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뻔히 보이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것이 법이다. 해결할 방법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법일지라도 그것이 일관되지 않는 것은 개탄을 넘어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운 분노까지도 느끼게 한다.  

 김종배의 글이다. 프레시안에서 퍼왔다. 김종배는 매우 단순한 논리이면서도 명쾌하다. 그리고 날까롭다.  

 

'성매매 특별법'이 아니라 '형법상 강요죄'라고 한다. 경찰이 '장자연 리스트' 수사선상에 오른 사람들에게 '성매매 특별법'이 아니라 '형법상 강요죄(교사 또는 방조)'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해는 한다. '성매매 특별법' 위반행위를 입증하려면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당사자가 성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거나, 성행위의 흔적과 대가를 찾아야 한다. 쉽지 않다. 장자연 씨는 이미 고인이 됐다. 경찰이 남성 4명의 DNA를 확보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성행위를 입증하는 직접적 물증이 되기는 어렵다. 게다가 사안의 성격상 성행위의 금전적 대가가 오갔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경찰이 '성매매 특별법' 대신 '형법상 강요죄'를 들여다보는 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일단 이렇게 이해하고 묻자. 그럼 잘 될까? '형법상 강요죄' 혐의는 입증할 수 있을까?

ⓒ뉴시스

그렇지가 않나 보다. 이명균 경기경찰청 강력계장이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고인이 문건만 남기고 사망한 상태에서 형법상 강요죄를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이명균 강력계장 말 그대로다. '강요당한' 주체 장자연 씨는 진술을 할 수 없다. 이미 고인이 된 터라 어떻게 강요를 당했고 어떤 압박감을 느꼈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없다. '강요한' 주체들이 발뺌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강요당한' 주체의 증언까지 확보할 수 없기에 혐의 입증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잠자리를 강요당한 적 있다"는 표현이 '장자연 문건'에 담겨있는 점, 그리고 참고인으로 경찰에 출석한 동료연예인들이 잠자리 강요가 있었다고 진술한 점이 한 가닥 실마리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장자연 문건'에 '잠자리 강요'를 한 주체가 특정되지 않았으면 아무 소용없다. 동료연예인들이 잠자리 강요를 느꼈다고 해도 그것을 장자연 씨의 당시 심리상태와 동일시할 수 없기에 소용없다. 이런 글귀와 진술은 기껏해야 정황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마지막 방법, 즉 장자연 씨 소속사 대표 김모 씨가 귀국해 성행위 강요와 '포괄적 대가'에 대해 이실직고 하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지만 이럴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추리다보니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밖에 안 남는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술 접대와 잠자리 강요에 괴로워하던 한 여성이 목숨까지 끊었는데, 그리고 이런 상황이 빚어지는 과정에 이른바 사회유력인사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냥 덮을 건가?

갑갑증을 극한수치로 끌어올리는 물음임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호흡을 가다듬자. 사법처리만이 징치 방법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 규탄도 징치의 한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사자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 또한 성립될 것 같지 않다. 경찰이 '출장조사'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사회 유력인사들을 경찰서로 불러 포토존에 세우는 게 아니라 세상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묻겠다는 것 아닌가. 경찰이 실제로 이렇게 하면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그 사람들의 행위를 확인할 수 없다. 그들이 사법처리 대상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그들이 벌인 행위는 '사생활'이 된다. 경찰이 이름과 행위를 공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경찰이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간에 흘러다니는 '리스트'만 믿고 실명 비판을 하면 영락없이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린다. 사회적 징치 또한 법률적 속박에 갇히는 것이다.

참으로 갑갑하고 참으로 희한하다. '장자연 리스트' 수사가 법의 한계와 법치의 허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갑갑하고, '장자연 리스트' 수사와 대비되는 다른 사건이 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창의성과 과감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희한하다.

정부가 추진한다.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해 모욕감을 느낀 당사자를 제쳐놓고 국가가 직접 사법처리하는 방안을 제도화하려고 한다. 어떤 강요행위는 피해자가 입을 열 수 없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을 판인데 어떤 모욕행위는 피해자가 호소하지 않아도 국가가 대리 징치하려고 한다.

검찰이 규정했다. '용산 참사'를 수사한 끝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던진 화염병으로 불이 나 사람이 죽었으니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어떤 부적절 행위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판인데 어떤 호소 행위는 똑같이 행위자가 특정되지 않았는데도 국가가 나서 도매금으로 처벌했다.

