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의무는 시민의 자유표현… 국가가 ‘복종’ 요구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지난번 주신 글에서 말씀하신 것들 가운데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지만, 그 이면에 출산율은 꼴찌요, 자살률은 최고 수준이라는 지적은 저 자신이 모르는 일도 아니었지만 한 주일 내내 새삼스럽게 제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은 2305년이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문제에 관해 꼭 한 마디 보태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독자들이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과 세계 최저 출산율 및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사이의 관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관계로 본다면 아직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당연히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리어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이야말로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매우 높은 자살률의 결정적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경제력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경제력 때문에 한국 사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율의 저하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조차 출산율의 저하를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는 인간과 생명을 오로지 자본축적의 도구로 삼는 것에 의해서만 유지됩니다. 따라서 인간성과 생명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체제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선진국들은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성과 생명의 파괴를 다른 곳에 전가시킴으로써 공동체의 붕괴를 지연시킵니다.
자본주의 경제발전 미명하에 인간성 파괴, 체제유지 도구로
하지만 해외에 식민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식민지배에서 간신히 해방된 뒤에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경제발전에 매달렸던 한국인들이 단시일 내에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우리 내부에서 인간성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조건 아래서는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성과 생명이 파괴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반세기 만에 세계 꼴찌 수준의 경제가 최고 수준으로 올랐으니 이 사회가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다수 한국인들은 박정희가 경제 발전시켰다고 감사해 하고, 앞으로도 경제가 발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경제발전 속에 지옥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정말로 아무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이라는 이번주 주제를 밀쳐 두고 제가 딴 소리를 너무 길게 했습니다만, 지난 일을 하나 더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저의 마지막 글에서 제가 병역의 의무를 예로 들어 국가가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시민에게 총을 들라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해 가까운 분이 그럼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로 가자는 말이냐고 물으시며, 모병제가 시민들이 나누어 져야 할 부담을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가하는 제도인 까닭에 결코 징병제보다 좋은 제도라고 말할 수 없다고 이의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분과 같은 의문을 가진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저는 오늘 시민의 권한과 책임에 대한 논의를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제가 지난 번 편지에서 병역의 의무를 비판한 것은 징병제라는 제도를 비판하고 모병제를 도입하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의무의 개념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가 시민의 권한과 책임인데, 다행히 여기서는 의무 대신 책임이라는 낱말이 쓰였지만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 책임은 너무도 쉽게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와 같은 뜻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저는 시민의 책임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뜻한다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무라는 말 자체가 서양에서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과 함께 탄생한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칸트가 의무의 윤리학을 말하기 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무의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거류민이나 노예로 살것인가…참 시민으로 살것인가 기로에
칸트는 의무의 개념에 어떤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한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철학자였는데, 그의 의도는 의무의 개념을 통해 중세적 신이 사라진 시대에 도덕의 절대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신의 타율적인 명령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이성과 양심의 소리에 따르는 것을 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즉 칸트에게서 의무란 개인의 지극한 자유와 자율성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적 국민국가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 표현이었던 의무의 개념을 가당찮게도 국가주의에 기초한 타율적 복종에 대한 요구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국가는 점점 더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키면서 마치 절대적 권리라도 가진 것처럼 시민들에게 이러저런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20세기 전제주의 국가는 그런 국가의 자기신격화의 절정이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값없이 빚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의무감은 그 조건 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감정으로부터 생겨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값없이 빚지고 있는 대상이란 국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내가 알지 못하는 인간이요, 자연입니다. 내가 빚진 자가 누군지 알고 갚을 수 있는 빚은, 갚으면 그만이니 은혜가 아닙니다. 알 수 없으니 갚을 수 없고, 갚을 수 없으니 은혜인 것입니다. 인간은 모르는 사람, 모르는 생명, 모르는 자연의 은혜로 삽니다. 모르니 갚을 수가 없습니다. 빚은 졌는데 똑같이 갚을 수는 없으니 긍지 높은 인간은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모르는 남에게 값없이 은혜를 입었으니, 나도 모르는 남에게 값없이 갚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쌀알 하나에도 농부의 피땀과 하늘과 바람과 별이 다 들어 있으니 내가 은혜를 입은 자는 존재 전체입니다. 의무감이란 세계 전체로부터 입은 그 무조건적인 은혜를 다시 아무 조건 없이 전체 세계로 되돌려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느끼는 마음입니다.
