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정치철학 수업.. 장장 9주간의 수업을 마치고, 이제 에세이만 남았다. 아직 많이 모자란 나의 실력에 추장은 쉬운숙제로 돌려주었다. 언제 실력쌓아서 부끄럽지 않은 발표도 하고 그럴수 있을까나. 일단 이해가 안가는 텍스트. 수업만 가지고 절대 되지 않는데.. 그나마도 열심히 못들었다. 읽기 숙제는 하지도 못하고,,, 밤을 새서라고 해야되는데 그런 열정은 벌써 식은건가.. 아니 공부하는 싫은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다만.. 확빠져들지 못할 뿐이다.. 쉽게 몰입을 못할 뿐이다. 그냥 두려워할 것없이 느낀 바를 쓰고, 요약도 하고 그러면 되는데 좀 두려워??  

처음에 데리다의 마르크스 유령들.. 환대에 대하여.. 등을 읽으면서 뭥미?? 철학을 문학처럼 온통 은유와 알 수없는 암호들로 메워진 것 같은 느낌.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도 짧은 데다.. 뭔가 알수 없다는 두려움은 감히 데리다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도대체 감이 오지 않았다. 데리다로부터 점점 텍스트들은 쉬워져 갔으나, 어렵게만 느껴지던 첫인상때문인지, 나머지 책들도 잘 읽혀지지 않았다... 소화하지 못하고 넘어가... 항상 답답하고 찜찜하다. 언제 시간내서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데 그 시간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선생님의 강의는 명쾌하다. 경직된 사유의 틈이 벌어지면서 빛이 쏟아지는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그 틈을 비짓고 껍데기를 벗으면 새로운 세상이 보이지는 않을까... 다른 차원의 정신적인 세계. 철학자들은 그런 세계에 산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준비물을 챙기는 중이고,, 신발끈을 묶는 시간이 너무 길다... 그렇게 하다가는 출발도 못하고 지칠텐데.. 그럼 안되. 신발끈을 묶었으면 얼른 길을 떠나야 한다...   

길을 떠나면서 나는 카메라를 준비하지 않으니,, 머리속에 이미지만 남는다.  

카메라와 일기장.. 그리고 여행하면서 읽을 책들도 잊지말자... 인제 준비다 되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길을 나서는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공부하기 위해 등록한 곳인데.. 아직도 나의 몸은 공부하는 몸으로 탈피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내 생활의 패턴은 무너짐과 불규칙속에서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책도 읽지 못하고, 자꾸만 반대로 가려고 한다. 내가 반대로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의지하고자 하는 바에 반하는 반대의지.. 노는게 즐거워? 그런것도 아니고,,, 그냥 익숙하지가 않아서 인가? 자극이 필요하다. 내 주변에는 우리 대중에서는 정말 다들 열심히 하고 몰입하는데 나 아직도 겉도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면 공부하는 신체를 만들수 있을까... 몸과 마음. 정신이 집중. 또 집중할 수 있도록 가다듬고 가다듬어 할 필요를 느낀다. 정말 다음주부터는 열심히 해야겠다.. 술도 좀 끊고, 집안일도 좀 하고,,, 심기일전 하자. 무엇에 집중을 하려면 시간을 어느정도 투자해야되는데. 난 아직도 엄한데다 시간을 쏟기 일수다.. 새어나가는 시간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간.. 정말 지나가는 시간을 잡기위해.. 나는 긴장이 필요하다.  

일단 만남을 대폭 줄일것. 만나려면 점심 때 이용해서 만나야겠다. 하루에 3시간 이상은 공부할 것.  9:30-11:30 2시간이랑 아침6:00-6:30 점심때 30분을 이용해서 공부할 것. 점심때는 한문숙제 하고. 아침에는 프루스트 읽기. 지하철에서도 읽기 그럼 하루 1시간 밖에 못읽네... 아 시간이 너무 없는데...  

이번주는 완전 포기하고 주3회 술마셨네. 이런 젠장. 결국 한문수업도 못듣고,, 속이 체해서 막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겠다. 단식. 오늘 저녁도 단식하고.  

