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는 바닷가를 따라 이어져 있다.

  해가 지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벽돌로 깨끗하게 포장된 산책로 군데군데엔 바다를 향한 벤치가 그림처럼 놓여있다.

  비록 목발을 짚고 거니는 거지만 미경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제야 다리 다치기 전의 편안한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가벼워진 마음 같았다.

 

  소형이 정말 판단을 잘 했다고 혼자 또 감탄을 했다. 수자도 기분이 한껏 좋다. 배가 부르니 세상이 아름답다. 미경이 걷는 앞에서 뒷걸음치며 뭐가 그리 우스운지 큰 소리로 웃어 제쳤다. 큰 웃음소리에 놀란, 산책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소형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다른 손으로는 수자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수자의 웃음은 아무도 못 말린다. 소리를 죽여 웃는, 터진 고무 호스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듯한 억눌린 웃음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졌다.

 나도 미경이도 소형이도 웃음이 터졌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이유도 없이, 단지 웃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파도 소리가 그녀들의 웃음소리를 바다로 끌고 들어갔다.

 

  바다에 어둠이 내리고 산책로에 불이 들어왔다.

  늘어선 벤치들은 가로등 불빛에 싸여 아늑해 보이지만 불빛이 닿지 않는 바다는 완전 깜깜이었다.

  우린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몇 명 보이던 산책객들은 어두워지자 모두 들어가 버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우린 앉아 있다. 어둠은 우릴 밝히고 있는 불빛에 끊임없이 도전하듯 몰려왔다. 아니 전속력으로 뛰어오다 번쩍, 하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깜깜한 바다를 보다 가로등을 보면 그런 착각이 들었다. 마치 사진을 찍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뚫어지게 보고 있는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대신 예민해진 귀가 솔깃하게 움직였다. 파도 소리에 싸여 움직이지 않고 있는 우리가 절해고도 같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파도 소리가 얼굴까지 다가왔다. 난 먼 바다에 흩어져있는 바위가 된다. 바닷물이 몰려온다. 몰려와서는 가슴을 치고, 또 한 번은 발만 훑고 물러났으며 그 다음은 어마하게 큰 소리를 내며 달려와 머리를 휘갈기고 지나간다.

  <단비 또 자니?>

  수자가 감고 있는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댄다.

  <하여튼 명상하는 걸 못 보네. 내가 앉아서 자는 거 봤어?>

  <못 봤지. 너 앉아서 잠들면 큰일 나게? 젓가락 목에 큰 머리. 목 부러지잖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친구라고 몇 안 되는데, 하나는 다리 부러져. 하나는 목 부러져. 나도 그런 친구들 둔 기구한 팔자는 되기 싫다.>

  수자는 정말 끔찍한 걸 보기라도 한 듯 진저리까지 쳤다.

  <아무래도 수자 화장실 가고 싶은 것 같다. 맞지?>

  소형이 수자 얼굴 앞에 얼굴을 갖다 대고 다그치듯 물었다. 눈치 하나는 정말 귀신 뺨친다. 수자가 어색해진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배가 살살 아프네.>

  <저녁 먹을 때 알아봤어. 잔뜩 먹고 겨울잠이라도 자러 들어가는 줄 알았지. 하여튼 많이 먹는 사람들이 문제라니까, 많이 먹고 많이 싸고. 국가적 낭비야.>

  내가 쏘아대자 미경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우린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둠이 얼굴로 몰려들었다. 앉아있을 때보다 더 어둡게 느껴졌다. 우리가 버리고 일어난, 아늑하던 불빛 속의 벤치가 몹시 쓸쓸하게 보였다. 빈자리란 그런 모양이었다.

 

***

 

  퇴실 시간을 꽉 채워 퇴실을 했다.

  정해놓은 행선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있다 해도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퇴실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향하는 건 뭔가 좀 밋밋하고 허전했다. 계산을 하고 어정어정 로비를 지나올 때까지도 계획을 못 잡고 있었다. 미경이 다리만 아니라면 어디 갈 데가 없겠냐만, 산도 안 되고 절도 안 되고 정말 갈 데가 없었다.

  유리문 밖에는 햇빛이 무섭게 내리쬐고 있었다.

  밖은 찜통이었다. 숨이 컥 막혔다. 미경이 다리 문제가 아니래도 어딜 걸어 돌아다닌다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모두의 표정이 그랬다. 차를 빼올 동안 기다리라며 수자가 유리 같은 쨍한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눈을 뜨고 있기도 어려웠다. 햇빛 세례를 받고 있는 시멘트 바닥에서 수만의 빛 알갱이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대단한 태양이다. 감히 가볼 엄두도 안 나게 멀리 있으면서도 존재를 이렇게 징그럽게 인식시키다니. 뜨거움을 견디다 못한 피부가 하소연같은 땀방울을 내비칠 즈음 수자의 차가 나타났다. 구세주가 따로 없다.

  차에 타며 소형이 오동도가 어떠냐고 물었다. 다리가 놓여 있으니 다리 구경도 하고 한 바퀴 차로 돌아 나오면 어떻겠냐고.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던 우리에겐 웬만한 제안도 희소식이다. 그런데 제안이 멋지기까지 했다. 철썩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다리를 건넌다?

  행선지가 정해지자 활기가 돌았다. 수자는 지체 없이 차를 몰았다. 장소만 정해지면 길은 수자가 알아서 찾아간다. 수자의 길 찾는 감각은 뛰어나다. 나는 그걸 동물적 감각이라고 늘 놀린다. 머리가 아니라 느낌으로 찾는 것 같으니까. 철새나 고래처럼 말이다. 어쨌든 길을 잘 아는 죄로 여행할 땐 거의 수자가 차를 몰게 된다. 운전 경력도 가장 길지만.

 

  그러나 오동도 입구에서 우리의 당당하던 행진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차량은 다리를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차를 두고 사람만 걸어서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다리는 끝이 아물아물했다. 그 다리 위에 사람들이 양산을 쓰거나 모자를 쓰고 햇빛 속을 허물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의 표정이 안 가면 안 갔지 걸어서는 못 간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미경이 때문에라도 걷는다는 건 어림도 없었다. 어쩔까 잠시 망설이다 돌아가자고 결정을 보았다. 그래도 겨우 잡힌 계획이 무산되자 풀이 좀 죽은 얼굴들이었다.

  우리가 부산하게 떠들며 차를 돌리자, 웃으면서 포기하자, 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한 마디도 않던 미경이 바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애자 차량은 들어갈 수 있는데.>

  <정말? 어떻게?>

  수자가 운전대에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목발 있으니까 아마 해 줄걸?>

  <진작 말하지. 소형아! 미경이 목발 잘 보이게 창가에 대라.>

하면서 수자는 다시 차를 전진시켜 안내소 앞으로 갖다 댔다. 미경이 말이 맞았다. 목발을 본 안내소 직원이 장애 차량이라고 적힌 플라스틱판을 주며 앞 유리 안쪽에 세워 놓고 갔다 오라 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 옆에 차가 달리는 도로가 나란히 나 있다.

  우린 사람들이 다니는 복잡한 길을 옆에 두고, 조용한 도로로 들어섰다. 도로에는 우리가 탄 차밖에 없다.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차를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차가 달리는 옆은 바로 바다다. 난간도 없는 다리 밑으로 보이는 바다가 무겁게 넘실대었다.

  친구들은 모두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길을 앞으로 향한다.

  길은 나란히 두 줄로 뻗어있다.

  두 길이 다리 끝에서 합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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