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문학동네 청소년 27
유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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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나를 잠시 잊고 싶어서 수원이와 수길이가 이산가족상봉 놀이를 하듯이

나도 가끔은 전혀 다른 나를 상상해 볼 때가 있다.

환상은 늘 환상일 뿐이고

현실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삶의 한계. 그리고 삶의 철저한 민낯을 난 언제쯤 깨달았을까.

 

누가 붙잡아 앉혀놓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세상이란 이런거구나 알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

도살장 안에 초원과 카우보이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의 수길이만큼이나 나는 한 때 식욕도, 말도 잃었을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다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무심해지고 무언가를 앞 뒤 생각없이 탐하게 되었을까.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

수원이는 서울 변두리 도살장 근처에 사는 6학년 여자아이다. 때는 86년...

비슷하게 못 배우고 못 살았을 이웃들과

그래도 도토리 키재기 하듯 그 속에서도 조금 더 잘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보다 못난 나를 부끄러워하면서 수원이는 그 또래 여자애들보다 조금은 성숙한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중성을 혼란스러워했다.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길이와 수원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진 것보다 못 가진 게 더 많아서 오히려 풍부한 감성과 상상력이 넘치던 그 아이들의 모습을 지금 결핍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느낄지 몹시 궁금해졌다.

소가 도살 당하는 장면이 상상되고 개발 때문에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추억이 서린 아카시아 나무가 쓰러지는 풍경에 계속 마음 한 켠이 무거운 건 내가 아직 순진하다는걸까.

소설 속 수원이는 동생에게 거짓말을 해 가면서, 마지막으로 꽃 피울 아카시아 나무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그렇게 죽음과 헤어짐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삶은 거기에서부터 시작이었다. 감정에 가슴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점점 불편한 것들에 대해 눈을 감고 마음을 닫았다. 

어쩌면 선지를 못 먹고 혼자 숲속으로 숨은 상희보다 수원이가 더 성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거짓말에 무뎌지고,  먹고 사는 일에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걸까. ​

 

청소년 도서라고는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소설을 읽게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멋모르던 시절에 읽었다면 그냥 그렇구나 넘겼겠지만

 

지금 읽어보니 가난하지만 따뜻한 그 마을이 아련하게 느껴지고, 수원-수길이 남매가 너무 귀엽게 느껴지고 ​나는 어떻게 성장했던가 되돌아볼 수 있게 돼서 단숨에 읽었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다.

나는 이제 세상에 없는 어떤 걸 꿈꿀 수가 없다.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다 옥상에서 도살장을 보게 된 수길이처럼 막막하고 두려울 때가 많다. ​

당연히 사람이 현실적이어야지! 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순수함을 잃은 서글픔과 무뎌진 마음을 되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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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그리울 때 보라 - 책을 부르는 책 책과 책임 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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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 이전에 세상 곳곳에 호기심을 가지고 눈을 반짝이는 작가.

김탁환의 산문집을 이 가을에 읽다보니

올 가을, 겨울은 읽어야 될 책들로 넘쳐나겠구나 싶습니다.

 

굳이 작가와 대면하지 않아도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산문집의 매력일텐데요.

이 책엔 그가 개인적으로 참담함을 느꼈다던 2014년의 이야기부터 그의 생각과 추천해주고 싶은 책들을 함께 모아놓았습니다.

책 제목 아비 그리울 때 보라 , 의 애틋함과 독특한 책 표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쫙 펼치면 그가 소개했던 책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책상 앞에 붙여 놓고 필독서로 삼아도 좋을 듯 합니다.

 

->이 중 제가 접한 책이 별로 없어서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몇 권은 장바구니속에서 결제를 기다리고 있네요.

 

 아마 글을 좋아하고, 작가의 꿈을 가진 사람 중에서 2014년을 마음 편히 보낸 분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던 진도의 봄을 작가님도 아파하고 함께 분노해주셔서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  를 언급하셨습니다.

또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그의 슬픔과 기쁨> 도 소개해주셨는데

제발 인간이 되자, 인간다운 인간이 되자 라는 메시지가 강합니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를 정작 받아들이고 느껴야 할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걸까요.   