공부하는 신체를 위해서 익숙해지기 위해서 좀 참아야겠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고,,, 특히 인터넷 하지 말기. 누누히 내가 말하지만 업무시간에 인터넷하지 말것. 괜히 쇼핑몰 보다가 돈만 날리고. 업무시간 집중해서 해야 할것은 좀 하고 살도록 하자. 나의 능력을 테스트 해볼수 있는 장이라고 생각하고... 인간관계도 정리하고... 그야말로 공부에 좀 집중해야겠다.. 쓸데없는 잡념들이 자꾸만 끼어드는 요즘. 잡념을 없애고 텍스트에 집중하자. 사유의 꼬리를 놓치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 집중하는 길밖에 없다.  

한가지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기. 그리고 쓰기. 쓰지않으면 정리가 안된다. 정리하기 위해 열심히 쓸 것 노트북도 샀으니, 이제 열심히 쓰면 된다.  

읽어야 할 책.  

꼬뮌주의 선언. 읽고 요약하고 자기코멘트 달기.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푸르스트와 기호들. 벤야민의 아케이드. 다른 정치철학책도 읽고 싶은데.. 배웠던것 다시 하나씩 읽어봐야 겠다...  

떡이 꽉막혀있다.. 목구멍이 답답하다. 삼실에 나가야 되는데 일도 정리하고 그냥 집에 있을까.. 쉬고 싶었자너. 그럼 오늘은 좀 쉬면서 책도 읽고 정리도 좀 하고 밀린 빨래. 밀린 아들의 대한 사랑.공부 해야겠다. 남편 생일이라 저녁수업도 못듣게 되었다... 누가 온다고 하는데 마누라도 없음 안되니까.  

하여간 핑계낌에 있는다 집에. 아들녀석은 게임하고 있네.. 아 정말 저놈의 게임. 진짜 싫다. 그게 뭐야.. 중독. 이런 녀석은...  

공부하는 것도 눈치 봐가며 해야하고.. 이런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야되... 그래야 자유로와져. 예전의 나는 아니다. 분명 하지만 다시 탈피가 필요하다... 정식으로. 그러기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나머지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접고. 사유를 진전시키기 위해 일상을 단순하게 변화시키고, 몸도 건강하게 만들자. 피곤을 유도하지 말것. 만남을 만들지 말것. 업무시간에 업무만 하면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로고 할것. 일주일에 1회 약속을 만드는 것도 안되고, 한달에 1회정도만 약속 만들것.  

정필요하다면 노트북가지고 다니면서 글쓸것. 그리고 집중해서 책읽을 시간을 확보할 것.  

나에대한 너무 많은 지시사항인가... 이런 결심도 없다면 도대체 뭐가 되겠는가.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고, 일체의 어둠은 몰아내자. 짜증난다.  

오래만에 쓰는 페이퍼가 고작 이거지만, 할 수 없다... 그동안 읽은 책 리뷰도 해야되는데 오래 되어 그냥 느낌만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벤야민과의 만남. 낯설었지만 그는 너무 매력적이다.  

 

