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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독서가 평생 좌우"

"TV·컴퓨터 게임·인터넷·휴대폰, 독서 습관 해쳐… 아이의 독서이력서 만들어 보세요"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드군. 지금 같아서는 윤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계 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구….’(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마지막 대목)

㈜클애들교육 남미영(南美英) 교육개발이사가 수 년 전 성장소설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의 일이다. 서울 압구정동 모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소나기’를 읽게 한 뒤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 여러분!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년은 자기가 사랑하는 소녀가 죽어서 매우 슬프겠지요? 그러면 좋아하는 소녀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 소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한 남학생이 자신있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주인공 소년은 이제 다른 여자애를 사귀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아무도 웃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또 다른 학생이 손을 들었다.

“제 생각에는요, 이제는 건강한 여자애를 사귀겠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요.”

남미영 이사는 중학생들에게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와 같은 철학적인 명제에 대한 사고를 확장해주기 위해 ‘소나기’를 읽게 했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23년간 한국교육개발원(KEDI)에 근무하면서 국어교육연구실장 등을 역임한 남미영 이사는 국내에 몇 안되는 독서교육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문학박사이자 동화작가이기도 한 남미영 이사는 독서교육이론서 ‘엄마가 어떻게 독서지도를 할까’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드는 독서 기술’ 등을 펴냈고 현재 한국독서교육개발원( www.kredi.co.kr) 원장과 디지털독서학교 엄지북( www.umjibook.co.kr)을 운영하고 있다.

▲ 어릴 적 습득한 어휘가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남미영 이사

슬픈 장면에서 깔깔깔 웃는 아이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문제가 아이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게임, 인터넷, 게임보이, 휴대폰 등에 빠져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책을 잡더라도 진득하게 집중을 못하고 건성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고전소설 ‘심청전’. 소설에 나오는 클라이맥스 중의 하나는 효녀 심청이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1300석에 뱃사람에게 자기 몸을 팔아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다. 유교적 윤리에 따라 부모를 위해 자식이 희생되는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다.

남미영 이사는 몇 해 전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에서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아이를 상담한 적이 있다.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된 게 우리 아이는 슬픈 장면에서 웃는지 모르겠다”고 찾아왔다. 남 이사는 그 아이에게 왜 웃음이 나는지를 물었고 그 아이는 이런 취지의 대답을 했다고 한다.

“치마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바다에 빠지면 팬티만 보일 것 아니에요.”

남 이사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아이들이 독해력은 높아도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 상상력이 없으면 주인공에의 감정이입(感情移入)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미있는 책을 갖다줘도 “재미없어요”라는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컴퓨터게임과 휴대폰이 대중화된 이후 초등학생들의 독서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그것은 100쪽 내외의 책을 5분에서 10분 사이에 다 읽었다고 하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어떤 책을 10분 만에 읽는다는 것은 줄거리만을 읽은 결과입니다. 책을 읽을 때 저급한 독자는 줄거리만을 읽는 반면 고급 독자는 생각하면서 읽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최근 매년 초등학생들이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 1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도서대여점에서 책을 빌려서 읽은 아이들과 속독 학원을 다닌 아이들이 주로 10분 안에 읽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부모들은 다른 아이들이 5권 읽을 때 10권을 읽으면 공부를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책을 빨리 읽는 것은 음식을 소화를 못시키고 설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 이사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고급 독서의 단계로 올라가야 아이들이 정서가 풍부한 청소년으로 자라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학교 교육에서는 이런 독서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개탄한다.

“슬픈 책을 읽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반대로 기쁜 책을 읽으면 낄낄거리고 웃어야 정상이지요. 저급 독자를 상상력이 풍부한 고급 독자로 키우는 게 독서 교육의 핵심입니다. 공부는 잘해도 대화하다 보면 말이 탁탁 끊기는 애들이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와 위인전을 읽지 않은 아이들이지요. 이런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기가 어렵지요.”

