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을 비운지 한 시간이 지났다.

  소형은 온몸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하고 내가 먼저 일어났다.

  스피커에선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콧소리 섞인 카랑한 목소리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울컥해진 가슴이 위장을 메스껍게 했고 메스꺼워 울렁거리는 위장이 날 순식간에 우울의 우물에 풍덩 빠뜨린다.

  소독약 냄새나는, 환자복 입은 아픈 사람 투성이인 병원으로 들어가야 되는 소형이가 불쌍했고, 비록 큰소리치지만 주위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독신 선언에 갈등을 겪고 있는 귀가 얇은 수자가 불쌍했다. 가족 각자에게는 한 번씩이지만, 부탁받는 미경에게는 그녀가 가진 여유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할애해야 하는, 몸을 아끼지 않는 미경의 책임감이 또한 불쌍했다.

  그리고 저 자유를 외치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

  매끈하고 강인하던 얼굴에 에이즈란 죽음의 그림자가 덮여 있던 모습. 그는 성의 자유와 목숨을 맞바꾸었는가.

  대가를 치르지 않는 완전한 기쁨이란 없는 인간의 삶.

  할 수 없는 유한한 생명.

  소형은 언제까지 병원에 있어야 할까.

  어머니는 언제 퇴원하게 될까.

  퇴원 다음엔 어떤 일이 예정되어 있을까.

  삶이란 무늬엔 빈틈이라는 게 없으니까.

  무늬의 끝에는 다른 무늬의 시작이 버티고 있으니까.

 

  나는 괜한 눈물로 말을 잃고,

  인사도 없이 소형을 병원 안으로 들여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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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애 돌이라고 온 집안에 초대장을 돌렸더라. 폼 잡을 일은 얼마나 잘 찾는지. 집안이 뭐 그리 번성하다고 초대장까지 찍어 부쳤는지 몰라. 사흘이 멀다 하고 얼굴 보고 지내지, 멀리 사는 것도 아니지, 전화 한 통이면 되는 거 아냐? 그것도 한 집에 한 장씩만 부쳤다면 또 모른다. 아버지 앞으로 한 장, 어머니 앞으로 한 장, 내 앞으로도 따로 부쳤더라. 주소 적은 글씨체 보니까 삼촌 글씨는 아니고, 통 큰 척 폼 잡는 셈치고는 글씨는 쪼잔하거든. 또 숙모 괴롭혔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숙모가 좀 일이 많니? 분명히 애들 다 잠든 밤에 눈 비벼가며 적었을 거라고. 안 봐도 비디오지.>

  <그랬겠지.>

  소형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네가 왜 한숨이니?>

  내가 핀잔.

  소형은 돌아보고 빙긋 웃고 수자는 들은 척도 않고 하던 이야기만 계속한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초대장 받고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숙모한테서 전화가 왔더라. 어머니가 받아서 나를 바꿔주며 숙모다하셔. ‘숙모가 나를 찾을 일이?’ 내가 그런 표정이었는지 어머니도 무슨 일인데 널 다 찾네. 내가 물어도 웃기만 하면서 바꿔 달래네?’하며 수화기를 건네주시네. 숙모가 날 직접 찾는 일은 처음이었거든. 통화야 많이 했지만 그건 어머니나 아버지 찾는 전화 내가 받았을 때, 바로 바꿔주지는 못하고 인사로 몇 마디 나눈 경우고.>

  <그래서?>

  내가 재촉했다.

  <전화를 받았는데 인사를 하더니, 머뭇머뭇하고 말을 잘 못해. 내가 딱 집히는 게 있어서 삼촌이 뭐 곤란한 거 시키셨어요? 괜찮아요. 말해보세요.’했지. 부정을 안 하더라고. 역시 맞구나 싶었어. 그런데 이 번에는 무슨 일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더라. 도대체 숙모까지 대동해서 나한테 할 말이라는 게 뭘까 하고 말이야. 나는 답답해 죽겠는데 숙모는 입을 못 떼. 그래서 무슨 일인지 괜찮다고, 숙모가 전화했을 땐 안 할 수가 없어서 했을 텐데, 삼촌 성격 다 아니까 걱정 말고 이야기하라고 했지. 너희도 들어보면 기가 찰 거야.>

  <알아야 기가 차지. 이야기나 계속해.>

  긴 서두에 짜증이 난 내가 수자를 몰아세웠다.