    벤야민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독일바로크 비애극의 원천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 하면서 그에게 대학교수자리가 기꺼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시대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그의 텍스트를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기존의 글쓰기 어법에서 벗어난 그의 텍스트들은 논리와 체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 였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그들이 놓치고 있는 사유의 틈, 같은 별을 두고 다른 성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레고리적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 논문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논문은 바로크시대의 독일 비애극이 가졌던 시대의 알레고리적인 측면과 이 논문을 통한 글쓰기의 새로운 방식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이중의 목적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독해가 어려웠던 것은 전후의 연결이 안되는 나열.  파노라마적인 글쓰기 방식 때문인데 벤야민은 기존의 귀납적이고, 연역적인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전개가 아닌 각각의 퍼즐조각을 독자들에게 흩뿌린다. 하지만 이것은 퍼즐이 아니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산만한 텍스트 속에서 핵심부터 찾으려고 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적잖이 당황시켰을 것이다.  이 끝없는 전환의 과정이 바로 베냐민이 독자에게 숨고르기, 관조적 글읽기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반짝거리는 모래알을 볼 수 있기 위함 이였다. 각각의 별들이 가치가 있고 그 별들이 모여 별자리를 만들 때 보는 사람마다 다른 별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벤야민의 글을 읽어내는 방식은 수잔손택이 투명하게 읽기(해석에 반대한다)가 적합하지 않은가 싶다. 예술작품을 해석하기 보다는 그 자체로 들어가 반짝거림을 경험하는 것이다. 벤야민 텍스트는 수많은 메모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은 전체로서의 부분이 아닌 그 자체로 전체가 될 수 있으면서 또 모였을 때는 그 자체가 말을 하는 식. 그 말은 듣는 사람이 각자의 버전으로 다시 재현하게 되는 말이 될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의 텍스트는 통찰의 텍스트라고 불리울 수도 있을 것같다.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어느날 툭 터지는. 물론 다른 해석자의 해석없이 벤야민의 이러한 방식을 혼자서 이해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벤야민이 어떤 의도로 어떤 실험을 했는지 통으로 이해하면 그 때 별들도 잘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다른 텍스트들 역시 기존의 자신이 가져왔던 고정관념들과 과감히 접어놓고 보는 백지의 미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숨한번 쉬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그렇게 그자체로 경험하면 되었던 것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별자리가 매직아이처럼 떠오를 것이고 떠오른 별자리가 주는 의미는 벤야민이 말하고 싶었던 알레고리의 기원일 것이다. 




    알레고리란, 어떤 한 주제를 말하기 위하여 다른 주제 비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 은우와 유사한 표현 기교라고 할 수있는데 은유가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기교인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로 관철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브리태니카 백과사전)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 일방통행로 등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매우 알레고리화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유사성을 찾는 예리함. 그의 그 예리함은 바로크 비애극에서 역시 바로크시대를 읽어내는 시대적 코드로서도 비애극 자체가 알레고리이면서, 비애극의 형식 자체 역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알레고리 일 수 있다는 벤야민의 신선한 발상. 궁정정치극이라는 특징과 고정된 배역과 배역의 역할, 무대장치 소재 등은 그 시대의 무엇인가를 우의적으로 표현했으며, 그것은 피안의 세계를 두려워하지는 그러면서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주는 활동성 즉, 비애극의 덕성인 초연함이(아파테이아) 있었다. 벤야민은 그 시대사람들이 사용한 알레고리를 비애극에서 찾았으며, 알레고리의 원천 그시대의 역사관은 아파테이아가 아니였나 싶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그 시대의 알레고리를 가진 비애극을 알레고리적 형식으로 써내려갔으며, 또한 사유의 실험으로서의 알레고리를 보여주는 글쓰기이다. 세계를 우의적으로 여겼던 벤야민의 독특한 시각을 다른 무엇인가로 은유하고픈 욕망을 접어야겠다. 모든 것을 언어로 반듯하게 설명해야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투명하게 바라보다 그림이 그려질 때를 기다려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림에 따른 인내심과 지구력, 그 별자리를 제대로 보기 위한 창조적인 시각도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은 비단 벤야민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면서 해석자의 해석을 의지했던 나약함에서 벗어나 일단은 관조와 명상이 베어있는 독해에 힘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와 분류, 의미의 규정하려던 나의 습관과 편견을 버려야 함을 느낀 것이 이번 벤야민강좌를 통한 가장 소중한 경험이였다. 이제는 벤야민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슬쩍 미소가 번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고미숙선생님의 호모 에로스를 읽었다. 

사랑과 삶에 대한 기술. 지금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일침.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가에 대한 제시가 있었다.사랑은 삶과 즉, 일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우리는 사랑에 대한 열정과 달콤함을 불멸의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 사랑이 마치 전부이거나 하는 순정파와 넘쳐나는 자의식을 파고드는 사랑의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는,두려운 나머지 냉소파가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엇인가? 열정과 쾌락 끝에 오는 권태를 이기못하는 사랑중독주의자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냉소주의자,, 이 양극에 많은 연애관계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순정파라고 볼수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사랑을 택하다가 권태라는 순간에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참는 것은 없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언젠가는 폭발하기 마련이고, 댓가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환상인것을... 그럼 댓가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불가능한가? 글쎄 부모자식간에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어느새 댓가를 바라고 서운함을 느끼는데 남녀간의 사랑이야 더하지 않을까.  