상식과 통념이 바라본 법과 법치는 이렇게 희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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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의무는 시민의 자유표현… 국가가 ‘복종’ 요구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지난번 주신 글에서 말씀하신 것들 가운데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지만, 그 이면에 출산율은 꼴찌요, 자살률은 최고 수준이라는 지적은 저 자신이 모르는 일도 아니었지만 한 주일 내내 새삼스럽게 제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은 2305년이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문제에 관해 꼭 한 마디 보태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독자들이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과 세계 최저 출산율 및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사이의 관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관계로 본다면 아직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당연히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리어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이야말로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매우 높은 자살률의 결정적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경제력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경제력 때문에 한국 사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율의 저하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조차 출산율의 저하를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는 인간과 생명을 오로지 자본축적의 도구로 삼는 것에 의해서만 유지됩니다. 따라서 인간성과 생명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체제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선진국들은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성과 생명의 파괴를 다른 곳에 전가시킴으로써 공동체의 붕괴를 지연시킵니다.

자본주의 경제발전 미명하에 인간성 파괴, 체제유지 도구로
하지만 해외에 식민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식민지배에서 간신히 해방된 뒤에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경제발전에 매달렸던 한국인들이 단시일 내에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우리 내부에서 인간성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조건 아래서는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성과 생명이 파괴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반세기 만에 세계 꼴찌 수준의 경제가 최고 수준으로 올랐으니 이 사회가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다수 한국인들은 박정희가 경제 발전시켰다고 감사해 하고, 앞으로도 경제가 발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경제발전 속에 지옥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정말로 아무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이라는 이번주 주제를 밀쳐 두고 제가 딴 소리를 너무 길게 했습니다만, 지난 일을 하나 더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저의 마지막 글에서 제가 병역의 의무를 예로 들어 국가가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시민에게 총을 들라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해 가까운 분이 그럼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로 가자는 말이냐고 물으시며, 모병제가 시민들이 나누어 져야 할 부담을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가하는 제도인 까닭에 결코 징병제보다 좋은 제도라고 말할 수 없다고 이의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분과 같은 의문을 가진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저는 오늘 시민의 권한과 책임에 대한 논의를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제가 지난 번 편지에서 병역의 의무를 비판한 것은 징병제라는 제도를 비판하고 모병제를 도입하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의무의 개념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가 시민의 권한과 책임인데, 다행히 여기서는 의무 대신 책임이라는 낱말이 쓰였지만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 책임은 너무도 쉽게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와 같은 뜻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저는 시민의 책임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뜻한다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무라는 말 자체가 서양에서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과 함께 탄생한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칸트가 의무의 윤리학을 말하기 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무의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거류민이나 노예로 살것인가…참 시민으로 살것인가 기로에

칸트는 의무의 개념에 어떤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한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철학자였는데, 그의 의도는 의무의 개념을 통해 중세적 신이 사라진 시대에 도덕의 절대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신의 타율적인 명령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이성과 양심의 소리에 따르는 것을 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즉 칸트에게서 의무란 개인의 지극한 자유와 자율성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적 국민국가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 표현이었던 의무의 개념을 가당찮게도 국가주의에 기초한 타율적 복종에 대한 요구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국가는 점점 더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키면서 마치 절대적 권리라도 가진 것처럼 시민들에게 이러저런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20세기 전제주의 국가는 그런 국가의 자기신격화의 절정이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값없이 빚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의무감은 그 조건 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감정으로부터 생겨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값없이 빚지고 있는 대상이란 국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내가 알지 못하는 인간이요, 자연입니다. 내가 빚진 자가 누군지 알고 갚을 수 있는 빚은, 갚으면 그만이니 은혜가 아닙니다. 알 수 없으니 갚을 수 없고, 갚을 수 없으니 은혜인 것입니다. 인간은 모르는 사람, 모르는 생명, 모르는 자연의 은혜로 삽니다. 모르니 갚을 수가 없습니다. 빚은 졌는데 똑같이 갚을 수는 없으니 긍지 높은 인간은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모르는 남에게 값없이 은혜를 입었으니, 나도 모르는 남에게 값없이 갚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쌀알 하나에도 농부의 피땀과 하늘과 바람과 별이 다 들어 있으니 내가 은혜를 입은 자는 존재 전체입니다. 의무감이란 세계 전체로부터 입은 그 무조건적인 은혜를 다시 아무 조건 없이 전체 세계로 되돌려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느끼는 마음입니다.

