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연재물이다.  

 

(18) 데이비드 하비 David Harvey


1935년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지리학을 공부하고 196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브리스톨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해 1969년 미국 존스홉킨스대로 옮겼으며, 1987년 영국으로 돌아가 옥스퍼드대 지리학과의 석좌교수로 있다가 1993년 다시 존스홉킨스대로 복귀했다. 2001년 뉴욕시립대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재직 중이다. 실증주의 지리학에서 출발했으나 곧 마르크스 지리학으로 전환해 <사회정의와 도시>(1973), <자본의 한계>(1982) 등을 썼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1989)을 출간했으며, 자연환경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정의, 자연, 차이의 지리학>(1996), 자본주의 도시공간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모색으로 <자본의 공간>(2001)과 <희망의 공간>(2001)을 출간했고, 현실 문제에도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고 <신제국주의>(2003), <신자유주의>(2005), 그리고 최근에는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자유의 지리학>(2009)을 출간했다.

     

 

 

 

       

 

 

 

 
 

 하비는 최근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과정 속에서 초래된 도시 부동산 시장의 위기로 보았다. 상층부의 잉여자본이 도시 확충에 대대적으로 투입됐지만 중하위 계층 저임금 실수요자들의 구매력 부족과 신용 붕괴로 금융위기가 촉발된 것이다.



 

» 데이비드 하비. flickr.com(ID:lsyrepublic)
 

현대 사회에서 공간은 인간 삶의 터전이 아니라 자본축적을 위한 물적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특히 1970년대 서구 경제의 침체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의 논리에 따른 공간의 재구성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 금융위기의 세계화 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대안으로 판명되고 있다. 다른 한편,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새로운 사회공간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대안적 공간이 가능한가? 하비는 신자유주의의 타락한 유토피아주의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기보다, 진정한 유토피아적 꿈을 잃지 않고 새로운 희망의 공간을 만들어나가야 함을 역설한다.



공간 개념을 사회이론의 중심으로

공간은 흔히 텅 빈 공간 또는 사물을 담고 있는 그릇 정도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디에도 텅 빈 공간은 없다. 공간은 사물을 비워버리면 남게 되는 그릇이 아니다. 공간은 항상 사물들과 함께하며, 사물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재)구성된다. 마찬가지로 사물들은 공간(그리고 시간)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공간 속에서 (재)생성된다. 그동안 사회이론이나 철학에서 이러한 공간의 개념은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왔다. 하비가 진보적 사회이론에 기여한 점들 가운데 하나는 공간의 개념을 사회이론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하비는 사회적 과정과 공간적 형태 간 관계를 변증법적 관점에서 이론화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공간과 사회는 각각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상호 관련적 관계 속에서 그 특성을 부여받게 된다. 공간이나 장소는 단순히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통해 생산되고 재현된다. 자연환경 역시 그 자체로서 독립된 가치를 가지지 않으며, 항상 인간 생활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공간환경을 (재)생산하면서 또한 인간의 본질과 사회 구조도 (재)구성하게 된다.

 

 

 


“금융위기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공간 지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 곧 자본축적의 논리에 의해 (재)구성된다. 하비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은 일차적으로 상품 생산-소비 과정을 통해 순환하며, 이 과정에서 형성된 잉여가치를 축적해 사회적 부를 확대해 나간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달한 노동의 분업은 생산과 소비를 공간적으로 분리시키고, 자본의 축적 과정을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확장하는 한편, 이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부는 일정한 지역들로 집중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흔히 상품 생산의 과잉으로 과잉 축적의 위기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자본은 이러한 위기를 회피하기 위하여 도로나 공단, 주택 등 도시 건조환경의 건설에 투자를 확대하게 된다.

도시공간에 대한 투자를 통해 자본은 현재보다 미래에 발생할 수익을 앞당겨 현가화(예로, 토지의 지대나 은행의 이자와 같이)하여 이윤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용체계의 발달과 금융자본의 지나친 확대로 인해 부동산시장의 거품과 세계적 금융 공황을 포함한 새로운 위기 국면이 도래한다. 대규모 도시재생 사업 등과 같이 건조환경의 재편성과 이를 통한 축적 과정(하비는 이를 ‘확대재생산에 의한 축적’과 구분하여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고 한다)은 금융자본의 확대로 초래될 위기를 일시적으로 해소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환경의 재편과 ‘탈취에 의한 축적’은 지역 불균등 발전을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하면서, 결국 제국주의의 팽창과 제국들 간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

