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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민음사 모던클래식
160페이지 정도 중편소설
"읽다가 그만두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두 번 읽을 수 있도록" 분량을 조절했다는 작가...
덕분에 읽고 또 읽은 부분이 있다.
파키스탄 청년 찬게즈가 한 미국인에게 맛있는 차와 음식을 대접한다.
그러면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를 다니고, 언더우드샘슨 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일을 하고, 에리카 라는 여자와 사랑을 한 얘기를 해준다.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찬게즈 혼자의 얘기지만 말솜씨가 꽤 훌륭하여 다소 딱딱한 제목과는 달리... 술술 잘 읽힌다.
젠틀하면서도 어딘가 압도적인 찬게즈의 그 태도는 마음에 들었다. 미국인이 아닌, 파키스탄인 찬게즈의 그 당당함 말이다.
품위가 허락하는 한, 더 미국인처럼 행동하고 또 말하려 했던 거죠. 우리와 같이 일하는 필리핀인들은 나의 미국인 동료들을 우러러보고 그들을 글로벌 비즈니스의 상위 계층이라고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들이 나도 그렇게 존경해주기를 바랐어요.
... 그렇다면 어째서 나의 일부가 미국이 해를 입는 걸 보고 싶어 했을까요? 당시에는 몰랐어요. 다만 그것이 내 동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은 알았어요. 나는 그런 감정을 최대한 숨기려고 했어요. 그날 저녁, 우리 팀원들이 짐의 방에 모였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충격 받고 괴로워하는 시늉을 했어요.
나는 그들에게, 미국처럼 다른 나라 시민들을 죽이려 하고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나라는 없다고 말했어요.
찬게즈가 자신의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낡음에 처음엔 수치스러워하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오래 지속되어 온 내 집의 장엄함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개성과 독특한 매력을 음미할 수 있게 된 거죠. 무굴인들의 세밀화와 고대 카펫이 응접실을 우아하게 만들고, 훌륭한 도서관이 베란다에 인접해 있었어요. 가난해진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역사와 더불어 풍요로운 것이었어요.
이 때...
나는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생각했고,
왜 늘 새것으로 무장하고 돈으로 포장된 뉴욕이라는 도시를 최고라고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왜 미국은 최상의 의미를 가지려고 할까.
개성도, 역사도, 전통도 미미하니 그걸 자본주의 앞에서 모두 낡고 불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우리도 미국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지혜로운 조상들이 있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색깔들이 있었다.
많은 일을 겪으면서 때론 훼손되고 퇴색됐지만 어디에서도 자부심을 느낄 만큼 당당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일제시대와 6.25 를 겪으면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그 영향력에서 자유롭진 않지만 우리가 그 규모와 자본력, 힘으로 그들에게 늘 굴복하고 초라해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 그건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들을 따라하고, 우리만의 색을 잃는 회색빛 도시에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찬게즈가 9.11 테러를 보고 미소를 지었을 때- 과연 찬게즈만 그랬을까?
찬게즈만 그랬던 게 아니라면
미국도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그 절대적 힘을 과연 올바르게 잘 썼는지를...
조금 더럽고 오래됐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를...
에리카와의 사랑도 여운이 많이 남는다. 그가 에리카를 떠올리고, 사랑했던 그 순간들은 다 낭만적이고 멋있었다.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수많은 에리카와 찬게즈가
'싸지만 맛있는 저녁을 왕립사원 옆 노천에서 달빛을 받으며 먹고'... 얘기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결말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찬게즈와 미국인 때문에 스릴러 느낌도 받을 수 있고,
비키니를 벗은 에리카를 보게 된 찬게즈의 그 수줍은 헬로... 는 진하고 달달한 멜로..
그리고 9.11 이후 예니체리가 된 것 같다고 느낀 찬게즈의 방황과 갈등은 날카롭고 서늘한 느낌을 준다.
모신 하미드, 라는 이 작가의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이 전작도, 다음 작품도 챙겨읽고 싶게 만든다.
모두에게 강추하고 싶은 소설 ^ ^
이 책을 알고 읽게 되서 정말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