한갓 단체에 불과한 국가가 조건없는 감사와 의무 가로채




세네갈 고래섬의 노예상(사진 위)과 촛불집회에 참여해 정치적 의사를 밝히는 시민들의 모습(사진 아래). 자유가 없는 노예와 달리 시민은 정치적 삶을 통해 스스로 나라를 형성할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
그런 즉 우리가 의무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전체 인류요, 온 생명이며, 우주 전체이지 우리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지시할 수 있는 특정한 사람이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존재 전체만이 돌려받을 수 있는 감사와 의무감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도둑이 있으니 그것이 국가입니다. 신에게 돌려야 할 감사를 종교단체가 중간에서 가로채듯이, 모르는 이웃과 인류 전체와 온생명 그리고 세계 전체에 돌려야 할 감사와 의무의 감정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이 국가입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우리 시대가 세속화된 시대, 이른바 계몽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에 대한 감사라는 점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감정인 감사와 의무의 감정을 세속화된 시대에 국가가 대신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함석헌이 말했듯이 국가는 전체가 아니라 한갓 단체입니다. 그리고 국가는 아무리 좋아도 주고받는 계약의 공동체일 뿐입니다. 하물며 우리 역사 속에서 국가란 대개 수탈기구나 폭력기구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그런 국가에 감사나 의무감을 느낀다면, 이는 노예가 주인에게 또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감사를 느끼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국가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까닭은 우리가 국가에 값없이 빚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가가 오직 나의 자유가 실현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사회적 삶을 자유의 실현이란 관점에서 세 가지로 구별한 적이 있습니다. 자유가 전혀 없는 사람은 노예입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를 실현한 사람이 시민입니다. 그는 이 둘 외에 또 하나의 존재방식을 말했는데 그것이 거류민의 삶입니다. 거류민은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사람으로서, 노예처럼 예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기가 거주하는 나라에 시민권이 없는 까닭에 정치적 삶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사는 나라에서 공적인 일에 관해 아무 것도 더불어 형성하고 결정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이 거류민이라면 시민은 정치적 삶을 통해 나라를 스스로 형성하는 사람인데, 오직 이런 사람만이 참된 의미에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반복해 말씀드려 미안하지만, 자유는 탈주와 고립이 아니라 스스로 형성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의 사회적, 정치적 권한과 책임은 모두 이 형성의 필연성에 근거합니다. 국가가 시민들이 자유로이 더불어 형성해야 할 공동체인 한에서, 시민은 형성의 주체로서 국가에 대한 권리, 곧 참여와 형성의 권리를 가집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언제나 일정한 법칙과 결합될 수밖에 없습니다. 형성은 재료에 형상을 부여하는 일인데, 마치 집을 지을 때처럼, 모든 형상은 재료들이 어떤 법칙에 근거하여 서로 결합할 때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책임이란 국가에 질서와 합법칙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시민적 자유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것은 자유에 수반되는 활동과 자기구속인 것입니다.

의무란 타율적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이성과 양심에 따르는것

국가가 건물처럼 사물적 합성체가 아니라 너와 나의 만남의 공동체인 한에서 국가는 너와 나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약속에 의해서만 생성되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모든 약속은 남에게 하는 제안인 동시에 자기를 스스로 구속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시민이 국가 속에서 일정한 법칙의 구속 아래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만남에 수반되는 자기구속입니다. 국가가 시민에게 부과하는 모든 구속은 타율적인 의무가 아니라 자유로운 약속에 기초할 때만 윤리적 정당성과 현실적 안정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민의 권한과 책임에 관해 오늘 우리 사회가 당면한 근본문제는 국가는 시민을 끊임없이 노예로 만들려 하는데, 대다수 시민들은 참된 의미에서 시민으로 살려 하지 않고 거류민으로 살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 살면서 거류민으로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에 살면서 거류민처럼 살려하는 시민은 결국 새로이 등장하는 독재자에 의해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 역사의 냉혹한 법칙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역사의 그런 갈림길에 서 있으니,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류민처럼 살려다 노예가 될 것이냐, 아니면 다시 자유로운 시민의 길로 나아갈 것이냐.

선생님께 더욱 구체적인 가르침을 청하며 저는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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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Bernard Stiegler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1952년 태어났다. 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삼아 철학·정치학·미학을 넘나드는 저작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작은 <기술과 시간>(전 3권, 1994~2001)이다. 국내에는 자크 데리다와 함께 지은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관하여>가 번역돼 있다. 은행 강도 혐의로 5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철학을 공부했고, 그 뒤 데리다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국립시청각연구소와 음향음악연구소의 소장을 맡았고, 현재 퐁피두센터 문화개발부 디렉터로 재직중이다. 2005년 대안문명을 연구 실천하는 단체를 만들었다.(http://www.arsindustrialis.org)
 


 

»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생중계, 인터넷 같은 기술은 우리가 즉각적이고 단일한 현재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동일한 과거를 기억하고 동일한 미래를 예상하게 된다. 저마다 절실한 존재감도, 생성의 욕망도 사라진다. 남는 건 허무주의다.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이기려고 손쉬운 길, 즉 소비의 욕망을 따른다.



