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 나무들은 변덕스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젠 누가 보아도 새순의 수준을 넘은 잎들을 달고 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일지 않는다. 언제 심술을 부려 흙먼지를 날릴지 모르는 봄이지만 아직은 초점 없는 고양이 눈같이 공기가 맹하니 동요가 없다.

  나는 춤을 추듯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까불까불 가볍게 차 키를 꽂고, 그레이스 켈리같이 우아하게 자동차 문을 열고 사뿐히 올라탔다. 시동 소리도 경쾌했다. 주차장의 차들은 거의 그대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내가 아주 출근이 빠른 편이다.

이 사람들은 다 뭘 해먹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느긋해?’

콧김을 흥! 뿌리며 액셀을 밟았다.

 

  크고 좋은 차일수록 아침 늦게까지, 또는 오랜 시간동안 주차장을 지킨다. 그리고 작은 차일수록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바쁘게 들락거리고. 풀방구리의 쥐 중 하나인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조용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가방을 맨 학생들만 종종 눈에 띄는 거리도 아직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적당히 허리를 조여 주는 재킷의 착용감을 즐기며,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내 모습을 내려다본다. 흐뭇하다.

 그런데 소형은 왜 자꾸 옷을 사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왜 나는 옷을 받을 때마다 그렇게 선뜻, 아무 생각 없이, 빌려준 물건 받는 것처럼 부담 없이 좋아만 했을까?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내가 왜 그랬지? 돈을 벌어도 내가 더 벌고, 소형은 늘 마이너스 통장 신센데. 옷도 그렇다. 소형은 새 옷이 거의 없다. 유행 지나간 옷은 자기가 손봐서 입고, 웬만해서 새로 사는 법이 없다.

  내가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이었던가. 그렇게 염치가 없었나?

  생각이 빨라진다.

  기억 속의 나는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다고 변명하고 있다.

  소형 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 없이 뭘 받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그 기억은 믿을 만한가? 기억에 없다고 없었던 일인가? 나도 이제 기억력을 맹신하고 있지만은 않는 나이다. 아니, 그렇게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알아가는 나이다.

 

  그렇다면, 성격,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급기야 나의 습성을 고찰하기 시작한다.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나?

  타인을 대하는 방식은?

  아니 관계를 맺어가는 데 습관이 된 일정한 방식이 있을 테지?

  그렇지!

 드디어 답을 찾는다.

 이유 없이 무얼 받진 않지! 왠지 부채를 짊어진 기분이 드니까. 그랬다면 금방 보답을 해버리는 걸로 짐을 벗어버린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그런데 소형에겐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무감각했을까. 이유도 없는 선물을 뻔뻔하게 받고도 당연하게 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마에서 땀이 났다. 내가 미쳤지, 그 동안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미쳤지, 미쳤지 하는 사이에 차는 벌써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학교는 너무 가까워 겨울엔 히터를 켜도 따뜻해지기도 전에 도착을 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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