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 블로그의 [책으로 세상읽기]를 보다
이번 주 글이 마침 <에티카>라 퍼왔습니다.
소제목도 재밌어요^^ [슈퍼맨과 맥가이버, 어느 쪽이 진짜 자유인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해 많은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론학교 스피노자 읽기 함께 해요~~~~^_^

(홈페이지를 클릭하면 사진과 함께 편집된 글이 나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우리의 '자유'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연구공간 수유+너머 만세


1. 왜 우리는 땅을 사는가?

로또에 당첨이 되었다. 50억이 생겼다. 우리가 처음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 강남에 땅을 사는 거다. 펀드나 주식에 분산투자하는 방법도 있지만, 머리 아프니까 관두자. 왜 우리는 강남에 땅을 사는가? 청와대에 계신 분들처럼 자연과 땅에 유별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주말 농장을 기어코 타워팰리스 옆에서 해야겠다는 변태가 아니라면, 그건 땅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50억이 100억이 되고 또 200억이 될 테니까. 즉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돈을 쓰기보다 불리려고 한다.



세컨드 라이프 같은 가상현실에서도 '증식'에 대한 욕구는 현실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대단하고 끈질긴 욕망엔 의문이 붙는다. "행복한데 필요한 것이 '돈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

그런데 돈을 불려서 뭘 하려고? 자자손손 행복하게 살려고? 하지만 행복한 데 필요한 것은 돈으로 사거나 구할 무언가지, 돈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왜 우리의 관심은 돈으로 뭘 사거나 재미있는 일을 하려는 데 있지 않고, 돈을 불려나가는 데만 있는가? 연구실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물어본다. 얼마나 돈을 벌고 싶냐고. 그러면 한 100억 벌고 싶다고 한다. 그걸로 하고 싶은걸 당장 대 보라고 되묻는다. 대부분 10억을 못 넘긴다. 그리고 결국 나오는 말이 자식한테 물려주겠단다. 아니면 쓸데없이 F-15 전투기 같은걸 사대거나.

왜 이런 ‘삽질’이 가능한 걸까? 스피노자의『에티카』에 따르면 우리가 전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노예다. 내 맘대로 하고 사는데 왜 자유롭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우리가 왜 그런 의욕이나 욕망을 가지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명문 대학도 가고 싶고, 번듯한 직장도 갖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데, 왜 그걸 원하는지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생각 비슷한 일은 한다. 이런 식이다. 대학에 가고 싶은 이유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고, 좋은 직장을 얻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함이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자식에게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서 다시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함이다. 그건 욕망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을 따라 흘러가는 것에 가깝다.



'지름신'이 내리면 우리는 지를 수 밖에 없다.
앉으나 서나 그 생각만 나고, 자제하려고 해도, 자꾸 카드로 손이 간다.
'지름신'은 우리의 '극단적인 수동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우리는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 통상적으로 우리 삶과 욕망은 여러 요인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다. 삶이 다른 요인들의 결과물에 머물 때, 우리는 삶이라는 결과물도,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원인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원인이 단일하지 않고 혼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돌에 맞았다고 하자.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돌의 본성과 바람의 본성과 내 신체의 본성이 ‘섞여 있는’ 멍밖에 없다. 나는 결코 돌에 대해서도, 그 돌을 날린 바람에 대해서도, 결정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욕망의 정체와 원인을 알 수 없다. 내 욕망은 멍처럼 여러 요인들의 혼합물이기 때문에, 최소한 나의 신체와 외부요인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의욕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하는 것 같지만, 그 의지와 의욕은 나의 것이 아니다. 여러 요인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다.

욕망의 원인을 모르고 수동적인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왜 원하는지도 모른 채 뭔가에 매달린다. 끊임없이 술을 찾는 알코올 중독자나 어디에 돈을 쓸지도 모른 채 계속 돈을 불려가려는 우리처럼 말이다. 이때 자유란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무지와, 나를 얽어맨 쇠사슬을 느낄 수 없는 둔감함이 낳은 허상이다.