만화 <공각기동대>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컴퓨터로 인간의 기억을 외부에 저장할 때부터 인간들은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인 듯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억과 기록의 문제다. ‘디지털 건망증’을 떠올려보자.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기대다 보니 자기 집 전화번호도 잊어버리는 현상 말이다. 기록의 저장은 이처럼 기억을 위협하기도 한다. 더구나 기록을 잃어버린다면, 혹은 그것을 누군가 악용하거나 바꿔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스티글레르는 이런 문제가 현대사회에서 처음 생겼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이 기억을 외부에 내놓는 일은 아주 오래됐다. 문자기록은 물론이고 바위에 그림을 새기는 것도 이미 기억의 외재화다. 도구도 그렇다. 카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도구는 ‘죽은 노동’인데, 그것은 앞선 인간들의 지식을 담았기 때문이다. 제3의 기억이라고 할까? 이 덕분에 인간은 유전자와 대뇌 같은 선천적 한계를 넘어 차세대로 기억을 ‘유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도구는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며 좀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듯이, 인간은 자신이 만든 도구를 통해 자기 능력을 비춰보고 새로운 미래를 기획한다. 도구는 이처럼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희망을 함께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양방향의 시간성은 인간 의식의 바탕이다. 그래서 도구는 의식 자체를 구성하고 지탱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도구를 만드는 기술은 인간을 이끄는 주체인가 대상인가?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은 기술을 전항(轉項, transduction)적이라고 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를 규정한다는 뜻이다. 스티글레르는 여기서 ‘후천성 계통발생’(epiphylogenesis)이란 용어를 만들었다. ‘후천성’이란 인류의 진화가 유전자 차원을 벗어난다는 말이다. 또 ‘계통발생’이란 인간과 기술이 한 몸이라는 의미다. 즉 인류와 기술이 하나로 합친 단위로 진화해 왔다는 뜻이다. 그는 대뇌피질과 도구의 발전이 함께 이뤄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순수한 기억도, 순수한 기록도 없다. 모든 것은 ‘매개’되었다. 인간은 기술을 통해 세계를 기억하고 기록한다. 언어를 비롯해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매체들도 기록 기술을 벗어나는 건 없다. 다만 직접성의 효과를 지닐 뿐. 신문 기사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진도, 텔레비전도 마찬가지다. ‘생중계’는 마치 ‘실시간’ ‘현장’을 그대로 전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기술이라는 중간매체로 거르고 선택한 것이니까.

중간매체를 거친 건 모두 조작될 수 있다. 생중계는 생생함이라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기만의 가능성을 지닌다. 즉각적인 디지털사진을 법적 증거로 삼지 않는 이유도 조작 가능성 때문이다. 그래서 디지털 기술 시대가 모든 걸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만든다는 건 환상이다. 반면, 현대 기술이 나오기 전에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느끼며 살았다는 믿음도 환상이다. 인류는 처음부터 기술과 함께 살아왔다. 아니, 인간의 감각 자체가 이미 대뇌라는 매체로 ‘편집’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환상을 모두 버려야 한다.

스티글레르가 볼 때 기술의 조작 가능성은 기술의 본질이다. 가령 디지털사진이 조작될 수 있는 건 바로 사물의 형상을 0과 1의 조합으로 다루는 디지털의 본성 때문이다. 즉 0과 1의 조합을 바꿈으로써 형상을 바꿀 수 없다면 그건 디지털사진이 아닌 것이다. 이런 뜻에서 기술의 발달은 조작 가능성에 비례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기술과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를 그저 비관하지는 않는다. 요점은 기술의 본성을 알고 인정하는 데 있다.

언어를 예로 들자. 우리는 언어가 생각을 전하는 방식이 불만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불만스런 요소들을 모두 없애면 의사소통은 아예 사라질 것이다. 가령 ‘돌’이란 말의 오해를 피하려면 직접 돌을 들고 다녀야 한다. 하지만 얼마나, 어디까지? 차라리 의사소통에는 늘 오해와 불일치가 있다고 인정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불가능한 직접성, 즉 완전한 의사소통의 환상을 버리면 오히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스티글레르는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에 바탕을 둔 공동체 개념을 넓혔다. 데리다와 시몽동을 종합했다고 할까? 그에 따르면 인간은 ‘결여’의 존재다. 그래서 기술의 보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욕망은 구체적이며 ‘특이’하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결여된 내용이 다르니까. 인간은 각자의 욕망을 통해 새로운 개체로 생성한다. 주어진 기술적 환경에 속하지만, 각자 특이하게 세계와 부딪치며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이 결과는 곧 세계의 변화로 나타난다. 즉 ‘전항’적이다. 사람과 세계가 특이함을 보존하며 서로를 규정하고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술의 문제는 이 전항의 다양성이 가로막혔다는 데 있다. ‘표준화’ ‘규격화’ ‘선택과 집중’으로 움직이는 현대사회는 사람들과 세계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만든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욕망도 획일화되고 있다. 소득과 소비로 집중되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이처럼 모든 욕망을 한쪽으로 몰아야 하는 이유는 과잉생산 구조에 있다. 과잉생산은 과잉소비를 요구하므로 사람들의 욕망을 남김없이 소비욕구로 돌려놓아야 한다. 스티글레르는 이 욕망의 통제가 시간의 통제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간의 통제는 시간의 기술을 통해 이뤄진다. 생중계, 엠피3(MP3), 디지털카메라, 인터넷 같은 현대기술은 마치 우리가 즉각적이고 단일한 현재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동일한 과거를 기억하고 동일한 미래를 예상하게 된다. 이처럼 시간이 한 방향으로 맞춰지면 ‘특이’한 생성이 일어날 자리가 없어진다. 저마다 절실한 존재감도, 생성의 욕망도 사라진다. 남은 건 허무주의다. 사람들은 이 허무주의를 이기려고 손쉬운 길을 택하는데, 그것은 현대사회가 바라는 유일한 욕망, 즉 소비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대 기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기술이 시간성을 조작할 수 있는 건 원래 기술이 시간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기술은 욕망 통제의 기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기술을 전용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빼앗긴 기술의 시간성을 되찾아오면 어떨까? 현대사회의 지배양식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저마다 잃어버린 시간, 기억, 욕망, 즉 기술의 본뜻을 되살리자고 제안한다. 기술에 잠재된 다양한 시간들을 되살려 ‘삶의 기술’로 만들자는 것이다. 내재적인 전략이다. 현대사회의 내부에서 그 기반을 해체하는 전략이니까. 이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다. 다만 인터넷에 주목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생산과 소비, 발신과 수신이 분리되지 않는 양방향 작용에 주목한다. 특이성을 보존하는 전항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실마리를 거기서 찾은 듯하다.