-> 아, 내가 이렇게 무식하고 무관심하고 바보스럽게 살았구나, 를 처절하게 느끼게 되는 <그의 슬픔과 기쁨> 이라는 책을 덕분에 바로 읽게 됐는데 새벽 늦게까지 읽다가 결국 악몽을 꿨습니다.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두 장 내외의 짧은 산문 속에 내가 미쳐 보지 못했던 세계와 알지 못했던 책을  계속해서 만난다는 경험이 저에겐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습니다.

 작가님의 생각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다정하게, 때론 아프게 다가오는데 그 설득력이 무섭습니다. 

 

늘 한 곳에서, 한 가지 일만 바라보고 헤드라인 뉴스에만 눈길을 주던 생활에 익숙한 분이라면 큰 자극이 될 것 같습니다.

내 발로 걸어야 할 땅이 이렇게나 많고, 내 관심이 필요한 곳이 이렇게도 많고, 내 생각을 키워줄 훌륭한 책이 지금도 어디선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것...

계절도 딱 움직이기 좋은 것 같습니다. 리심의 삶을 따라 파리를 헤매던 작가만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이 저에게도 오길 바라며 어디로 어떤 책을 갖고 떠나야 할지 

벌써부터 마음이 분주하고 설렙니다.

 

 불안과 매혹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불안도 사라지고 매혹도 없는 일상이 백배는 더 위험하다. 미래의 안락을 정해두고 현재를 단지 그곳으로 가는 수단쯤으로 파악하는 삶이 천배는 더 끔찍하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언제나 첫 마음으로 돌아가서 매혹에 떨고 불안에 잠길 일이다.

(불안과 매혹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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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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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가 내 개인적 삶에 계속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도 조금은 역겨웠다. (p.142)

유럽, 그 중에서 프랑스에서 선거를 통해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면?


이 책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남자, 대학교수 프랑수아이다.

만약에 여자가 화자였다면 어떤 식으로 소설이 갔을지 잘 모르겠다.

너무나 마초적이라는 평가를 본 것 같은데 왜냐하면 지적능력이 있는 남자가 이슬람 정권 안에서 산다는 건 그의 마지막 대사처럼 '후회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식사를 위한 요리 잘하는 후덕한 부인과, 밤의 쾌락을 위한 어린 첩을 몇 명 둬도 아무렇지 않을테니 금방 권태를 느끼는 그에겐 나쁘지 않을것이다.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면 높은 연봉의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고, 여학생들의 선망의 시선은 덤이다.


철저한 남성중심 사회에서 의무교육은 초등학교까지로만 제한되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막히니 가시적인 실업율은 현저하게 내려간다. 거기다 석유강국의 자금 지원으로 인한 경기 활성화.

어느 연회장에 가도 여자를 볼 수 없다.

기득권 남자들이 이슬람 정권으로 이끄는 세상이 어떨지, 이 소설로 처음 상상해보았고 르디제가 이슬람 세계를 합리화 시키면 시킬수록 이 소설의 정체를 생각해보게 됐다.

 ​심지어 우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느꼈다가 중국 등 아시아까지 거론할 때의 그 섬뜩함은 소설 속에서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이다.

여자가 읽은 <복종> 은 그 어떤 소설 속의 가상현실보다 끔찍했던 것 같다. 온 몸을 시커먼 천으로 둘둘 싸매고 중매쟁이를 통해 남자들의 선택을 기다려야만 한다.

집이 부자가 아닌 이상 수준 높은 교육을 바랄수도 없고

종교와 정치가 설정해놓은 이상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들 때.

어렸을 때부터 세뇌되어있지 않아서일까...

프랑수아가 펼쳐놓은 그 세계는 솔직히 이슬람 세계에 대해 우호적일 수 없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위한 유일한 해답이라는 듯 자신만만해 하던 그들의 태도는 정말 픽션일까, 아니면 우리가 언젠가 지켜볼지도 모를 일일까.

내가 흥미롭게 봤던 건 이 모든 게 선거라는 민주주의 절차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 무엇이 이슬람 정권에 '복종' 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면서 합리화 시킬 것인지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없어서인지 종교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나서서 세상을 휘두르려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다. 

종교는 종교로 남아 한 인간이 좌절에 빠졌을 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남길 바라지 이익집단과 손을 잡고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개인의 개성을 짓밟아버리는 게 과연 옳은것인가 싶었다.