현 단계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특히 1970년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도입된 후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신자유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민영화와 탈규제와 같이 사적 소유의 확대와 자유시장의 확산을 통해 침체된 경제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 이 과정에서 세계경제의 성장은 회복되기보다 오히려 위축되었고, 개별 국가 내에서도 복지 지출의 축소로 양극화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하비에 의하면, 최근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위기와 이로 인한 전세계적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과정 속에서 초래된 도시 부동산시장의 위기로 이해된다. 곧 상층부의 잉여자본이 도시 건조환경의 확충에 대대적으로 투입되었지만, 실제 중하위 계층의 실수요자들은 저임금에 따른 구매력 부족과 이로 인한 신용의 붕괴로 금융위기가 촉발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희망의 공간으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특히 신자유주의적 공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전망을 가질 수 있는가?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은 흔히 모더니즘, 나아가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운동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하비에 의하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 간에는 차별성보다는 연속성이 더 두드러지며,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경제적 현실과의 직면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재현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으로서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전환 및 시공간적 변화, 자본축적을 가속화하기 위한 교통통신의 발달로 ‘시공간적 압축’ 과정 및 이의 재현이 이루어졌다. 하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하에서 강조되고 있는 장소의 정체성과 ‘차이’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이들은 공간의 구성에 대한 거시적 분석과 결합할 때만 의의를 가진다.

하비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공간을 극복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공간에 관한 철학적 의미와 역사적 발전 과정을 우선 다소 추상적으로 고찰한다. 그는 사회적 및 환경적 정의를 이론화하고자 하는 한편, 지리적 상상력 또는 ‘공간적 유희로서의 유토피아’를 사회적 관계, 도덕적 질서, 정치경제체제 등에 관하여 흥미로운 사고를 탐구하고 표현하기 위한 창의적 수단으로 강조한다. 다른 한편, 좀더 구체적으로 하비는 과거의 노동운동보다는 탈취에 의한 축적에 반대하는 다양한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한편,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다양한 자유와 권리의 개념들 가운데 어떤 것이 진정한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논쟁에서 그가 강조하는 ‘도시에 대한 권리’ 운동은 도시 공간에서 사회적 잉여의 생산, 이용 및 분배에 대한 통제권의 쟁취를 목적으로 한다.

 

 

  


최병두/대구대 교수·지리학


 




 

» 최병두/대구대 교수·지리학
 

최병두 교수는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지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87년 영국 리즈대에서 지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대구대 지리교육과에 재직하면서, 자본주의 도시공간과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의 공간과 환경>, <환경갈등과 불평등>, <근대적 공간의 한계>, <비판적 생태학과 환경정의> 등이 있으며, 데이비드 하비가 쓴 <사회정의와 도시>, <자본의 한계>, <신제국주의>, <신자유주의>, 마누엘 카스텔의 <정보도시>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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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의 진보의 재구성 기획이다.  정태인의 글이다.

 세계화의 조건은 자본시장 통제와 고정환율제 복귀  

정보 비대칭성’과 ‘가격의 경직성’이라는 현실 아래에서 시장은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가. 신케인스학파를 대표하는 스티글리츠 교수의 시장론과 경제 대안을 살펴본다. 

 




   
중국 베이징의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는 미국 버클리 대학의 조지 애컬로프, 스탠퍼드 대학의 마이크 스펜스,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의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였다. 스웨덴 왕립학술원은 이들의 수상 이유를 공식적으로 “정보 비대칭 상황에서의 시장 분석”이라고 밝혔다.  

 

 

 

 



시장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보 비대칭’이란 무엇인가. 스티글리츠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애컬로프의 1970년 논문 <레몬들의 시장>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애컬로프의 논문에서 ‘레몬’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형편없는 물건을 의미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비지떡’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물건이 레몬 혹은 비지떡이라는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에 있다. 중고차 시장을 예로 들어보면, 차를 팔려는 사람은 자신의 차량에 대한 정보(차의 성능, 결점 등)를 잘 알고 있지만, 사려는 사람은 그 정보를 잘 모른다. 이를 ‘정보 비대칭성’이라고 한다. 이런 정보 비대칭성 때문에, 불량한 차량을 가진 사람들은 중고차 시장에서 자신의 차를 팔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차량에 대한 ‘정보’를 매입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량한 성능의 차를 실제 가치보다 더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차를 가진 사람은 정보 비대칭성으로 제값을 받기 어렵기 때문에 중고차 시장에 차를 내놓지 않게 된다. 또한 중고차를 사려는 사람들은 ‘비지떡’에 불과한 중고차를 비싸게 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중고차 시장에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성능은 형편없는 ‘비지떡’들만 난무하고, 이를 구매자들은 외면하게 된다.