2. 원인을 아는 것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내 삶을 좌지우지 하는 원인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어떤 것의 원인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인식하거나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에게 ‘원인을 안다’는 것은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원(圓)의 ‘원인을 안다’는 것은 원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스피노자는 원을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한쪽을 고정시킨 채 막대기를 회전시켰을 경우 나타나는 형상]으로 표현한다. 만들 수 있어야 안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철학자보다 '별종'스러웠던 철학자 스피노자.
"불화란 종교에 대한 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인간 감정의 상이함 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왜곡하고 단죄하는-이렇게 얘기해도 된다면- 대립의 정신에서 생겨나옵니다. "
(팔츠 영주에게 보낸「스피노자의 교수직 거절 답장」중에서)

그렇기에 삶을 알거나 삶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삶을 생산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원인을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원인이 되는 것, 즉 내 삶이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영향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스스로 원인이 되어 생산한다면, 삶이건 무엇이건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거꾸로 삶을 명료하게 안다는 것은, 그것을 조직할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가 만든 인생의 레일을 왜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걸어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레일을 깔고 걸어야 한다. 그래야 그 레일의 정체를 알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다. 알기 위해서는 만들어야 한다.

스피노자는 적극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것은 진리/앎일 뿐 아니라 기쁨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에게 기쁨이란 능력이 증가할 때 발생하는 정서이다. 전보다 많은 능력을 갖출 때, 우리는 기쁨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가 능동적으로 삶을 구성할 때, 그것은 늘 능력 증가와 기쁨을 가져온다. 자기에게 해가되는 일을, 스스로의 능력이 감소하는 일을 ‘능동적’으로 하는 존재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도 100%능동적이어서 적합하게만 인식하고 기쁨만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100%수동적이어서 항상 혼잡한 원인에 시달리며 슬픔만을 안고 사는 사람 역시 없다. 문제는 전보다 더 많은 적합한 인식과 기쁨을 가지는 것, 전보다 더 능동적이 되는 것.

보통 사는 게 좋았다가 싫었다가 한다. 사람들은 그걸 조울증이라고 부르며 대단히 섬세한 감성이라도 되는 양 떠든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조울증은 삶의 원인을 모르는 무능력자들의 병이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삶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요행을 바란다. ‘착하게 살면 복 받을 거야’라거나, ‘열심히 일하면 행복해질 거야’ 같은 근거 없는 인생의 도덕이나 목적을 믿는다. 하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도 태풍에 휩쓸린다. 착함과 복은 필연적 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복해지는 건 다른 문제다. 물론 행복해지는 경우도 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 벌리고 있으면 사과가 떨어지기도 한다. 다만 잠시 후에는 벌레가 떨어질 것이다. 조울증이란 인생을 요행에 맡겼을 때 나타나는 파고에 지나지 않는다. 수동적일 때, 우리 인생은 불확실한 기쁨과 슬픔에 던져진다.

스피노자의 충고는 간단하다. 기쁠 때를 늘이고 슬플 때를 줄이자는 말이다. 사춘기 청소년처럼 조울증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계속 기뻐하자는 말이다. 그러려면 불확실한 우연에 기댈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기쁨을 조직해야 한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릴 것이 아니라, 사과 씨를 심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라는 도덕에 기대어서는, 행복을 ‘기도’해서는 곤란하다. 내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조직’해야 한다. 삶을 파악하는 것, 스스로 삶의 원인이 되는 것, 수동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삶의 생산자가 되는 것, 기쁨을 조직하는 것.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이런 능동적 조직과 그에 따른 적합한 인식과 기쁨의 다른 이름이다.  


