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다

      

 

  운주사는 너무 변했다.

 

  나지막한 산 아래 작은 법당 한 채, 그 앞에 펼쳐진 펑퍼진 벌판 여기저기 탑이 흩어져 있었다. 탑이 흩어져 있는 벌판 한 쪽엔 고추밭도 있었다. 별다른 경계 구분도 없이. 고추를 따고 있던 아낙이, 둘러싸인 낮은 산, 탑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았었다.

 안내판도 들어가는 문도 없어, 미경이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너 국사선생 자격 있다. 내가 허락할 테니 선생 노릇 계속해라.’

던 소형의 농담도 생각났다.

  너무도 한가한 국도를 계속 달리다 난데없이 오른쪽으로 꺾인, 길 같지도 않은 비포장 길이었다. 미경이가 바로 이 길이다.’고 외쳤을 때도, 목을 빼고 그 길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다. 길이랄 것도 없이, 무너진 도로 한 쪽을 임시로 흙으로 메워놨나 했을 정도였다. 미경의 장담에도, 수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핸들을 돌려 울퉁불퉁한 길로 방향을 틀었다.

  방향을 트는 순간 우리 눈앞에 나타난 풍경!

  우린 그 풍경을 또 믿을 수 없었다.

  ‘별유천지 비인간이라더니, 그 풍경에 그만큼 맞는 말이 없었다.

  그 때까지도 운주사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절이었나 보았다. 매표소도 관리인도 없는 벌판에 선 우리는 황당했다. 늘 도로를 가로막는 쇠막대와 돈을 지불해야만 통과되는 매표소에 익숙해 있던 우리였다. 그래서 새장 문을 열어 놓아도, 선뜻 새장 밖으로 날아나가지 못하는 새처럼, 발걸음을 떼어놓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인간의 세상 같지 않은 풍경에 얼이 빠지고, 그런 풍경 속으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경의 당당한 갑시다소리를 듣고도 마치 앞에 보이지 않는 장막이나 있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온전하게 보존된 탑이 하나만 있어도 철책을 둘러치고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 앞에 설명이 적힌 간판을 세워놓아 보물이라는 것을 강조해 감히 손도 대보지 못하게 했다. 그런 탑들만 보다가, 버려진 듯이 철책도 없이 벌판에 서 있는 탑을 보는 기분이라니. 더구나 그 귀한 탑 이 한 두 개도 아니고 벌판 여기저기에 한 눈에 헤아려지지도 않는 숫자로 흩어져 있었다.

  그 때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많은 보물이 이렇게 한꺼번에 모여 있어도 되나?’였다. 바나나가 귀하던 시절, 처음으로 말레이시아 여행을 갔다가 지나가던 길 가 가게에 가득 쌓여있는 바나나를 보고 그렇게 귀한 것이 한꺼번에 저렇게 많이?’ 하던 심정과 비슷했다.

  풀, 바람과 함께 벌판에 편안하게 서 있던 탑들을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올려다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정답고 아늑했던 벌 가운데를 지금은 허옇게 포장된 길이 가로지르고 있다. 쭉 벋은 훤한 길은 벌판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빛났다. 정답게 어울려있던 탑들과 돌부처도 시멘트 길이 갈라놓았다. 벌판에 놓인 탑과 산자락에 기대 선 돌부처는 이제 더 이상 다정한 한 식구가 아니다. 들판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올려다 보아야했던 탑과 탑의 상륜부를, 높은 길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했을 때는 화까지 났다. 탑이란 본래 우러러 볼 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길 위에서 탑을 내려다보자니 성이 차지 않고 길에서 내려가 탑 주변을 돌아볼라치면 높은 길이 시야를 가로막아 기분이 상했다. 산자락에 놓인 작은 돌부처들은 이젠 탑들이 흩어져 있는 들판에선 볼 수가 없었다. 단절된 풍경. 마치 한 쪽이 잘려나간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입장료를 받기 시작하면 철책부터 두른다. 돈이 사람만을 망치는 건 아닌 것 같다. 사람이 밟아서 훼손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보호라는 이름아래 망가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산마루에 누워있는 와불(臥佛)은 괜찮을까.