  <알았어.>

  수자의 목소리가 약간 퉁명해졌다.

 

  겪을 당시엔 화가 얼마나 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수자는 두고두고 화를 곱씹는 성격이 아니다. 분노는 지나간 일이고 지금은 말하는 재미에 열중해있었다. 집중해 있는 우리의 눈들을 즐기며 사건을 천천히 즐기려는 데 내가 초를 쳐서 기분이 심드렁해진 것 같았다. 미경이가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웃고 소형은 나를 보고 혀를 차는 시늉을 했다.

  <궁금하다. 빨리 계속해.>

  소형이 수자 쪽에 바짝 붙어 앉으며 어깨로 수자를 밀었다. 아직 어두워진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수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자의 표정은 장담하건대 일 분 안에 풀릴 것이다.

  <몇 번이나, 화내지 마세요, 하더니,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이렇게 말해. ‘삼촌이 돌잔치 음식 준비하는데 아가씨 오셔서 음식 하는 것 좀 도우라고…….’ 여기까지 듣다가 난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하고. 숙모는 잠시 조용하더니 말까지 더듬거리며 아가씨 시집가려면 신부 수업 받아야 한다고, 음식하는 거랑 차리는 거 보고 배워야 한다고, 와서 일도 거들고 저보고 가르치라고. 내가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 이 막무가낸 거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며칠을 버텼는데 어제는 와서 내가 아직 전화 못했다고 하니까 소리 지르고 집어던지고, 무서워서. 아가씨 미안해요.’ 하면서 나중엔 울먹이더라.>

정말 색다른 사건이기는 하다.

  미경은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앉아있고 소형은 맥없이 웃기만 했다.

  <일이야 내가 왜 못 도우겠니. 힘 있겠다. 시간 자유롭겠다. 숙모가 정말 도와 달래면 날아서 가지. 그런 부탁할 숙모도 아니지만.>

 

  정말 재밌는 삼촌이다.

  신부 수업이라고? 삼촌이 장가들기 전 신랑 수업을 받았다는 소린 듣지 못했다. 신랑 노릇은커녕 사람 노릇도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신랑과 살아내는 데 필요한 수업이 신부 수업인가? 그렇다면 그건 이해가 된다. 삼촌의 신부 노릇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얼마나 재미있는 발상인가. 여자에게는 학교 수업 외에 받아야 할 수업이 또 하나 있나니, 그게 일명 신부 수업이라. ‘엄마 수업’ ‘주부 수업도 아닌 신부 수업’.

  나는 피식 웃었다.

  하긴 신랑 수업이 부재한 이 나라에, 婦德은 있어도 夫德이란 건 없는 이 나라에서 신부 수업없는 결혼 생활의 유지는 힘이 들기도 하겠다. 어느 한 쪽이라도 밥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청소와 빨래하는 법, 더 나아가 남녀에 대한 온갖 편견들을 감수할 참을성을 배우지 않으면 그 망나니 같은 삼촌과의 동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신부 수업이란 발상이 신랑 수업이 전혀 안된 삼촌 같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올 법도 하다. 망나니도 살기는 살아야 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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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촌이었지만,

  삼촌의 권위는커녕 수자에게 잔심부름 하나 시키는 것조차 주저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수자의 집에 오면 종종 물심부름을 시켰고 인사만 하고 제 방에 틀어박히는 수자를 불러내 술자리에 끼이기를 점잖게 강요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수자는 아버지 낯을 봐서 앉아 있다가 삼촌이 술에 취해 자기 속에 빠져있을 때 몰래 일어나곤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민감한 사생활에까지 간여를 했다. 부모까지 입을 다물게 된 수자의 결혼 문제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의 어른으로서(삼촌이니 수자에겐 어른이긴 하다) 혼기가 지나도 결혼하지 않는 조카에 대한 당연한 간섭이고 관심이라 여겼다. 뒤늦게 배운 어른 노릇은 수자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 서둘러 집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자는 잘 나가는 과외선생이다. 평일에 시간이 나지 않는 고등학생 과외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요일 오후까지 방안에 박혀 있는 게 싫다고 일요일엔 악착같이 오전에만 수업을 몰아놓아 아침부터 바빴다. 서둘러야 하는 시간에 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삼촌은 난데없는 호출을 멋이라고 생각하는지, 삼촌의 여자들에겐 그게 잘 통했는지, 수자보고 당장 삼촌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나오라고 했다.

