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가 방송부원들 신입생 환영회 때문에 좀 늦게 퇴근했거든요. 오늘 이런 일 일어날 줄 알았으면 미리 귀띔 좀 해드릴 걸..... 그런데 그게 이럴 일이 아니라서, 다 해결된 일이고, 괜히 선생님 듣고 나면 기분만 상할 것 같아 아까 운동장에서 만났을 때도 일부러 이야기 안 했거든요.>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다. 그것도 퇴근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일이 밤을 지나는 동안 누군가의 머리속에서 음모로 변질되었다. 오늘 아침의 이 말도 되지 않는 음모로 말이지?’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 거의 퇴근하고 난 뒤에 교무 부장님이 국어과 보충 수업 교재 안 들어왔다고 난리더라구요. 선생님 이름을 들먹이는 것 같아 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기가 막혀, 나를 왜 찾아? 윤오균 선생을 찾아야지. 윤선생도 정말 웃기네. 어제 나한테 보충 넘기면서 그때까지 교재도 안 넘겼단 말이야? 또 안 했으면 안 했다고 말이라도 해야 조치를 취할 거 아냐.>

관자놀이가 펄떡펄떡 뛰었다.

 

 <그렇죠? 저도 그게 이상해서, 선생님이 일을 그렇게 할 분이 아닌데, 역시....... 하여간, 교무부장 말씀이 선생님이 보충 수업을 맡았는데 수업 자료도 안 넘기고 퇴근했다고, 인쇄소에 넘겨야 하는데 일을 그렇게 해놓고 퇴근했다고 노발대발이었어요. 제가 하도 이상해서, 선생님이 그럴 리도 없고, 이번 달 보충 없다고 좋아하셨잖아요? 그 생각이 나서, 신단비 선생님은 이번 달에 아닐 거라고, 뭔가 잘못 알고 계실 거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랬지. 원래는 없었어요. 근데 어제 퇴근 시간 다 돼서 바뀌게 된 거예요. 윤선생이 아버님이 많이 편찮으시다고 부탁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한 달 편해보나 했다가 실망하고 퇴근했는데. 세상에! 장선생은 이해가 돼? 어제 알리면서 교재 준비도 안 했다는 거. 그것도 퇴근 시간에.>

 

  <말하면 뭐해요. 말도 안 되죠. 근데 선생님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내가 이번 달 보충 아닐 거라고.>

  <, 맞다. 그랬더니, 부장님 말씀이 알고 있다고, 본래 아니었는데, 윤선생이 못 할 사정이 생겨서 선생님께 넘기기로 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윤선생님께 연락을 하는 것 같았어요. 전 사정을 자세히 모르니까 궁금하기도 해서 선생님께 전화했는데 계속 안 받으셨구요.>

  <언니 집에 저녁 먹으러 갔었어요. 밥 한 번 먹으러 오라고 언제부터 졸라서, 어젠 엄마도 와 계신다 하고... 내가 휴대전화하곤 좀 덜 친해서 배터리가 나간 줄도 몰랐고......전화가 왔대도 아마 안 들렸을 거예요. 모이면 시끌시끌해서... >

  <제가 선생님을 모르면 모를까. 사실 전화하면서 기대도 안 했어요. 통화 성공률이 본래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장선생이 뒷말을 끌며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아주 잘 안다. 그녀도 나도.

 

  문명의 이기利器.

  휴대전화가 문명의 이기임엔 틀림없다. 돌아다니며 나의 행적을 알릴 수 있고, 앉아서 세상과 소통하게 한다. 엄청 편리한 기계다. 그걸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난 이놈이 왜 괴물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편리한 것이 과연 이롭기만 한 것인지.

  휴대전화를 보고 있으면, 정신과 손을 한 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게 하는, 요물을 하나씩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시간을, 혼자만의 시간을, 이 요물은 허용하지 않는다. 가장 고요하고 싶은 산책 중에도 울리는 신호음.

  처음 휴대폰을 소유했을 땐 나도 애지중지 가는 곳마다 품고 다녔다.

  별 생각도 없이 습관처럼.

  그러던 그 해 여름 방학, 강원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휴대전화를 집에다 두고. 고의가 아니라 깜빡한 것이다. 날마다 분신처럼 따라다니던 그 놈은 나흘 동안 내 방 책상 위에 혼자 있었다. 혼자 가끔 벨소리를 울리면서.

 

  그리고 난, 드디어 평화를 얻었다.

  아니 잃어버린 평화를 다시 찾았던 것이다.

  그 여행이 유난히 편안하고 고요하고 안정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휴대전화의 부재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단안을 내렸다. 그 놈을 사용은 하되 사랑하진 말자고. 매달려가진 말자고 말이다. 현대를 살면서 아주 무시하고 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매순간을 그놈에게 빼앗기진 말자고.

 

  나는 그놈과 이렇게 협상을 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출근하는 순간, 가방에 들어있는 전화는 잊어버리고 퇴근 시 확인.

  퇴근하면 가방에 둔 채 잊어버리고 아침에 확인.

  물론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 걸 모른척하는 건 아니다. 들리면 받지만 끊임없이 확인하진 않는다는 것. 뭐 그 정도의 친분만 유지한다. 외출할 때도 휴대는 하지만 돌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시끌시끌한 곳에 있을 땐 신호음이 들리지 않으니 안 받기가 일쑤. 이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전화를 안 받아도 큰일이 아니다. 그렇게 인식되고 나니 나름 편한 점도 있다. 물론 그들에겐 불편한 점이 있을 테지만.

 

  <6 시경까지 전화하다 말았어요. 윤선생님과 연결이 됐거든요. 불려 들어와서 늦게까지 교재 만들더라구요.>

  <그럼 해결 다 됐는데 왜 아침에 나를 부른 거지?>

  이건 물론 장선생에게 하는 질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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