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엔 여전히 햇살이 눈부시다.
수자는 배에 물을 흠뻑 튀기며 상추와 깻잎을 씻었다. 소형은 특기인 된장찌개를 준비하고 있다. 난 침대에 몸을 펴고 누웠다. 밥을 먹을 때까지 누워 있고 싶었다. 조금 피곤했다.
엉덩이를 밀고 다니던 미경이 어느새 몰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오래 사귀고 여행을 여러 번 다녔어도 미경이 옷 갈아입는 걸 한 번도 못 보았다. 옷 갈아입는 걸 안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가 갈아입을 때도 어느 틈에 피해 버리고 없다. 수자와 소형이 내가 동시에 뛰어들어 옷을 갈아입을 때에도 미경은 밖에서 기다리거나 외면해 있다. 우리가 뭐 없는 거 있느냐고 아무리 놀려도 소용이 없었다. 미경은 항상 아무도 모르게 귀신 같이 옷을 갈아입는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모양이다. 아니 비밀로 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다. 비밀이 많은 사람은 음흉하게 보이지만 비밀이 너무 없어도 신비감이 없어지는 건 사실이다. 미경은 우리에게 옷 갈아입는 모습을 신비로 남겨놓았다. 소형의 신비는 무얼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비법? 그건 그녀가 일부러 숨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마음이 아닐까. 하지만 어쨌든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니 그것도 ‘신비’라고 해 두자. 그러면 수자의 신비는? 과외계의 인기스타?
수자는 학생들이, 아니 학부모들까지 굉장히 좋아하는 과외 선생이다. 물론 실력을 인정받은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거의 개인 대 개인의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과외는 실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인간관계도 생각보다 까다롭게 작용한다. 학생도 그렇지만 학부모와도. 그런데 수자의 학생으로 들어오면 선생을 바꾸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이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 과외가 필요 없어지거나 경제적 사정으로 그만두어야 할 형편이 아니곤 다른 이유로 수자를 거부하는 걸 보지 못했다.
내가 보기엔 무심하기도 하고 섬세한 배려 없는, 분명 기분 나쁠 말도 툭, 던지곤 하는데, 학생들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지. 하여튼 수자의 불퉁스러움이 어떤 사람들에겐 매력이 되는 모양이다. 그것도 내가 이해 못할 일이니 ‘신비’라 해두자. 그럼, 내 신비는 뭘까. 그들에게 알지 못할 나의 ‘무엇’이 있을까. 내 문젠 내가 답을 내지 못하겠다.
중이 제 머린 못 깎는구나.
나중에 직접 물어봐야겠다.
개수대에서 나는 물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아늑하게 들린다.
<와! 좋다.>
상추와 깻잎을 다 씻은 수자가 물이 묻은 티셔츠 앞자락을 펄럭이며 창가에 붙어 섰다. 아기처럼 창에 얼굴을 대고 바다를 보고 있는 수자. 수자의 얼굴 앞으로 멀리 지나가는 배가 보인다. 뱃고동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조용하다. 그런데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 서 있던 수자가 쿵, 소리가 나도록 방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앉는 소리다.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저렇게 소리가 나도록 앉는데도 아프지 않을까. 과연 엉덩이뼈는 괜찮은 걸까. 볼 때마다 놀랍다. 우리가 그 소리에 놀라 물을 때마다 수자는 괜찮다고 했다. 굉장한 뼈대 집안인 모양이다. 맞다! 수자의 진짜 ‘신비’는 엉덩이뼈의 비밀이다. 집이 울리도록 소리가 나는데도 멀쩡하다니. 더구나 아프지도 않다니!
찌개를 얹어놓은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이고 소형도 와서 앉았다.
<수자 너 정말 뼈 조사 해봐야 되겠다. 신기하잖아. 소리만 들어선 거의 사고 수준이거든. 뭔가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 말이야.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 안 올라오니?>
<안 올라와.>
수자는 창밖으로 향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뚝 부러지는 대답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수자의 대답은 무뚝뚝하다. 처음 겪는 사람들은 화난 걸로 안다.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그 대답이 상쾌하진 않다. 소형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창 밖을 봤다.
나는 눈을 감았다.
편안했다. 옛날, 가족이 모두 같이 살 때, 누구도 결혼하지 않았을 때, 집에 있던 것처럼 편안하다. 언제부턴가, 이젠 식구들과 있는 것보다 이들과 있는 게 더 편해졌다. 지금은 엄마가 계신 집도 옛날 같지는 않다. 언니집도 마냥 편할 수는 없다. 밥을 먹고도 뭘 해야 되지 않을까 서성거리게 되고, 여기서처럼 누워버리기도 어려워졌다. 물론 형부나 언니나 엄마나 동생은 그들 집이 제일 편한 곳이겠지만.
이제 이들이 나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생각을 한다. 누가 인정을 하건 말건 관계없이 생활이 그렇게 돼버렸다. 무슨 일을 도모할 때, 심지어 몸이 아플 때에도, 제일 쉽게 달려와 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의 가족이 아니라 이들이다.
