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과의 만남. 낯설었지만 그는 너무 매력적이다.  

 

    벤야민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독일바로크 비애극의 원천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 하면서 그에게 대학교수자리가 기꺼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시대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그의 텍스트를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기존의 글쓰기 어법에서 벗어난 그의 텍스트들은 논리와 체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 였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그들이 놓치고 있는 사유의 틈, 같은 별을 두고 다른 성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레고리적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 논문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논문은 바로크시대의 독일 비애극이 가졌던 시대의 알레고리적인 측면과 이 논문을 통한 글쓰기의 새로운 방식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이중의 목적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독해가 어려웠던 것은 전후의 연결이 안되는 나열.  파노라마적인 글쓰기 방식 때문인데 벤야민은 기존의 귀납적이고, 연역적인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전개가 아닌 각각의 퍼즐조각을 독자들에게 흩뿌린다. 하지만 이것은 퍼즐이 아니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산만한 텍스트 속에서 핵심부터 찾으려고 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적잖이 당황시켰을 것이다.  이 끝없는 전환의 과정이 바로 베냐민이 독자에게 숨고르기, 관조적 글읽기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반짝거리는 모래알을 볼 수 있기 위함 이였다. 각각의 별들이 가치가 있고 그 별들이 모여 별자리를 만들 때 보는 사람마다 다른 별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벤야민의 글을 읽어내는 방식은 수잔손택이 투명하게 읽기(해석에 반대한다)가 적합하지 않은가 싶다. 예술작품을 해석하기 보다는 그 자체로 들어가 반짝거림을 경험하는 것이다. 벤야민 텍스트는 수많은 메모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은 전체로서의 부분이 아닌 그 자체로 전체가 될 수 있으면서 또 모였을 때는 그 자체가 말을 하는 식. 그 말은 듣는 사람이 각자의 버전으로 다시 재현하게 되는 말이 될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의 텍스트는 통찰의 텍스트라고 불리울 수도 있을 것같다.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어느날 툭 터지는. 물론 다른 해석자의 해석없이 벤야민의 이러한 방식을 혼자서 이해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벤야민이 어떤 의도로 어떤 실험을 했는지 통으로 이해하면 그 때 별들도 잘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다른 텍스트들 역시 기존의 자신이 가져왔던 고정관념들과 과감히 접어놓고 보는 백지의 미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숨한번 쉬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그렇게 그자체로 경험하면 되었던 것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별자리가 매직아이처럼 떠오를 것이고 떠오른 별자리가 주는 의미는 벤야민이 말하고 싶었던 알레고리의 기원일 것이다. 




    알레고리란, 어떤 한 주제를 말하기 위하여 다른 주제 비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 은우와 유사한 표현 기교라고 할 수있는데 은유가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기교인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로 관철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브리태니카 백과사전)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 일방통행로 등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매우 알레고리화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유사성을 찾는 예리함. 그의 그 예리함은 바로크 비애극에서 역시 바로크시대를 읽어내는 시대적 코드로서도 비애극 자체가 알레고리이면서, 비애극의 형식 자체 역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알레고리 일 수 있다는 벤야민의 신선한 발상. 궁정정치극이라는 특징과 고정된 배역과 배역의 역할, 무대장치 소재 등은 그 시대의 무엇인가를 우의적으로 표현했으며, 그것은 피안의 세계를 두려워하지는 그러면서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주는 활동성 즉, 비애극의 덕성인 초연함이(아파테이아) 있었다. 벤야민은 그 시대사람들이 사용한 알레고리를 비애극에서 찾았으며, 알레고리의 원천 그시대의 역사관은 아파테이아가 아니였나 싶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그 시대의 알레고리를 가진 비애극을 알레고리적 형식으로 써내려갔으며, 또한 사유의 실험으로서의 알레고리를 보여주는 글쓰기이다. 세계를 우의적으로 여겼던 벤야민의 독특한 시각을 다른 무엇인가로 은유하고픈 욕망을 접어야겠다. 모든 것을 언어로 반듯하게 설명해야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투명하게 바라보다 그림이 그려질 때를 기다려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림에 따른 인내심과 지구력, 그 별자리를 제대로 보기 위한 창조적인 시각도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은 비단 벤야민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면서 해석자의 해석을 의지했던 나약함에서 벗어나 일단은 관조와 명상이 베어있는 독해에 힘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와 분류, 의미의 규정하려던 나의 습관과 편견을 버려야 함을 느낀 것이 이번 벤야민강좌를 통한 가장 소중한 경험이였다. 이제는 벤야민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슬쩍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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