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던져놓았던 옷을 옷걸이에 걸고 돌아서는데 현관벨이 울린다. 인터폰 화면 가득 수자의 큰 얼굴이 비친다.

  ‘얼굴이 작아서 저렇게 들이대나?’

  실실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아! 이 짓도 못해먹겠다.>

  들이치는 바람과 함께 한 발을 현관에 들여놓으며 소리치는 수자.

  수자의 별명은 마이크. 노래방에서 노래 부를 때, 마이크 댄 목소리보다 그냥 내는 수자의 목소리가 더 커서 붙여진 별명이다. 바로 옆에 앉아 있다간 가는귀 멀기 십상이다.

  <목소리 좀 줄여라. 경기하겠다.>

  들어서는 수자의 이마를 향해 쏘아붙였다.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닌데도 큰 소리에 놀라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이런 신경질에 기가 죽거나 노여움을 탈 수자가 아니다.

  <본래 크다. 못 줄인다. 미경이는?>

  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직>

  <?>

  <모르지, 요 깜찍한 것이 전화도 없네.>

  <이런 배신자! 이 바쁘신 몸도 약속 지키려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왔구만. 중간고사 시험이 내일 모레잖아. 어디서 다른 학교 시험지를 한 묶음 복사해 와서는 그걸 좀 풀어 달라 하는데, 못해준다 할 수도 없고. 얼마나 빨리 지껄여댔는지 진짜 입에서 거품 나대.>

  나의 청각 신경은 이제 그녀의 마이크에 적응이 됐다. 귀가 좀 아프긴 하지만 놀라지는 않는다.

  <커피 한 잔 줄까?>

  <좋지. 그런데 미경인 정말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늦고.>

  <몰라, 오겠지. 저녁 뭐 먹을 건지나 생각해 놔.>

  <못 정하면 사다리 타지 뭐.>

하면서 수자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언젠가 넷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각자가 먹고 싶은 것도 다르고 장소도 달라 재미로 사다리를 타서 식당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론 걸핏하면 의견이 두 가지로만 갈라져도 사다리를 탔다.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시작을 하면 거기에 푹 빠져 결과에 박수를 치며 웃게 된다.

  <, 사다리는 의견 통일 안 될 때 쓰는 방법이고, 일단 네가 하나 정해 봐. 시간 절약해야지. 그리고 나 배고프단 말이야.>

  <알았어. 일단 한숨 돌리고. 커피부터 마시고.>

  커피 메이커에서 나는 치직 소리가 멎었다.

  커피를 한 잔 가득 부어 수자에게 넘기고 옆에 앉았다.

  2인용 소파라지만 말만 2인용이지, 혼자 앉으면 낙낙하게 맞을 정도다. 소파 고를 때, 소형이가 우겨 2인용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공간 좁아지는 게 싫어 최대한 작은 걸 골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혼자 사는 집이지만 1인용 달랑 들여놓으면 배타적이고 인정 없고 메말라 보인다나.

  얼마나 작은지 둘이 앉으니 엉덩이가 꽉 끼었다.

  나는 끼이는 걸 참지 못한다. 수자는 감각이 있는지 없는지, 끼어도 참는 건지 안 끼이는 척 버텨보는 건지, 커피만 훌훌 마시고 있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파는 수밖에. 나는 으라차, 용을 쓰며 엉덩이를 뺐다. 수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듯, 소파에 다리까지 얹어 책상다리를 하더니 느긋하게 다시 몸을 부려놓았다. 나는 속으로 기집애, 둔하기는하면서 보료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나 살 붙을 복도 없는 나, 보료 위에 엉덩이가 닿는 순간 벨이 울렸다. 인터폰에 딴전을 피우는 미경이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벌써 튕기듯이 일어나 뛰어가는 등 뒤에다 대고 수자가 한 마디 사족을 붙인다.

