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때론 힘들게 한다

 

 

  ‘나는 두부 장수가 싫어요.’

  아무리 싫다고 소리치며 도망가도 두부장수는 딸랑딸랑 종을 흔들면서 따라왔다.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찢어진 밀짚모자가 얹혀 있었다. 분명히 두부를 안 산다고, 나는 두부를 싫어한다고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는데도, 두부 장수는 표정도 없이 계속 두부가 얹힌 목판을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두부 목판에 밀려 뒷걸음치다 할 수 없이 뒤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보니까, 목판을 묶고 있는 끈을 목에 걸고 한손으로는 목판을 단단히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 종을 흔들며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멈출 것 같지 않는 동요 없는 같은 자세로 나를 쫓는 사람.

  갑자기 두부가 문제가 아니라 두부 장수가 무서워졌다.

  푹 눌러 쓴 밀짚모자에 얼굴이 반이나 가려 표정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추적이 이젠 그 자체만으로 공포가 되었다. 남자는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는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이 영원히 그렇게 따라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멈추지 않는 기계,

  멈추지 않는 자동차,

  멈추지 않는 세월.

  저 사람은 영원히 뛰는 사람이다.

  건전지만 넣어주면 소녀의 기도에 맞춰 뱅글뱅글 돌아가며 쉼 없이 춤을 추는 인형처럼.

  이런 생각이 들자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난 무릎을 떨면서 멈춰서고,  그 다음엔 떨리던 무릎을 꺾고 고꾸라지듯 땅바닥에 앉아버렸다.

 

  두부 장수가 내 앞에 와서 섰다.

  나는 도망갈 힘이 없었다.

  앞에 서서도 두부 장수는 내 머리 위에서 딸랑딸랑 종 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쉬지 않고 종을 흔들어댔다. 귀가 아팠다. 손으로 귀를 막아도 소리는 작아지지 않고 점점 아프게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괴로워서 머리를 흔들었다.

  잠을 깨서도 나는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꿈이었다는 걸 의식하고 난 뒤에도 흔들던 머리를 곧바로 멈출 수 없었다. 어지러웠다. 의식은 아직 꿈과 현실, 두 세계에 걸쳐져 있다. 다른 세계로 옮아가는 덴 시간이 필요했다.

 

  드디어 머리가 베개 위에 얌전히 놓이고 의식이 또렷해진다.

  천장에 달려있는, 전구가 박힌 튤립 모양의 전등갓이 눈에 들어왔다. 자명종이 울리고 있었다. 알람 때문이었구나. 왼손을 뻗어 방바닥을 더듬어 시계를 찾아 들었다. 여섯 시 반이었다. 소리를 죽이고 다시 방바닥에 시계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습관적으로 어제 밤 자기 전에 알람을 눌러놓았나 보았다.

  머리 밑이 축축했다.

  다시 꿈 생각이 났다.

  나는 정말 두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콩을 싫어하고 콩으로 만든 음식들도 만찬가지다. 콩나물도 두부도. 꿈에서도 두부가 싫었다. 꿈속에서도 식성은 그대로라니. 그런데 웬 난데없는 한복? 두부 장수는 한복을 입었다. 한복이 그렇게 무섭게 보이다니, 두부 장수의 한복이 떠오르자 섬뜩했다.

  나는 두부 행상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더구나 한복 입은 두부 장수라니, 그리고 그 찢어진 밀짚모자는 또 뭔가. 각설이 타령에서나 보았음직한 밀짚모자를 왜 두부 장수의 머리에서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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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전모가 훤히 꿰뚫렸다.

  그가 아침부터 나를 부른 목적이 아주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그저 껀수를 잡고 싶은 그의 본능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나다.

  손 안에 말랑하게 잡히지 않는 걸 못 견뎌 하는 부장.

  멋대로 통제하려 하는 걸 참지 못하는 나.

