꼭 맞겠더라, 얼마 안 하기에 샀다.’며 주던 바로 그 옷이다. 눈이 빛났다. 새 옷이라면 사온 날 당장 입어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왜 이 옷을 잊어버리고 있었던가. 나도 늙었나? 그러나 기분은 아직 늙지 않았다. 갑자기 생긴 새 옷에 마음이 들떠 흥분까지 하며 얼른 소매에 팔을 꿰었다.

 

  나머지 한 팔을 꿰는 순간 나는 알았다. 내 몸에 딱 맞춤이라는 걸. 역시! 난 소형의 틀림없는 안목을 칭찬했다. 옷 하나는 기가 차게 뽑는단 말이야, 누가 디자이너 아니랄까봐. 와이셔츠 칼라에 목은 브이 자로 깊게 패이고 허리선이 몸에 맞게 들어간, 단추가 세 개 달린 재킷이었다. 내 몸에서 유일하게 봐줄 만한 가느다란 허리는 멋지게 살리고, 빈약한 가슴은 기가 차게 가려 주었다. 그리고 색상은 비록 검은 색이지만 약간의 반짝이는 광택이 무거움을 덜어주어 밝은 봄날에 입어도 칙칙하다는 느낌이 덜 들 것 같았다. 광택도 어디 싸구려 광택인가? 정말 은은하고 우아한 광택이었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 동안 받쳐 입을 게 마땅치 않아 늘 걸려있기만 했던, 앞뒤로 맞주름이 하나씩 잡혀있는 치마와 또 천생연분이었다. 우아하고 단아해진 내 모습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까지 흘렸다. 어울리는 옷 하나에 머리 속에는 야호!’란 소리가 지나가고 행복이란 단어도 둥둥 떠왔다.

 

  소형은 아직 대학교의 강사, 일명 보따리 장사다. 두 학교의 강의를 뛰고 있지만 보수는 고등학교 선생인 나보다 형편없다. 그런데도 황송하게 가끔 훌륭한 안목으로 고른 옷을 너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별로 비싼 거 아니니까 그냥 입어.’ 하면서 선사한다. 전생에 옷을 탐내다 맞아죽은 영혼인지 어쩐지 옷에 집착이 많은 나는 그때마다 뛸 듯이 기뻐하며 접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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