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처음 알았을 때 저 한동안 꽤 우울해했던 거 모르시죠. 저랑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달랐어요. 난 그저 배운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만 살았더라구요. 어떻게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단 말인가. 한 자락의 의문도 없었을까. 내가 꼭 바보 같았어요. 신랑이 미운 것도 결혼을 후회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신랑한테 짜증내고, 내 자신이 밉고 그랬어요.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대로 살 권리가 있다구요. 그 방식이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요. 제도니 관습이니 하는 건 끊임없이 변하고 지금의 결혼 제도도 언젠가는 지금의 인식과 달라질 수 있다구요. 선생님은 결혼이란 걸 이스라엘 민족의 십계명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구요. 그저 생활의 한 방편일 뿐이라 여긴다고. 그 방편을 택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결혼이란 제도도 인간이 만들었고, 이혼이란 제도도 인간이 만들었고, 한때는 재혼을 금지하는 법도 있었다고. 그런 판국에 처음부처 혼자 못 살 이유가 있냐구요. 전 선생님이 그런 말 할 때 얼마나 멋지고 당당해 보였는지 몰라요.>
<장선생한테나 멋지지.>
난 웃었다. 애신의 일은 이제 정말 남의 일이 되었다. 아니면 아득한 과거가 되었든가.
<그리고 사실,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 해도 당당까지는 아니랍니다.>
장선생도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흘려들으세요.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욕먹을 각오하고 살면 편하다고요. 그리고 애신 언니라는 분도 나쁜 뜻으로 한 건 아니잖아요. 그 분은 그게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하신 걸 거예요.>
<그렇겠죠.>
나쁜 뜻은 아니었겠지.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모두에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에겐 아주 나쁜 일이 되고 말았다. 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장선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아마 내 얼굴의 웃음이 먼저 사라졌으리라.
어색한 침묵.
<이건 좀 다른 이야긴데.>
<네?>
<나쁜 뜻으로 한 게 아니라는 말. 난 그 말이 무섭거든요……. 장선생은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아니, 좋은 뜻으로 하는 거라면, 상대가 피해를 입더라도 계속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
장선생의 얼굴이 너무 심각하다. 난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어쩌면 넋두리를 펼쳐놓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를 풀어놓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다. 듣는 걸 고역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도 편하게 이야기하고 그녀도 편하고 재미있게 들었으면 싶다. 그런데 그건 내 혼자만의 소망인 모양이다. 그녀의 소망은 이런 이야기를 안 듣는 건지도 모르겠다.
<심각한 이야기 아닌데?>
<제 얼굴이 그랬나요?>
놀란 눈이 또 동그래진다. 만화 영화를 보는 듯하다.
<내 표정이 그랬겠지 뭐. 내가 말할 때 좀 그렇다면서?>
<네. 좀 진지해서.>
<정답! 심각한 게 아니고 진지한 내용.>
<진지한 내용?>
<재밌게 생각하면 재미있을 수도 있고……. 갑자기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는데, 장선생한테 진지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들어줄래요?>
<물론이죠.>
그녀의 눈이 조금 작아진다.
<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에요. 대학생들이 농촌 봉사 활동을 한다고 모내기철에 농촌에 가서 모내기하는 걸 도와주었대. 도시 출신이라 모내기를 해 본적이 있나, 거머리를 본 적이 있나, 죽을 고생을 했겠지. 근데 그 고생한 보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대요. 물 속에 잠겨서 등에는 땡볕을 받으며 모내기를 했는데 모심기가 잘못됐다나. 뿌리를 제대로 깊이 못 심었나 봐. 나중에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농부가 그걸 도로 뽑아서 다시 심었대.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라는데, 한 번 하기도 힘든 모내기를, 그걸 다시 뽑아 심자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그래서 그 농부가 그런 봉사활동 차라리 안 나오면 좋겠다고 했대요. 앞으론 안 받겠다고. 농부의 말에 한 대학생 어머니가 몹시 언짢아하며 한 말씀.
‘세상에 어린 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가서 그 고생을 했는데, 아무리 일을 망쳤다 하더라도 사람 인정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도와주러 가겠다는 걸 막느냐고. 어린 학생들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겠냐고. 사람이 그렇게 꼭 자기 좋은 대로만 살면 안 된다’
장선생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어머니 말씀대로 농부가 인정이 없는 건가? 좋은 뜻으로 한 거라면 무조건 오케이 해야 되는 건가?>
<아, 바로 이 질문이었군요.>
<아깐 좀 뜬금없었나?>
<당연하죠. 갑자기 좋은 의도니 나쁜 의도니 하는데, 내용이 뭔지도 모르겠고.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막 자책하고 있었다니까요.>
<미안.>
자책까지 했다니 정말 미안하다. 아니 내 실수가 그녀를 실망시켰을까봐 두렵다. 나는 날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좋아하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늘 좋아하는 채로 좋아하는 모습으로 남고 싶다. 그래서 차라리 난 좋아하고 사랑받는 상대에게 어떤 면에선 더 긴장한다. 늘 마음을 써야 하니까. 날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나를 보는 그의 시각은 불편하지 않다. 어떤 일에 얽히지만 않는다면 관심도 없다. 싫어하는 대로 둬버리면 된다. 이미지를 바꾸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어차피 감정은 이론 같은 걸로 다스려지는 게 아니다. 사람에 대한 감정은 노력으로 바뀌긴 어렵다.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는 그런 관계도 욕먹을 각오만 돼있다면 아주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