이지훈/한국해양대 강사

 

 

 






 

» 이지훈/한국해양대 강사
 

이지훈 박사는 부산대에서 분자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한 뒤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한국해양대학교 강사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존재의 미학>(이학사, 2008), <가까운 문화 멀어진 미학>(살림, 2007), <예술과 연금술>(창비, 2004)이 있고, 공저로는 <욕망하는 테크놀로지>(동아시아, 2009), <필로테크놀로지를 말한다>(해나무, 2008), <철학, 예술을 읽다>(동녘, 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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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국가역할 상실… 전체·개인의 관계 ‘파탄지경’

김상봉 선생님,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건강하신지요? 선생님의 금번 서신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명확하게 설명해주셔서 제겐 참 좋았습니다. 또 김선욱·우석훈 두 분의 소중한 지적은 상당한 격려와 부담인 동시에 공화국 논의가 결코 관념적 공허로 흘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거듭 확인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실제 인간 삶에 관한 대안모색의 구체성과 실질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문과 이론의 출발은 언제나 인간의 실존과 현실상황이며, 그 귀결 역시 그것의 개선이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두 분의 지상조언을 듣는 한편 저는 ‘대화문화아카데미’의 초청으로 저희 대담주제에 대해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정말 대안은 없는가 -민주공화주의로부터의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해 헌신해온 중견활동가들의 중심 지적사항은, 지금 우리가 민주공화주의를 논의해야 하는 필요와 이유가 존재하며, 그러한 공공가치를 위한 자원 배분, 담론 형성, 정책 선택을 위한 시민 요구 반영, 기구 형성 등을 위해 실질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청년·학생들의 기록적인 자살률은 국가와 시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로부터 비롯된다. 국가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동안 개인파괴와 생명단절이 진행된 것이다. 사진은 텅 비어 있는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의 신생아실과 주인을 잃은 채 옥상 난간 위에 놓여 있는 구두(이미지컷).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가 보기에 한국사회에서 국가·민족·전체를 다시 성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국가와 시민·국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로부터 연유합니다. ‘위기’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한국에서 국가와 시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는 거의 ‘파탄’에 이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국가의 역할 상실로 인한 이 ‘파탄’이야말로 고단한 한국적 삶을 둘러싼 모든 문제의 핵심이자, 우리가 지금 좌우를 넘는 지혜를 통해 공동체를 재건하지 않으면 안될 요체라고 생각됩니다. 국가와 시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를 재구성하지 않으면 바람직한 공화국의 건설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한국사회의 위기는 진보의 위기도, 보수의 위기도 아니고, 공동체 전체와 공화국의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10위권으로 발전한 한국…자살·저출산 등 개인파괴 극심
무엇보다 국가가 세계 10위권으로 발전하는 동안 대다수 한국민의 삶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토록 발전했는데 개별 삶은 왜 더 안정적이고 자유롭고 행복해지지 않고 있습니까? 동시에 왜 이 국가공동체에서 살고 싶다는, 이 공동체를 사랑한다는 비율은 더욱 줄어들고 있습니까? 늘 국가 우선, 전체 우선을 말해온 한국에서 국가는 지금 자신있게 자신에 대한 헌신과 애국을 말할 수 있나요? 말할 수 있어야 함에도, 국가가 시민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발적 충성의 공통 가치들, 자랑들, 현상들이 지금 존재하나요? 없지요. 저는 여기에 관계 파탄의 기저요인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우리 국가가 빠른 속도로 발전해오는 동안, 이미 말씀드린 청년·학생들의 기록적인 자살률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의 지속은 전체 우선주의와 국가발전 제일주의가 산생한 개인 파괴, 생명 단절,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 붕괴의 연쇄고리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국가우선/전체 우선주의가 배태하고 생산·증폭·악화시킨 국가 발전-개인 파괴/생명 단절-사회 해체의 이 무서운 연쇄고리는 결코 추측이 아니라 실제상황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2017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가, 2021년부터는 총인구가 감소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한국이 2050년에 총인구대비 노동력을 2000년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무려 총인구의 35%에 이르는 누적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합니다. 놀라운 일로, 만약 이러한 규모의 인구를 수입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어떻게 될까요?