  <미경이다. 문 열어라.>

 

  수자는 한 번 앉았다 하면 좀처럼 일어나는 법이 없고, 누웠다 하면 웬만한 일에도 미동 없이 같은 자세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버틴다.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이러니 나날이 저는 몸집이 커지고 나는 요렇게 작아지지.’

  나는 바람처럼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안녕.>

  크지도 작지도 않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아무리 바빠도,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톤을 유지하는 미경이만의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온다.

  <, 늦었잖아. 약속 위반이다.>

  수자는 앉은 채로 고개만 현관 쪽으로 빼며 소리쳤다.

  <미안, 엄마한테 불려갔다 오느라고.>

  미경은 잘 벗겨지지 않는 신을 벗느라 애를 쓰며 배시시 웃었다.

  <넌 웃음이 나니? 나 같으면 열 받아서 꽁지에 불만 붙이면 날아가겠다. 너희 집엔 자식이 너밖에 없어? 니가 직장이 없어 노는 사람이길 하니, 아님 월급 주며 집에서 부리는 사람이니. 도대체 네 직업은 직업도 아니냐? 사흘이 멀다 하고 불러들이게?>

  내가 핸드백을 받아들며 잔소리를 해댔다.

  <글쎄 말이야. 차에 타서 휴대폰 켜는 순간 벨이 울리잖아. 내 퇴근 시간 맞춰서 전화하는 데 어떡하니. 학교로 하면 연결이 잘 안되니까 이젠 아예 퇴근 시간 맞춰 휴대폰으로 해.>

  <약속 있다 하지, 이 바보야.>

  미경은 대답 대신 웃으며 화장실부터 들렀다. 커피를 다 마신 수자는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큰 눈을 굴리며 텔레비전을 보다 우리 쪽을 보다 했다.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며 미경이가 나왔다.

  <약속 있다 했지. 했는데도 잠깐이면 되니까 오라는데 어떡해.>

  <그 잠깐이 무슨 일인데?>

  <, 백화점엘 갔는데 쇼핑한 짐이 너무 많아서 혼자서는 다 들고 택시 타고 내리기도 힘들다고.>

  미경은 흘러내린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식탁 의자를 하나 빼서 앉았다.

  <아주 기사를 뒀구만. 그리고 둘이 사시면서 무얼 그리 살 게 많다니?>

  <집에 조카들 와 있어.>

  <걔들 과천 갔댔잖아.>

  <걔들은 갔지. 걔들은 큰 동생 애들이고, 이 번엔 둘째.>

  <그래? 그럼 너 또 주말 보모? 어떻게 애는 동생들이 낳는데, 조카들 생길 때마다 바쁘긴 네가 더 바쁘냐?>

  <그러게. 말만 독립이지. 내가 독립을 한 건지, 별장 두고 잠깐씩 들르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내 집은 집이 아니라 별장 같애. 어떤 땐 낯설다니까. 나도 독립할 때 이럴 줄 알았겠니? 집 얻어 나올 땐 정말 대한 독립 만세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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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바로 퇴근하면 동물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오늘은 동물의 세계단골손님인 사자와 사자의 먹이로 종종 등장하는 누가 주인공이었다. 오랫동안 보다 보니, 몇 년 전에 봤던 것들이 심심찮게 다시 방영되기도 한다. 영화든 책이든 결코 두 번 보는 일이 없는 내가 동물의 세계는 예외다.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옷을 되는대로 벗어 던져 놓고 텔레비전을 켰다. 켜는 순간, 귀에 익은 내레이터의 설명에 뒤이어 화면에 초원이 나타났다.

  저물어가는 하늘과 어두워지는 초원에서,

  가쁜 숨을 뿜어내며 뿔을 부딪치고 있는 누를 보고 있는데,

  지나가는 생각.

  모든 동물이 교미에 성공하고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건 아니구나.

  그렇더라도,

  패배한 수컷도, 교미에 실패한 암컷도 그 세계에선 이상한 게 아니었다. 종족 보존이란 차원에서 본다면, 반드시 내 새끼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음악이 나오고 동물과 초원이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일어나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을 챙겼다.