사랑은 둘이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와 개별자가 서로를 너라 나처럼 나를 너처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그리하여 나의세계는 너로 인해 더 확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도 불멸의 판타지가 아닌 타이밍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의 망상기제를 벗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세계에서 한걸음 나가기 위한 공부는 그놈의 사랑도 변화시킬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린비 블로그의 [책으로 세상읽기]를 보다
이번 주 글이 마침 <에티카>라 퍼왔습니다.
소제목도 재밌어요^^ [슈퍼맨과 맥가이버, 어느 쪽이 진짜 자유인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해 많은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론학교 스피노자 읽기 함께 해요~~~~^_^

(홈페이지를 클릭하면 사진과 함께 편집된 글이 나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우리의 '자유'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연구공간 수유+너머 만세


1. 왜 우리는 땅을 사는가?

로또에 당첨이 되었다. 50억이 생겼다. 우리가 처음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 강남에 땅을 사는 거다. 펀드나 주식에 분산투자하는 방법도 있지만, 머리 아프니까 관두자. 왜 우리는 강남에 땅을 사는가? 청와대에 계신 분들처럼 자연과 땅에 유별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주말 농장을 기어코 타워팰리스 옆에서 해야겠다는 변태가 아니라면, 그건 땅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50억이 100억이 되고 또 200억이 될 테니까. 즉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돈을 쓰기보다 불리려고 한다.



세컨드 라이프 같은 가상현실에서도 '증식'에 대한 욕구는 현실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대단하고 끈질긴 욕망엔 의문이 붙는다. "행복한데 필요한 것이 '돈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

그런데 돈을 불려서 뭘 하려고? 자자손손 행복하게 살려고? 하지만 행복한 데 필요한 것은 돈으로 사거나 구할 무언가지, 돈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왜 우리의 관심은 돈으로 뭘 사거나 재미있는 일을 하려는 데 있지 않고, 돈을 불려나가는 데만 있는가? 연구실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물어본다. 얼마나 돈을 벌고 싶냐고. 그러면 한 100억 벌고 싶다고 한다. 그걸로 하고 싶은걸 당장 대 보라고 되묻는다. 대부분 10억을 못 넘긴다. 그리고 결국 나오는 말이 자식한테 물려주겠단다. 아니면 쓸데없이 F-15 전투기 같은걸 사대거나.

왜 이런 ‘삽질’이 가능한 걸까? 스피노자의『에티카』에 따르면 우리가 전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노예다. 내 맘대로 하고 사는데 왜 자유롭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우리가 왜 그런 의욕이나 욕망을 가지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명문 대학도 가고 싶고, 번듯한 직장도 갖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데, 왜 그걸 원하는지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생각 비슷한 일은 한다. 이런 식이다. 대학에 가고 싶은 이유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고, 좋은 직장을 얻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함이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자식에게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서 다시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함이다. 그건 욕망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을 따라 흘러가는 것에 가깝다.



'지름신'이 내리면 우리는 지를 수 밖에 없다.
앉으나 서나 그 생각만 나고, 자제하려고 해도, 자꾸 카드로 손이 간다.
'지름신'은 우리의 '극단적인 수동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우리는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 통상적으로 우리 삶과 욕망은 여러 요인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다. 삶이 다른 요인들의 결과물에 머물 때, 우리는 삶이라는 결과물도,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원인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원인이 단일하지 않고 혼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돌에 맞았다고 하자.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돌의 본성과 바람의 본성과 내 신체의 본성이 ‘섞여 있는’ 멍밖에 없다. 나는 결코 돌에 대해서도, 그 돌을 날린 바람에 대해서도, 결정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욕망의 정체와 원인을 알 수 없다. 내 욕망은 멍처럼 여러 요인들의 혼합물이기 때문에, 최소한 나의 신체와 외부요인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의욕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하는 것 같지만, 그 의지와 의욕은 나의 것이 아니다. 여러 요인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다.