“국가 전체의 발전과 개별 삶들의 불안화” “외면적 국가발전과 내면적 국가이탈” “평균소득의 증가와 생명 단절의 증대”…. 이 극단적인 부조화의 누적 속에 우리는 “국가는 발전하나 개인은 떠나고 싶은”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온 것입니다. 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한 국가발전이었나요? 인간·시민·국민 개별 삶들의 안전·개선·행복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국가발전이란 개념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국가 자체가 개인을 전제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국가에 권리의 상당 부분을 내맡길 때에는 그러한 양도를 통해 삶의 어떤 가치와 조건을 보장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확보하기 어려운 최소한의 안전일 수도, 자유·안정·평등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은 떠나고 싶은’ 국가 전락…대체 누구를 위한 발전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앞서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공통의 인간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만 존재하지요. 즉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국가이건 돈이건 이념이건 인간실존에 앞선 다른 어떤 가치나 존재를 생각할 때 인간은 수단화되고 도구화됩니다. 우리가 군대를 가고 세금을 내고 질서를 지키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건설되고 유지될 국가공동체가 우리 삶을 보호·안정·발전시켜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국가 우선의 한국사회에서 민주화 이후 국가와 시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가 자발적 충성과 헌신으로 연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우리에게 이 급격한 파탄은 예상치 못한 역전이었습니다.

상세히 말씀드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는 우리에게 예리한 비교통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개인주의, 다원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는 공공성과 사회정책을 통한 시민 삶의 안정과 상대적 평등이 유지되고 있는 데 반해, 전체 우선, 국가 우선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공공성과 사회정책이 허약하고 그리하여 개별적 삶들은 파편화하고 불안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국가가 공적으로 개인을 위할 때 비로소 전체와 사회가 좋아진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회경제 관련 OECD 비교통계는 우리 사회에 하나의 충격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을, 나아가 전체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는 전체 우선, 국가 우선의 한국사회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전체와 국가 우선/민족 우선의 사유체제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깊은 역사적 배경이 존재합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중국·일본과 함께, 명확한 국경을 기준으로 근대 이전부터 1000년 이상 정치공동체와 종족공동체가 일치해온, 매우 예외적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봉건제를 경험하지 않아 지방과 도시의 자치와 자율을 허용하지 않는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해왔습니다. 근대 이전부터 국가와 민족이 일치해온 이른바 ‘역사적 국가’라는 것이지요. 중앙집권적인 ‘역사적 국가’의 장기 지속은 개인·다원·지방·자율보다는 국가·중앙·전체·공적 헌신의 뚜렷한 우위를 노정해왔습니다. 제국주의에의 망국을 포함한 근대국가 형성과정은 더욱더 강한 국가 우위, 전체 우위 관념을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건국 이후 인민들은 근대적 계층이나 계급, 시민이나 개인이 되기에 앞서 먼저 국민이 됨으로써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습니다. 남북의 생사를 건 투쟁이 국가와 국민의 동일시를 더욱 강화해왔고요.

이 점은 국가발전의 한 토대를 이룬 요인이었으나, 개인적·시민적 요구를 투과하지 않았기에 국가의 국민 대우는 처음부터 존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좌우를 넘어 국가 우선 논리가 얼마나 인간을 배제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국전쟁처럼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한 경우도 없습니다. 저는 20대에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공부하기 위해 제주도, 휴전선, 지리산을 포함한 여러 곳을 답사하며 국가가 자행한 숱한 민간인 학살을 목도하고는, 국민 생명 보호를 존재의 제1 이유로 삼아야 할 국가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통곡했습니다. 국가는 사과와 배상·보상은커녕 외려 희생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왔습니다. 그 충격이 제게 진실 규명과 국가의 사과·배상·보상을 촉구하는 학문적 실천을 자극했습니다.