  여섯 시가 다 되었다.

  수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미경이는 왜 아직 안 올까.

  오늘은 소형 어머니 병문안을 가기로 한 날이다.

  모여서 일단 저녁을 해결하고, 주차장이 좁다 하니 차는 한 대로 가자고, 모이는 장소는 우리집으로 하자고, 퇴근하는 대로 곧바로 집에 가 있으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주었던 미경이까지 늦다.

  나는 정말 총알같이 달려왔다. 퇴근 시간이 같은 미경이 혹시 먼저 도착해서 밖에서 기다릴까봐. 핸드백을 교무실 내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시간되기만 기다리다 땡 소리와 동시에 뛰어나온 사람이다. 수자는 애초에 여섯 시는 돼야 가능하다고 했다.

**

 

  수자와 미경이는 교사 발령 나던 해에, 가슴 떨리던 신입교사로 처음 부임한 학교에서 같은 신입으로 만났다.

  10년 넘게 학교물을 먹은 지금도 학교를 옮긴 첫 해는 몹시 부자연스럽고 어설프다. 그러니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담근 신입 때는 오죽했으랴. 모든 게 무겁게 느껴졌다.

  적응이 안 돼 힘들던 시절, 억눌린 심정을 가슴에 담고 바로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퇴근해서 거의 매일 같이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다. 불평이라도 서로 쏟아놓아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불평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라야 시원했다. 설명을 해가며 불평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불평하는 사람도 뭔가 답답할 것이고 상황도 모르며 듣고 있어야 될 사람은 괴롭기만 할 것이다.

  처음엔 그런 이유로 우린 서로에게 꼭 필요했다.

  간절히 탈출구가 필요했고 하루 종일 가슴을 눌렀던 무언가를 벗어던져야 했다. 우린 마치 억압받는 식민지 민족이 된 것 같은 심정으로 고참 교사들을 좀 과장되게 비난하다 동지애가 생기고 정이 깊어갔다. 시간이 흘렀다. 흐른 시간만큼 불평의 추억도 쌓이고 불평보다 두터운 정도 쌓여갔다.

 

  그리고 어찌된 셈인지 우리 셋은 결혼 적령기가 지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도 우리의 결속을 강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결혼을 한 동료는 저녁 시간이 자유롭지 않았으니까. 더러 같이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던 동료들도 결국 새로 만든 가정으로 돌아가고 종당엔 우리 셋만 밤거리 찻집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소형은 나와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 오랜 친구다. 중학교 때부터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대학은 비록 달랐지만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났고 축제 때는 더 미친 듯이 붙어 다녔다. 그러니까 수자와 미경은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소형과도 친구가 된 셈이다.

  미경과 난 비록 학교는 달라졌어도 아직 학교에 남아 있지만, 수자는 5년짜리 재형저축 끝나던 해에, 노래처럼 부르던 사표를 썼다. 그리고 몇 달을 신나게 놀더니 과외를 시작했다. 선생보다 시간 자유롭고, 답답한 교무실에서 기 안 눌려 지내서 좋고, 수입도 짭짤하고. 하여튼 수자는 사표 쓰고 더 신나는 달밤된 운 좋은 친구다. 물론 사표도 든든한 부모 믿고 던진 건데, 그렇게 애태워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돈까지 수자를 따랐다. 실력이 좋은 건지, 수단이 좋은 건지 몰라도 과외 학생이 줄을 이었다. 오는 대로 다 받아준다면 자긴 아마 몇 달 안에 빌딩을 샀을 거라며, 매이는 거 싫어 학교 그만뒀는데 주변이 자꾸 자기를 옭아매려 한다고, 아무래도 자기 팔자는 돈 버는 노예 팔자인 거 같다고 엄살을 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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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이 생산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평원.

  수컷 누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암컷을 차지하려는 처절한 혈투다. 황혼이 지는 하늘엔 어두워지는 구름이 넓게 깔려있고, 초원의 풀은 끝자락이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누의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발굽에 패여 피어오르는 흙먼지.