돈과 종교적 세뇌와 힘...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아니기에

그런데 그 배경이 유럽 중에서 프랑스라는 강대국이었기에 만만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프랑스는 이 책이 발간된 날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일어났고, 칼레 지방에 난민들의 문제로 시끄러웠던 걸로 안다.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은 유럽 뿐 아니라 여러 나라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점점 다문화 국가가 되어가는 이상 정치적으로 어떤 변수를 맞을지 모를 일이다.

이 책을 통해 종교, 정치가 내 삶에 아무 영향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 특히 우리나라는 더 정신차려야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느 날 이런 강력한 종교가 , 소설속에서도 난민이나 젊은층을 공략했듯이 스며들어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이끌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우린 어떤 곳에도 복종할 수 없다. 그래선 안 된다.

따끔한 주사를 맞은 듯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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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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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는 읽는건데, 이런 식으로 읽는다고 생각해봐. 책을 읽기 전에 작두 같은 걸로 제본된 부분을 잘라내는거야. 그러면 책이 종이 수백 장으로 흩어지겠지? 그 종이를 화투 섞듯이 섞은 다음에, 아무렇게나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거야. 막 남녀 주인공이 책 시작할 때에는 서로 사귀는 것처럼 나오다가 갑자기 이야기가 뚝 끊기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아직 만나기도 전이고, 남자 주인공이 중간에 죽고,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여자의 과거가 나오고, 그런 식인 거야. 그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 거야. (p.18)  ​

남자가 제안했던 저 책 읽기 방식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

저 방식이 매력적이라고 느껴진다면 바로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이 소설은 저 남자가 말한대로 시간의 흐름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어떤 패턴대로, 하지만 절묘하게 세 인물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길지도 않은 소설인데 한참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책을 놓지 못했다.

지금도 1분, 1분 순차적으로 흐르는 이 시간을,

여태까지 살면서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이 당연함을 의심하게 하는 것.

읽는 나는  혼란스럽지만 작가는 담담한 것 같았다.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한쪽 방향으로 체험하지. 그 속도를 조절하지도 못하고. 아주 드라마틱해. 모든 사건을 한쪽 방향으로, 단 한 번씩만 경험하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리석기도 해. 왜 인간들만 그런 식으로 시간을 체험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어떤 진화상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p.11)

#현재.

지금 이 시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생경하게 느껴진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이 남자만은 지금 오롯이 이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시간여행자와 역사도둑> 작가는 매일밤 수백년 전의 일들로 머리를 쥐어뜯을 것이고

어떤 작가는 앞 선 트렌드를 읽기 위해 돈이 흐르는 곳을 봐야 한다며 지금도 어느 가로수길의 카페에 앉아 있을 지 모른다.

영훈이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순간부터 그 과거에 매여 있고

여자는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의 말 한 마디로 친구의 일생이 바뀌었다는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사람들은 과거라는 시간에 얽매이기도, 혹은 앞으로 일어날 지 모를 일에 대비하면서 지금 현재를 목적 아닌 수단으로 흘려보내곤 한다.

우리집 개를 보면서 가끔 느낀건데 시간에 연연하는 건 인간 뿐이다. ​

시간이 우리를 어쩔 수 없이 어리석게 만드는 걸까? ​우리가 시간을 어리석지 않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어쨌든 우주알이라는 건 없다. 정말 매력적인 녀석이긴 하지만 우린 시간을 지금 우리가 써왔던 대로 그렇게 흘려보내며 살아가야 한다.

시작과 끝을 정해놓고 순서대로...

시간을 의심하는 사람은 심지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조차 힘들 것이다. ​

이 남자...

사랑하는 여자를 오랫동안 볼 수 없고

자신으로 인해 파괴되는 인생을 봐야만 했던 이 남자를 우주알이라는 게 조금은 구원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보통 인간이었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못 볼 꼴만 보여주곤 이별 했을 것이다.  ​

그게 인간의 삶이고 변하지 않을 패턴이다.

그가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했건 어쨌건. ​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p.87)

함께 행복했던 시간이 많았으면 그게 해피엔딩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시간이 좋게 끝날지, 안 좋게 끝날지를 알 수 없으므로 매 순간에 충실 할 수밖에 없다.

그걸 미리 알 수 있다면 나와 좋게 끝날 사람들하고만 만나고 관계를 맺겠지만 그게 과연 인간에게 좋은 일일까?

