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펙토르의 시간
엘렌 식수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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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말함으로써 멀어지고 싶지 않은 여자들、 사물을 비껴 나가는 말로 말하고 싶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 말의 발걸음이 내는 소음은 사물들의 맥박을 뒤덮어 가려 버리기에、 나는 사물 위로 떨어져 내려 그 미세한 떨림을 얼어붙게 하는、 음조를 어긋나게 하는、 먹먹하게 만드는 말로 그 여자들에게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이 그녀들의 목소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두렵다。 어느 한 목소리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난。 나는 여자다。 목소리의 사랑。 베일에 가려진 채 나의 피를 깨우러 오는 깊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친근한 손길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목소리는 갓 태어난 심장이 만나는 최초의 빛줄기다。 내 심장이 속한 곳은 목소리이며、 그것은 무한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곁에 있어주는 찬란한 어둠으로 빚어진다。 -9-


목소리는 그 말의 내용이나 그 내용의 의미를 구축하는 기호작용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또 단독적인 현존의 증명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닌、 그 사이의 존재론을 함축함으로써 불가능한 위상을 달성한다。 중략

목소리가 오로지 기호작용으로 화원되지 않는 만큼 거기에는 어떤 찌꺼기가 남아 있으며、 이제 주체의 자리는 목소리의 불가능성이라는 잔해에서만 간신히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 불가능한 목소리、 림보、9쪽- 


‘말’이기 보다 리스펙토르는 ‘목소리’이다。  




하나의 글쓰기가 천사의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채 유한한 내 존재의 끄트머리에 홀로 외로이 있을 때였다。 나의 글쓰기-존재는 홀로 있음에 가슴 아파하며 나날이 커져 가는 슬품 속에서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보냈다。 "십 년간 책들의 사막에서 헤맸지만 아무런 대답도 만나지 못했어"、 편지는 점점 짧아져 가고、 "그런데 친구들은 어디 있지¿" 、 그것은 점점 더 금지된 것이 되어가고、 "시는 어디에¿" "진리는¿" 、 겁에 질려 주어가 사라지고 거의 읽을 수 없게 되었고、 내 광기의 메아가 되었다며 글쓰기-존재가 자책할까 두렸다。 그리고 나는 나의 글쓰기-존재가 절대적으로 비-현대적이고、 부-적절하며、 시대에 부-적격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미친 듯 악착스레 요구하고、 이 시체 더미의 시대에 몹시도 초연하고 풍요로우며 열려 있는 젊은 노래、 찬가의 시대에 그랬던 것만큼이나 광대하고 무방비한 젊은 노래의 도래를 욕망했기 때문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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