  벌어진 입에서 흐르는 걸쭉한 침.

  짙어지는 어둠 속으로 퍼져나가는 뜨거운 콧김.

  숨을 헐떡이며 몇 걸음 물러섰다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며 서로 머리를 부딪치는 지루한 싸움.

  이렇게 격렬한 싸움 끝에 죽는 놈도 있다고 한다.

 

  수컷 누의 멋진 뿔은,

  순전히 암컷을 차지하려는 싸움에 쓰이기 위해 갈고 닦여진다고.

  멋지고 우아한 뿔이 오직 공격용으로만 쓰인다니.

  인간의 인식 속에 있는 세상과, 동물의 세상은 많이 다른지도 모른다.

  사람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이란 것도 자연의 세계에선 그렇게 우아한 이유 때문에 생겨난 것만은 아니다.

  수사자의 갈기털은 여러 암컷을 지배하기 위한 힘의 과시용으로, 장끼의 고상한 듯 화려한 깃털과 긴꼬리 푸른 비단 날개새의 빛나는 푸른 꽁지와 색색의 비단실로 수놓은 듯한 몸치장의 이유는 단 하나, 번식을 위해 암컷의 눈길을 끌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긴꼬리 푸른 비단 날개새의 그 우아하고 긴 꽁지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면 다 빠져버린다. 새끼를 키우기 위해 먹이를 물고 좁은 둥지 구멍으로 들락거리는 동안.

  수컷 원앙의 깃털도 번식 때에 맞춰 화려한 변신을 할 뿐이다. 번식기가 지나면 화려한 깃털이 몽땅 사라져버려 수컷과 암컷은 구분도 되지 않는다. 부부 금슬의 상징인 아름다운 원앙 한 쌍은 알고 보면 번식기에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생존 경쟁은 치열하다. 약한 놈의 생존율은 거의 없다. 생존의 가능성이 높은 튼튼한 종자를 얻기 위해 수컷은 가장 아름답고 튼튼한 암컷을 차지하려 하고 암컷 또한 그 중 가장 힘센 수컷을 받아들인다.

  그런 자연의 세계에서는 모든 동물이 생산에 참여할 수가 없다. 평생 생산의 언저리에서 맴돌다 사라져가는 동물들도 있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운 자연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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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소형아, 나 하나 물어볼 거 있다.>

  <뭔데?>

  <너 왜 자꾸 옷 사 주는데? 그 옷 입은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소형이는 왜 자꾸 내 옷을 사주고, 나는 왜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받아 입었을까, 하고 말이야.>

  <친구한테 옷 선물하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선물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근데 그게 꼭 그래야 되는 것처럼, 말하자면 부모가 자식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하듯이 여러 번이니까 그렇지. 생일도 아니고. 너는 또 그렇다 치고 나는 왜 그 동안은 이런 생각이 한 번도 안 들었냐는 거지. 당연한 듯이 받았던 것 같애.>

  <글쎄, 듣고 보니 좀 그렇기도 하네. 그냥 내가 시장이나 백화점 자주 다니니까, 사이즈 작은 옷 보면 네 생각나고, 그러다 예쁘겠다 싶으면 사게 되더라. 그렇지 뭐.>

  <수자나 미경이 옷은 안 사잖아?>

  <걔들이 입을 만한 옷이면 할인 할 때까지 남아 있는 게 잘 없지. 넌 워낙 치수가 작으니까. 옷 찍어놓고 세일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걔들 치수는 제일 잘 나가는 치수야. 네 사이즈는 그래도 남아있는 게 많은 편이고. 적은 돈으로 좋은 옷 고르는 맛이지 뭐.>

  <정말 치수가 작아서만일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데?>

  난 대꾸 없이 웃었다.

  <단비야.>

  소형이 정색을 하고 나를 불렀다.