가족이 편하게 느껴지는 건 생활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설명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필요할 때 바로 곁에 있고,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지가 된다. 가족이라도 생활공간이 달라지면 마음뿐이다.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 즉각 도움을 줄 수는 없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일일이 설명을 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는 없다. 사는 공간이 달라지면 생활 방식도 조금씩 달라져가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과 새로운 친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혼으로 만난 부부만 결속이 단단한 건 아니다. 그들도 남남으로 만났고 살면서 질긴 끈이 생겼을 것이다. 처음부터 깊어지는 정은 없다. 시간이 추억을 만들고 추억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낳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멀어지면 아쉬운,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 가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세월을 같이 했던 가족이듯, 우리도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어야 마땅하지 않은지. 내가 가장 필요할 때조차도 이제 언니나 동생은 조카들에게, 배우자에게 일이 생기면 당연히 올 수 없다. 나는 가족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서로에게 우선권을 주는 걸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취하고 있는 형태의 가족 외의 가족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눈은 앞만 보게 되어 있으니까. 한 번씩 돌아보는 주변은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일 거니까.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방편으로나 여기겠지. 그 방편들은 늘 그 자리에 아무런 문제도 없이, 요구도 없이 존재할 때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미경이 이사하는 전날이었다. 퇴근해서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요일에 같이 친정에 가자는 전화였다. 나는 미경에게 갈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무슨 약속이냐고 묻길래, 이사 가는데 가봐야 된다고 했다. 언니는 엄마한테 오래 못 갔는데, 혼자 가려니까 재미없다고, 약속 취소하고 가면 안 되냐고 했다. 안 된다고 점잖게 말해도 알아들을 언니다. ‘약속 취소’는 같이 가고 싶은 마음에 해본 소리다. 그런데 내가 그렇다. 그냥 한 소리란 걸 알면서도 곧바로 흥분해버린다. 그 날도 그랬다. 꼭 흥분하는 순간 반성이 된다. 물론 때는 늦었다.
<언니는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약속 해놓고 안 가면 어떡해. 집에는 나중에 가도 되지만 이사 날짜는 정해져 있잖아.>
언니도 곧바로 응수해왔다.
<아이구, 됐다. 너는 뭐 그만한 일에 화를 내고 그러니? 친구도 좋지만.... 아니다. 그런 말은 그만두고. 하여튼 너도 참, 친구 일이라면. 너무 빠져서 그러는 거 아니다.>
언니는 불을 질러놓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친구에게 빠지다니, 반성하던 마음은 다시 물 건너 가버렸다. 무슨 그런 말이 있어. 필요할 때 도와주는 걸 빠진다고 표현해야 될 정도로 친구가 그렇게 가벼운 존재인가? 자기 이사 갈 땐 이민이라도 가는 것처럼 동네방네 알려 놓고. 혼자 사는 사람 짐은 솜으로 만들었나? 언니한텐 도대체 친구가 뭐지? 언제든 다른 약속이 생기면 무시해버려도 되는 그런 사람인 모양이지. 아니, 세상에 무시해버려도 되는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약속이 왜 약속인데. 우선순위를 정해놓은 질서 같은 거 아니냐고. 질서는 아름다운 거지. 아, 아니. 그건 내 생각이고. 그것도 좋아. 친구가 필요 없는 사람도 있겠지. 각자의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거니까. 소중한 게 모두에게 같으란 법은 없으니까.
친구에게는 빠지면 안 되나? 남편, 아내, 자식에게는 빠져도 되고? 남녀가 서로에게 빠져 결혼하는 건, 나라가 인정하고 집안이 축복하는 거라 이건가? 우정이 결혼보다 가볍다고 누가 정해놓기나 했나? 하늘이 계시라도 내렸단 말인가? 십 년을 궂은 일 기쁜 일 같이 해가며 친해온 사이를, 무슨 권리로, 아니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간단히 뭉개버릴 수 있지? 나 늙으면 자식이라도 하나 떼 줄 건가. 언니 노후 설계에 나도 들어있는 모양이지?
나는 화가 쉽게 안 풀려 수화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사실 언니가 내 친구들을 푸대접 한 적도 없고, 소홀히 하라는 뜻으로 그 말은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동생이니까 경계 없이 할 수 있는 말을 언니도 했을 것이다.
결혼해서 바쁘게 살면서 친구들과 멀어지고, 멀어진 자리를 자식이나 남편이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세계가 그녀의 세계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다. 젖먹이 아기도 이제 다 자랐고 크게 손갈 데가 없다. 여유 시간이 나고 그 세계에 틈이 생긴다. 뭔가 허전하다고 느낀다. 그 때 떠오르는 얼굴. 친구.
옛날을 추억하며 전화번호를 누른다. 연락이 닿으면 무척 반가울 것이다. 가끔 만나기도 하고, 죽이 맞아 여행 계획이라도 세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행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갑자기 생각난 시부모 생일이나, 남편의 출장, 뭐 그런 일로 쉽게 취소도 하겠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친구도 같은 사정일지 모른다. 서로 잘 이해하고 또 다음을 약속할지도. 언니에겐 친구가 그런 존재이리라.
하지만 내게 친구란, 그런 존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