3. 슈퍼맨과 맥가이버

주의하자. 내가 인생의 원인이 된다거나 능동적이라는 말은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뜻도, 그렇게 하라는 충고도 아니다. 흔히 자유를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독립된 개인의 속성으로 파악한다. 스피노자에게 그런 독립된 개인은 불가능하다. 모든 존재는 자연의 법칙, 인과의 사슬 안에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슈퍼맨이 될 수 없다. 슈퍼맨처럼 날아다닐 수도 없고 마법을 쓸 수도 없다. 10층에서 뛰어내리면 중력의 법칙 때문에 머리가 박살나며, 물속에 들어가면 숨을 쉴 수 없다. 만약 자유가 인과에서 벗어남을 뜻한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늘을 나는 슈퍼맨, 눈에서 광선빔도 나온다. 하지만, 누구나 슈퍼맨이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스피노자의 자유를 잘 보여 주는 모델은 슈퍼맨보다는 맥가이버다. 맥가이버는 우리보다 특별히 힘이 세지도 않고 초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가진다. 전자렌지로 폭탄을 만들고, 쓰레기로 행글라이더를 만든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에~”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궁지에 몰려 있어도 기상천외한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맥가이버는 분명히 우리와 같이 인과의 사슬 안에 있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는 10M를 뛰어넘고 하늘을 난다. 그의 신체와 도구가 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제는 맥가이버처럼 우리 신체의 숨겨진 능력을 발휘하여, 지금과 다른 삶을 조직하는 것이다. 기쁠 때를 늘이고 슬플 때를 줄이기 위해서는 삶을 능동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사는 것 밖에 모르던 신체의 다른 능력을 발굴하고 찾아냄으로써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맥가이버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여기서 지혜는 세계를 바라볼 때, 기존의 용법이나 법칙 혹은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맥가이버가 전자렌지를 음식을 데우는 기계로만 인식했다면, 커튼 걸이를 커튼을 거는 데만 사용했다면, 폭탄도 글라이더도 없었을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가 지금 작동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 지금 용도나 코드의 ‘여백’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지금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다른 삶을 만들 수 있다.



맥가이버의 손과 손칼. 그는 이 작은 칼을 가지고 세상 만물과 관계를 맺는다.
하늘을 나는 외계인이 되길 기다리는 것보다, 맥가이버에게 기술을 배우는게 더 빠르지 않을까?

더불어 맥가이버의 놀라운 능력은 항상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통해, 우정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맥가이버의 지혜는 ‘나는 하늘을 날 수 있어’라는 몽상이 아니라, 행글라이더를 내 몸에 붙이는 새로운 관계의 파악이다. 그가 물속에서 자유로운 것은 오리발과 산소통을 내 신체의 친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은 개인의 의지로 가능하지 않다. 지금과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 냈을 때, 계약 관계가 아닌 우정을 맺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는 함께 함으로써, 아니 함께 할 때에만 전과 다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능력 증대는 다른 인간과 공동체를 만들 때 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적합한 인식은 ‘공통’개념으로만 가능하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던져져 있다. 그 세계의 작용을 받는 수동적 결과물에 머무를 때,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욕망을 따라 흘러가고 조울증에 시달린다. 이유도 모른 채 아침마다 직장을 향하고 땅 투기를 하고 사교육을 시키는 사람들. 허나 절망하지 말자. 자연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세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풍요로운 방식으로 존재한다. 지혜로운 우정을 통해 그 풍요로움을 만날 수 있고 우리 삶 역시 풍요롭게 조직할 수 있다. 자전거에 몸을 실을 때,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이주노동자와 만날 때, 당연하게 여겨 온 국민국가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깨닫는 섬세한 눈을 얻을 수 있다. 컴퓨터/인터넷과 친구가 될 때, 살기 위해 미치도록 일하는 대신 전 세계적 반 신자유주의 투쟁을 조직할 수 있다. 자유는 이처럼 세계 안에서 세계를 좀 더 풍요롭게 만나 삶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유로워라! 그것이 스피노자의 에티카(윤리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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