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국가역할 상실… 전체·개인의 관계 ‘파탄지경’

김상봉 선생님,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건강하신지요? 선생님의 금번 서신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명확하게 설명해주셔서 제겐 참 좋았습니다. 또 김선욱·우석훈 두 분의 소중한 지적은 상당한 격려와 부담인 동시에 공화국 논의가 결코 관념적 공허로 흘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거듭 확인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실제 인간 삶에 관한 대안모색의 구체성과 실질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문과 이론의 출발은 언제나 인간의 실존과 현실상황이며, 그 귀결 역시 그것의 개선이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두 분의 지상조언을 듣는 한편 저는 ‘대화문화아카데미’의 초청으로 저희 대담주제에 대해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정말 대안은 없는가 -민주공화주의로부터의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해 헌신해온 중견활동가들의 중심 지적사항은, 지금 우리가 민주공화주의를 논의해야 하는 필요와 이유가 존재하며, 그러한 공공가치를 위한 자원 배분, 담론 형성, 정책 선택을 위한 시민 요구 반영, 기구 형성 등을 위해 실질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청년·학생들의 기록적인 자살률은 국가와 시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로부터 비롯된다. 국가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동안 개인파괴와 생명단절이 진행된 것이다. 사진은 텅 비어 있는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의 신생아실과 주인을 잃은 채 옥상 난간 위에 놓여 있는 구두(이미지컷).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가 보기에 한국사회에서 국가·민족·전체를 다시 성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국가와 시민·국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로부터 연유합니다. ‘위기’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한국에서 국가와 시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는 거의 ‘파탄’에 이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국가의 역할 상실로 인한 이 ‘파탄’이야말로 고단한 한국적 삶을 둘러싼 모든 문제의 핵심이자, 우리가 지금 좌우를 넘는 지혜를 통해 공동체를 재건하지 않으면 안될 요체라고 생각됩니다. 국가와 시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를 재구성하지 않으면 바람직한 공화국의 건설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한국사회의 위기는 진보의 위기도, 보수의 위기도 아니고, 공동체 전체와 공화국의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10위권으로 발전한 한국…자살·저출산 등 개인파괴 극심
무엇보다 국가가 세계 10위권으로 발전하는 동안 대다수 한국민의 삶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토록 발전했는데 개별 삶은 왜 더 안정적이고 자유롭고 행복해지지 않고 있습니까? 동시에 왜 이 국가공동체에서 살고 싶다는, 이 공동체를 사랑한다는 비율은 더욱 줄어들고 있습니까? 늘 국가 우선, 전체 우선을 말해온 한국에서 국가는 지금 자신있게 자신에 대한 헌신과 애국을 말할 수 있나요? 말할 수 있어야 함에도, 국가가 시민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발적 충성의 공통 가치들, 자랑들, 현상들이 지금 존재하나요? 없지요. 저는 여기에 관계 파탄의 기저요인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우리 국가가 빠른 속도로 발전해오는 동안, 이미 말씀드린 청년·학생들의 기록적인 자살률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의 지속은 전체 우선주의와 국가발전 제일주의가 산생한 개인 파괴, 생명 단절,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 붕괴의 연쇄고리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국가우선/전체 우선주의가 배태하고 생산·증폭·악화시킨 국가 발전-개인 파괴/생명 단절-사회 해체의 이 무서운 연쇄고리는 결코 추측이 아니라 실제상황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2017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가, 2021년부터는 총인구가 감소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한국이 2050년에 총인구대비 노동력을 2000년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무려 총인구의 35%에 이르는 누적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합니다. 놀라운 일로, 만약 이러한 규모의 인구를 수입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어떻게 될까요?

“국가 전체의 발전과 개별 삶들의 불안화” “외면적 국가발전과 내면적 국가이탈” “평균소득의 증가와 생명 단절의 증대”…. 이 극단적인 부조화의 누적 속에 우리는 “국가는 발전하나 개인은 떠나고 싶은”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온 것입니다. 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한 국가발전이었나요? 인간·시민·국민 개별 삶들의 안전·개선·행복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국가발전이란 개념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국가 자체가 개인을 전제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국가에 권리의 상당 부분을 내맡길 때에는 그러한 양도를 통해 삶의 어떤 가치와 조건을 보장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확보하기 어려운 최소한의 안전일 수도, 자유·안정·평등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은 떠나고 싶은’ 국가 전락…대체 누구를 위한 발전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앞서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공통의 인간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만 존재하지요. 즉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국가이건 돈이건 이념이건 인간실존에 앞선 다른 어떤 가치나 존재를 생각할 때 인간은 수단화되고 도구화됩니다. 우리가 군대를 가고 세금을 내고 질서를 지키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건설되고 유지될 국가공동체가 우리 삶을 보호·안정·발전시켜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국가 우선의 한국사회에서 민주화 이후 국가와 시민, 전체와 개인의 관계가 자발적 충성과 헌신으로 연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우리에게 이 급격한 파탄은 예상치 못한 역전이었습니다.