남몰래 굿판을 구경시켜줬던 남자든, 이 우주알을 품게 된 남자든

그 능력이 인간세상에서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도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

큰보람의 이야기는 흘려듣는 듯 하다가, 남이 이혼했다는 소리는 더 듣고 싶어하는 여자의 심리.

영훈 어머니의 민폐에 가까운 스토킹? 과 폭력적으로 빼앗긴 모성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없으므로 곧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꽃을 따라 꿀을 따러 다니는 이동 양봉업자와 미용 봉사를 하러 다닐 영훈 어머니

마포의 옛일들 ..

하나하나 곱씹어 보다가 이 책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꽤 길었던 것 같다.

자신의 아내가 첫 번째 독자라는 , 아내가 불러서 가야 한다고 말하는-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것 같은 한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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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옥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해봤다.

 

그의 단편들이 실려있는 이 책은 몇몇 등장인물이 겹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단편소설들이지만 장편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간빙기의 밤> 속 주인공이 제대하고 한 여자와 헤어지기 전 침대에 누워 군대에서 저 <먼 산에 내리는 눈>을 본 적이 있다... 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은

 

그 주인공의 뒷 얘기를 다른 단편을 통해 보는 것 같은 경험.

 

 

 

이 소설들을 읽다보면 자꾸 과거를 끄집어내게 된다.

 

그 땐 별 것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별 것이 되는 순간들...

 

일상의 시간 속에서 기억들이 예고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도 조금은 혼란스러울 만큼 두서없이 그의 기억이 나타난다.

 

그리고 문득, 서글퍼진다.

 

기억이 끝나면 그곳에 있던 그녀도, 그것도, 그 시간도 끝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감촉할 때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 존재할 때 나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감촉하지 못한다. (해설/ p,332)

 

 

그러니까 삶이란 기억을 통해 비로소 완벽해지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든, 그 기억이 희미해졌든...

내가 두려웠던 건 끝을 보는 거였다. 그녀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는 거였다.

내게는 그냥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적당했다.

그냥 내가 싫어졌을 뿐이다. 거기에 다른 이유는 없어야 했다.

사랑이 시작되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끝나는 데도 이유가 없다.

그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곳에서 결정되는 일이어야 했다. (p.76 )

 

 

 

, 어떤 일들은 그전에 일어난 일의 결과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일은, 어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무언가 일어나기 위해선,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 (p.78)

 

방학식은 좀 심오했다.

 

낡은 소파, 탐구생활, 엄마가 만들어놓았을 법한 생선조림과 밑반찬들...

 

방학식을 해서 집에 일찍 온 날, 집에 아무도 없는 게 괜히 좋아서 들뜬 소년에게 찾아온 한 여자. 나도 처음엔 교회에서 나온 아줌마인가? 했지만...

 

여자는 문득 죽음을 암시하며 이 소년을 집 밖으로 끌어내려하지만 소년은 꽤나 격렬하게 싸운다.

 

 

세상과 자아에 대한 모순 속에서 문득 모든 것이 완벽한- 굳이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누군가가 책임져주겠다고 하는 그곳으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고

 

그곳으로 데려가주겠다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면 따라갈 것인가?

 

거긴 언젠가 내가 혼자서 가야만 하는 곳이긴 하다.

 

외로울 거라고도 생각이 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대고 싶어할 만큼...

 

작가는 왠지 순순히 따라가지 말고 싸우라고 얘기하는 듯 했고 그래서 너무 좋았다.

 

 

친숙하고 익숙한 분위기에서 몽환적이고 어쩌면 판타지 같은 세계로 넘어가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여운이 오래 남고 <크리스마스 포커> 에서처럼 삶과 죽음에 대해 가볍게든, 무겁게든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여러 작품들이 다 매력 있었지만 내 마음속 명작은 이 < 방학식> 이다. 단편소설의 매력이 200% 발휘되었다고 생각된다.

 

 

# 그러니까 영화로 치자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어느 여자가 끊이지 않는 남자 선배와 대낮부터 술집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그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그런 분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담백함과 소소함 속에서도 빛나는 진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잘 들어줄 것 같았고 , 또 끊임없이 무언가를 얘기해줄 것 같았다. 또 나를 잘 기억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 다섯개가 아깝지 않은 멋진 소설집이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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