이런 정보 비대칭 상황과 관련해 스티글리츠는 이른바 스크리닝(scree ning) 이론을 개발했다. ‘스크리닝’은 정보를 가지지 못한 측이 거래 상대방의 정보를 캐내고 심사(screen)해서 정보 비대칭 상황을 완화하는 과정이다. 예컨대,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가지지 못한 차량 매입자는 매도자에게 “이 차를 450만원에 줄래요? 아니면 500만원 낼 테니 1년간 보증해줄래요?”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 경우, 품질에 자신 있는 매도자는 보증을 선택하겠지만, 자신 없는 매도자는 보증을 기피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매입자는 해당 차량의 정보에 접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현실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거나 시장이 있더라도 정보의 비대칭성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안 보이는 이유


그는 <사회주의는 어디로 가는가?>(1994)에서 자신의 이론을 꽤 대중적으로 정리한다. 경제학자들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를 시장이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지만 몇 가지는 ‘시장이 해결할 수 없는’ 예외로 인정한다는 것.

이런 예외 중 하나가 바로 ‘외부성’이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는 특정 경제 주체가 다른 사람에게 이득을 주면 그 대가를 받아야 하고, 피해를 주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대가를 주고받지 않으면서 이득과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외부성’이라고 한다. ‘시장 외부’의 사건인 것이다. 기업이 생산활동을 하면서 환경세 등 대가를 치르지 않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외부성’이 ‘예외’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스티글리츠는 세상이 이 같은 외부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당초 시장이 잘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는 폴 크루그먼 교수.

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행위마다 전부 시장을 만들 수도 없다. 시장을 만드는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스티글리츠는 시장에 의존하면 모든 게 다 잘되리라는 경제학자들, 특히 시장만능론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풍자한다. 동화에서 임금님의 옷이 보이지 않는 것은 옷이 없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없는 것은 그 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스티글리츠가 익숙해진 것은 그가 ‘IMF 위기’ 때 세계은행(IBRD) 부총재로 있으면서 한국에 유리한 얘기를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 정책이라든가 균형재정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이는 현재 ‘IMF 개혁론’의 핵심 논거이기도 하다). 우스운 것은 당시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이 오히려 IMF의 정책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IMF 재협상’ 주장이 나왔을 때 난리를 쳤던 바로 그 사람들과 그 언론들, 훗날 참여정부 초기에 대통령 당선자가 스티글리츠를 해외 자문단장으로 임명하려 하자 “월스트리트가 싫어한다”라며 반대했던 청와대 내 인사들이다.

스티글리츠는 어떤 경제에 위기가 왔을 때 그것이 ‘국가의 개입 때문’이라 예단하고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이론,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독단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는 오히려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 시장에 개입해서 제도를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에는 다수의 균형점이 존재하고, 이런 균형점 중에는 ‘나쁜 균형’도 ‘좋은 균형’도 있다. 그러므로 경제 상황을 전자에서 후자로 옮기는 제도를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스티글리츠는 제도경제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동아시아 경제를 고저축-고부채-고성장이 결합된 모델로 봤다(<동아시아의 기적>, 1993). 반면 IMF가 추구하는 모델은 저저축-저부채-저성장 모델이며 지금 한국에 구현되어 있다. 스티글리츠는 IMF가 왜 더 나쁜 모델로 가도록 강요하는지 비판한다(<동아시아의 기적을 다시 생각한다>, 2001).
특히 동아시아의 성장이 생산성 향상 없이 단지 자본을 퍼부어 이룩된 것이라는 크루그먼의 비판과 그 기초인 ‘총요소생산성 이론’을 “근거 없다”라고 비판했다. 스티글리츠는, 크루그먼 등이 의존한 계량경제학적 방법이란 서울부터 부산까지의 거리를 서울에서 광주까지 거리와 부산에서 광주까지 거리의 차이로 계산하는 것과 같다고 조롱한다.


   
1997년 말, 임창렬 경제부총리(가운데)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오른쪽)가 캉드쉬 IMF 총재(왼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IMF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가 ‘끼리끼리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는 크루그먼의 비난에 대해서는 “부패라는 면에서 미국이 한국보다 더 낫다는 근거가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결국 엔론 사태 때 크루그먼은 미국도 ‘끼리끼리 자본주의’라며 반성했다.