  <?>

  <난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돈 싫다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 돈으로 내가 큰집을 사고, 보석을 사고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주변에 도와주고 싶은 사람, 하여튼 꼭 필요한데 돈이 없어서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런 걸 쓱쓱 해결해 주고 싶어. 주제넘게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몰라. 너한테는 옷을 사주고 싶고. 너 다른 건 몰라도 옷 욕심은 장난 아니잖아? 엄마는 시설 좋은 병원에 입원시켜주고 싶고, 할 수 있으면 미경에게는 집도 사주고 싶어.

미경이 그 기집애, 마음 좋아 돈 못 모으잖아. 평생 월세 못 면할 거야. 지금은 부모 살아 계시니까 모르지. 아직 쓸쓸한 걸 몰라요. 부모 돌아가셔 봐.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동생들이 모른 척 안할 거라 하지만, 그래도 십 수 년 선생해서 집 한 칸도 없다면 믿겠어?

지 돈이 엄마 돈이고 엄마 돈이 지 돈이라며 마구 퍼붓는데, 그건 부모 살아 계실 때 얘기고, 부모 돌아가시면 형제자매 돈은 각각 다른 가정 소속이지 공동 소유가 될 수가 없어. 제 가족을 가진다는 건 그런 거거든. 나중에 아무리 그 동안 부모 집에 들어간 거 따져본들, 일일이 본 사람이 있나. 속속들이 알아줄 사람이 있나. 그냥 헤프게 살았다 생각할 걸?

자식도 없고, 결혼 생각도 없는 주제에 그렇게 돈이 없어 어떡하려나 몰라. 노후 대책도 없이. 물론 자식이 노후 대책은 아니지만……. 수자야 뭐 돈 걱정은 없는 애니까.>

  <소형이 너 희귀한 콤플렉스 갖고 있는 거 아니? 그러니까 네가 부자가 못되지. ‘모아서 누굴 주겠다는 마음으로 백만장자가 되겠니? 옆도 안 돌아봐야 돈이 모이지. 그렇게 주변을 휘휘 둘러보면서 갑부는 무슨 갑부.>

  <그런가?>

  <백만장자 될 인물은 따로 있지. 억만금을 물려받았거나, 자린고비라고 주변에 소문이 날 정도로 돈 모으는 데 억척이거나……. 하나 더 있긴 하네.>

  <뭔데?>

  <운이 대통해서 복권에 당첨되거나. 네 운이 얼마나 대통인지는 모르겠지만.>

  <알았어. 하여튼 헛소리하는 걸 1초도 그냥 못 듣고 있다니까.>

  <돈 벌려면 장사가 최곤데, 너 옷가게 열지. 옷 장사하면 내 옷은 네가 알아서 갖다 놓을 거 아냐? 정말 생각만 해도 신난다.>

  <너도 헛소리 하니? 돈이 있어야 하지. 가게는 손바닥에다 차리니? 너답지 않다. 하나마나한 소리도 하고.>

 

  조용필이 죽어라 같은 노랠 부르고 있다.

  잠이 왔다.

  침대에 기대어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침대 위였다.

  베란다로 스며드는 햇살은 맥이 빠져 있었다.

  일요일이 지나가고 있다.

  소형은 또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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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면을 싫어한다.

  보고 있으면 무섭다. 감정을 볼 수 없는 소형의 얼굴이 무섭게 느껴졌다. 감정이 없다는 건 사랑이 없다는 거고, 사랑이 없으면 측은지심이 있을 리가 없고, 측은지심이 없는 마음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있을 리가 없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데서 온갖 잔인한 일들이 저질러진다고 나는 보고 있다.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표정 없는 인형들.

  가면을 쓴 변태 성욕자들.

  영화에서 보는 로봇 인간.

  어떤 잔혹한 장면이나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변화를 전혀 읽을 수 없는, 그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가면의 표정이 내겐 너무도 끔찍하게 다가왔다.

 

  <?>

  여전히 맹한 표정으로 소형이 물었다.