욕망의 원인을 모르고 수동적인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왜 원하는지도 모른 채 뭔가에 매달린다. 끊임없이 술을 찾는 알코올 중독자나 어디에 돈을 쓸지도 모른 채 계속 돈을 불려가려는 우리처럼 말이다. 이때 자유란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무지와, 나를 얽어맨 쇠사슬을 느낄 수 없는 둔감함이 낳은 허상이다.


2. 원인을 아는 것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내 삶을 좌지우지 하는 원인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어떤 것의 원인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인식하거나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에게 ‘원인을 안다’는 것은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원(圓)의 ‘원인을 안다’는 것은 원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스피노자는 원을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한쪽을 고정시킨 채 막대기를 회전시켰을 경우 나타나는 형상]으로 표현한다. 만들 수 있어야 안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철학자보다 '별종'스러웠던 철학자 스피노자.
"불화란 종교에 대한 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인간 감정의 상이함 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왜곡하고 단죄하는-이렇게 얘기해도 된다면- 대립의 정신에서 생겨나옵니다. "
(팔츠 영주에게 보낸「스피노자의 교수직 거절 답장」중에서)

그렇기에 삶을 알거나 삶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삶을 생산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원인을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원인이 되는 것, 즉 내 삶이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영향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스스로 원인이 되어 생산한다면, 삶이건 무엇이건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거꾸로 삶을 명료하게 안다는 것은, 그것을 조직할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가 만든 인생의 레일을 왜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걸어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레일을 깔고 걸어야 한다. 그래야 그 레일의 정체를 알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다. 알기 위해서는 만들어야 한다.

스피노자는 적극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것은 진리/앎일 뿐 아니라 기쁨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에게 기쁨이란 능력이 증가할 때 발생하는 정서이다. 전보다 많은 능력을 갖출 때, 우리는 기쁨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가 능동적으로 삶을 구성할 때, 그것은 늘 능력 증가와 기쁨을 가져온다. 자기에게 해가되는 일을, 스스로의 능력이 감소하는 일을 ‘능동적’으로 하는 존재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도 100%능동적이어서 적합하게만 인식하고 기쁨만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100%수동적이어서 항상 혼잡한 원인에 시달리며 슬픔만을 안고 사는 사람 역시 없다. 문제는 전보다 더 많은 적합한 인식과 기쁨을 가지는 것, 전보다 더 능동적이 되는 것.

보통 사는 게 좋았다가 싫었다가 한다. 사람들은 그걸 조울증이라고 부르며 대단히 섬세한 감성이라도 되는 양 떠든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조울증은 삶의 원인을 모르는 무능력자들의 병이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삶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요행을 바란다. ‘착하게 살면 복 받을 거야’라거나, ‘열심히 일하면 행복해질 거야’ 같은 근거 없는 인생의 도덕이나 목적을 믿는다. 하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도 태풍에 휩쓸린다. 착함과 복은 필연적 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복해지는 건 다른 문제다. 물론 행복해지는 경우도 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 벌리고 있으면 사과가 떨어지기도 한다. 다만 잠시 후에는 벌레가 떨어질 것이다. 조울증이란 인생을 요행에 맡겼을 때 나타나는 파고에 지나지 않는다. 수동적일 때, 우리 인생은 불확실한 기쁨과 슬픔에 던져진다.

스피노자의 충고는 간단하다. 기쁠 때를 늘이고 슬플 때를 줄이자는 말이다. 사춘기 청소년처럼 조울증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계속 기뻐하자는 말이다. 그러려면 불확실한 우연에 기댈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기쁨을 조직해야 한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릴 것이 아니라, 사과 씨를 심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라는 도덕에 기대어서는, 행복을 ‘기도’해서는 곤란하다. 내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조직’해야 한다. 삶을 파악하는 것, 스스로 삶의 원인이 되는 것, 수동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삶의 생산자가 되는 것, 기쁨을 조직하는 것.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이런 능동적 조직과 그에 따른 적합한 인식과 기쁨의 다른 이름이다.  