특히 스티글리츠는 한국의 위기를 무분별한 개방으로 인해 무책임한 국제 금융자본과 재벌이 합작한 결과로 설명한다. 그는 새로운 균형으로 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바로 그것이 의사결정의 주체까지 바꾸는 ‘심도 있는 개혁(deep reform)’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30년간에 걸친 그의 이론적·실천적 역정을 가장 대중적으로 소개한 것이 <세계화, 그 불만의 뿌리>(2005)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스티글리츠의 대중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문제든, 동아시아 문제든 IMF는 엉터리 이론에 기초한 만병통치약을 파는 돌팔이였다. 더구나 스티글리츠는 세계은행 부총재를 하면서 정책 방향을 놓고 IMF와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가 보기에 IMF는 잘못된 이론, 미국과 금융자본의 일방적 편들기, 밀실에서의 정책 결정이라는 온갖 오류의 집합체이다.

IMF와 세계화 비판

그러나 그가 세계화 자체를 부정하거나 국제기구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세계화는 필연적이고 또 이 흐름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 세계화가 전 인류의 복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세계화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IMF와 같은 국제기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또 세계경제 차원에서는 각국의 이익 추구가 전체의 실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마치 시장의 실패를 국가가 교정할 수 있다는 케인스의 주장이 국제적 차원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스티글리츠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국제적 케인스주의자로 분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국제기구가 성공하려면 최소한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특히 IMF나 세계은행의 결정에 생사가 좌우되는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 요즘 논의되는 IMF 의결권의 조정이 그것이다.

케인스는 전후에 국제청산동맹안(케인스 플랜)을 내놓았다. 그가 새로운 초국적 준비통화로 제안한 방코르는 기축통화 발행국이 다른 나라에 대해 누리는 비대칭적 이익(시뇨리지)을 원천 봉쇄할 것이었다.
동시에 케인스는 ‘청산동맹은행’(결국 IMF로 귀결되었지만)을 통해 각국이 상호간에 경상수지의 잔액만 청산하면 되는 다자간 시스템을 채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은 미국에 의해 거부됐고 기진맥진한 케인스는 1946년 4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스티글리츠의 <국제통화개혁론>(2007)은 케인스의 핵심을 현대판으로 번안한 것이다.

현재 세계적 금융위기의 배후에는,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2007년 현재 미국 GDP의 6%)라는 글로벌 불균형이 도사리고 있다. 기축통화를 가진 미국은 막대한 특권(시뇨리지)을 누려왔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소비재를 많이 구입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해왔다. 그러나 경상수지 흑자국(미국에 소비재를 수출한)의 외환보유고는 미국 재무성 증권 구입에 쓰이고 결국 달러는 미국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각 경제주체(국가·주정부·가계 등)는 산더미 같은 빚을 지게 되었다.

세계 금융위기와 국제통화 체제 개혁


이 같은 글로벌 불균형은 ‘금융 붕괴의 공포 때문에 유지되는 균형(balance on financial terror)’이기도 하다. 즉,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무너지면 세계적 금융공황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유지되는 기묘한 균형인 것이다. 세계 각국이 달러 가치 하락 때문에 재무성 증권을 팔기 시작한다면 순식간에 붕괴될(금융 테러를 감수하고서라도) 위태로운 균형이기도 하다.

스티글리츠는 <국제통화개혁론>에서 케인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시장의 통제와 관리·고정환율제를 주장했다. 이는 월스트리트 등 세계적 금융 대자본의 이익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구상이 제도화되지 않는다면 금융위기가 불가피하다고 스티글리츠는 역설했다. 이 구상은 금융위기를 맞아 유엔이 스티글리츠에게 맡긴 ‘전문가위원회 제안’(2009)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지만 G20은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스티글리츠는 미시경제학에서 거시경제학 그리고 환경문제까지 다루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이다. 그는 신케인스주의자라 분류되지만 그가 다루는 분야는 어느새 케인스를 넘어섰다. 그는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의 미래를 본다. 그는 한국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추구하다 한·미 FTA까지 가버린 것을 한탄한 바 있는데, 이는 금융위기를 맞은 지금 다시 되돌아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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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8-2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시사인에서 연재하는 진보의 재구성을 퍼온다. 첫번째가 미국식 사회민주주의이다.  

탈산업화의 대안은 시장 역동성을 믿는 미국형 사민주의 

 

미국 민주당이 1990년대 초에 성취한 사상적 변혁은 한국의 진보 세력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 미국 민주당이 한 일은 서구세계 진보적 대중정당들의 전통적 사상을 뒤엎은 것이었다. 복지와 시장, 국가에 대한 기존 관념을 전복함으로써 1992년 빌 클린턴을 대통령에 당선시켜 공화당의 12년 지배를 끝장냈다. 이런 사상적 변혁 이후의 미국 민주당을 ‘신민주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금융과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 미국의 주력산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때였다.