  문제는 역시 거기 있었다.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그 황당한 일은 내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고 그가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다 싶었지요. 그리고 교무 부장님도 어제는 분명히 윤선생님 잘못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끝까지 선생님 안 찾고 윤선생님 불러들이는 걸로 끝냈겠지요?>

  <결론을 말하자면, 오늘 아침 건은 완전히 치사한 고의에서 시작됐다?>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오늘 부장님 처사에 깜짝 놀랐잖아요. 어제 일 제가 못 봤으면 오늘일은 보고도 믿지 못했을 걸요? 어떻게 자고 나서 딴 사람이 되는지... 어제 그 자리에 선생님 몇 분 더 계셨고, 이런 이야기 다른 선생님 통해 귀에 들어가면 선생님 기분 더 엉망일 것 같아 제가 미리 말씀드려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힘이 쭉 빠진다. 독기가 뻗칠 때가 차라리 나았다. 이런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되다니.

  <기분 많이 상하시죠?>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이다.

  <듣고 나니 더 허탈하네.>

  그녀는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얼른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까부터 그녀 반 학생이 창문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런 기막힌 일도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기분이 좋아도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있겠는가. 혼자서만 조심을 한다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술에 취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자동차를 무슨 재주로 피한단 말인가.

  하루아침 기분 좋았던 값을 엄청나게 치른 나.

  목을 늘어뜨리고 잠시 잊어버렸던 나의 주문을 떠올린다.

 

  ‘행복 뒤에는 반드시 따라붙는 불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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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제가 방송부원들 신입생 환영회 때문에 좀 늦게 퇴근했거든요. 오늘 이런 일 일어날 줄 알았으면 미리 귀띔 좀 해드릴 걸..... 그런데 그게 이럴 일이 아니라서, 다 해결된 일이고, 괜히 선생님 듣고 나면 기분만 상할 것 같아 아까 운동장에서 만났을 때도 일부러 이야기 안 했거든요.>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다. 그것도 퇴근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일이 밤을 지나는 동안 누군가의 머리속에서 음모로 변질되었다. 오늘 아침의 이 말도 되지 않는 음모로 말이지?’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 거의 퇴근하고 난 뒤에 교무 부장님이 국어과 보충 수업 교재 안 들어왔다고 난리더라구요. 선생님 이름을 들먹이는 것 같아 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기가 막혀, 나를 왜 찾아? 윤오균 선생을 찾아야지. 윤선생도 정말 웃기네. 어제 나한테 보충 넘기면서 그때까지 교재도 안 넘겼단 말이야? 또 안 했으면 안 했다고 말이라도 해야 조치를 취할 거 아냐.>

관자놀이가 펄떡펄떡 뛰었다.

 

 <그렇죠? 저도 그게 이상해서, 선생님이 일을 그렇게 할 분이 아닌데, 역시....... 하여간, 교무부장 말씀이 선생님이 보충 수업을 맡았는데 수업 자료도 안 넘기고 퇴근했다고, 인쇄소에 넘겨야 하는데 일을 그렇게 해놓고 퇴근했다고 노발대발이었어요. 제가 하도 이상해서, 선생님이 그럴 리도 없고, 이번 달 보충 없다고 좋아하셨잖아요? 그 생각이 나서, 신단비 선생님은 이번 달에 아닐 거라고, 뭔가 잘못 알고 계실 거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랬지. 원래는 없었어요. 근데 어제 퇴근 시간 다 돼서 바뀌게 된 거예요. 윤선생이 아버님이 많이 편찮으시다고 부탁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한 달 편해보나 했다가 실망하고 퇴근했는데. 세상에! 장선생은 이해가 돼? 어제 알리면서 교재 준비도 안 했다는 거. 그것도 퇴근 시간에.>

 

  <말하면 뭐해요. 말도 안 되죠. 근데 선생님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내가 이번 달 보충 아닐 거라고.>

  <, 맞다. 그랬더니, 부장님 말씀이 알고 있다고, 본래 아니었는데, 윤선생이 못 할 사정이 생겨서 선생님께 넘기기로 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윤선생님께 연락을 하는 것 같았어요. 전 사정을 자세히 모르니까 궁금하기도 해서 선생님께 전화했는데 계속 안 받으셨구요.>

  <언니 집에 저녁 먹으러 갔었어요. 밥 한 번 먹으러 오라고 언제부터 졸라서, 어젠 엄마도 와 계신다 하고... 내가 휴대전화하곤 좀 덜 친해서 배터리가 나간 줄도 몰랐고......전화가 왔대도 아마 안 들렸을 거예요. 모이면 시끌시끌해서... >

  <제가 선생님을 모르면 모를까. 사실 전화하면서 기대도 안 했어요. 통화 성공률이 본래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장선생이 뒷말을 끌며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아주 잘 안다. 그녀도 나도.