  운주사 서쪽 산마루에 조성한 석불(石佛)도 이젠 울타리 속에 누워있었다. 산세와 조화를 이루게 조성되었을 와불(臥佛) 주위에, 굉음을 일으키며 쇠막대를 박았을 공사를 생각하니 진저리가 쳐진다. 어차피 비와 바람에도 조금씩 마모되어갈 돌부처에 사람의 손길이 좀 닿으면 어떠랴 싶은데, 안타까웠다.

그릇 하나도 어디 놓이는가에 따라 인물이 달라진다. 위대한 석공이 산꼭대기에다 그 힘든 작업을 시작하고 완성시켰을 때에는 철저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곳에 그렇게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구성이었으리라. 들판의 갓바위 부처와 팔공산 마루의 갓바위 부처가 어찌 느낌이 같겠는가. 더구나 주변에 다른 구조물을 덧붙인다는 건…….

  울타리 주위를 빙빙 돌며 석불을 감상하자니 참 찐맛이 없었다. 그 인정스러운 모습을 멀리 두고 손님처럼 맴을 돌다니. 도무지 보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울타리를 넘어 들어갔다.

  묵직하게 누워있던 돌부처가 성큼 다가온다. 부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성거리다 부처 옆구리에 등을 대고 앉았다. 이제야 좀 무엇을 사랑할 마음이 생긴다. 형상을 가진 것을 감상한다고 해서 꼭 눈만이 이용되는 건 아니다. 마음을 열고 있으면 그것은 통째로 오감을 통해 뛰어 들어온다. 손으로도 보고 피부로도 느끼는 것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질감이 기대고 있는 등에 천천히 스며든다.

  일요일인데도 아침나절이라 아직 관광객은 아무도 없다. 날까지 흐리니 늦잠들을 자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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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면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속해있는 세계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을 버린 내가 문제지 상식선상에서 반응하는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나야 이런 문제에 많이 부닥치니까 자기 방어적으로 해놓은 생각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들에겐 닥치지도 않을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방어할 필요 없는, 나름의 사는 방식이 생겼을 테고, 그런 방식에 투덜대는 내가 도리어 이상하겠지요.>

  나의 한숨.

  <아니에요.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저도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을 좀 하게 됐거든요. 어쩌면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이 속이 더 좁은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어요. 물론 결혼생활 힘들죠. 저야 편한 편이지만. 말 들어보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할 정도로 사는 사람 많거든요. 그래도 결혼한 여자들이 하는 걱정이나 고생은 많은 사람이 알아주는 고생이잖아요. 하소연을 하면 대개가 공감도 하고.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기도 하고요. 쉽게 위로를 받을 수 있거든요. 적어도 전혀 엉뚱한 곳에 복병이 숨어 있어 공격당하는 그런 황당함은 당하지 않죠.

  그런데 선생님 말 듣고 있으면, 어머 저럴 수도 있구나, 저런 괴로움도 있었네, 하는, 놀랄 일도 많더라구요. 저도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어요. 가끔 화제에 오르기라도 하면 그냥 돌 던지듯이 독신? 자유롭겠네? 가 끝이죠. 생각 길게 안 해요.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런 세상에 같이 살아가야 되니까 차라리 이해심이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참아야 할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다수를 상대로 이해를 받아내는 수고를 하기보단 포기하고 이해하는 쪽을 택하는 게 더 쉽지 않았을까. 다르다면 많이 다른 세계일지 모른다. 그리고 다른 세계를 이해하려면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먼저라야 한다. 관심과 시간을 가지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소수자의 모르는 세계를 그렇게 봐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니 이해받기란 거의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쌓인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어떨까. 살아가기 위해선 차라리 자신을 감추고 이해받기를 포기하는 쪽이 편하지 않을까. 기대를 버리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더 편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저보단 선생님 마음이 더 넓을 거다. 어때요? 맞아요?>

  웃음이 나왔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장선생 나 너무 심하게 변호하는 거 아냐? 아무리 변호해 줘도 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건 사실인데 뭐.>

  <어머 선생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도 있잖아요. 그래도 물고기 세계에서 연어를 욕하진 않을 걸요. 드물다 해서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힘내세요. 저 아줌마라도 선생님 좋아하고 이해하잖아요.>

  연어? 내 분노가 지극히 정상적인 장선생을 이상하게 만들어놓았다. 연어가 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일생에 딱 한 번, 알을 낳고 수정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장선생이 그걸 모를 리는 없고. 부덕 높은 그녀가 변호하는 데 눈이 어두워 뻥을 치거나 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내가 죄인임은 더욱 분명한 것 아닌가.