신민주당이 변혁한 것은 자신과 미국만이 아니었다. 1990년대 하반기에는 미국과 다른 경제 시스템을 영위하는 동아시아 국가와 유럽 국가들을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에 포섭했다. 당시 한국에서 집권한 진보 세력은 신민주당의 사상을 적극 흡수하기도 했다. 그만큼 위력적인 사상이었다.

신민주당은 시장의 역동성이 진보적 과제와 결합될 수 있음을 굳게 믿었다. 이에 따라 시장을 규제해서

   
이찬근 인천대 교수.

소생산자와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왜곡하지 않는 수단(근로장려세제 등)으로 서민을 직접 지원하려 했다. 또한 기업과 경제성장을 노골적으로 중시했다. 민주당의 존 케리 상원의원 같은 사람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미워하면서 일자리를 사랑할 수는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시각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능력과 책임을 강조하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행정과 공적 사업을 민간에 이양하는 권력이양(empowerment) 정책이 실시되었다. 서민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이들이 자기 사업을 통해 자활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설계되었다.

한국에서도 이 흐름은 김대중 시대의 생산적 복지, 노무현 시대의 사회적 투자국가론 등으로 이어졌다. 금융 및 서비스 산업의 성장동력화, 참여정부의 금융허브론, 이명박 정부의 금융중심지론도 신민주당의 영향을 일정하게 반영한다.

이러한 미국 신민주당 사상의 배경 및 전망과 관련해 최근 지구화라는 맥락 속에서 클린턴·오바마 정책을 연구 중인 인천대 이찬근 교수를 만났다.


미국 신민주당의 사상 역시 소외층 지원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미국형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유럽 사민주의 정당의 경우, 지구화 흐름에서 이탈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구화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지구화에 따른 현상들을 일정 정도 정치와 사회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고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에 반해 미국 신민주당은 지구화를 ‘포스’(force), 즉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인식한다. 신민주당의 여러 정책에는, 이런 ‘포스’에 맞설 것이 아니라 올라타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한 이 흐름을 주도한 빌 클린턴, 로버트 라이시(전 노동장관) 등은 지구화와 기술 혁신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지구화에 대한 견해 차이가 대안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인가.

로버트 라이시, 진 스펄링 등 미국 신민주당 이론가들은 지구화의 불가피성을 일단 인정하고 이에 대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 아른 던컨 시카고 공립학교 교육감(맨 오른쪽) 등이 시카고의 한 공립학교에서 흑인 어린이들과 담소하고 있다.

대응을 고민한다. 탈산업화라는 현실에 기반해서 국가의 구실을 고민하고, 이 영역에서 보수와 진보가 대안으로 다투자는 거다. 유럽 사민주의가 ‘복지를 지키자’고 주장한다면, 미국형 사민주의는 복지의 개념을 ‘개인의 위험 관리’에서 ‘개인 능력의 향상’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탈산업화는 어떤 시대인가.

로버트 라이시에 따르면, 미국 자본주의 혹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추세는 지구화다. 대다수 대기업은 국적이 불분명한 글로벌 기업이다. 이들은 원자재, 중간재(하청기업), 노동자 등을 국내가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선택한다. 미국 기업이 잘나간다고 미국인의 일자리가 보장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자본과 노동이 국민경제 내에서 공생하며 한 배를 타던 시대는 지나갔다. 또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제조업과 서비스업에서 숙련도가 낮은 반복적 노동이 사라지고 있다. 이 부문의 저숙련 노동자들은 기존 일자리를 잃고 소매 상점, 레스토랑, 호텔, 노인이나 어린이 돌보기 등 대인 서비스업(사람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서비스업)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런 대인 서비스업은 자동화가 불가능하고 글로벌 경쟁에 직접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일자리 수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급여 수준이 너무 낮아서 사회적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왼쪽)과 로버트 라이시 전 노동부 장관.

으로 일자리 불안과 양극화를 초래한다. 이처럼 탈산업화 시대에는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반면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양극화가 심화된다.

노동과 자본 간 사회적 대타협에 기반한 기존 사회민주주의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인가.

그렇다. 기존 사민주의는 산업화 시대의 대안이었을 뿐이다. 산업화 시대는 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면서 거대한 공장을 운영했고, 그 공장 내에는 비슷한 작업을 수행하는 수많은 노동자가 근무했다. 노동자들은 단결하기 쉬웠고, 단결하면 자본에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또한 기업들의 생산거점도 국가 내에 있었다. 그래서 국가 단위에서 자본은 노동과 타협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 모두 사라졌다.