자발적 충성의 가치는 고사하고 국가에 의한 희생자조차 팽개쳐
그런데 그러한 분노와 충격은 반대방향에서도 다가왔습니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도 있고, 공동체의 유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나 안전은 보장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하신 대로 동의를 전제로, 자유를 위한 전체에의 일정한 희생은 필요하지요. 공동체에의 자발적 참여·헌신은 공화국·공화주의의 필수요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국전 참전 희생자 및 유족들에 대한 국가의 처우를 보면, 반공주의가 기저가치인 나라에서 국가 수호와 반공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다친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게 국가가 해준 보훈과 보상은 거론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국가의 이 두 태도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념을 넘어 국가 우선/전체 우선을 위해 개인·국민·시민을 너무도 무가치하게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찍부터 6·25 담론과 기념행사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6·25 담론이 갖고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반인간적 담론과 기념비용에 매몰되어 방치된 ‘국가에 의한 희생자들을 위한 포용’과, ‘국가를 위한 희생자들에 대한 보훈’을 동시에 추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6·25 담론·기념 폐지 주장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며 협박하던 보수단체 인사가 직접 만나 제 의도를 확인하고는 오히려 더 빨리 시작했어야 한다며 사과하던 기억이 새삼 새롭습니다. 국가주의·전체 우선주의로 전도된 이념은 이처럼 국가 자체를 물신화해 국가의 바른 역할을 보지 못하도록 왜곡합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탈냉전 민주화를 거친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그러합니다.

공공성 회복과 개별적 삶 집중…좌우 넘어 공동체 재건해야
근대 이후 인간들은 국가-시민관계에서 국가에 맞서거나(against), 국가를 위하거나(for), 국가에 의해서(by)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왔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우리는 국가를 통해(through), 그리고 국가와 함께(together) 실현하는 조합을 추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이념으로 매몰되어 인간을 보지 못하던 국가 우선·전체 우선 이데올로기가 냉전 및 독재의 종식과 함께 극복되길 기대했으나 지금은 사사화와 함께 더욱 내화하고 있지 않나 두렵습니다. 개인과 시민 요구가 배제된 국가 우선·전체 우선 논리가 민주성·공공성·공화성의 상실 속에 사사·이념·연줄·지역·파당 우선의 현실로 은폐·고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다시 상세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국가는 하루빨리 참된 국가이성과 공공성을 회복해 국민·시민의 개별적 삶들을 보듬고 안정시키려 집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 없이는 국가의 안정도, 발전도 어렵습니다.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리 국가와 사회는 개인과 시민의 발전을 위한 분배·복지·교육·의료·환경 정책을 펼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처럼 계속 국가 우선을 고수하다보면 파탄난 국가-시민 관계가 끝내는 국가 자체를 파탄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걱정을 선생님과 함께 나누며 오늘 편지를 마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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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화국 

 

ㆍ‘전체’의 이름으로 ‘강자 위한 약자 희생’ 고착화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지난주에 김선욱·우석훈 선생님이 주신 글은 격려와 자극도 되었지만 동시에 부담도 되었습니다. 특히 경제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공화국을 설계할 수 없다는 김선욱 선생님의 말씀은 너무도 지당한 요구이지만 학문이 얕은 제가 그런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도록 하고 오늘은 오늘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점들은 국가가 시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채 개인의 일방적 희생과 복종을 강요하는 데서 비롯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자유 실현을 위해서다.

오늘 주제는 국가와 민족인데, 그 주제를 생각하니 갑자기 며칠 전에 경향신문에 실렸던 조갑제씨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조씨는 “국가 중심으로 국익 중심으로, 국민 전체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국민”이라고 하더군요. 기자가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관련해서,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은 삶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인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국가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조씨는 대뜸 “국가가 자선기관은 아니죠” 하면서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깡패들이 설치는 것을 막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라더군요. 삶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에게 대한민국이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보다 나을 것이 없고, 어차피 여기는 용역깡패와 경찰이 한 통속인 나라인데, 국가가 공산당 반대하고 깡패들 막아주니 국가중심, 국익중심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되라니, 이것은 시장 상인들더러 다른 깡패들로부터 보호해 줄 테니 우리 말 들으라며 등쳐먹는 조폭의 논리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이런 식의 국가지상주의가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전체가 개인보다 더 소중하다는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고 있지요. 자기를 내세우면 이기적인 사람이고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라는 모호한 도덕률은 단지 파시즘적 도덕교육 때문이 아니라도 식민통치와 전쟁의 경험으로부터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제대로 된 나라를 위해서는 이 전체주의 도덕을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사회 용산참사에서 보듯 국가 책임회피,개인 복종 강요

저도 개인이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무가치한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전체가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할 권리는 없으며, 개인 역시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 국가는 끊임없이 개인에게 전체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면서, 희생당하는 개인이 그럼 국가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느냐고 물으면, 뻔뻔스럽게도 국가는 자선기관이 아니라고 발뺌합니다.