  <아줌마인 저를 봐서라도 애신 아줌마 용서하고 잊어버리세요.>

  그녀의 따뜻한 눈빛. 마음이 절로 누그러진다.

  <, 선생님…….>

  무슨 말을 하려다 놀라며 자기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없던 일로 돌리기엔 늦었다고 생각되는지, 손을 내리더니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오늘 나가실 거예요?>

  나는 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웃음 뒤엔 서글픈 생각이 따라붙었다. 결국 나를 이해한다는 장선생까지도,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라며 수습하게 만드는 죄가 나에게 있구나. 어떤 말이든 무심코 할 수 없는 말이 있다는 건, 상대에게 벽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녀도 나를 이해해주고 싶은 거지 통째로 이해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의 처지도, 나를 사랑하고 그래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받아들여지는 답답한 처지가 아닌가.

  <안 나갈 거예요. 여러 사람 심정 생각하면 나가야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봤지만 정말 나가기 싫어요. 그 심정 위로해주고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고, 또 내 위로 받을 정도로 그들이 안 된 처지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제 그런 차원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맞아요. 선생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애신 언니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는 걸요.>

  장선생이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며 응수를 했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의 머리를 날렸다.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장선생의 약간 들려진 오똑한 콧날이 바람 속에 도도하게 보였다. 그래,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자. 바람은 나를 스치고 지나갈 뿐. 잠시 들려진 옷자락도, 머리칼도 결국은 제자리도 돌아오는 것. 노여움도 기쁨도 다 내게서 나온 나의 것이었다. 바람에 잠시 흔들렸다고, 그래서 형태가 조금 변했다고 내 것이 아닌 게 아니다. 내 흐트러진 마음을 두고 남 탓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나뭇잎 사이를 지나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운동장엔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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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하시면 그냥 하던 이야기 계속 하세요. 그 질문엔 노코멘트입니다.>

  <왜요?>

  <그냥, 선생님 답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이번엔 언니 같은 표정이다. 어떤 이야기든 들어줄게, 하는.

  저 속엔 도대체 뭐가 들었을까. 영감이 서넛 들어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생 어머니의 그 말. 난 그 말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요. 내 뜻이 좋으니 그대는 무조건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라, 피해를 보더라도 참고 견뎌라, 하는 자기 위주의 발상. 봉사의 의미가 원래 그런 게 아니잖아요? 도움 받을 사람한테 필요한 도움. 정말 도움이 되는 행위를 실천하는 게 봉사 아니에요? 내 뜻만 중요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는 건 자기 만족이죠.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술이 고맙지 배가 부른 사람에게 억지로 밥 한 그릇을 떠넘기고 만족해한다는 거 우습지 않아요?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걸 받고, 도움을 받았다는 부담감만 안은 거잖아요. 얼마나 우스워요.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 놓고 좋은 뜻이니 좋게 생각하라구요? 그건 봉사가 아니라 취미생활이죠. 그 농부는 다시 해야 될 걸 뻔히 알면서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새참을 준비하고, 고마워해야 되는 건가요. 그렇게 되면 도대체 도움을 받은 쪽이 누구란 말인지.

봉사라는 허울 좋은 말에 멍드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진정 도움을 주고 싶으면 일단 도움 받을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정말 필요한 것을 알아내고, 그 뜻을 존중해서, 정히 거부를 하면 철회할 수도 있어야 해요. 그렇게 복잡해서 어떻게 봉사를 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게 복잡하다면 안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미 초점을 상대가 아니라 자기에게 맞춰놨잖아요. 봉사는 봉사 받을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는 거잖아요. 의사 무시한 채 관철하는 것은 자기만족이지 봉사는 아니에요. 봉사라는 이름 아래 자기만족의 희생자가 탄생하는 꼴이죠.>

  말을 끝내자 숨이 찼다.

  새소리가 다시 들렸다.

  연설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장광설이 되어버렸다. 말을 하다 흥분해버렸다. 나는 늘 이 모양이다. 말을 하다 내 말에 흥분하고 그래서 내용은 길어지고 목소리는 커지고. 그리고 다 끝난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간결하고 요약된 생각만 이야기하려 했는데. 습관인지, 성격인지 정말 버려지지 않는다.

