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이 풀렸다.

 돌아서서 발걸음을 떼어 몇 걸음을 옮겼나?

 거칠게 의자 돌아가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갑자기 세찬 언어의 폭풍우가 뒤통수를 마구 후려갈겼다.

<요새 젊은 사람들 말이야--, 하여튼 못써.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다고. 우리 젊었을 땐 안 그랬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지. 감히 어디라고.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모르는 척. 도대체 지 주장만 할 줄 알지. 책임감이 없어! 책임감이! 뭐든지 안 하려고만 한단 말이야. 누구는 나이 안 먹나? 나이들 먹고 이 자리 한 번 앉아보라고. 얼마나 잘하나.>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서 내 책상으로 왔다. 그건 이제 딱히 나를 상대로 하는 소리도 아니었고, 사슴을 놓치고 하릴없이 아무 곳에나 대고 으르렁거려보는 맥 빠진 몸짓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피곤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내 생각은 분명히 전달했고, 내가 다시 여기서 돌아서면, 분명 별별 지나간 일까지 시시콜콜히 들고 나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전인수로 해석을 달아서.

  나는 의자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부장도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내가 이쯤에서 가버린 걸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시작한다 하더라도 이미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는 틀렸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남의 약점을 잡고 올라서려는 자는, 공격을 멈춰야 할 시기에 대한 상황 파악도 빠르다.

  어쩐지 아침이 즐겁다 했다. 나의 운명의 씨줄 날줄에는 행복이란 무늬는 주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왠지 즐겁고 마음이 가벼운 날엔 꼭 이렇게 찬물 끼얹는 일이 생기곤 한다.

  **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난 그 나이까지도 낯을 심하게 가렸고 왜 그렇게 부끄러움을 많이 탔는지. 학교에 가면 친구도 없이 하루 종일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마 오늘처럼 왠지 기분이 들뜨는 신들린 것 같은 날이었으리라.

  평소엔 일어서서 낭독도 못했던 나였다. 책을 읽으려 하면 목에 무엇이 걸린 것 같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손들고 발표 한 번 해 본적도 없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살았다.

 

  문제의 그 날,

 그런 용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자발적인 참여란 아예 사전에도 없었던 내가, 칠판에 적어 놓은 산수 문제를 두고 풀어 볼 사람?이란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학교에 입학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일어서서 소리 내어 책 한 번 옳게 못 읽던 아이가, 하루 종일 가야 입 한 번 벌리지 않던 아이가, 그것도 스스로 하겠다고 손을 치켜들었으니 선생님의 눈에 확 띌 수밖에.

  손을 든 많은 학생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선생님은 나를 지목했다.

  사실 그 때,

  지목 받기 직전에 난 손을 들고 있는 내 모습에 놀라 손을 도로 내리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흔들리던 내 눈빛이 선생님의 눈길과 마주쳤고 그 순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신단비->

  난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며, 화난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입 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기역자로 굳어있던 방아깨비 뒷다리 같은 다리가 펴지면서 딱! 소리가 났다. 학생들은 무섭게 조용했다. 아마 그들도 수업 중에 처음 일어서는 나를 보는 것이 신기했을 것이다.

  나를 향한 집중과 고요.

  나는 물속을 허우적거리듯 앞으로 나아갔다. 정지된 공기가 나를 친친 동여매는 것 같았다. 칠판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 얼굴이 노랗게 보였다.

 

  드디어 칠판 앞에 섰다.

  더하기 문제다.

  앉아서 할 때는 쉬운 문제였다.

  눈으로 보고 있을 땐 답을 다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칠판에 적힌 숫자는 아까 그 숫자가 아니었다. 크기가 엄청 나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의 숫자를 읽고 나서 뒤의 숫자를 읽을 때 앞 숫자가 무엇인지 까먹었고 앞 숫자를 보면 뒤 숫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요함이 내 머릿속까지 고요하게 만들어버린 듯했다. 긴장을 했다는 생각은 아직도 없다. 긴장의 의미를 그 땐 몰랐고 그래서 긴장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분필을 손에 꽉 쥔 채 먹먹한 머리로 계속 숫자만 보고 있었다. 아니 숫자가 적힌 칠판만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 땀이 났다.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몰랐다. 서 있는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져 내 몸이 돌로 굳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길어야 기껏 일 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드디어 그 상황이 타개는 되었다. 나의 불행으로 끝난 게 유감이지만 말이다.

  <신단비!  앞으로 모르면 손들지 마. 알았어? 들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