용산참사에서 보듯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문제들은, 국가가 시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지기 싫어하면서 개인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국가권력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한국사회에서 크든 작든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의 공통적인 질병인 듯합니다. 지난해 강릉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3학년 학생회장이 2학년 학생 하나를 아침 조회에 불참했다 하여 때려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전체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 정당화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살인을 부른 것입니다. 그런즉 언젠가 이 부패한 국가를 허물고 참된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엄밀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짧은 편지에서 그 과제를 끝낼 수는 없겠지만, 시작을 위해 세 가지 근본원칙을 제시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에게 어떤 행위를 하라고 강제할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 번 강조한 것이지만 국가의 존재이유는 그것을 통해 오직 개인의 자유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강요는 자유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병역의 의무나 교육의 의무가 그런 것인데, 국가는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시민에게 총을 들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학교 가지 않겠다는 학생에게 학교 가라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게 하고 싶으면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고 자유로이 계약을 맺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어떤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며,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국민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이승만이나 박정희 또는 전두환과 같은 내부의 독재자와 싸우는 것이 아무리 절박한 일이라 할지라도 시민에게 강요된 의무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특히 부끄럼 없이 식민지개발론을 입에 올리고 박정희 덕분에 경제가 발전했으니 독잰들 어떠냐는 우익인사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병역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로 기괴한 일입니다.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시켜 주었다면 미국이나 중국이 이제 우리를 현대화시켜 줄 것이니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킬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박정희의 독재는 괜찮고 김일성의 독재는 나쁘다는 말은 사리에도 맞지 않거니와, 공산당이 통치하는 베트남의 경우에서 보듯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대개 우리의 인생에서 자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뿐입니다. 국가와 침대에 들 것도 아닌데 국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변태적 발상입니까? 하물며 그것이 어찌 의무로 강요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유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5·18 시민군처럼 자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유의 가치를 깨닫는 것과 나라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지,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강요하는 일이 아닙니다.

개인 자유실현 위해 국가 존재 공적인 의견의 표현 침해 안돼

둘째, 국가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아닌 한, 개인의 행위를 금지할 권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과연 무엇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독성 마약을 제조·판매하는 일이나 성을 사고파는 일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니, 시민적 토론과 합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금지되어서는 안 될 것은 공적인 일에 대해 의견을 표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시민의 침해될 수 없는 주권 행사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해온 국가,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글을 썼다고 인터넷 논객을 감옥에 가두는 국가 그리고 일제고사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다고 교사들을 해고하는 국가는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한 국가로서,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요, 마땅히 타도해야 할 국가입니다.

국가가 권력을 통해 금지해야 할 것은 개인의 주권 행사가 아니라 도리어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는 모든 유사권력들의 횡포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가 학생에게 야간자율학습을 강요한다면, 국가는 그런 학교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하여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만약 자본이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중소기업을 착취한다면, 그런 때 역시 국가는 지체 없이 개입하여 그런 유사권력에 대해 재갈을 물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학교가 학생과 교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교육의 자율성이고 자본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시장의 자율성이라 강변하면서 국가가 일관되게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유사권력의 편을 든다면, 이제 그런 국가는 허물고 새로 세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양보 필요할 때도 협박 대신 합당한 대가 줘야

셋째,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국익을 빙자해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 역시 국가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수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지역에서 아무리 많은 주민이 찬성한다 하더라도 반대하는 사람에게 재개발사업에 참여할 것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다수결의 원리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공적인 일에 적용되는 한에서만 정당성을 가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다수가 담합하여 소수를 약탈하는 범죄행위일 뿐입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기지로 쓰겠다고 대추리 주민들에게 집과 땅을 버리고 떠나라고 강요하거나, 해군기지를 만들겠다고 서귀포 강정리 주민들의 삶터를 빼앗을 권리는 국가에 없습니다. 물론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양보가 필요한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국가는 협박과 술수 대신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고 협상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 ‘전체 위한 일’ 가장 약자의 이익·행복 증진뿐

전체를 위하는 마음은 고귀하고 숭고하지만, 그 까닭은 전체가 무조건 개체보다 귀해서가 아니라 함석헌이 말했듯이 개인의 참된 자유가 오로지 전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요된 희생은 자유가 아니라 굴종일 뿐이니, 거기 고귀하고 숭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칸트가 말했듯이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인 까닭에, 사람들은 제 편한 대로 전체를 입에 올리는데, 대개 가짜를 들고 진짜 전체라 우깁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전체는 계량화된 숫자로 표현되거나, 더 나쁜 경우 사람들은 강자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이라 강변합니다. 그리하여 단지 다수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이 되고 강자를 위하는 것이 전체를 위하는 것으로 둔갑하는데, 그 결과 사람들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고, 강자를 위해 약자를 수탈하면서도, 이것이 도리어 국가와 민족 전체를 위한 일이라 믿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지금 이 나라는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경제, 언론, 교육 가릴 것 없이 총체적으로 강자를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제도적으로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단순히 정부가 아니라 국가를 통째로 바꾸어야 할 까닭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전체를 위한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전체 공동체 내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일 뿐입니다. 가장 약한 자에게 좋은 일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인류는 강자를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면서 그것을 진보라 믿었습니다. 이제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약하고 느린 자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울 때입니다. 사랑의 진보만이 참된 진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선생님의 지혜를 청하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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