3. 슈퍼맨과 맥가이버

주의하자. 내가 인생의 원인이 된다거나 능동적이라는 말은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뜻도, 그렇게 하라는 충고도 아니다. 흔히 자유를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독립된 개인의 속성으로 파악한다. 스피노자에게 그런 독립된 개인은 불가능하다. 모든 존재는 자연의 법칙, 인과의 사슬 안에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슈퍼맨이 될 수 없다. 슈퍼맨처럼 날아다닐 수도 없고 마법을 쓸 수도 없다. 10층에서 뛰어내리면 중력의 법칙 때문에 머리가 박살나며, 물속에 들어가면 숨을 쉴 수 없다. 만약 자유가 인과에서 벗어남을 뜻한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늘을 나는 슈퍼맨, 눈에서 광선빔도 나온다. 하지만, 누구나 슈퍼맨이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스피노자의 자유를 잘 보여 주는 모델은 슈퍼맨보다는 맥가이버다. 맥가이버는 우리보다 특별히 힘이 세지도 않고 초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가진다. 전자렌지로 폭탄을 만들고, 쓰레기로 행글라이더를 만든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에~”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궁지에 몰려 있어도 기상천외한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맥가이버는 분명히 우리와 같이 인과의 사슬 안에 있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는 10M를 뛰어넘고 하늘을 난다. 그의 신체와 도구가 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제는 맥가이버처럼 우리 신체의 숨겨진 능력을 발휘하여, 지금과 다른 삶을 조직하는 것이다. 기쁠 때를 늘이고 슬플 때를 줄이기 위해서는 삶을 능동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사는 것 밖에 모르던 신체의 다른 능력을 발굴하고 찾아냄으로써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맥가이버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여기서 지혜는 세계를 바라볼 때, 기존의 용법이나 법칙 혹은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맥가이버가 전자렌지를 음식을 데우는 기계로만 인식했다면, 커튼 걸이를 커튼을 거는 데만 사용했다면, 폭탄도 글라이더도 없었을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가 지금 작동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 지금 용도나 코드의 ‘여백’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지금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다른 삶을 만들 수 있다.



맥가이버의 손과 손칼. 그는 이 작은 칼을 가지고 세상 만물과 관계를 맺는다.
하늘을 나는 외계인이 되길 기다리는 것보다, 맥가이버에게 기술을 배우는게 더 빠르지 않을까?

더불어 맥가이버의 놀라운 능력은 항상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통해, 우정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맥가이버의 지혜는 ‘나는 하늘을 날 수 있어’라는 몽상이 아니라, 행글라이더를 내 몸에 붙이는 새로운 관계의 파악이다. 그가 물속에서 자유로운 것은 오리발과 산소통을 내 신체의 친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은 개인의 의지로 가능하지 않다. 지금과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 냈을 때, 계약 관계가 아닌 우정을 맺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는 함께 함으로써, 아니 함께 할 때에만 전과 다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능력 증대는 다른 인간과 공동체를 만들 때 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적합한 인식은 ‘공통’개념으로만 가능하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던져져 있다. 그 세계의 작용을 받는 수동적 결과물에 머무를 때,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욕망을 따라 흘러가고 조울증에 시달린다. 이유도 모른 채 아침마다 직장을 향하고 땅 투기를 하고 사교육을 시키는 사람들. 허나 절망하지 말자. 자연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세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풍요로운 방식으로 존재한다. 지혜로운 우정을 통해 그 풍요로움을 만날 수 있고 우리 삶 역시 풍요롭게 조직할 수 있다. 자전거에 몸을 실을 때,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이주노동자와 만날 때, 당연하게 여겨 온 국민국가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깨닫는 섬세한 눈을 얻을 수 있다. 컴퓨터/인터넷과 친구가 될 때, 살기 위해 미치도록 일하는 대신 전 세계적 반 신자유주의 투쟁을 조직할 수 있다. 자유는 이처럼 세계 안에서 세계를 좀 더 풍요롭게 만나 삶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유로워라! 그것이 스피노자의 에티카(윤리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