  과외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만, 어디서 잘못 배운 어른 노릇인지,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무조건 나오라는 지시를 하고는 끊어버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시해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삼촌이 자기를 불러내는 일은 처음이고 정말 알아야 할 중대한 일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을 진정시키고 과외를 오후로 돌리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열 시 밖에 안 된, 일요일의 호텔 커피숍은 조용했다.

  손님 없는 커피숍 한 쪽에서 삼촌이 수자를 먼저 발견하고 손을 높이 쳐들었다. 삼촌은 혼자가 아니었다. 삼촌 맞은편에 앉아서 수자 쪽을 돌아보는 낯선 남자를 보는 순간,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약속도 없이 이런 짓을 할 리는 없다고 도리질을 하며 벤자민 화분이 죽 둘러서 있어 제법 비밀스럽게 보이는 삼촌이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 갔다.

  걸어올 때부터 계속 수자를 보고 있는 낯선 남자의 은근한 미소를 애써 모르는 체 하며, 무슨 일이냐는 몸짓으로 잎사귀가 늘어진 벤자민 나무 옆에 섰다. 수자의 태도에서 어떤 완강함을 느꼈는지 삼촌은 호들갑스럽게 엉덩이를 떼어 옮겨 앉으며 일단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수자는 삼촌이 내놓은 자리, 낯선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아서 비로소 정면으로 남자를 보고 눈인사를 했다. 어쨌든 삼촌이 아는 사람일 테니 예의는 갖춰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남자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이야기 많이…….’ 하는데 삼촌이 큰 소리로 웨이터를 불렀다. 뒷소리는 삼촌의 큰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삼촌은 수자를 돌아보며 차부터 시키자. 아침은 먹었지? 하더니, 오고 있는 웨이터를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큰소리로 커피 세 잔을 시켰다. 삼촌의 약간 긴장한 듯한 태도나 분위기로 봐서 수자의 예상이 틀림없어 보였다. 언제나 상대를 내려보는 듯한 평소의 삼촌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꾸미거나 감추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긴한 일에 다른 사람이 나와 있을 리도 없고, 커피를 시키며 시간을 끄는 것도 그랬다.

 

  불러낸 이유가 거의 확실하다 싶자, 수자를 살피는 남자의 시선도 불편하고 이렇게 멋대로인 삼촌의 희한한 배려도 역겨웠다.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수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말없이 굳어 있는 수자로 인해 분위기가 딱딱해지자, 커피를 마시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시간을 벌어보려 했던 삼촌은 의지를 꺾고 본론을 꺼냈다.

  <여기, 이 사람 삼촌하고 제일 친한 친군데, 내가 봐도 멋진 남자다. 아직 장가를 못 갔는데, 서로 부담 갖지 말고 자주 만나면서…….>

  수자는 여기까지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삼촌도 끔찍한데 제일 친한 친구라니, 삼촌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 스타일이라는 것도 몰라?’를 가슴 속에 꾹꾹 누르고 발딱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선 수자를 쳐다보며 급히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 삼촌 쪽은 보지도 않고, 어리둥절 앉아있는 삼촌 친구에게

  <미안합니다. 전 이런 자린 줄 모르고 나왔습니다.>

  재빨리 말하고는 틈도 주지 않고 자리를 빠져 나와 버렸다. 카운터 뒤쪽에서 커피 잔을 받쳐 들고 나오던 웨이터가 수자가 거칠게 밀고 나와 그때까지 흔들리고 있는 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수자가 그 때 그랬었다.

  자기도 잘한 건 아니지만 삼촌이 하는 일이 매사에 그렇다고.

  남의 의사 무시하고, 생각나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일 저지르는 데 선수라고. 숙모에게 하는 짓 보면 정말 눈곱만큼 있던 정도 다 떨어진단다.

  특히 명절 같은 날, 친척들 모인 자리에서 삼촌의 목불인견은 극에 달한다. 숙모 앞에서 얼마나 폼 잡고 권위를 세우고 쥐 잡듯 하는지, 보는 사람이 민망해서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심심하면 친구들 몰고 와서 저녁 차리게 하는 건 예사고,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오는 날은 반드시 술 취한 친구들 다 몰고 와서 집에서 한 판을 더 벌인다 했다.