  <역시, 선생님 생각은 재미있어요. 그리고 결혼 하지 않고 사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도 들구요.>

  <들켰네. 애신 언니 사건은 털어버리려 했는데. 이야기하다 흥분해서. 난 왜 이야기하다 내 이야기에 흥분하는지 몰라.>

  <선생님 흥분할 때 사실 전 더 재밌어요. 덜 걸러진 이야기도 막 나오고요. 진짜 살아있는 이야기. 어떤 땐 드라마 보는 것 같다니까요.>

  <놀리는 거죠?>

  그녀의 웃음.

  나의 장단점을 꿰고 있는 그녀다. 좀 부끄러워진다. 너무 가벼웠다. 또 흥분하다니. 자격지심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문제를 두고 부닥칠 때마다 그렇게 흥분할 리가 없다.

  난 조금 의기소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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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처음 알았을 때 저 한동안 꽤 우울해했던 거 모르시죠. 저랑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달랐어요. 난 그저 배운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만 살았더라구요. 어떻게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단 말인가. 한 자락의 의문도 없었을까. 내가 꼭 바보 같았어요. 신랑이 미운 것도 결혼을 후회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신랑한테 짜증내고, 내 자신이 밉고 그랬어요.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대로 살 권리가 있다구요. 그 방식이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요. 제도니 관습이니 하는 건 끊임없이 변하고 지금의 결혼 제도도 언젠가는 지금의 인식과 달라질 수 있다구요. 선생님은 결혼이란 걸 이스라엘 민족의 십계명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구요. 그저 생활의 한 방편일 뿐이라 여긴다고. 그 방편을 택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결혼이란 제도도 인간이 만들었고, 이혼이란 제도도 인간이 만들었고, 한때는 재혼을 금지하는 법도 있었다고. 그런 판국에 처음부처 혼자 못 살 이유가 있냐구요. 전 선생님이 그런 말 할 때 얼마나 멋지고 당당해 보였는지 몰라요.>

  <장선생한테나 멋지지.>

  난 웃었다. 애신의 일은 이제 정말 남의 일이 되었다. 아니면 아득한 과거가 되었든가.

  <그리고 사실,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 해도 당당까지는 아니랍니다.>

  장선생도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흘려들으세요.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욕먹을 각오하고 살면 편하다고요. 그리고 애신 언니라는 분도 나쁜 뜻으로 한 건 아니잖아요. 그 분은 그게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하신 걸 거예요.>

  <그렇겠죠.>

  나쁜 뜻은 아니었겠지.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모두에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에겐 아주 나쁜 일이 되고 말았다. 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장선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아마 내 얼굴의 웃음이 먼저 사라졌으리라.

  어색한 침묵.

  <이건 좀 다른 이야긴데.>

  <?>

  <나쁜 뜻으로 한 게 아니라는 말. 난 그 말이 무섭거든요……. 장선생은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아니, 좋은 뜻으로 하는 거라면, 상대가 피해를 입더라도 계속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

  장선생의 얼굴이 너무 심각하다. 난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어쩌면 넋두리를 펼쳐놓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를 풀어놓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다. 듣는 걸 고역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도 편하게 이야기하고 그녀도 편하고 재미있게 들었으면 싶다. 그런데 그건 내 혼자만의 소망인 모양이다. 그녀의 소망은 이런 이야기를 안 듣는 건지도 모르겠다.

  <심각한 이야기 아닌데?>

  <제 얼굴이 그랬나요?>

  놀란 눈이 또 동그래진다. 만화 영화를 보는 듯하다.

  <내 표정이 그랬겠지 뭐. 내가 말할 때 좀 그렇다면서?>

  <. 좀 진지해서.>

  <정답! 심각한 게 아니고 진지한 내용.>

  <진지한 내용?>

  <재밌게 생각하면 재미있을 수도 있고……. 갑자기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는데, 장선생한테 진지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들어줄래요?>

  <물론이죠.>

  그녀의 눈이 조금 작아진다.

  <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에요. 대학생들이 농촌 봉사 활동을 한다고 모내기철에 농촌에 가서 모내기하는 걸 도와주었대. 도시 출신이라 모내기를 해 본적이 있나, 거머리를 본 적이 있나, 죽을 고생을 했겠지. 근데 그 고생한 보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대요. 물 속에 잠겨서 등에는 땡볕을 받으며 모내기를 했는데 모심기가 잘못됐다나. 뿌리를 제대로 깊이 못 심었나 봐. 나중에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농부가 그걸 도로 뽑아서 다시 심었대.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라는데, 한 번 하기도 힘든 모내기를, 그걸 다시 뽑아 심자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그래서 그 농부가 그런 봉사활동 차라리 안 나오면 좋겠다고 했대요. 앞으론 안 받겠다고. 농부의 말에 한 대학생 어머니가 몹시 언짢아하며 한 말씀.

