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던져놓았던 옷을 옷걸이에 걸고 돌아서는데 현관벨이 울린다. 인터폰 화면 가득 수자의 큰 얼굴이 비친다.
‘얼굴이 작아서 저렇게 들이대나?’
실실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아! 이 짓도 못해먹겠다.>
들이치는 바람과 함께 한 발을 현관에 들여놓으며 소리치는 수자.
수자의 별명은 ‘마이크’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를 때, 마이크 댄 목소리보다 그냥 내는 수자의 목소리가 더 커서 붙여진 별명이다. 바로 옆에 앉아 있다간 가는귀 멀기 십상이다.
<목소리 좀 줄여라. 경기하겠다.>
들어서는 수자의 이마를 향해 쏘아붙였다.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닌데도 큰 소리에 놀라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이런 신경질에 기가 죽거나 노여움을 탈 수자가 아니다.
<본래 크다. 못 줄인다. 미경이는?>
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직>
<왜?>
<모르지, 요 깜찍한 것이 전화도 없네.>
<이런 배신자! 이 바쁘신 몸도 약속 지키려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왔구만. 중간고사 시험이 내일 모레잖아. 어디서 다른 학교 시험지를 한 묶음 복사해 와서는 그걸 좀 풀어 달라 하는데, 못해준다 할 수도 없고. 얼마나 빨리 지껄여댔는지 진짜 입에서 거품 나대.>
나의 청각 신경은 이제 그녀의 ‘마이크’에 적응이 됐다. 귀가 좀 아프긴 하지만 놀라지는 않는다.
<커피 한 잔 줄까?>
<좋지. 그런데 미경인 정말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늦고.>
<몰라, 오겠지. 저녁 뭐 먹을 건지나 생각해 놔.>
<못 정하면 사다리 타지 뭐.>
하면서 수자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언젠가 넷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각자가 먹고 싶은 것도 다르고 장소도 달라 재미로 사다리를 타서 식당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론 걸핏하면 의견이 두 가지로만 갈라져도 사다리를 탔다.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시작을 하면 거기에 푹 빠져 결과에 박수를 치며 웃게 된다.
<야, 사다리는 의견 통일 안 될 때 쓰는 방법이고, 일단 네가 하나 정해 봐. 시간 절약해야지. 그리고 나 배고프단 말이야.>
<알았어. 일단 한숨 돌리고. 커피부터 마시고.>
커피 메이커에서 나는 치직 소리가 멎었다.
커피를 한 잔 가득 부어 수자에게 넘기고 옆에 앉았다.
2인용 소파라지만 말만 2인용이지, 혼자 앉으면 낙낙하게 맞을 정도다. 소파 고를 때, 소형이가 우겨 2인용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공간 좁아지는 게 싫어 최대한 작은 걸 골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혼자 사는 집이지만 1인용 달랑 들여놓으면 배타적이고 인정 없고 메말라 보인다나.
얼마나 작은지 둘이 앉으니 엉덩이가 꽉 끼었다.
나는 끼이는 걸 참지 못한다. 수자는 감각이 있는지 없는지, 끼어도 참는 건지 안 끼이는 척 버텨보는 건지, 커피만 훌훌 마시고 있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파는 수밖에. 나는 으라차, 용을 쓰며 엉덩이를 뺐다. 수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듯, 소파에 다리까지 얹어 책상다리를 하더니 느긋하게 다시 몸을 부려놓았다. 나는 속으로 ‘기집애, 둔하기는’ 하면서 보료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나 살 붙을 복도 없는 나, 보료 위에 엉덩이가 닿는 순간 벨이 울렸다. 인터폰에 딴전을 피우는 미경이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벌써 튕기듯이 일어나 뛰어가는 등 뒤에다 대고 수자가 한 마디 사족을 붙인다.
<미경이다. 문 열어라.>
수자는 한 번 앉았다 하면 좀처럼 일어나는 법이 없고, 누웠다 하면 웬만한 일에도 미동 없이 같은 자세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버틴다.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이러니 나날이 저는 몸집이 커지고 나는 요렇게 작아지지.’
나는 바람처럼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안녕.>
크지도 작지도 않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아무리 바빠도,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톤을 유지하는 미경이만의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온다.
<야, 늦었잖아. 약속 위반이다.>
수자는 앉은 채로 고개만 현관 쪽으로 빼며 소리쳤다.
<미안, 엄마한테 불려갔다 오느라고.>
미경은 잘 벗겨지지 않는 신을 벗느라 애를 쓰며 배시시 웃었다.
<넌 웃음이 나니? 나 같으면 열 받아서 꽁지에 불만 붙이면 날아가겠다. 너희 집엔 자식이 너밖에 없어? 니가 직장이 없어 노는 사람이길 하니, 아님 월급 주며 집에서 부리는 사람이니. 도대체 네 직업은 직업도 아니냐? 사흘이 멀다 하고 불러들이게?>
내가 핸드백을 받아들며 잔소리를 해댔다.
<글쎄 말이야. 차에 타서 휴대폰 켜는 순간 벨이 울리잖아. 내 퇴근 시간 맞춰서 전화하는 데 어떡하니. 학교로 하면 연결이 잘 안되니까 이젠 아예 퇴근 시간 맞춰 휴대폰으로 해.>
<약속 있다 하지, 이 바보야.>
미경은 대답 대신 웃으며 화장실부터 들렀다. 커피를 다 마신 수자는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큰 눈을 굴리며 텔레비전을 보다 우리 쪽을 보다 했다.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며 미경이가 나왔다.
<약속 있다 했지. 했는데도 잠깐이면 되니까 오라는데 어떡해.>
<그 잠깐이 무슨 일인데?>
<응, 백화점엘 갔는데 쇼핑한 짐이 너무 많아서 혼자서는 다 들고 택시 타고 내리기도 힘들다고.>
미경은 흘러내린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식탁 의자를 하나 빼서 앉았다.
<아주 기사를 뒀구만. 그리고 둘이 사시면서 무얼 그리 살 게 많다니?>
<집에 조카들 와 있어.>
<걔들 과천 갔댔잖아.>
<걔들은 갔지. 걔들은 큰 동생 애들이고, 이 번엔 둘째.>
<그래? 그럼 너 또 주말 보모? 어떻게 애는 동생들이 낳는데, 조카들 생길 때마다 바쁘긴 네가 더 바쁘냐?>
<그러게. 말만 독립이지. 내가 독립을 한 건지, 별장 두고 잠깐씩 들르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내 집은 집이 아니라 별장 같애. 어떤 땐 낯설다니까. 나도 독립할 때 이럴 줄 알았겠니? 집 얻어 나올 땐 정말 대한 독립 만세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