 

  문명의 이기利器.

  휴대전화가 문명의 이기임엔 틀림없다. 돌아다니며 나의 행적을 알릴 수 있고, 앉아서 세상과 소통하게 한다. 엄청 편리한 기계다. 그걸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난 이놈이 왜 괴물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편리한 것이 과연 이롭기만 한 것인지.

  휴대전화를 보고 있으면, 정신과 손을 한 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게 하는, 요물을 하나씩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시간을, 혼자만의 시간을, 이 요물은 허용하지 않는다. 가장 고요하고 싶은 산책 중에도 울리는 신호음.

  처음 휴대폰을 소유했을 땐 나도 애지중지 가는 곳마다 품고 다녔다.

  별 생각도 없이 습관처럼.

  그러던 그 해 여름 방학, 강원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휴대전화를 집에다 두고. 고의가 아니라 깜빡한 것이다. 날마다 분신처럼 따라다니던 그 놈은 나흘 동안 내 방 책상 위에 혼자 있었다. 혼자 가끔 벨소리를 울리면서.

 

  그리고 난, 드디어 평화를 얻었다.

  아니 잃어버린 평화를 다시 찾았던 것이다.

  그 여행이 유난히 편안하고 고요하고 안정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휴대전화의 부재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단안을 내렸다. 그 놈을 사용은 하되 사랑하진 말자고. 매달려가진 말자고 말이다. 현대를 살면서 아주 무시하고 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매순간을 그놈에게 빼앗기진 말자고.

 

  나는 그놈과 이렇게 협상을 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출근하는 순간, 가방에 들어있는 전화는 잊어버리고 퇴근 시 확인.

  퇴근하면 가방에 둔 채 잊어버리고 아침에 확인.

  물론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 걸 모른척하는 건 아니다. 들리면 받지만 끊임없이 확인하진 않는다는 것. 뭐 그 정도의 친분만 유지한다. 외출할 때도 휴대는 하지만 돌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시끌시끌한 곳에 있을 땐 신호음이 들리지 않으니 안 받기가 일쑤. 이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전화를 안 받아도 큰일이 아니다. 그렇게 인식되고 나니 나름 편한 점도 있다. 물론 그들에겐 불편한 점이 있을 테지만.

 

  <6 시경까지 전화하다 말았어요. 윤선생님과 연결이 됐거든요. 불려 들어와서 늦게까지 교재 만들더라구요.>

  <그럼 해결 다 됐는데 왜 아침에 나를 부른 거지?>

  이건 물론 장선생에게 하는 질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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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쥐었던 주먹을 풀고 땀에 젖어 잘 떨어지지 않는 분필을 놓고 돌아섰다. 자리로 돌아오는데 온 몸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눈물이 눈동자 바로 앞까지 차올랐지만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그래서 다행히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내 자리에 앉아 나는 결심을 했다. 다시는 손들지 않으리라. 한 순간도 나를 놓지 않으리라. 잠시 나를 잃고 남을 따라하는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절대로 기분이 함부로 날뛰게 놔두지 않으리라.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숫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나서고 싶어서 손을 든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날 거짓말쟁이로 취급해버렸다. 모르면서 손을 들었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 때는 해명할 방법도 알지 못했고 선생님께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그저 상처로만 가슴에 남아버렸다.

 

  그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난 한 번도 손을 들어 자발적인 흔쾌한 참여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그게 버릇이 되어서 난 즐거워 죽을 때도, 친구들과 어울려 디스코텍에 가서 춤을 출 때도 좀처럼 활짝 웃지를 않는다. 운명은 언제나 나의 활짝 웃는 웃음을 용서하지 않았다.

**

  오늘 아침엔 왜 그렇게 태평하게 즐거워했을까.

  늘 마음에서 놓쳐버리지 않고 있던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어쩌자고 가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인가.

