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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평점 :
* 날마다 잔치
전설의 고향을 시청할 수 없는 밤이란 얼마나 심심한가.
괜히 안부를 묻고 살림을 걱정해주는 척 찾아가서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시청한 뒤 그 집을 빠져나왔는데 날이 갈수록 대범해져서는 저녁밥상을 물리면 아예 대놓고 그 집에 찾아가곤 했다. 그렇게 해서 날마다 그 집은 마을 사람들로 북적였고 빈손으로 찾기 민망했던 사람들이 술이며 안주며 군것질거리를 들고 모여들어 때아닌 잔치 분위기로 그 집은 날마다 그들먹해졌다. (P.25)
KBS 수신료 내기는 아깝고, 전설의 고향은 보고 싶고 그래서 밤마다 유일하게 KBS 를 보는 집으로 모여드는 동네 사람들이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나던 에피소드였어요.
그 땐 나름 무서웠던 전설의 고향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눈을 가리는 사람들, 어딘가에서 피어오를 모기향의 매캐한 냄새, 먹을 걸 찾아들고 오는 동네 사람들을 내치지 않았던 인심 좋은 집주인. 그 여름밤의 풍경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웠는데 , 오늘 전혀 왕래가 없던 옆집 사람들의 이사에 무덤덤했던 아침이 떠올라 좀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그들먹한 느낌을 언제 받았었던가. 그런 느낌을 아는 날이 오긴 올까.
* 가을엔 손편지
편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여된 거의 유일한 문학이므로 들추어볼 편지가 없다면 비밀이 없는 사람처럼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을이라면 가슴속 낡은 편지지를 꺼내어 눈물과 그림을 펜 삼아 사연을 적어볼 일이다. 누군가에게 비밀을 부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니까. (P.57)
손편지 쓰는 시간을 좋아하고 오늘도 편지를 담은 작은 상자 하나를 누군가에게 보내고 왔어요. 무슨 할 말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할 말을 쥐어짜낸 것도 아닌데 주절주절 한 페이지를 채우는 일도 신기하고. 이걸 나중에 웃으며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소망을 늘 차곡차곡 담는 일도 별 볼일 없는 일상에서 큰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서로 들추어볼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이 이렇게나 벅찬 일이었다니.
*아르바이트
날이 밝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간다 해도 그 아르바이트생을 기다리는 건 그날 밤 다시 시작되는 야간 근무일 것이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등록금 투쟁을 하다 길거리에서 한 대학생이 죽었다. 아르바이트를 수용소에 가둔 채 (Arbeit Macht Frei) 편히 잠든 자들의 파렴치한 밤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내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다. (p.101)
어느 날 막차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커피를 한 잔 사 마셨는데 거기서 일하던 분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들어가자 먹던 핫바를 얼른 뜯어놓은 비닐에 대충 쑤셔놓고 카운터로 나오던, 입가를 손으로 대충 쓱쓱 닦던 젊은 남자의 모습. 그러고보니 그를 기다리는 건 다시 피곤하고 출출한 야간근무였겠네요. 몇 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기억 나는 건 내가 잠깐의 휴식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닐까, 라고 작가님과 비슷한 생각을 해서 인 것 같아요.
늦은밤 환한 빛과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단 돈 천원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해준 그의 '노동'은 제 값을 받았을까요. 파렴치한 밤, 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쿡 찔린 듯 했습니다.
* 독서의 자세
독서는 읽는 행위가 아니라 교감하는 행위다. 좀더 외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문장들과 속삭임을 나누고 손길을 나눈다. 책과 동침하고 책과 사랑을 나눈다. 책은 우리 안에서 익어가고 발효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책과 하나된 스스로를 출산한다. (P.167)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 라는 질문에 작가님은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도 몹시 공감했습니다. 다양한 책들의 종류만큼 읽는 목적도 방법도 다 다르겠지만. 한 권을 읽어도 그 책이 내 맘 속에 들어와 발효가 되는 체험. 기나긴 몽상의 끝에 느끼는 경탄과 경이로움을 맛보는 독서를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론 욕심만큼 다독을 못할 때, 책 읽는 일에 흥미가 떨어질 때가 있는데 단순히 읽으려는 마음만 급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하철에서 책 읽는 이를 '일상의 미학에 균열' 을 일으키는 작은 반란처럼 느끼며 어여삐 봐주는 그 마음 또한 좋았어요. 그만큼 이렇든, 저렇든 책 읽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얘기라 씁쓸하기도 했지만요. 어떻게 읽든, 어디서 읽든...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했던 얘기... 누구와도 책 이야기가 통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올 수 있으려나요.
* 서글픈 보수
우리 사회에서 보수라고 일컬어지는 혹은 자처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규정을 내릴 때 신념의 체계에 의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신념이 없다. 그들에게는 가난과 분노가 있다. (...) 수십년 동안 사회체제는 그들의 분노를 먹고 자랐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에게 보상해주지 않았다. 하루 일당 외에는. 그런 보수(保守)는 서글픈 보수(報酬)다. 한쪽에서는 손가락질을 당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용만 당하다 버림받는. (p.273)
요즘 시국 때문인지 밑줄을 쫙쫙 긋게 되는 그의 차분한 글에 오래 머물게 됐습니다. '보수' 라는 단어가 나날이 훼손됨을 슬퍼했던 터라 그랬던 걸까요. 사실 보수와 진보는 어느 하나 없어선 안 될 중요한 것들인데. 삼성동에서 '마마~' 를 외치는 서글픈 자칭 보수를 보던 날. 그 묘한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당신들은 뭘 잘못 알고 있거나, 적어도 이런 일 앞에선 이러지 말아야 돼요. 라고 설득력 있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도, 용기도 없는 저는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거나 저절로 풀리길 바라고 있는데 그 앞에서 무력감과 한심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신형철 평론가님이 자신만의 베스트 5를 소개해주셨길래 저도 다섯 개를 꼽아보고자 책을 여러 번 뒤적였지만 아 너무 힘드네요. 맘 같아선 한 20개를 고르고 싶었습니다.
먼 얘기가 아니라 내 생활과 가까운 따뜻하면서도 때론 냉철한 이야기들이 한 장에 녹여져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던 에세이였습니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시선이 더 따뜻해지기도, 더 냉정해지기도 했어요.
이 책에 실린 손홍규 형의 글 중에 한두 시간 만에 뚝딱 쓰인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순수한 그가 미련할 정도로 최선을 다한 자취들 앞에서 저는 몇 번은 눈물겨웠습니다. (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