  파출부도 못쓰게 하면서 먼지 하나 있으면 안 되는 삼촌 탓에 숙모 손은 습진 때문에 지문이 하나도 없다. 기껏 삼촌이 하는 배려라는 것이 습진 약 한 박스 사다 주는 것이라나. 하여튼 이상한 배포를 사나이의 훈장쯤으로 여기시는 모양이다.

  수자는 삼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자리를 마련했다면, 아무리 갑작스런 자리라 하더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거라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삼촌이지만 정말 저런 남자 만날까봐 결혼 못 하겠다고 노래를 하는 수자에게 자기랑 가장 친한 친구라니, 수자가 펄쩍 뛸 수밖에. 친구는 친구를 닮는다는데, 더구나 가장 멋진 친구라니.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고, 아마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남자가 삼촌이라면 그 친구는 제 2인자는 될 거라고 했다.

 

  그 사건 이후 삼촌은 노골적으로 수자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삼촌 대접을 안 한다, 버릇이 없다, 같은 유치한 이유에서 출발해 부모도 하지 않는 훈계까지 늘어놓았다. 결혼을 해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둥, 결혼 안 하는 게 얼마나 불효인지 아느냐는 둥, 사람은 다 짝을 맺어야 할 일을 다 하는 거라는 둥. 그 중 수자가 제일 견디기 힘들어하는 건, 술 먹고 밤늦게 와서 자는 수자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아버지 낯을 봐서 잠깐 앉았다 들어가기는 하는데, 그 잠깐이 정말 죽기보다 싫다고 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본래 맑지도 않은 눈은 게게 풀리고, 폼은 잡고 싶은데 권위가 서지 않아 안달이 난 얼굴로, 술상을 앞에 놓고 거만하게 앉아서, 걸어나오는 수자를 아래위로 훑는 그 순간을, 수자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 참는다 했다. 수자가 집 나오고 싶어지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건 그 삼촌의 잦은 방문일 것이다.

  살신성인하는 심정으로 억지로 인사하고 앉아있는데 수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술 한 잔 할래? 요새는 여자들도 술 한 잔씩 하는 게 매력 있더라.’

도를 넘었던 모양이다. 그 날은 대작을 해주고 있던 점잖은 수자의 아버지가 보다 못해

조카가 여자냐?’

고 한 소리를 했다나.

 

  술 취해 왔을 땐 아무 소리 않고 듣기만 하는 게 빨리 벗어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수자는 터득했다. 괜히 볼멘소리 했다간 삼촌 연설만 길어진다. 연설 길어지면 일어서야 할 시기 잡기 힘들고 연설 중에 일어서면 또 버릇없다는 둥 새로운 시비 거리가 생겨 삼촌만 더 신난단다. 삼촌이 신나할수록 수자는 듣고 있기 괴로워 몸이 뒤틀리며 멀미가 날 정도다.

  수자가 삼촌 입에서 나오는 말 중 제일 한심해 하는 말이

 ‘부모에게 효도해라.’

 삼촌만큼 부모 속 끓이는 사람을 아직 발견 못했다는 수자 앞에서, 불효의 상징이던 그 장본인 입에서 나오는 란 말이 수자의 귀에 한심하게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입에만 올려도 두드러기가 돋는다는 수자의 삼촌이 수자에게 욕먹을 일을 하나 더 보탠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가 지금 미경의 위로 안주로 도마 위에 오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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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판단은 좀 다르다.

  어찌되었건 가족은 가족이다.

  미경이 제법 분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말은 저렇게 했어도 앞으로 행동에 큰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본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섭섭한 일 앞에서 말랑하게 배반될 것 같으면 가족이란 이름이 그렇게 따뜻하고 그렇게 징그럽진 않을 것이다.

  웬만한 일에 감정을 드러내는 여자는 아니지만 감정이 행동의 변화까지 가져오려면 또 시간이 필요한 법. 그리고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그건 전쟁이아닌가? 미경의 성격으론 어림도 없고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가족들은 몰랐던 미경의 심중을 알고 좀 놀라고 그래서 조심하자고 결의했을 지도 모르고, 미경은 속으로 너무 심했나, 하고 반성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웬만한 다툼도 해빙기 얼음 풀리듯 풀리는 것이 형제자매 다툼이 아닌가.