  ‘세상에 어린 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가서 그 고생을 했는데, 아무리 일을 망쳤다 하더라도 사람 인정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도와주러 가겠다는 걸 막느냐고. 어린 학생들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겠냐고. 사람이 그렇게 꼭 자기 좋은 대로만 살면 안 된다

  장선생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어머니 말씀대로 농부가 인정이 없는 건가? 좋은 뜻으로 한 거라면 무조건 오케이 해야 되는 건가?>

  <, 바로 이 질문이었군요.>

  <아깐 좀 뜬금없었나?>

  <당연하죠. 갑자기 좋은 의도니 나쁜 의도니 하는데, 내용이 뭔지도 모르겠고.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막 자책하고 있었다니까요.>

  <미안.>

  자책까지 했다니 정말 미안하다. 아니 내 실수가 그녀를 실망시켰을까봐 두렵다. 나는 날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좋아하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늘 좋아하는 채로 좋아하는 모습으로 남고 싶다. 그래서 차라리 난 좋아하고 사랑받는 상대에게 어떤 면에선 더 긴장한다. 늘 마음을 써야 하니까. 날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나를 보는 그의 시각은 불편하지 않다. 어떤 일에 얽히지만 않는다면 관심도 없다. 싫어하는 대로 둬버리면 된다. 이미지를 바꾸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어차피 감정은 이론 같은 걸로 다스려지는 게 아니다. 사람에 대한 감정은 노력으로 바뀌긴 어렵다.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는 그런 관계도 욕먹을 각오만 돼있다면 아주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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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잠을 못 자고 출근을 했고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1교시를 끝냈다. 원래도 아침형 인간이 아닌데 지난밤과 같은 악몽이 있으면 정말 최악이다. 직장인에게 아침이란 뭘까. 어디 아침 없는 나라 없을까. 학생들은 학교 없는 나라를 찾을까.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이 내 비몽사몽을 눈치 챘을까. 그렇게 여전히 몽롱한 상태로 장선생이 준 메모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애신 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실이 뚜렷해진다.

  <전화 하셨다면서요?>

  나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내 딱딱함이 전달이 됐는지,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건지는 몰라도 언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어젠 잘 잤니? 오늘 오후에 시간 어때? 오빠한테 얘기해 놨는데, 오빠 굉장히 바쁘거든. 대기업 부장 자리라는 게 그래. 우리 엄마도 같이 살지만 1년을 통틀어 오빠하고 한 상에 밥 먹는 날은 한 달도 안 될 거래. 근데 오빠가 오후 일곱 시에 시간 난다고 했거든. 괜찮지? 넌 그보다 퇴근 빠르잖아. 집에 가서 잠시 쉬다가 나와도 되고. 하루 종일 근무하다 바로 나오는 것보다 낫잖아. 화장도 고치고.>

  일사천리였다. 내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북 치고 장구까지 쳤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교무실에서 큰소리도 낼 수 없었다. 화를 누르며 제발 알아들으라는 심정으로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 . . . . . . .>

  내 목소리가 지나치게 굳었는지 아니면 내 안색이 변했는지 전화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선생이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 한 번 보기나 보고 싫다고 해라. 만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니? >

  언니 목소리에도 감정이 실렸다. 차라리 상대가 화를 낼 때 거절하기가 쉽다. 난 언니의 화난 목소리에 오히려 힘을 얻으며 목소리가 가벼워졌다.

  <언니, 교무실이라 오래 이야기 못 하겠어요. 미안해요. 오빠가 싫다는 게 아니라 저 정말 결혼할 마음이 없어 그래요. 끊을 게요.>

  못 들은 척 끊어버렸지만 애신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단비야, 기다린다. 일곱 시 H호텔…….>

  나는 못들은 거였다. 안 나갈 작정이었다.

 

***

 

  무슨 새인지.