한갓 단체에 불과한 국가가 조건없는 감사와 의무 가로채
세네갈 고래섬의 노예상(사진 위)과 촛불집회에 참여해 정치적 의사를 밝히는 시민들의 모습(사진 아래). 자유가 없는 노예와 달리 시민은 정치적 삶을 통해 스스로 나라를 형성할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
그런 즉 우리가 의무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전체 인류요, 온 생명이며, 우주 전체이지 우리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지시할 수 있는 특정한 사람이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존재 전체만이 돌려받을 수 있는 감사와 의무감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도둑이 있으니 그것이 국가입니다. 신에게 돌려야 할 감사를 종교단체가 중간에서 가로채듯이, 모르는 이웃과 인류 전체와 온생명 그리고 세계 전체에 돌려야 할 감사와 의무의 감정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이 국가입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우리 시대가 세속화된 시대, 이른바 계몽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에 대한 감사라는 점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감정인 감사와 의무의 감정을 세속화된 시대에 국가가 대신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함석헌이 말했듯이 국가는 전체가 아니라 한갓 단체입니다. 그리고 국가는 아무리 좋아도 주고받는 계약의 공동체일 뿐입니다. 하물며 우리 역사 속에서 국가란 대개 수탈기구나 폭력기구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그런 국가에 감사나 의무감을 느낀다면, 이는 노예가 주인에게 또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감사를 느끼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국가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까닭은 우리가 국가에 값없이 빚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가가 오직 나의 자유가 실현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사회적 삶을 자유의 실현이란 관점에서 세 가지로 구별한 적이 있습니다. 자유가 전혀 없는 사람은 노예입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를 실현한 사람이 시민입니다. 그는 이 둘 외에 또 하나의 존재방식을 말했는데 그것이 거류민의 삶입니다. 거류민은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사람으로서, 노예처럼 예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기가 거주하는 나라에 시민권이 없는 까닭에 정치적 삶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사는 나라에서 공적인 일에 관해 아무 것도 더불어 형성하고 결정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이 거류민이라면 시민은 정치적 삶을 통해 나라를 스스로 형성하는 사람인데, 오직 이런 사람만이 참된 의미에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반복해 말씀드려 미안하지만, 자유는 탈주와 고립이 아니라 스스로 형성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의 사회적, 정치적 권한과 책임은 모두 이 형성의 필연성에 근거합니다. 국가가 시민들이 자유로이 더불어 형성해야 할 공동체인 한에서, 시민은 형성의 주체로서 국가에 대한 권리, 곧 참여와 형성의 권리를 가집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언제나 일정한 법칙과 결합될 수밖에 없습니다. 형성은 재료에 형상을 부여하는 일인데, 마치 집을 지을 때처럼, 모든 형상은 재료들이 어떤 법칙에 근거하여 서로 결합할 때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책임이란 국가에 질서와 합법칙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시민적 자유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것은 자유에 수반되는 활동과 자기구속인 것입니다.
의무란 타율적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이성과 양심에 따르는것
국가가 건물처럼 사물적 합성체가 아니라 너와 나의 만남의 공동체인 한에서 국가는 너와 나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약속에 의해서만 생성되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모든 약속은 남에게 하는 제안인 동시에 자기를 스스로 구속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시민이 국가 속에서 일정한 법칙의 구속 아래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만남에 수반되는 자기구속입니다. 국가가 시민에게 부과하는 모든 구속은 타율적인 의무가 아니라 자유로운 약속에 기초할 때만 윤리적 정당성과 현실적 안정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민의 권한과 책임에 관해 오늘 우리 사회가 당면한 근본문제는 국가는 시민을 끊임없이 노예로 만들려 하는데, 대다수 시민들은 참된 의미에서 시민으로 살려 하지 않고 거류민으로 살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 살면서 거류민으로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에 살면서 거류민처럼 살려하는 시민은 결국 새로이 등장하는 독재자에 의해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 역사의 냉혹한 법칙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역사의 그런 갈림길에 서 있으니,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류민처럼 살려다 노예가 될 것이냐, 아니면 다시 자유로운 시민의 길로 나아갈 것이냐.
선생님께 더욱 구체적인 가르침을 청하며 저는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