이런 현실에 대한 미국 신민주당의 대안은 무엇인가.
바로 교육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교육개혁을 강조하는 이유다. 오바마는 ‘미국은 교육에서 승리해야 다른 나라들을 앞설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 경쟁력 강화’가 아니라 ‘교육 강화’인가. 특유의 세계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공산권 붕괴 이후 30억여 명 이상이 세계 노동시장에 들어왔다. 이에 더해 무역과 투자도 완전히 개방

   
진 스펄링 미국 재무부 고문.

되었다. 세계 자본의 처지에서는 글로벌 차원에서 노동자 40억명을 마음대로 활용하면서 생산을 조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새로운 고부가가치 비즈니스도 금융과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이다. 지구화로 인해, 어느 나라에 살든 글로벌 차원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노동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 개인은 높은 보수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인식에 기반하면, 결국 대안은 고부가가치 노동력을 자국 내에 많이 육성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교육을 강조한다. 교육을 통해 고부가가치 인력을 많이 키워내자는 것이다.

교육의 강화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인가.
로버트 라이시는 일자리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최상위에는 고도의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지식형·문제해결형 일자리가 있다. 두 번째는 산업화 시대에 전형적인, 대규모 사업장에서 반복 노동을 하는 일자리다. 세 번째는 대인 서비스이다. 그런데 두 번째는 파괴되었고, 세 번째는 늘어나지만 임금 수준이 매우 낮다. 결국 첫 번째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국가의 구실이고 이를 담당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에는 기득권 해체의 의미도 있다. 공교육을 강화해서 저소득층 자제들도 노력에 따라 고부가가치 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일부 사립학교와 부촌의 공립학교만 우수하다. 그런데 나머지 학교의 수준을 끌어올려 고부가가치 인력의 풀을 넓히자고 한다. 부모의 조건에 자식이 구애받지 않도록 하자는, 교육이 갖는 엄청나게 평등한 함의가 여기 있다.

그러나 클린턴 시대의 미국도 그리 평등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이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다. 클린턴 때는 경제 환경이 괜찮았다. 그래서 양극화의 본질적 대책인 ‘교육에 대한 역사적 투자’를 게을리 했다. 탈산업화와 양극화에 월스트리트는 금융 버블을 통해 자산가격을 올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미국 시민들의 실질소득 하락을 자산가격 상승으로 보완한 것이다.


   

ⓒREX미국 신민주당의 복지정책은 ‘개인’의 자활을 지원하는 것이다. 위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홈리스 천막촌.


그러나 오바마 정부 역시 이런 월스트리트 방식을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육정책이 핵심이지만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분간 소비를 살리는 차원에서 금융 버블을 통해 자산가치를 높이는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다만 오바마 정부는 금융을 청정에너지 기술 같은 녹색산업에 대한 생산적 투자로 유도하면서 이에 교육개혁을 결합하려 할 것이다.

신민주당적 관점에서 한국 정부를 평가한다면.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시대로 한정해서 보면, 정치인이나 지식인 사회에서나 탈산업화 시대라는 자각이 없다. 양극화에 대한 인식만 있다. 그래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 김대중 정부는 IMF나 미국의 압력으로 시장 개혁 및 전면 개방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으나 이러한 조처가 탈산업화로 가는 문을 연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이때 탈산업화가 15년 당겨졌다. 노무현 정부는 양극화를 물려받아 많은 고민을 했다. 동반성장 전략을 세우기도 했으나 기득권자들과의 싸움에 너무 에너지를 소진했다. 사회적 대타협의 마지막 기회였으나 이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보수라고 하나 보수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다. 그냥 ‘경영자 정부’로 보인다. 경영자로서 거시적 환경 변화에 무조건 적응한다는 방침이지 ‘내가 노선을 깔겠다’는 것이 없다. 그래서 불분명하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도 교육개혁을 제시하고 있으나 방향이 틀렸다. 교육개혁의 목표는 탈산업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학생들의 지적 능력(skill)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게 교육개혁은 ‘사교육 비용 줄이기’의 일환일 뿐이다. 이는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 이 기사와 관련해 참조할 도서로는 로버트 라이시의 <부유한 노예>(김영사), <슈퍼자본주의>(김영사), <국가의 일>(까치글방)과 진 스펄링의 <성장 친화형 진보>(미들하우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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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글을 가져왔다. 스피노자의 쾌활에 대한 생각이다.  한겨레21에서 퍼왔다.

