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페이퍼 이후로 벌써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직장을 옮겼고, 이제 막 20일을 지난 시점에서 시간은 어김없이 빨리 지나감을 느낀다. 몇번의 모임과 숙취가 지나간 자리들을 털어오면 그렇게 나는 늙어가고 있다. 뇌세포의 빠른 퇴화를 느끼면서 오늘 기사를 보니 술과 흡연이을 동시에 했을 때 치매 10배의 위험이 있다고 하고, 블랙아웃이 잦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블랙아웃이 거의 매번이다... 그리고 잘 생각이 안나고, 벙떠있는 느낌. 몸과 입이 분리되어 있는 듯.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듯.. 맑은 정신이 없다... 내년에는 심각하게 뇌건강에 신경써야 겠다.
한 시간 가량 독서를 했다. 제목은 "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슬라보예 지젝이 쓴 책이다. 지난 주 로쟈의 강의를 아이와 함께 들으러 갔다. 지젝은 왠지 읽기가 난해하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들어오지 않는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도 읽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이해하고자 강의도 듣게 되고 책도 지금 찬찬히 읽고 있다. 지난 번은 '지젝'은 어떤 인물인가라는 개괄적인 소개가 있었다. 지젝이 슬로베니아 철학자로 MTV철학자에서 현존하는 가장위험한 철학자로 소개된다고 한다. 지젝은 라깡으로 읽는 헤겔로 유명하다. 라깡. 헤겔 이름만 들어도 쥐나는 철학자들인데 이 둘을 연결했다고 한다. 지젝은 또한 행동하는 철학자. 괴팍하고, 다작을 많이 하는 철학자로 유명하고 그의 사상은 계속 변화, 진화하는 중이다.
로쟈선생님의 강의 때문인지 "실재사막"은 잘 읽혔다. 가끔 어디로 가는지 길을 잃을 때도 있지만, 집중해서 읽어보니.. 9.11 테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에서 이러한 사건이 주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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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가 유토피아적인 혹은 과학적인 기획과, 이상 미래를 위한 계획들을 꿈꾸었다면,20세기는 사물 그 자제를 전달하는 것으, 갈망하던 새로운 질서를 직접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한다. 20세기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은 실제를 직접 경한는 순간이었다. 이 실재는 사회적 현실과 대립되는 것이며, 기만적인 현실의 층위를 벗겨내는 대가인 극단적 폭력안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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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테 벤야민은 메시아적 순간을 '정지의 변증법'이라고 규정했다. 메시아적 사건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삶은 정체 상태에 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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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종말이 가까운 사회적 정체와 카스트로가 죽고 사회주의가 붕괴되면 일어날 기적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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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실재에 대한 열정을 근본주의적 테러에서도 발견한다.
근본주의적 테러의 목표 역시 우리 서구 시민들을 무감각으로부터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깊이 빠진 상태로부터 각성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자해행위가 자기파괴가 아닌 실재를 확인시키는 도구로서 정상성을 위한 병리적 도구라고 볼때, 가상성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열정은 폭력을 회귀시킨다....
9.11사건을 보면 대다수에 사람들이 이것은마치 영화같다는 표현을 많이 썼다. 믿기지 않은 그 화면을 몇번이고 되돌려 보면서 어떻게 이런일이 하며 소름 끼쳐했다.
하지만, 소름끼쳐하는 것 그 이상의 그 무엇 그것을 지젝은 으스스한 향락이라고 보았다. '실재에 대한 열정'이 클라이맥스에 달한 결말이라고..
우리는 제3세계의 일들에 대해서 유령같은 환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면 살아왔다. 그리고 9.11 사태는 이 환상과도 같은 화면의 환영이 우리 현실에 들어온 것이다. 이미지가 우리 현실에 들어와 그것을 산산조각 낸것이다.
실제로 발생하기 오래전부터 9.11테러 사태가 대중적 환상의 재료였다.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미국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꾼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쉽다. 그렇다면 안락한 속에 고정화된 부유한 미국인들은 무슨 꿈을 꿀까? 자신으리 삶을 산산이 부술 전 세계적 재난을 꿈꾼다.
20세기 실재한 대한 열정은 거짓열정, 궁극적으로는 실재와의 대면을 피하려는 전략이였다.
실재에 대한 열정은 영우주의 즉 아무도 할 수 없다면 자신이 하겠다. 꼭 해야하는 더러운 일을 기꺼이 떠맡는 영웅들을 찬양하는 전형적인 우파적 태도에서도 이런 자세를 볼 수 있다.
이 실재라는 괴물은 그 존재를 통해 우리의 상직적 셰의 일관성을 보장하면 따라서 그 구성요소인 비 일관성과의 대면을 회피하게 해주는 환영적 유령을 분인다. 나치이데올로기를 옐로 들자면, 실재로서의 유대인인은 사회적 적대를 감추려고 불런낸 유령일 뿐이다.
--> 지젝이 말하는 실재한 대한 열정. 이 실재라는 것은 실재가 아닌 유령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 남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열정 역시 실재가 아닌 유령에 불과하다.. 실재의 사막에 아직 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 이미지가 현실을 비집고 들어올때 조차 우리는 실재를 경험하는 못하는 것일까? 그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실재가 아닌가?
이 사건은 더 이상 전쟁, 테러 등이 우리에게 영화같은 현실. 허구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 실재"의 세계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 힘; 권력, 폭력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실체를 실재라고 여기고 두려워한다. "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은 이미 저널리즘의 클리셰가 되었다" 하이테크 전쟁, 세균전 등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국가, 미디어의 정보망에 더욱더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물리적인 폭력이 보여준 마지막 스펙터클한 사건이다라고 지젝은 본것이다. 이 사건을 보는 미국인의 시점은 테러조직에 대한 응징. 보복이라는 실재하고 멀어지는 편집증적인 태도양산했다. 우리는 반격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반격을 가할 것이인가... 또는 좌파에서 미국이 설치다가 응당 보복을 당한것이라며, 개개인의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보았다. 미국이 역사의 휴가는 날조된 것임을 이 기회로 말미암아 ' 실재'를 인식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