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바로 퇴근하면 ‘동물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오늘은 ‘동물의 세계’ 단골손님인 사자와 사자의 먹이로 종종 등장하는 누가 주인공이었다. 오랫동안 보다 보니, 몇 년 전에 봤던 것들이 심심찮게 다시 방영되기도 한다. 영화든 책이든 결코 두 번 보는 일이 없는 내가 ‘동물의 세계’는 예외다.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옷을 되는대로 벗어 던져 놓고 텔레비전을 켰다. 켜는 순간, 귀에 익은 내레이터의 설명에 뒤이어 화면에 초원이 나타났다.
저물어가는 하늘과 어두워지는 초원에서,
가쁜 숨을 뿜어내며 뿔을 부딪치고 있는 누를 보고 있는데,
지나가는 생각.
모든 동물이 교미에 성공하고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건 아니구나.
그렇더라도,
패배한 수컷도, 교미에 실패한 암컷도 그 세계에선 이상한 게 아니었다. 종족 보존이란 차원에서 본다면, 반드시 ‘내 새끼’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음악이 나오고 동물과 초원이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일어나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을 챙겼다.
여섯 시가 다 되었다.
수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미경이는 왜 아직 안 올까.
오늘은 소형 어머니 병문안을 가기로 한 날이다.
모여서 일단 저녁을 해결하고, 주차장이 좁다 하니 차는 한 대로 가자고, 모이는 장소는 우리집으로 하자고, 퇴근하는 대로 곧바로 집에 가 있으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주었던 미경이까지 늦다.
나는 정말 총알같이 달려왔다. 퇴근 시간이 같은 미경이 혹시 먼저 도착해서 밖에서 기다릴까봐. 핸드백을 교무실 내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시간되기만 기다리다 땡 소리와 동시에 뛰어나온 사람이다. 수자는 애초에 여섯 시는 돼야 가능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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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와 미경이는 교사 발령 나던 해에, 가슴 떨리던 신입교사로 처음 부임한 학교에서 같은 신입으로 만났다.
10년 넘게 학교물을 먹은 지금도 학교를 옮긴 첫 해는 몹시 부자연스럽고 어설프다. 그러니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담근 신입 때는 오죽했으랴. 모든 게 무겁게 느껴졌다.
적응이 안 돼 힘들던 시절, 억눌린 심정을 가슴에 담고 바로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퇴근해서 거의 매일 같이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다. 불평이라도 서로 쏟아놓아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불평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라야 시원했다. 설명을 해가며 불평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불평하는 사람도 뭔가 답답할 것이고 상황도 모르며 듣고 있어야 될 사람은 괴롭기만 할 것이다.
처음엔 그런 이유로 우린 서로에게 꼭 필요했다.
간절히 탈출구가 필요했고 하루 종일 가슴을 눌렀던 무언가를 벗어던져야 했다. 우린 마치 억압받는 식민지 민족이 된 것 같은 심정으로 고참 교사들을 좀 과장되게 비난하다 동지애가 생기고 정이 깊어갔다. 시간이 흘렀다. 흐른 시간만큼 불평의 추억도 쌓이고 불평보다 두터운 정도 쌓여갔다.
그리고 어찌된 셈인지 우리 셋은 결혼 적령기가 지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도 우리의 결속을 강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결혼을 한 동료는 저녁 시간이 자유롭지 않았으니까. 더러 같이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던 동료들도 결국 새로 만든 가정으로 돌아가고 종당엔 우리 셋만 밤거리 찻집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소형은 나와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 오랜 친구다. 중학교 때부터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대학은 비록 달랐지만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났고 축제 때는 더 미친 듯이 붙어 다녔다. 그러니까 수자와 미경은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소형과도 친구가 된 셈이다.
미경과 난 비록 학교는 달라졌어도 아직 학교에 남아 있지만, 수자는 5년짜리 재형저축 끝나던 해에, 노래처럼 부르던 사표를 썼다. 그리고 몇 달을 신나게 놀더니 과외를 시작했다. 선생보다 시간 자유롭고, 답답한 교무실에서 기 안 눌려 지내서 좋고, 수입도 짭짤하고. 하여튼 수자는 사표 쓰고 더 ‘신나는 달밤’된 운 좋은 친구다. 물론 사표도 든든한 부모 믿고 던진 건데, 그렇게 애태워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돈까지 수자를 따랐다. 실력이 좋은 건지, 수단이 좋은 건지 몰라도 과외 학생이 줄을 이었다. 오는 대로 다 받아준다면 자긴 아마 몇 달 안에 빌딩을 샀을 거라며, 매이는 거 싫어 학교 그만뒀는데 주변이 자꾸 자기를 옭아매려 한다고, 아무래도 자기 팔자는 돈 버는 노예 팔자인 거 같다고 엄살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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