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이었지만,
삼촌의 권위는커녕 수자에게 잔심부름 하나 시키는 것조차 주저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수자의 집에 오면 종종 물심부름을 시켰고 인사만 하고 제 방에 틀어박히는 수자를 불러내 술자리에 끼이기를 점잖게 강요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수자는 아버지 낯을 봐서 앉아 있다가 삼촌이 술에 취해 자기 속에 빠져있을 때 몰래 일어나곤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민감한 사생활에까지 간여를 했다. 부모까지 입을 다물게 된 수자의 결혼 문제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의 어른으로서(삼촌이니 수자에겐 어른이긴 하다) 혼기가 지나도 결혼하지 않는 조카에 대한 당연한 간섭이고 관심이라 여겼다. 뒤늦게 배운 어른 노릇은 수자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 서둘러 집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자는 잘 나가는 과외선생이다. 평일에 시간이 나지 않는 고등학생 과외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요일 오후까지 방안에 박혀 있는 게 싫다고 일요일엔 악착같이 오전에만 수업을 몰아놓아 아침부터 바빴다. 서둘러야 하는 시간에 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삼촌은 난데없는 호출을 멋이라고 생각하는지, 삼촌의 여자들에겐 그게 잘 통했는지, 수자보고 당장 삼촌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나오라고 했다.
과외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만, 어디서 잘못 배운 어른 노릇인지,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무조건 나오라’는 지시를 하고는 끊어버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시해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삼촌이 자기를 불러내는 일은 처음이고 정말 알아야 할 중대한 일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을 진정시키고 과외를 오후로 돌리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열 시 밖에 안 된, 일요일의 호텔 커피숍은 조용했다.
손님 없는 커피숍 한 쪽에서 삼촌이 수자를 먼저 발견하고 손을 높이 쳐들었다. 삼촌은 혼자가 아니었다. 삼촌 맞은편에 앉아서 수자 쪽을 돌아보는 낯선 남자를 보는 순간,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약속도 없이 이런 짓을 할 리는 없다고 도리질을 하며 벤자민 화분이 죽 둘러서 있어 제법 비밀스럽게 보이는 삼촌이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 갔다.
걸어올 때부터 계속 수자를 보고 있는 낯선 남자의 은근한 미소를 애써 모르는 체 하며, 무슨 일이냐는 몸짓으로 잎사귀가 늘어진 벤자민 나무 옆에 섰다. 수자의 태도에서 어떤 완강함을 느꼈는지 삼촌은 호들갑스럽게 엉덩이를 떼어 옮겨 앉으며 일단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수자는 삼촌이 내놓은 자리, 낯선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아서 비로소 정면으로 남자를 보고 눈인사를 했다. 어쨌든 삼촌이 아는 사람일 테니 예의는 갖춰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남자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이야기 많이…….’ 하는데 삼촌이 큰 소리로 웨이터를 불렀다. 뒷소리는 삼촌의 큰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삼촌은 수자를 돌아보며 ‘차부터 시키자. 아침은 먹었지? 하더니, 오고 있는 웨이터를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큰소리로 커피 세 잔을 시켰다. 삼촌의 약간 긴장한 듯한 태도나 분위기로 봐서 수자의 예상이 틀림없어 보였다. 언제나 상대를 내려보는 듯한 평소의 삼촌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꾸미거나 감추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긴한 일에 다른 사람이 나와 있을 리도 없고, 커피를 시키며 시간을 끄는 것도 그랬다.
불러낸 이유가 거의 확실하다 싶자, 수자를 살피는 남자의 시선도 불편하고 이렇게 멋대로인 삼촌의 희한한 배려도 역겨웠다.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수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말없이 굳어 있는 수자로 인해 분위기가 딱딱해지자, 커피를 마시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시간을 벌어보려 했던 삼촌은 의지를 꺾고 본론을 꺼냈다.
<여기, 이 사람 삼촌하고 제일 친한 친군데, 내가 봐도 멋진 남자다. 아직 장가를 못 갔는데, 서로 부담 갖지 말고 자주 만나면서…….>
수자는 여기까지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삼촌도 끔찍한데 제일 친한 친구라니, 삼촌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 스타일이라는 것도 몰라?’를 가슴 속에 꾹꾹 누르고 발딱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선 수자를 쳐다보며 급히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 삼촌 쪽은 보지도 않고, 어리둥절 앉아있는 삼촌 친구에게
<미안합니다. 전 이런 자린 줄 모르고 나왔습니다.>
재빨리 말하고는 틈도 주지 않고 자리를 빠져 나와 버렸다. 카운터 뒤쪽에서 커피 잔을 받쳐 들고 나오던 웨이터가 수자가 거칠게 밀고 나와 그때까지 흔들리고 있는 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수자가 그 때 그랬었다.