  그러나 수자는 미경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접수했다. 그리고 배가 부르다 해도 기어이 밥을 한 술 더 보태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수자식 의리가 이미 발동해버렸다. 그래서 학교의 명예를 걸고 웅변대회에 나온 사명감에 불타는 아이의 웅변이 시작되었다.

 

  <미경이 네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더한 일도 있었다. 우리 삼촌 알지?>

  그렇다.

  우리는 수자의 그 삼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직접 보고 겪어서가 아닌 수자의 분노한 입을 통해서. 수자가 흥분해서 침을 튀기는 상당 부분이 그 삼촌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장가를 들기 전까지 무던히도 부모 속을 끓였던, 물론 지금은 상대가 아내로 바뀌었지만. 수자 말대로 하면 지금은 바람둥이, 장가들기 전에는 불량배였던 그 삼촌이 심심찮게 수자의 화를 머리끝까지 올려놓았다. 바람둥이 오빠가 누이동생 닦달은 더 한다고, 자기의 과거를 모르는 순진한 아내에게나 통할 으름장을 수자에게도 놓는 모양이었다.

 

  삼촌은 수자보다 두 살 위다.

  삼촌의 행패를 낱낱이 보며 자란 수자에게 삼촌은 이름뿐인 삼촌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나. 그런 삼촌에게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던 수자는 거부, 혹은 경외의 대상. 문제만 일으키는 자신과 칭찬만 듣는 수자에 대한 친척들의 비교가 어찌 달달하기만 했겠는가.

  사람 구실을 못할 것 같던 삼촌이 장가를 들어 첫 애를 낳을 때까지도 삼촌은 수자를 간섭하는 일은 고사하고 거리를 두고 말도 잘 붙이지 않았다. 그런 삼촌이 아버지가 되고 주변의 인정을 제법 받으면서 수자에게 어른 노릇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삼촌이지만, 수자와 나이가 비슷해 알게 모르게 비교 당하며 자격지심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수자가 못한 결혼을 했다는 자만심이, 그동안 기죽어 못했던 삼촌 노릇을 하게 만든 것 같았다.

  삼촌의 일탈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삼촌을 고등학교 졸업시킬 때까지 이사를 세 번이나 해야 했고 학교를 일곱 번이나 옮겼다. 그래서 삼촌은 입학한 중학교 고등학교와 졸업한 학교가 모두 다르다. 욱하는 주먹 때문에 물어준 치료비만 해도 수자 말대로라면 서른 평 아파트 한 채 값은 될 거라고 했다.

  그래도 겨우 들어간 대학에 다니면서부터는 삼촌도 숨구멍이 트였는지, 대학의 자유로움이 그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았는지 그럭저럭 학교도 잘 다니고 주먹질도 거의 없어졌다.

  그런 삼촌이 했던 일 중에 가장 신통한 일이 착하고 예쁜 여자를 후려 결혼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연줄로 취직한, 비록 육 개월밖에 버티지 못 했지만, 서울 생활에서 삼촌이 얻은 수확이 있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이다. 본인으로 봐서는 너무나 불행하고 삼촌 집안으로 봐서는 너무나 다행이고 과분하고 고마운 여자, 수자의 숙모. 직장을 걷어치우고 의논도 없이 내려온 소행에 집안이 또 한 번 들썩였지만 숙모의 출현으로 삼촌의 경솔함은 재빨리 묻혀버릴 수 있었다. 숙모는 그만큼 참하고 나무랄 데 없는 여자였다.

 

  사실 육 개월도 길었다.

  삼촌이 취직이 됐답시고 순순히 서울로 올라간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으니까. 며칠이나 갈까가 몇 달이나 갔으니, 겉으로만 한숨이었지 큰 실망도 없었다.

삼촌은 고향으로 내려와 별 하는 일 없이 할아버지 소유의 건물 임대료나 관리하면서 제법 건전한 가장 흉내를 내고 살았다. 순진한 아내를 평소에 닦아놓은 여자 후리는 솜씨로, 선물 공세로 감동을 시키고, 한편으론 불량배 시절에 닦아놓은 박력?으로 기를 죽여 집안을 평정했다.