 

지난호에 언급한 발리의 일화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한 대목과 겹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비슷하게 쓰이는 두 단어, ‘도덕’과 ‘윤리학’을 구분해야 한다. 들뢰즈의 간단명료한 정식을 빌리자면, “도덕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관련되고, 윤리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도덕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선험적으로 지정해주는 반면, 윤리학과 관련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도덕을 형성하지만, 사회적 규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은 윤리학을 구성한다.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 발리, 고원, 쾌활함 2.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종교적 명령이 없는 실천 철학이다. 윤리학은 선과 악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역량의 증감, 존재의 확장을 예민하게 느끼길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역량이 증대될 때 기쁨을 느끼고, 축소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행동의 기준을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이전시키기를 제안한다.

스피노자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정도 교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좀더 나아가보자. 아무래도 기쁨과 슬픔이라는 기준은 분명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기쁨의 추구는 쉽게 쾌락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닐까? 간단한 예로 마약 중독에 대해 생각해보자. 마약이 주는 쾌감을 연장하기 위해 점점 더 중독될 때, 그것이 하여간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일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이 종교나 법으로 금지됐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차적 구분을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다시 하위 단위로 구분한다. 기쁨은 쾌활함(cheerfulness)과 쾌감(pleasure)으로, 슬픔은 아픔(pain)과 우울함(melancholy)으로 나누어진다. 이 구분의 기준은 신체가 변용되는 범위다. 즉, 쾌감과 아픔은 신체의 일부분만 변용될 때이고, 쾌활함과 우울함은 신체의 전체가 변용될 때이다. 마약은 신체의 일부분에만 제한적으로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쾌감일 뿐 충만한 기쁨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쾌감과 아픔에 이중적인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쾌감은 기쁨에 속하기는 하지만 나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소적인 쾌감을 주는 사물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픔은 슬픔에 속하기는 하지만 좋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집착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수 있을 때 그렇다. 그러니까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시간 안에서 봤을 때, 아픔은 쾌활함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윤리학의 목표는 기쁨의 형성이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해, 전체적이고 지속적인 기쁨, 즉 쾌활함의 형성이다.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서


발리의 일화에서 아이의 불만족은 교육적 효과가 있는 아픔에 상응한다. 아이는 부모의 신중한 상호작용 안에서 쾌활함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베이트슨의 관찰이 정확하다면, 이러한 문화 형식이 몇몇 사람의 특별한 지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 안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발리의 음악 또한 점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배제하고, 같은 모티브가 변주되고 반복된다. 발리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언젠가 한국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멜로디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아,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였던가. 시작도 끝도 없이 완만하게 진행되는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최근 10여 년간 절정의 쾌감을 추구하며 급속하게 변형돼왔다는 점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렬하고도 평평하게 지속되는 쾌활함을 유지하는 법은 ‘잃어버린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


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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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독특한 인물인 듯하지만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 인물이었는데 .... 

 

(17)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수사학과와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유대계 백인 레즈비언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논쟁적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이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으로 예일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0년 <젠더 트러블>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 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 번역서로는 <안티고네의 주장>,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젠더 트러블>, <불확실한 삶>, <누가 민족 국가를 노래하는가> 등이 있다.

 



 

» 주디스 버틀러
 


헤겔 철학에 대한 연구로 주저를 시작한 주디스 버틀러는 다양한 이론적 배경과 현란한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난해한 글쓰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버틀러는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주체형성 이론, 폴 드 망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의 영향을 받았고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과 (역)담론이론을 주요한 방법론적 토대로 삼고 있다.

버틀러가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주요 저작은 무엇보다도 <젠더 트러블>(1990)이다. 이 책은 기존 페미니즘이나 철학에 대해 도발적인 논쟁과 문제를 제기하면서 학계에 트러블을 일으켰고 세계적으로 번역 출간되어 1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인기를 누렸다. 또한 인터넷상에 ‘주디’라는 국제 팬진까지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만들었다
 

   

  

 

 

 

<젠더 트러블>은 버틀러의 ‘젠더 계보학’이 표면화되는 저작이다. 젠더는 불안정한 사회적 구성물이므로, 공통된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페미니즘의 주체라는 주장은 특정한 정치권력이 작용한 결과임을 밝히려는 작업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정치학에 여성이라는 주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여성 주체가 있어야 여성 해방이라는 정치학이 있다는 전제에 있어서 그 ‘여성’은 확고한 본질이 아닌 일시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성의 정치학의 정치 주체가 여성이라면, 이때 성을 지칭하는 것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이 섹스, 후천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교육받은 성이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으로 말해진다. 쉽게 말해 우리는 태어날 때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인 몸을 가지고 태어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학습하면서, 남녀 간의 이성애를 당연한 욕망으로 여기며 자란다. 그런데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특성도, 섹슈얼리티라는 원초적인 욕망도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인식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모두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젠더’로 수렴되며 규범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가 불가능해진다.