  나는 눈으로는 소형의 표정을 읽으려 애쓰며 입으로는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네가 사준 옷 예쁘더라고.>

  <, 그래.>

  영혼 없는 대답만 남긴 채 소형은 얼굴을 돌렸다.

  말문이 막혔다. 짧은 답을 예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답을 이을 말은 준비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때문에 입술이 붙어버리고 만 나는 소형의 옆얼굴을 보았다.

  날카로운 콧날이 앞을 향한 채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굳어 보였다. 상당히 높은 콧대였다. 코가 저렇게 높았나? 속으로 감탄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꼼지락거리며 무릎을 한 번 비비고 발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소형을 볼 때까지 소형의 콧날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앞을 보고 있었다.

  목석같이 앉아 있는 소형이 낯설었다.

 

  난 좀 불안해졌다.

  불안함이 나의 이성에 흠을 내고 있었다. 소형의 감정을 읽지도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말을 잇는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다.

  <학교 선생들이 다 예쁘다고, 어디서 샀냐고 난리 났었어. 장선생이 너 소개 좀 시켜 달래. 자기도 덕분에 날개 좀 바꿔보자고.>

  그런데,

  마구 지껄인 내 말에 소형이 감정 섞인 대꾸를 해왔다.

  <날개?>

  말끝을 올리며 의문의 표정으로 돌아보는 그 얼굴이 얼마나 반갑던지. 나는 신이 났다.

  ‘상대의 감정 담긴 표정에 이렇게 엎어지며 좋아하다니. 좋아하는 표정도 아니고, 기뻐죽는 표정도 아니고, 기껏 의아한 표정 때문에 내가 왜 이러지?’ 라는 의문은, 마음을 얻으려고 아양을 떠는 첩처럼 한참이나 떠들고 난 뒤에나 들었다.

  <옷이 날개라잖아. 네가 골라주면 스타일이 확 바뀔 거라고 믿고 하는 얘기지. 너 정말 다르더라. 나 같으면 그런 옷 선택 못 했을 거야. 전공이 무섭긴 무섭다. 어떻게 반짝이 들어간 옷을 살 생각을 했니? 난 반짝이 하면 밤무대에서나 입는 건 줄 알고 있었거든.>

  소형이 픽 웃었다.

  소형의 코에서 나는 바람 새는 듯한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입을 닫은 방 안.

  잠깐 동안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폭풍우 속에 있다 갑자기 닫힌 공간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잠시 후, 멍한 귀 속으로 노래가 밀려들어왔다. 그가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전원을 꺼지 않는다면 영원히 부르고 있을 그 노래를. 도대체 몇 번이나 돌아갔을까. 인식하지 못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옷 하나 얻어 입고 아부가 심하다?>

  소형의 얼굴이 내가 알던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부로 들려? 내가 언제 아부하는 것 봤어? 마음에 없는 소린 못 하는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소형의 모습이, 나를 평소의 신단비로 돌려놓았다.

  <그래, 넌 마음에 있는 소리만 해서 탈이지. 하고 버릴 말이라도 헛소린 안 하니까.>

  <어째, 비난으로 들린다.>

  <그렇게 들려도 할 수 없고. 네 친구 오래 하다 보니까, 나도 마음에 없는 소린 못하게 됐나 봐.>

  이건 또 무슨 소리?

  그 다음은 이게 아닌데?

  난 미심쩍은 눈으로 소형을 쳐다보았다.

  <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니? 하여튼 너한텐 쉰 소릴 못한다니까. 조금만 방심해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난 절대로 기분 상해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니까. , 금방 공격당하잖아.>

  소형이 부덕 높은 중전 같은 어진 미소를 짓고 있다.

  <옷이 예뻤다고?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도도하신 신단비 친구신데. 아무나 단비 친구 하나? 나중에 갑부 되면 예쁜 옷 더 많이 사 줄게.>

  꼭 이런 식이다.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되는 판인가 말이다.

  소형과 벌이는 티격태격은 어떤 상황에서든 나의 삐지기와 소형의 달래기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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