  수자 말에 의하면 여전히 걸쳐놓고 지내는 여자가 있다 했다. 그건 숙모만 모르지 집안에서는 다 아는 일이라고. 자기는 숙모만 보면, 저렇게 예쁘고 싹싹하고, 배울 만큼 배운 여자가 어떻게 저런 망나니에게 걸렸을까 싶어 화가 난다고 했다. 두 살 터울로 태어난 아들 둘을 키우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에서, 만날 친구도 없이 집에 갇혀있다시피 살아가는 숙모. 어떤 때는 산적에게 납치당해 정절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조선시대의 양반집 아씨같은 느낌까지 든다고 했다.

  어쨌든 집안에서는 그런 숙모가 고마웠다.

  삼촌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믿고, 행실과는 반대로 권위 세우기 좋아하는 삼촌의 권위를 백 퍼센트 살려주었다. 서른이 되도록 아무도 어른 대접을 해주지 않았던 삼촌을 깎듯이 남편대접을 하고 받들어주는 숙모의 존재는 삼촌을 크게 변화시켰다. 남자로, 남편으로 권위가 선 삼촌은 집안에서 안면수습을 하며 목불인견의 모습을 지웠다. 부모에게 막말을 하며 달려들던 건 옛날 말이고 조카들에게도 점잖을 부리며 어른 노릇을 했다.

  마치 일을 저지르는 게 자신의 사명인 듯 그것을 즐기던 삼촌이, 드디어 윤리의 채찍을 휘두르는 어른의 맛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삼촌의 채찍은 자주 방향과 시간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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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0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미경의 캐릭터가 더 더러났으며 좋을 것 같고, 삼촌의 인물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소박한 문체여서 갈등과 긴장이 부족한 것 같네요.
아뭏든 다음의 얘기가 기대가 됩니다. 좋은 꿈 꾸세요. ^^

한여름소나기 2016-02-13 14:19   좋아요 0 | URL
새겨듣겠습니다...^^
 

   미경은 별로 말이 없다.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도록 가족에 대해선 물론이고, 자신의 생각도 묻기 전에는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질문에 대한 답도 짧고 덤은 없다. 우린 보통 하나만 물어도 그 다음은 줄기에 달려 나오는 감자처럼 계속이지만 미경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성한 미경의 총체는 그런 단편적인 것들을 모으고 그 틈새는 상상력과 추리력으로 메운 것들이다.

  알고 지낸 처음 몇 년 동안은 긴가민가했다.

  친한 것 같다가도 이게 친한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닌가 싶다가도 미경의 너무나 스스럼없는 태도에 긴가하기를 여러 번. 그러는 동안 혼기가 찬 주변 동료들이 결혼으로 훨훨 날아갔는데, 이 친구들만 약속한 것처럼 요동이 없었다. 우리에겐 그런 공통점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를 말하지 않고, 독신을 선포하지도 않으면서, 결혼을 포기한 자들이란 걸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자세히 알아갈수록 비슷한 성향이 꽤 많았다.

  대학을 다닐 때까지도 이렇다 할 연애 경험이 없었다는 것.

  결혼식장에만 갔다 오면 예식장이 무슨 장날도 아니고, 복잡하고 정신없고, 결혼식 싫어서라도 절대 결혼 못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이 한 번도 부러워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더 환장하게 들어맞는 점은 맞선보기를 결혼보다 더 싫어했다는 점    연애도 못한 주제에 선보기가 그렇게 끔찍하니 결혼은 달나라 일일 수밖에.

  휴일에 아이들 앞장 세워 유원지 가는 모습을 봐도

  ‘어머 좋겠다’, ‘행복한 모습이다가 아닌,

  ‘저 남자도 피곤하겠다.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서로 확인하고는 너도 그랬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지애를 느꼈다.

  미경은 말은 없지만 우리가 그런 화제로 떠들면 소리 없이 웃는 걸로 동의를 표했다. 한마디로 생각의 방향이 같다는 것.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비록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표현은 않지만 확고부동한 일원으로 자리 잡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았다.