상세히 말씀드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는 우리에게 예리한 비교통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개인주의, 다원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는 공공성과 사회정책을 통한 시민 삶의 안정과 상대적 평등이 유지되고 있는 데 반해, 전체 우선, 국가 우선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공공성과 사회정책이 허약하고 그리하여 개별적 삶들은 파편화하고 불안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국가가 공적으로 개인을 위할 때 비로소 전체와 사회가 좋아진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회경제 관련 OECD 비교통계는 우리 사회에 하나의 충격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을, 나아가 전체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는 전체 우선, 국가 우선의 한국사회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전체와 국가 우선/민족 우선의 사유체제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깊은 역사적 배경이 존재합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중국·일본과 함께, 명확한 국경을 기준으로 근대 이전부터 1000년 이상 정치공동체와 종족공동체가 일치해온, 매우 예외적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봉건제를 경험하지 않아 지방과 도시의 자치와 자율을 허용하지 않는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해왔습니다. 근대 이전부터 국가와 민족이 일치해온 이른바 ‘역사적 국가’라는 것이지요. 중앙집권적인 ‘역사적 국가’의 장기 지속은 개인·다원·지방·자율보다는 국가·중앙·전체·공적 헌신의 뚜렷한 우위를 노정해왔습니다. 제국주의에의 망국을 포함한 근대국가 형성과정은 더욱더 강한 국가 우위, 전체 우위 관념을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건국 이후 인민들은 근대적 계층이나 계급, 시민이나 개인이 되기에 앞서 먼저 국민이 됨으로써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습니다. 남북의 생사를 건 투쟁이 국가와 국민의 동일시를 더욱 강화해왔고요.

이 점은 국가발전의 한 토대를 이룬 요인이었으나, 개인적·시민적 요구를 투과하지 않았기에 국가의 국민 대우는 처음부터 존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좌우를 넘어 국가 우선 논리가 얼마나 인간을 배제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국전쟁처럼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한 경우도 없습니다. 저는 20대에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공부하기 위해 제주도, 휴전선, 지리산을 포함한 여러 곳을 답사하며 국가가 자행한 숱한 민간인 학살을 목도하고는, 국민 생명 보호를 존재의 제1 이유로 삼아야 할 국가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통곡했습니다. 국가는 사과와 배상·보상은커녕 외려 희생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왔습니다. 그 충격이 제게 진실 규명과 국가의 사과·배상·보상을 촉구하는 학문적 실천을 자극했습니다.

자발적 충성의 가치는 고사하고 국가에 의한 희생자조차 팽개쳐
그런데 그러한 분노와 충격은 반대방향에서도 다가왔습니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도 있고, 공동체의 유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나 안전은 보장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하신 대로 동의를 전제로, 자유를 위한 전체에의 일정한 희생은 필요하지요. 공동체에의 자발적 참여·헌신은 공화국·공화주의의 필수요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국전 참전 희생자 및 유족들에 대한 국가의 처우를 보면, 반공주의가 기저가치인 나라에서 국가 수호와 반공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다친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게 국가가 해준 보훈과 보상은 거론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국가의 이 두 태도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념을 넘어 국가 우선/전체 우선을 위해 개인·국민·시민을 너무도 무가치하게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찍부터 6·25 담론과 기념행사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6·25 담론이 갖고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반인간적 담론과 기념비용에 매몰되어 방치된 ‘국가에 의한 희생자들을 위한 포용’과, ‘국가를 위한 희생자들에 대한 보훈’을 동시에 추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6·25 담론·기념 폐지 주장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며 협박하던 보수단체 인사가 직접 만나 제 의도를 확인하고는 오히려 더 빨리 시작했어야 한다며 사과하던 기억이 새삼 새롭습니다. 국가주의·전체 우선주의로 전도된 이념은 이처럼 국가 자체를 물신화해 국가의 바른 역할을 보지 못하도록 왜곡합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탈냉전 민주화를 거친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그러합니다.

공공성 회복과 개별적 삶 집중…좌우 넘어 공동체 재건해야
근대 이후 인간들은 국가-시민관계에서 국가에 맞서거나(against), 국가를 위하거나(for), 국가에 의해서(by)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왔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우리는 국가를 통해(through), 그리고 국가와 함께(together) 실현하는 조합을 추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이념으로 매몰되어 인간을 보지 못하던 국가 우선·전체 우선 이데올로기가 냉전 및 독재의 종식과 함께 극복되길 기대했으나 지금은 사사화와 함께 더욱 내화하고 있지 않나 두렵습니다. 개인과 시민 요구가 배제된 국가 우선·전체 우선 논리가 민주성·공공성·공화성의 상실 속에 사사·이념·연줄·지역·파당 우선의 현실로 은폐·고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다시 상세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국가는 하루빨리 참된 국가이성과 공공성을 회복해 국민·시민의 개별적 삶들을 보듬고 안정시키려 집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 없이는 국가의 안정도, 발전도 어렵습니다.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리 국가와 사회는 개인과 시민의 발전을 위한 분배·복지·교육·의료·환경 정책을 펼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처럼 계속 국가 우선을 고수하다보면 파탄난 국가-시민 관계가 끝내는 국가 자체를 파탄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걱정을 선생님과 함께 나누며 오늘 편지를 마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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