  시무룩하게 의자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와서 어깨를 찌른다. 돌아보니 나를 스치듯 지나가는 장선생이다. 그녀는 교무실 문을 열고 나가며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장선생과 같이 근무한지는 2년이다. 세월과 친분이 꼭 정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와의 친분은 아주 두텁다. 왜 그렇게 가까워졌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나이 차이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그냥 인연이 닿아서일까. 어쨌든 나도 그렇지만 그녀도 날 아끼고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나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 그녀는 하는 짓은 거의 언니다.

편견 없고 관대하며, 어쩌면 그렇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회생활을 잘해나가는지 감탄스러울 때가 많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하느님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사람에게 참 골고루도 퍼부었구나 싶게, 샘이 날 정도로 괜찮은 여자다. 배우를 했어도 손색없을 인물에, 늘씬한 키에, 남을 기분 좋게 하는 웃는 얼굴.

  사실 그 모든 것은 그냥 들러리일 뿐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조건으로 좋아지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진짜 중요한 건 뾰족한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 싫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군이라도 보통 아군이 아니다. 장선생이 나를 왜 그렇게 절대적으로 지지하는지 잘 모른다. 사람을 좋아하는 걸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여튼 그녀와 같이 근무하는 것이 신통치 않은 사회성을 가진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나는 생각을 끊고 장선생을 따라 나섰다.

  그녀는 휴게실로 들어간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녹색 소파가 늘어서 있는 휴게실은 텅 비어 있다. 이 시간엔 대체로 그렇다. 담임선생들은 교실로 들어가 있을 시간이다. 그녀도 나도 그래야 될 시간이기도 하다.

  장은 소파에 앉는다.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선생님, 표정 좀 푸세요. 무서워 이야기도 못하겠네.>

하며 웃는다. 불쾌한 기분이 표정에 다 보이나 보았다.

 

  이마에 세로줄이 그어지고 입술은 비뚤어진 채 좀 나왔으리라. 불쾌할 때의 내 표정이 그렇다는 걸 알고는 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거울을 보다 정말 놀랐다. 사람만큼 표정이 풍부한 동물이 없다더니, 어떻게 감정이 표정에 그렇게 적나라하게 나타날 수 있단 말인지, 내 얼굴인데도 기분이 나빠졌다. 남이라면 두 번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을 인상이었다. 그 때 무지 깊이 반성했었다.

  신단비!

  모든 기분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고 사람을 대하지 말라!

  온화한 표정. 변함없는 표정. 그게 바로 인격이다!

  하고.

  하지만 막상 화가 났을 땐 이성이 없고, 이성을 찾은 후에는 이미 과거였다. 나를 본 사람들을 모두 불쾌하게 만들었음에 틀림없었다. 한심한 노릇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뒤늦게 속으로 또 깜짝 놀라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마에서 힘을 빼고,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힘이 빠진 이마가 근질근질하게 느껴졌다. 내가 볼을 빨아 당겼다 놓았다 하며

  ‘이젠 어때?’

하는 표정으로 장선생을 바라봤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내 눈을 보며 묻는다.

  <이젠 상대해 줄 만한 표정인가 봐?>

  <, 아깐 무서워 죽을 뻔 했어요.>

  그녀는 웃지도 않고 농담을 한다.

  <사회생활 한 두 해도 아니고, . 잊어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표정은 또 굳어진다. 날 보고 있는 장선생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난 표정을 바꾸려 애쓴다.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괜찮다니까. 세월이 약이지. 망각이라는 약이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 마음이 분노로 굳어버린 모양이다. 그녀가 나를 불러낸 목적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다른 낌새를 이제야 눈치 챈다.

  <무슨, 내게 해줄 말 있어요? 들어서 기분 나쁠 이야기면 하지 말고.>

  난 긴장을 한다. 애써 농담처럼 말해보지만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걸 알고 있다.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들어야 될 이야기면 뜸들이지 말고 하세요. 설상가상이라고, 나쁜 일엔 꼬리 잡고 따라붙는 나쁜 놈이 꼭 있으니까.>

  태연한 척 말하면서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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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이 풀렸다.

 돌아서서 발걸음을 떼어 몇 걸음을 옮겼나?

 거칠게 의자 돌아가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갑자기 세찬 언어의 폭풍우가 뒤통수를 마구 후려갈겼다.