 

  그런 미경이 수자의 화살을 맞은 후 자세를 고쳐 앉더니,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평소대로라면 왜 갑자기 나보고 그래.’ 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우리는 긴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고 더 이상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수자가 뽑은 감자 덩굴에 두 번째의 감자가 뽑혀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집에서 기분 상하는 일이 있어서……. 근데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미경의 이 한 마디에 셋은 마치 좌우향우 명령을 받은 군인처럼 일시에 그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가. 동고동락의 긴 세월동안 자진 사례란 것이 없었던 마마님 아니신가. 미경의 그 다음 말은 나올 듯 하면서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음식을 보고 군침을 흘리는 굶주린 아이들처럼 미경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성은 쉽게 무너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초조한 몇 초가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재촉하지는 않았다. 겨우 물가로 밀려오려던 공이 괜한 물장구에 밀려 도로 멀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참을성이 마침내 효과를 발휘했다.

 

  <지난 일요일이 아빠 생일이었거든.>

  미경은 아직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고 있다.

  젖 냄새가 날 것 같은 작고 여린 입술에서 뱉어지는 아빠라는 말 외엔 징그럽다고 여기는 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흔을 바라보는 미경의 아빠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유달리 친하게, 보통은 어머니에게 받는 느낌과 보살핌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여자애들이 대개 아빠라는 호칭을 나이 들도록 달고 사는 것 같았다. 맏딸로 태어나 유독 아빠의 기대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던 미경의 입에서 나오는 아빠소리에는 여섯 살짜리 소녀의 깜찍함과 귀여움이 아직도 배어있었다.

  <그 날이 사실 생일은 아닌데, 평일에는 모이기가 힘드니까 내가 그 날 모이자고 했어.>

  미경은 얼음이 다 녹은 멀건 커피를 한 모금 마셨고, 수자는 덩달아 냉수를 들이켰다.

  <과천 사는 첫째 동생만 못 오고, 나머진 제부와 애들 다 데리고 왔더라. 저녁 먹고 엄마 아빠는 조카들 데리고 거실에서 놀고, 나는 동생들하고 제부들이랑 차나 한 잔 하자며 안방에 있었어.>

  미경의 말은 자꾸 끊겼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드디어 수자가 끼어들었다.

  <, 궁금해 돌아가시겠다. 좀 빨리빨리 진행해라.>

  수자 옆에 앉았던 소형이 수자의 허벅지를 찔렀다. 수자가 입을 벌려 아, 소리를 내려다 소형을 쳐다보더니 도로 입을 다물었다. 미경은 아무 소리도 들은 바 없다는 듯 같은 목소리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중에 엄마 아빠 이야기도 나오고, 노인 문제도 나오고........ 무슨 얘기 끝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딸만 둔 부모는 누가 모셔야 하나 그런 이야기 중이었지 싶어. 막내 제부가 이러는 거야. ‘장인 장모님은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나중에 더 나이 드시면 처형하고 사시면 되잖아요. 처형도 혼자니까 외롭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들 생각하기가 쉽지.>

  소형이 눈길을 탁자에 떨어뜨리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병원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는 건 알겠는데, 당시엔 참 기분 묘하더라.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이..... 내가 그런 생각은 꿈에도 안하고 있었나봐. 나 이젠 진짜 같이 생활하긴 싫거든. 지금도 같이 살진 않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많이 매이는 편이잖아.>

  <알고는 있네.>

  이건 수자의 대꾸.

  <비록 늦더라도 혼자만의 집으로 가는 자유라는 게 있거든. 물론 가면 또 나름 할 일도 많지만 그건 좀 미뤄두면 되고. 내가 주인이다, 내 멋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숨통이 트이지. 이젠 아무리 밤중이라도 내 집에 와서 자야 편해.

  살아보니까, 갈수록 엄마 아빠 집에 손님이 많아져. 처음엔 동생들 결혼만 하면 일이 줄어드나 했거든. 근데 애 낳으러 오지, 산바라지 해야 되지, 아예 조카들을 맡기기도 하고. 걔들 보러 오는 손님들도 있어. 산바라지 하는 동안엔 제부들 저녁마다 오고. 저녁 먹고 갈 때도 많고. 늦게까지 일이 끝나질 않아. 엄마한테 있으면. 집이라도 따로 있어서 밤엔 돌아오니까 그렇지, 아님 내가 미쳤을 거야. 고달픈 건 둘째 치고 뭐랄까……. 그걸 사생활이라고 해야 되나? 사생활 보장이 안 된다고 해야 되나. 알면 안 될 특별한 사생활이랄 것도 없지만.......