자기도 잘한 건 아니지만 삼촌이 하는 일이 매사에 그렇다고.
남의 의사 무시하고, 생각나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일 저지르는 데 선수라고. 숙모에게 하는 짓 보면 정말 눈곱만큼 있던 정도 다 떨어진단다.
특히 명절 같은 날, 친척들 모인 자리에서 삼촌의 목불인견은 극에 달한다. 숙모 앞에서 얼마나 폼 잡고 권위를 세우고 쥐 잡듯 하는지, 보는 사람이 민망해서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심심하면 친구들 몰고 와서 저녁 차리게 하는 건 예사고,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오는 날은 반드시 술 취한 친구들 다 몰고 와서 집에서 한 판을 더 벌인다 했다.
파출부도 못쓰게 하면서 먼지 하나 있으면 안 되는 삼촌 탓에 숙모 손은 습진 때문에 지문이 하나도 없다. 기껏 삼촌이 하는 배려라는 것이 습진 약 한 박스 사다 주는 것이라나. 하여튼 이상한 배포를 사나이의 훈장쯤으로 여기시는 모양이다.
수자는 삼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자리를 마련했다면, 아무리 갑작스런 자리라 하더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거라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삼촌이지만 정말 저런 남자 만날까봐 결혼 못 하겠다고 노래를 하는 수자에게 자기랑 가장 친한 친구라니, 수자가 펄쩍 뛸 수밖에. 친구는 친구를 닮는다는데, 더구나 가장 멋진 친구라니.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고, 아마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남자가 삼촌이라면 그 친구는 제 2인자는 될 거라고 했다.
그 사건 이후 삼촌은 노골적으로 수자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삼촌 대접을 안 한다, 버릇이 없다, 같은 유치한 이유에서 출발해 부모도 하지 않는 훈계까지 늘어놓았다. 결혼을 해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둥, 결혼 안 하는 게 얼마나 불효인지 아느냐는 둥, 사람은 다 짝을 맺어야 할 일을 다 하는 거라는 둥. 그 중 수자가 제일 견디기 힘들어하는 건, 술 먹고 밤늦게 와서 자는 수자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아버지 낯을 봐서 잠깐 앉았다 들어가기는 하는데, 그 잠깐이 정말 죽기보다 싫다고 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본래 맑지도 않은 눈은 게게 풀리고, 폼은 잡고 싶은데 권위가 서지 않아 안달이 난 얼굴로, 술상을 앞에 놓고 거만하게 앉아서, 걸어나오는 수자를 아래위로 훑는 그 순간을, 수자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 참는다 했다. 수자가 집 나오고 싶어지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건 그 삼촌의 잦은 방문일 것이다.
살신성인하는 심정으로 억지로 인사하고 앉아있는데 수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술 한 잔 할래? 요새는 여자들도 술 한 잔씩 하는 게 매력 있더라.’
도를 넘었던 모양이다. 그 날은 대작을 해주고 있던 점잖은 수자의 아버지가 보다 못해
‘조카가 여자냐?’
고 한 소리를 했다나.
술 취해 왔을 땐 아무 소리 않고 듣기만 하는 게 빨리 벗어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수자는 터득했다. 괜히 볼멘소리 했다간 삼촌 연설만 길어진다. 연설 길어지면 일어서야 할 시기 잡기 힘들고 연설 중에 일어서면 또 버릇없다는 둥 새로운 시비 거리가 생겨 삼촌만 더 신난단다. 삼촌이 신나할수록 수자는 듣고 있기 괴로워 몸이 뒤틀리며 멀미가 날 정도다.
수자가 삼촌 입에서 나오는 말 중 제일 한심해 하는 말이
‘부모에게 효도해라.’
삼촌만큼 부모 속 끓이는 사람을 아직 발견 못했다는 수자 앞에서, 불효의 상징이던 그 장본인 입에서 나오는 ‘효’란 말이 수자의 귀에 한심하게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입에만 올려도 두드러기가 돋는다는 수자의 삼촌이 수자에게 욕먹을 일을 하나 더 보탠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가 지금 미경의 위로 안주로 도마 위에 오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