<요새 젊은 사람들 말이야--, 하여튼 못써.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다고. 우리 젊었을 땐 안 그랬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지. 감히 어디라고.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모르는 척. 도대체 지 주장만 할 줄 알지. 책임감이 없어! 책임감이! 뭐든지 안 하려고만 한단 말이야. 누구는 나이 안 먹나? 나이들 먹고 이 자리 한 번 앉아보라고. 얼마나 잘하나.>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서 내 책상으로 왔다. 그건 이제 딱히 나를 상대로 하는 소리도 아니었고, 사슴을 놓치고 하릴없이 아무 곳에나 대고 으르렁거려보는 맥 빠진 몸짓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피곤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내 생각은 분명히 전달했고, 내가 다시 여기서 돌아서면, 분명 별별 지나간 일까지 시시콜콜히 들고 나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전인수로 해석을 달아서.

  나는 의자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부장도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내가 이쯤에서 가버린 걸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시작한다 하더라도 이미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는 틀렸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남의 약점을 잡고 올라서려는 자는, 공격을 멈춰야 할 시기에 대한 상황 파악도 빠르다.

  어쩐지 아침이 즐겁다 했다. 나의 운명의 씨줄 날줄에는 행복이란 무늬는 주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왠지 즐겁고 마음이 가벼운 날엔 꼭 이렇게 찬물 끼얹는 일이 생기곤 한다.

  **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난 그 나이까지도 낯을 심하게 가렸고 왜 그렇게 부끄러움을 많이 탔는지. 학교에 가면 친구도 없이 하루 종일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마 오늘처럼 왠지 기분이 들뜨는 신들린 것 같은 날이었으리라.

  평소엔 일어서서 낭독도 못했던 나였다. 책을 읽으려 하면 목에 무엇이 걸린 것 같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손들고 발표 한 번 해 본적도 없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살았다.

 

  문제의 그 날,

 그런 용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자발적인 참여란 아예 사전에도 없었던 내가, 칠판에 적어 놓은 산수 문제를 두고 풀어 볼 사람?이란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학교에 입학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일어서서 소리 내어 책 한 번 옳게 못 읽던 아이가, 하루 종일 가야 입 한 번 벌리지 않던 아이가, 그것도 스스로 하겠다고 손을 치켜들었으니 선생님의 눈에 확 띌 수밖에.

  손을 든 많은 학생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선생님은 나를 지목했다.

  사실 그 때,

  지목 받기 직전에 난 손을 들고 있는 내 모습에 놀라 손을 도로 내리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흔들리던 내 눈빛이 선생님의 눈길과 마주쳤고 그 순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신단비->

  난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며, 화난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입 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기역자로 굳어있던 방아깨비 뒷다리 같은 다리가 펴지면서 딱! 소리가 났다. 학생들은 무섭게 조용했다. 아마 그들도 수업 중에 처음 일어서는 나를 보는 것이 신기했을 것이다.

  나를 향한 집중과 고요.

  나는 물속을 허우적거리듯 앞으로 나아갔다. 정지된 공기가 나를 친친 동여매는 것 같았다. 칠판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 얼굴이 노랗게 보였다.

 

  드디어 칠판 앞에 섰다.

  더하기 문제다.

  앉아서 할 때는 쉬운 문제였다.

  눈으로 보고 있을 땐 답을 다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칠판에 적힌 숫자는 아까 그 숫자가 아니었다. 크기가 엄청 나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의 숫자를 읽고 나서 뒤의 숫자를 읽을 때 앞 숫자가 무엇인지 까먹었고 앞 숫자를 보면 뒤 숫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요함이 내 머릿속까지 고요하게 만들어버린 듯했다. 긴장을 했다는 생각은 아직도 없다. 긴장의 의미를 그 땐 몰랐고 그래서 긴장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분필을 손에 꽉 쥔 채 먹먹한 머리로 계속 숫자만 보고 있었다. 아니 숫자가 적힌 칠판만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 땀이 났다.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몰랐다. 서 있는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져 내 몸이 돌로 굳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길어야 기껏 일 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드디어 그 상황이 타개는 되었다. 나의 불행으로 끝난 게 유감이지만 말이다.

  <신단비!  앞으로 모르면 손들지 마. 알았어?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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