계보학은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사실상 어떤 것의 결과임을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방법론이다. 계보학은 원래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논의를 계승한 푸코의 비평적 접근방식으로서 권력 효과나 담론의 구성물을 마치 근본 원인이자 전제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배타적 실천을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논의 양식이다. 공통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의 사법적 구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에 불과하며 당면한 ‘재현 정치학’의 결과일 뿐이다. 이는 사실상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안정된 여성성을 확보한 것으로 전제되는 생물학적 여성을 페미니즘의 법적 주체로 생산하려는 특정한 정치적 작용이기 때문에, 특정한 권력의 역학 관계 속에서 조작되고 구성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이 여성 주체에서 복장 전환자, 젠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자, 성적 소수자 등은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젠더 계보학은 소수자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그것과의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려는 퀴어 이론의 현실적 정치성과 맞닿아 있다.


버틀러는 9·11 사건 이후 국가가 가져온 폭력의 악순환과 현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여러 담론에 대해서도 새로운 규범을 제시해야 할 윤리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심은 이제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확대됐다.


<젠더 트러블> 이후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1993), <권력의 심리 상태>(1997), <격분하기 쉬운 말>(1997) 등을 출간하면서 젠더 수행성 논의를 육체, 권력, 언어의 문제로 구체화한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2000)은 우연적 토대 위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를 면밀히 고찰했으며, <안티고네의 주장>(2000)은 희랍 비극의 고전적 여성 영웅 안티고네를 친족 교란과 젠더 역전의 급진적 퀴어 주체로 재해석했다.

주목할 점은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3) 이후 <젠더 허물기>(2004), <스스로를 말하기>(2005),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2007) 등의 후기작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각의 변화이다. 버틀러는 미국이 겪은 대참사였던 9·11 사건 이후 국가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이라크를 공격한 것은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또다른 폭력을 동원하는 악순환을 가져왔다고 본다. 그리고 대테러 전쟁을 주창하면서 현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여러 담론에 대해서도 새로운 규범을 제시해야 할 윤리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관심은 이제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아랍인이나 유대인과 같은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확대되며, 특정한 삶만을 살 수 있는 삶으로 제한하고 정당화하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극복하여 또다른 폭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애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곧 가멸적 육체의 취약성과 이질성에 대해 사유하고 그 애도 상태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생산할 수 있는 정치적·윤리적 행위에 주목하는 것이다. 윤리적 가능성은 나의 내부에 내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레비나스의 ‘얼굴’처럼 재현의 한계를 드러내는 타자성이, 곧 자신의 실패를 드러내는 재현이 윤리적 재현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가야트리 스피박과의 대담집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에서 버틀러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불법 체류자나 난민의 관점에서는 국가 없음이 단순한 국적의 누락이 아니라 권력의 장 내부에서 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하는 적극적인 방식이 된다고 주장한다. ‘국가 없음’은 한 국가의 권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저 벗어난 상태가 아니라, 권력이 적극적으로 특정한 사람을 배제하는 현실이다. 실제로 국가에서 추방된 사람이나 추방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독일의 이주노동자, 팔레스타인 점령지구의 사람들,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의 권리 박탈은 보편적 주체의 양상이 아니라 특정 권력이 복잡한 방식으로 개입된 역사적 상황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삶’도 사실상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조건이자 주권 권력 이면의 한 양상이기보다는, 특정한 법제적 권력에 의해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의 겪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버틀러의 논의는 전기의 젠더 존재론에 대한 계보학적이고 이론적인 통찰에서, 후기의 실천적 정치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것이 단순히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의 문제까지 포괄하면서 이 사회 속에서 인식 가능한, 또한 생존 가능한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문제로 논의를 확대하고 있는 버틀러의 타자의 윤리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조현준/경희대 객원교수·영문학

 

 

 

 

 



 

» 조현준/경희대 객원교수·영문학
 


조현준은 경희대학교 영문학과,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주디스 버틀러의 환상적 젠더 정체성과 안젤라 카터의 ‘서커스의 밤’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과 경희대 교양학부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프랑켄슈타인’에 나타난 ‘낯선 두려움’-서사 구조, 응시, 비체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 <젠더 계보학과 여성 없는 페미니즘-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등이 있고, <안티고네의 주장>, <젠더 트러블>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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