“어휘력 달리면 만화만 탐독”

남 이사에게 상담하는 학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이 만화만 보지 책을 읽으려하지 않는다는 것. 남 이사는 “아이들이 만화만 보려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거의 어휘력 문제 때문입니다. 어휘력이 달리니까 책을 읽지 않고 쉬운 구어체만 나오는 만화에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대부분의 만화책은 사용하는 어휘가 제한적이지만 책에서는 어휘의 색깔이 다양하지요. 예컨대, 시나브로와 같은 단어는 책에서나 나올 수 있는 어휘지요. 따라서 폭력 만화만 보는 아이들은 폭력적 언어에 익숙해져 결국 사고도 폭력적으로 하게 되고 행동도 그렇게 됩니다.”

남 이사에 따르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용하는 어휘는 대부분 부모에게서 배운다고 한다. 아이들은 말과 행동을 부모를 따라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부모의 영향이 줄어드는 대신 책의 영향이 커지게 됩니다. 어떤 책을 얼마나 읽느냐에 따라 머릿속이 고급 언어로 채워지기도 하고 반대로 저급 언어로 차게 됩니다. 한번 성장기에 머릿속에 저급한 언어로 채워지게 되면 이건 절대로 고쳐지지 않아요. 사람은 습득한 어휘대로 느끼고 그대로 생각하고 또 그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美 리더들 초등학교 때 500권 읽어

성장기의 독서가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가 있다. 몇 해 전 미국에서 ‘미국의 리더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있었다. 당시 미국 사회 전분야의 리더 1000명을 선정해 이들에게 초등학교 때 읽은 책을 써내도록 했다. 각 분야 지도자 1000명이 읽은 평균 책 수는 500권. 주제별로는 위인전, 세계 명작 등이었다. 반대로 미국의 자존심과 명예를 실추시킨 1000명을 선정해 똑같은 조사를 했다. 1000명은 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인 흉악범들이었다. 이들이 초등학교 시절 읽은 책은 평균 5권. 이것도 대부분 선정적이거나 폭력적 내용이 주를 이뤘다. ‘미국의 리더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조사는 결국 사람은 성장기에 읽은 책을 통해 영향받고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교육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부모들은 읽기와 쓰기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 그러나 입시교육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는 사실상 읽기와 쓰기 교육이 전무한 상태다. ㈜클애들교육( www. kredl.co.kr)은 독서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다.

남 이사는 최근 ‘어휘력 무료진단 사이트’를 개발했다. 교과서, 국립국어연구소 기초어휘, 동화책을 토대로 5000개의 어휘를 선정해 어린이들이 어휘력을 시험해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어휘력 측정에 걸리는 시간은 15분 가량. 아이들의 점수는 100점 만점에 평균 50~60점 수준. 남 이사는 “어휘력을 측정해보면 아이의 어휘량, 이해도, 활용능력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남 이사는 부모들에게 자녀들의 독서이력서를 만들어 보도록 권한다. 독서이력서는 곧 아이들의 정신의 지도이자 사고의 밭이기 때문이다.

독서이력서를 작성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흰종이에 초등학교 때 읽은 책의 이름을 생각나는대로 나열하고 각각의 책 옆에 그 책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이름을 쓰게 만든다. 마지막으로는 세 번째 칸에서는 그 책의 줄거리나 생각나는 내용을 쓰게 한다. 책을 건성으로 읽는지 꼼꼼하게 읽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읽은 책이 100권인데 주인공이나 줄거리를 기억하는 게 10개도 안되면 이것은 건성건성 읽었다는 증거다.

텔레비전, 컴퓨터 게임, 인터넷, 휴대폰 등에 마음을 빼앗긴 당신의 자녀들에게 지금 당장 ‘독서이력서’를 써보게 하자. 아이들의 정신의 지도가 순식간에 펼쳐질 것이다.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 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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