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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잠을 못 자고 출근을 했고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1교시를 끝냈다. 원래도 아침형 인간이 아닌데 지난밤과 같은 악몽이 있으면 정말 최악이다. 직장인에게 아침이란 뭘까. 어디 아침 없는 나라 없을까. 학생들은 학교 없는 나라를 찾을까.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이 내 비몽사몽을 눈치 챘을까. 그렇게 여전히 몽롱한 상태로 장선생이 준 메모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애신 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실이 뚜렷해진다.
<전화 하셨다면서요?>
나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내 딱딱함이 전달이 됐는지,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건지는 몰라도 언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어젠 잘 잤니? 오늘 오후에 시간 어때? 오빠한테 얘기해 놨는데, 오빠 굉장히 바쁘거든. 대기업 부장 자리라는 게 그래. 우리 엄마도 같이 살지만 1년을 통틀어 오빠하고 한 상에 밥 먹는 날은 한 달도 안 될 거래. 근데 오빠가 오후 일곱 시에 시간 난다고 했거든. 괜찮지? 넌 그보다 퇴근 빠르잖아. 집에 가서 잠시 쉬다가 나와도 되고. 하루 종일 근무하다 바로 나오는 것보다 낫잖아. 화장도 고치고.>
일사천리였다. 내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북 치고 장구까지 쳤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교무실에서 큰소리도 낼 수 없었다. 화를 누르며 제발 알아들으라는 심정으로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언. 니. 저. 정. 말. 싫. 어. 요.>
내 목소리가 지나치게 굳었는지 아니면 내 안색이 변했는지 전화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선생이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얘, 한 번 보기나 보고 싫다고 해라. 만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니? >
언니 목소리에도 감정이 실렸다. 차라리 상대가 화를 낼 때 거절하기가 쉽다. 난 언니의 화난 목소리에 오히려 힘을 얻으며 목소리가 가벼워졌다.
<언니, 교무실이라 오래 이야기 못 하겠어요. 미안해요. 오빠가 싫다는 게 아니라 저 정말 결혼할 마음이 없어 그래요. 끊을 게요.>
못 들은 척 끊어버렸지만 애신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단비야, 기다린다. 일곱 시 H호텔…….>
나는 못들은 거였다. 안 나갈 작정이었다.
***
무슨 새인지.
내가 아는 까치나 참새는 아니었다. 보이지는 않는데 지저귀는 소리가 예뻤다. 바늘 같은 잎이 촘촘한 리기다소나무 사이 어디에선가 나는 건 확실한데 아무리 살펴도 새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나무 사이를 지나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 사막 같은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바람과는 비교가 안 된다. 나무 그늘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앉아있으니 답답하던 가슴이 트였다. 별 거 아닌 걸로 속을 끓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며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많은 할 말들이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교재 연구를 하다 끌려 나온 장선생은 내 눈치만 보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할 말이 있어 불러냈으리란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지금 말을 잃은 상태다. 화가 난 상태에서 들끓던 말들은 화가 누그러진 지금은 싱겁기까지 하다.
새삼 끄집어내야 할까. 기분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또 다른 이유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무 말도 없으면 나를 실없는 사람으로 알 것이다. 관대한 장선생이라도 기분이 상할지 모른다.
수업 하는 내내 애신 언니의 일이 마음에 걸려 개운하지가 않았다. 종례를 하고 교무실에 앉아있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교재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컴퓨터 화면은 들여다보기도 싫었다. 두 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자니, 교무실은 와글와글 시장 같고 후덥지근한 공기로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오늘 따라 장선생은 무슨 일이 그리도 많은지 내내 학생들을 붙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텁텁한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다.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장선생 자리로 갔을 땐 머리를 박고 교재 연구를 하고 있었다. 염치 불구하고 바쁘냐고 물었더니 선뜻 책을 덮고 따라 나서 주었다.
그런데 막상 운동장을 가로질러 제법 나무가 우거진 쉼터 벤치에 앉으니 답답하던 속이 뻥 뚫렸다. 서늘한 바람에 찜찜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날아가 버린 듯, 이야기할 거리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텅텅 빈 마음으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앉아 있었더니, 장선생은 말 꺼내기가 어려워서라고 짐작했는지 먼저 입을 떼었다.
<아침에 전화 온 사람 누구예요?>
<족집게네? 안 그래도 그 이야기 하려 했는데.>
장선생 눈이 동그래졌다. 참 예쁜 눈이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어떤 이야기도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난 담담하게 어제 밤에 온 애신의 전화 이야기를 했다.
<그럼 오늘 아침에 전화하신 분이 바로 그…….>
<맞아요. 바로 그 문제의 애신 언니.>
<오늘은 왜 전화를,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면서요?>
<그러니까 내가 답답하지.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야. 일방적으로 장소 이야기하고 끊더라구요.>
<…….>
<장선생은 결혼했으니까 물어보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내 반응이 별난 거예요? 자격지심인가?>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이상한 거 아니에요. 애신 언니라 했죠? 이상하다면 그 언니가 이상한 거예요. 그런 사람 잘 없어요. 선생님 화 낼만 해요. 제가 들어도 화나는 걸요.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법이 어딨어요? 멋대로.>
장선생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 일에 같이 흥분해주는 여자. 이상하게 상대가 열을 내자 나는 더 냉정해질 수 있었다. 애신 언니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 같았다.
<결혼하기 싫다는 말을 왜 그대로 믿지 못하는 건지. 장선생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문제.>
<그 말을 안 믿어 준다구요?>
<그냥 하는 소리로 생각하더라고. 장선생도 내 말이 그렇게 들려?>
<조금만 신경 쓰면 진심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어요. 겉으로만 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긴 있겠죠. 그렇지만 그건 사람 소개시켜주려고 말해보면 금방 표 나요. 저도 몇 번 소개팅 시켜 준 적 있거든요. 선생님은 정말 아닌 것 알아요. 그냥 하는 소리랑 정말 뜻이 그런 거랑은 다르거든요. 조금만 신경 써도 알게 돼 있어요. 모르는 사람이 바보죠.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 하는 것이거나 아님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걸요.>
<정말 뜻대로 살기 힘드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밥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생활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자식을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부부 사이에 끼워 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 자기들 방식대로 살게 하지 못해 난린지 모르겠어.>
<신경 쓰지 마세요.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만 해도 그래요. 전 결혼했지만 선생님같이 사는 것도 좋아 보여요. 사실 전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해야 되는 줄 알고 남들 다하기에 질세라 했죠. 선생님 알고 나서 제가 느낀 게 뭔지 아세요? ‘어머나 저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그런데 나는 왜 그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지?’ 였어요.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해요. 머리를 스치는 순간엔 마치 벼락을 맞는 것 같았다니까요.>
장선생은 귀까지 빨개지며 이야기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