  하여튼 계속 식구들 틈에 그렇게 있으면 내가 없는 것 같애. 가끔 내가 뭘 하고 있나 싶고. 어쨌든 거기엔 내 물품이 없잖아. 집에선 잠깐 틈나면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일기장도 들추고 할 수 있는데. 하다못해 친구들에게 전화할 일도 있고. 집에서도 전화는 할 수 있지만 식구들 틈에선 왠지 어수선해서 그럴 마음도 안 나고.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해.

  일은 끝이 없구나.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선을 그었어야 했는데.

  정말 몰랐거든. 세월이 지나면 내 역할이 줄어들 줄 알았지. 근데 아니야. 명절엔 손님이 더 많아져. 사위도 손님이고, 오는 사람들은 다 손님이지. 명절날 집에 있어보면 하루 종일 서 있어야 돼. 지금도 명절 손님은 내 차진데, 아예 생활을 같이 하라니. 24시간 어떻게 벌을 서고 있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야. 일하기 싫은 거 하고는 달라. 난 가만히 앉아있는 것 보단 움직이는 걸 더 좋아하니까. 너희들도 알잖아. 나한테 제일 심한 고문이 가만히 누워지내라 하는 거라고.

어른이 된다는 게 뭘까. 집 떠나기 전에 그런 생각 한 적 있거든.

  일일이 누구의 지시를 받고 싶지 않은 때가 오잖아. 빨래하는 일 까지도 스스로 결정하고 싶은 그런 시기.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바로 그런 시기가 온때였지. 그리고 그 때는 마땅히 부모 집을 떠나야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실행에 옮겼고.

  물론 지금 난 너무 집에 매이다 보니까 그저 밤에만 어른이 되는 거지만...... 그래도 같이 살면 그것마저도 없어지잖아.

  부모하고 같이 지내면 내 의지는 쓸모가 없어. 하루 종일 명령만 듣다 보면 무기력해지는 기분이라고. 친구 만나고 싶은 날, 엄마는 동생들 불러 저녁 먹는 계획 세워놓고, 여행 계획 세워놓았어도 조카들 와 있으면 빠져 나오기 미안하고. 엄만 물론 당신이 즐거우니까 나도 즐거울 거라 생각하겠지. 식구들이니까 나도 싫은 건 아니지. 하지만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아.

  하여튼 아무리 나이 먹어도 싱글부부가족의 계획에 언제든 끼워 넣을 수 있는 스페어타이어쯤으로 취급되는 기분이 들더라구.>

 

  스페어타이어라.

  오직 쓰는 사람에게만 편리한 존재. 조용히 달려 있다가 필요할 때 아무 소리 없이 몸을 던지니까. 문제가 없을 땐 한 번도 생각나지 않는 존재. 아무런 염려도 사랑도 필요 없는 존재. 미경이가 그런 존재라고? 아니 우리가? 너무 비참한 비유 아닌가?

  <그 때 내가 조용히 넘어가면 다들 그렇게 믿어버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갈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어.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그 문제만은 그럴 수 없었지. 은근히 부아도 치밀고. 그래서 내가 정색을 하고 한 소리 했어.>

  나는 미경의 다소 힘이 들어간 한 소리 했어.’라는 말을 내심 비웃었다.

  뭘 대단한 소릴 했을라고.

  지금까지 질질 끌려 다니며 한 걸 보면 모르냐?

  할 수 있으면 해주고 말자! 좋은게 좋다! 이것이 삶의 구호 아니었냐고.

  그렇게 소리 없이 외치며 한 소리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 소리는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대단한 소리였다.

  상상력과 추리력으로 메꾼 미경의 총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미경의 화난 얼굴은커녕 고조된 목소리 한 번 들은 적이 없었다. 잔잔한 호수 같은 줄 알았던 미경의 마음에도 드러내놓지 않은, 혼자 삭였던 생각들이 엄청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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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07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지만 이제는 소설도 재미를 붙이려고 해요.
연재소설, 기대하고 죽~ 읽어보겠습니다. 건필하세요.

한여름소나기 2016-02-10 17: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