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공화국
ㆍ‘전체’의 이름으로 ‘강자 위한 약자 희생’ 고착화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지난주에 김선욱·우석훈 선생님이 주신 글은 격려와 자극도 되었지만 동시에 부담도 되었습니다. 특히 경제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공화국을 설계할 수 없다는 김선욱 선생님의 말씀은 너무도 지당한 요구이지만 학문이 얕은 제가 그런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도록 하고 오늘은 오늘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점들은 국가가 시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채 개인의 일방적 희생과 복종을 강요하는 데서 비롯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자유 실현을 위해서다.
오늘 주제는 국가와 민족인데, 그 주제를 생각하니 갑자기 며칠 전에 경향신문에 실렸던 조갑제씨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조씨는 “국가 중심으로 국익 중심으로, 국민 전체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국민”이라고 하더군요. 기자가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관련해서,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은 삶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인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국가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조씨는 대뜸 “국가가 자선기관은 아니죠” 하면서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깡패들이 설치는 것을 막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라더군요. 삶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에게 대한민국이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보다 나을 것이 없고, 어차피 여기는 용역깡패와 경찰이 한 통속인 나라인데, 국가가 공산당 반대하고 깡패들 막아주니 국가중심, 국익중심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되라니, 이것은 시장 상인들더러 다른 깡패들로부터 보호해 줄 테니 우리 말 들으라며 등쳐먹는 조폭의 논리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이런 식의 국가지상주의가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전체가 개인보다 더 소중하다는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고 있지요. 자기를 내세우면 이기적인 사람이고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라는 모호한 도덕률은 단지 파시즘적 도덕교육 때문이 아니라도 식민통치와 전쟁의 경험으로부터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제대로 된 나라를 위해서는 이 전체주의 도덕을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사회 용산참사에서 보듯 국가 책임회피,개인 복종 강요
저도 개인이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무가치한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전체가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할 권리는 없으며, 개인 역시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 국가는 끊임없이 개인에게 전체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면서, 희생당하는 개인이 그럼 국가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느냐고 물으면, 뻔뻔스럽게도 국가는 자선기관이 아니라고 발뺌합니다.
용산참사에서 보듯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문제들은, 국가가 시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지기 싫어하면서 개인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국가권력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한국사회에서 크든 작든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의 공통적인 질병인 듯합니다. 지난해 강릉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3학년 학생회장이 2학년 학생 하나를 아침 조회에 불참했다 하여 때려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전체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 정당화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살인을 부른 것입니다. 그런즉 언젠가 이 부패한 국가를 허물고 참된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엄밀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짧은 편지에서 그 과제를 끝낼 수는 없겠지만, 시작을 위해 세 가지 근본원칙을 제시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에게 어떤 행위를 하라고 강제할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 번 강조한 것이지만 국가의 존재이유는 그것을 통해 오직 개인의 자유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강요는 자유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병역의 의무나 교육의 의무가 그런 것인데, 국가는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시민에게 총을 들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학교 가지 않겠다는 학생에게 학교 가라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게 하고 싶으면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고 자유로이 계약을 맺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어떤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며,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국민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이승만이나 박정희 또는 전두환과 같은 내부의 독재자와 싸우는 것이 아무리 절박한 일이라 할지라도 시민에게 강요된 의무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특히 부끄럼 없이 식민지개발론을 입에 올리고 박정희 덕분에 경제가 발전했으니 독잰들 어떠냐는 우익인사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병역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로 기괴한 일입니다.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시켜 주었다면 미국이나 중국이 이제 우리를 현대화시켜 줄 것이니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킬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박정희의 독재는 괜찮고 김일성의 독재는 나쁘다는 말은 사리에도 맞지 않거니와, 공산당이 통치하는 베트남의 경우에서 보듯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대개 우리의 인생에서 자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뿐입니다. 국가와 침대에 들 것도 아닌데 국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변태적 발상입니까? 하물며 그것이 어찌 의무로 강요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유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5·18 시민군처럼 자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유의 가치를 깨닫는 것과 나라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지,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강요하는 일이 아닙니다.
개인 자유실현 위해 국가 존재 공적인 의견의 표현 침해 안돼
둘째, 국가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아닌 한, 개인의 행위를 금지할 권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과연 무엇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독성 마약을 제조·판매하는 일이나 성을 사고파는 일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니, 시민적 토론과 합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금지되어서는 안 될 것은 공적인 일에 대해 의견을 표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시민의 침해될 수 없는 주권 행사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해온 국가,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글을 썼다고 인터넷 논객을 감옥에 가두는 국가 그리고 일제고사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다고 교사들을 해고하는 국가는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한 국가로서,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요, 마땅히 타도해야 할 국가입니다.
국가가 권력을 통해 금지해야 할 것은 개인의 주권 행사가 아니라 도리어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는 모든 유사권력들의 횡포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가 학생에게 야간자율학습을 강요한다면, 국가는 그런 학교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하여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만약 자본이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중소기업을 착취한다면, 그런 때 역시 국가는 지체 없이 개입하여 그런 유사권력에 대해 재갈을 물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학교가 학생과 교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교육의 자율성이고 자본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시장의 자율성이라 강변하면서 국가가 일관되게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유사권력의 편을 든다면, 이제 그런 국가는 허물고 새로 세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양보 필요할 때도 협박 대신 합당한 대가 줘야
셋째,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국익을 빙자해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 역시 국가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수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지역에서 아무리 많은 주민이 찬성한다 하더라도 반대하는 사람에게 재개발사업에 참여할 것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다수결의 원리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공적인 일에 적용되는 한에서만 정당성을 가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다수가 담합하여 소수를 약탈하는 범죄행위일 뿐입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기지로 쓰겠다고 대추리 주민들에게 집과 땅을 버리고 떠나라고 강요하거나, 해군기지를 만들겠다고 서귀포 강정리 주민들의 삶터를 빼앗을 권리는 국가에 없습니다. 물론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양보가 필요한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국가는 협박과 술수 대신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고 협상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 ‘전체 위한 일’ 가장 약자의 이익·행복 증진뿐
전체를 위하는 마음은 고귀하고 숭고하지만, 그 까닭은 전체가 무조건 개체보다 귀해서가 아니라 함석헌이 말했듯이 개인의 참된 자유가 오로지 전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요된 희생은 자유가 아니라 굴종일 뿐이니, 거기 고귀하고 숭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칸트가 말했듯이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인 까닭에, 사람들은 제 편한 대로 전체를 입에 올리는데, 대개 가짜를 들고 진짜 전체라 우깁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전체는 계량화된 숫자로 표현되거나, 더 나쁜 경우 사람들은 강자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이라 강변합니다. 그리하여 단지 다수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이 되고 강자를 위하는 것이 전체를 위하는 것으로 둔갑하는데, 그 결과 사람들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고, 강자를 위해 약자를 수탈하면서도, 이것이 도리어 국가와 민족 전체를 위한 일이라 믿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지금 이 나라는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경제, 언론, 교육 가릴 것 없이 총체적으로 강자를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제도적으로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단순히 정부가 아니라 국가를 통째로 바꾸어야 할 까닭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전체를 위한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전체 공동체 내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일 뿐입니다. 가장 약한 자에게 좋은 일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인류는 강자를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면서 그것을 진보라 믿었습니다. 이제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약하고 느린 자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울 때입니다. 사랑의 진보만이 참된 진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선생님의 지혜를 청하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