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쥐었던 주먹을 풀고 땀에 젖어 잘 떨어지지 않는 분필을 놓고 돌아섰다. 자리로 돌아오는데 온 몸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눈물이 눈동자 바로 앞까지 차올랐지만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그래서 다행히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내 자리에 앉아 나는 결심을 했다. 다시는 손들지 않으리라. 한 순간도 나를 놓지 않으리라. 잠시 나를 잃고 남을 따라하는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절대로 기분이 함부로 날뛰게 놔두지 않으리라.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숫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나서고 싶어서 손을 든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날 거짓말쟁이로 취급해버렸다. 모르면서 손을 들었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 때는 해명할 방법도 알지 못했고 선생님께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그저 상처로만 가슴에 남아버렸다.
그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난 한 번도 손을 들어 ‘자발적인 흔쾌한 참여’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그게 버릇이 되어서 난 즐거워 죽을 때도, 친구들과 어울려 디스코텍에 가서 춤을 출 때도 좀처럼 활짝 웃지를 않는다. 운명은 언제나 나의 ‘활짝 웃는 웃음’을 용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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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왜 그렇게 태평하게 즐거워했을까.
늘 마음에서 놓쳐버리지 않고 있던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어쩌자고 가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인가.
시무룩하게 의자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와서 어깨를 찌른다. 돌아보니 나를 스치듯 지나가는 장선생이다. 그녀는 교무실 문을 열고 나가며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장선생과 같이 근무한지는 2년이다. 세월과 친분이 꼭 정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와의 친분은 아주 두텁다. 왜 그렇게 가까워졌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나이 차이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그냥 인연이 닿아서일까. 어쨌든 나도 그렇지만 그녀도 날 아끼고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나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 그녀는 하는 짓은 거의 언니다.
편견 없고 관대하며, 어쩌면 그렇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회생활을 잘해나가는지 감탄스러울 때가 많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하느님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사람에게 참 골고루도 퍼부었구나 싶게, 샘이 날 정도로 괜찮은 여자다. 배우를 했어도 손색없을 인물에, 늘씬한 키에, 남을 기분 좋게 하는 웃는 얼굴.
사실 그 모든 것은 그냥 들러리일 뿐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조건으로 좋아지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진짜 중요한 건 뾰족한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 싫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군이라도 보통 아군이 아니다. 장선생이 나를 왜 그렇게 절대적으로 지지하는지 잘 모른다. 사람을 좋아하는 걸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여튼 그녀와 같이 근무하는 것이 신통치 않은 사회성을 가진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나는 생각을 끊고 장선생을 따라 나섰다.
그녀는 휴게실로 들어간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녹색 소파가 늘어서 있는 휴게실은 텅 비어 있다. 이 시간엔 대체로 그렇다. 담임선생들은 교실로 들어가 있을 시간이다. 그녀도 나도 그래야 될 시간이기도 하다.
장은 소파에 앉는다.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선생님, 표정 좀 푸세요. 무서워 이야기도 못하겠네.>
하며 웃는다. 불쾌한 기분이 표정에 다 보이나 보았다.
이마에 세로줄이 그어지고 입술은 비뚤어진 채 좀 나왔으리라. 불쾌할 때의 내 표정이 그렇다는 걸 알고는 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거울을 보다 정말 놀랐다. 사람만큼 표정이 풍부한 동물이 없다더니, 어떻게 감정이 표정에 그렇게 적나라하게 나타날 수 있단 말인지, 내 얼굴인데도 기분이 나빠졌다. 남이라면 두 번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을 인상이었다. 그 때 무지 깊이 반성했었다.
신단비!
모든 기분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고 사람을 대하지 말라!
온화한 표정. 변함없는 표정. 그게 바로 인격이다!
하고.
하지만 막상 화가 났을 땐 이성이 없고, 이성을 찾은 후에는 이미 과거였다. 나를 본 사람들을 모두 불쾌하게 만들었음에 틀림없었다. 한심한 노릇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뒤늦게 속으로 또 깜짝 놀라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마에서 힘을 빼고,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힘이 빠진 이마가 근질근질하게 느껴졌다. 내가 볼을 빨아 당겼다 놓았다 하며
‘이젠 어때?’
하는 표정으로 장선생을 바라봤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내 눈을 보며 묻는다.
<이젠 상대해 줄 만한 표정인가 봐?>
<네, 아깐 무서워 죽을 뻔 했어요.>
그녀는 웃지도 않고 농담을 한다.
<사회생활 한 두 해도 아니고, 뭐. 잊어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표정은 또 굳어진다. 날 보고 있는 장선생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난 표정을 바꾸려 애쓴다.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괜찮다니까. 세월이 약이지. 망각이라는 약이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 마음이 분노로 굳어버린 모양이다. 그녀가 나를 불러낸 목적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다른 낌새를 이제야 눈치 챈다.
<무슨, 내게 해줄 말 있어요? 들어서 기분 나쁠 이야기면 하지 말고.>
난 긴장을 한다. 애써 농담처럼 말해보지만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걸 알고 있다.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들어야 될 이야기면 뜸들이지 말고 하세요. 설상가상이라고, 나쁜 일엔 꼬리 잡고 따라붙는 나쁜 놈이 꼭 있으니까.>
태연한 척 말하면서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