  내가 아는 까치나 참새는 아니었다. 보이지는 않는데 지저귀는 소리가 예뻤다. 바늘 같은 잎이 촘촘한 리기다소나무 사이 어디에선가 나는 건 확실한데 아무리 살펴도 새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나무 사이를 지나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 사막 같은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바람과는 비교가 안 된다. 나무 그늘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앉아있으니 답답하던 가슴이 트였다. 별 거 아닌 걸로 속을 끓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며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많은 할 말들이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교재 연구를 하다 끌려 나온 장선생은 내 눈치만 보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할 말이 있어 불러냈으리란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지금 말을 잃은 상태다. 화가 난 상태에서 들끓던 말들은 화가 누그러진 지금은 싱겁기까지 하다.

  새삼 끄집어내야 할까. 기분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또 다른 이유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무 말도 없으면 나를 실없는 사람으로 알 것이다. 관대한 장선생이라도 기분이 상할지 모른다.

수업 하는 내내 애신 언니의 일이 마음에 걸려 개운하지가 않았다. 종례를 하고 교무실에 앉아있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교재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컴퓨터 화면은 들여다보기도 싫었다. 두 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자니, 교무실은 와글와글 시장 같고 후덥지근한 공기로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오늘 따라 장선생은 무슨 일이 그리도 많은지 내내 학생들을 붙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텁텁한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다.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장선생 자리로 갔을 땐 머리를 박고 교재 연구를 하고 있었다. 염치 불구하고 바쁘냐고 물었더니 선뜻 책을 덮고 따라 나서 주었다.

  그런데 막상 운동장을 가로질러 제법 나무가 우거진 쉼터 벤치에 앉으니 답답하던 속이 뻥 뚫렸다. 서늘한 바람에 찜찜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날아가 버린 듯, 이야기할 거리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텅텅 빈 마음으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앉아 있었더니, 장선생은 말 꺼내기가 어려워서라고 짐작했는지 먼저 입을 떼었다.

  <아침에 전화 온 사람 누구예요?>

  <족집게네? 안 그래도 그 이야기 하려 했는데.>

  장선생 눈이 동그래졌다. 참 예쁜 눈이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어떤 이야기도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난 담담하게 어제 밤에 온 애신의 전화 이야기를 했다.

  <그럼 오늘 아침에 전화하신 분이 바로 그…….>

  <맞아요. 바로 그 문제의 애신 언니.>

  <오늘은 왜 전화를,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면서요?>

  <그러니까 내가 답답하지.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야. 일방적으로 장소 이야기하고 끊더라구요.>

  <…….>

  <장선생은 결혼했으니까 물어보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내 반응이 별난 거예요? 자격지심인가?>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이상한 거 아니에요. 애신 언니라 했죠? 이상하다면 그 언니가 이상한 거예요. 그런 사람 잘 없어요. 선생님 화 낼만 해요. 제가 들어도 화나는 걸요.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법이 어딨어요? 멋대로.>

  장선생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 일에 같이 흥분해주는 여자. 이상하게 상대가 열을 내자 나는 더 냉정해질 수 있었다. 애신 언니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 같았다.

  <결혼하기 싫다는 말을 왜 그대로 믿지 못하는 건지. 장선생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문제.>

  <그 말을 안 믿어 준다구요?>

  <그냥 하는 소리로 생각하더라고. 장선생도 내 말이 그렇게 들려?>

  <조금만 신경 쓰면 진심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어요. 겉으로만 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긴 있겠죠. 그렇지만 그건 사람 소개시켜주려고 말해보면 금방 표 나요. 저도 몇 번 소개팅 시켜 준 적 있거든요. 선생님은 정말 아닌 것 알아요. 그냥 하는 소리랑 정말 뜻이 그런 거랑은 다르거든요. 조금만 신경 써도 알게 돼 있어요. 모르는 사람이 바보죠.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 하는 것이거나 아님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걸요.>

  <정말 뜻대로 살기 힘드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밥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생활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자식을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부부 사이에 끼워 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 자기들 방식대로 살게 하지 못해 난린지 모르겠어.>

  <신경 쓰지 마세요.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만 해도 그래요. 전 결혼했지만 선생님같이 사는 것도 좋아 보여요. 사실 전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해야 되는 줄 알고 남들 다하기에 질세라 했죠. 선생님 알고 나서 제가 느낀 게 뭔지 아세요? ‘어머나 저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그런데 나는 왜 그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지?’ 였어요.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해요. 머리를 스치는 순간엔 마치 벼락을 맞는 것 같았다니까요.>

  장선생은 귀까지 빨개지며 이야기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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