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밀키웨이 > 그의 법명은 '현소심(玄素心)'이었다


    


 

김형경씨의 소설에 대한 기억을 따라 올라가면 군 생활의 막바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겨울이 딸려 나온다. 강원도의 추위는 매서웠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야 할 만큼 조심스러운 말년 병장의 시절. 하루하루의 시간은 너무나 길었고 지루했다. 그 시절에 뜻하지 않게 만난 것이 바로 장편 「세월」이었다.
매케한 석탄 가스를 뿜어대는 페치카 옆에 웅크리고 앉아 「세월」을 읽었다. 분명 활자에 그리고 이야기에 목말랐을 게다. 그렇게 김형경이란 이름은 나와 첫 대면을 나눴고, 수년을 뛰어넘어 지난 토요일 사진으로만 바라봤던 그와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는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놓여 있었다.

1000매의 정신분석, 모험을 감행하다


"이번 소설은 막바지 작업이 다급하게 진행된 탓도 있겠지만 글쓰는 일이 직업이다보니 매번 새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설레거나 특별한 소감을 갖게되지는 않아요."
3년만에 전작 장편을 내놓은 작가의 첫마디치고는 정말 싱겁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아예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2,600매 중에서 1,000매 가량을 주인공의 정신분석치료 장면으로 채웠는데, 일종의 모험이었죠. 그 과정을 읽어가면서 독자들도 자신들이 안고 있는 심리적인 장애나 어려움을 함께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랬으니까요."
1,000매의 정신분석치료 장면의 주인공은 바로 '세진'이다. 세진의 직업은 건축가. 건축사무실의 밑바닥에서 시작해 당당한 전문 직업인으로 대접받는 성공한 30대의 여성이다. 매사에 빈틈이 없어 보이고 묘한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세진은 이성적이고 당당한 겉 모양새와는 달리 내면에 복잡한 상처와 아픔을 숨겨둔 그런 여성이다.
세진에게는 일종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인혜'. 학창시절 함께 자취를 했을만큼 가까웠던 사이였지만 세진의 마음이 견고하게 닫혀 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길로 떠나야 했던 그런 친구다.
그렇게 십년간의 떠도는 풍문에 의지해 서로의 안부를 듣던 두 친구는 '오늘의 여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준말인 '오여사'라는 모임의 결성식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다. 그 즈음 세진은 심한 정신적 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과 치료를 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어두운 과거와 고통스러운 만남을 갖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과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의 결핍과 성폭행, 그 때문에 자라난 이성적이고 강력한 자기 방어 의식들. 그 견고한 틀을 조금씩 깨고 나온 세진은 이제까지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던 허울을 벗어버리고 '야하고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여행길에 오른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혜도 마찬가지. 세진과의 이별 후 한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감행했지만 남자의 성 불능에서 오는 폭력과 음주를 견디지 못해 이혼하고 말았던 것. 그 대신 인혜에게 남은 사랑이란 삶을 생기 있고 역동적이게 하는 일종의 게임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인혜의 이런 의식은 진웅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고, 성적 장애를 가진 진웅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그가 가진 사랑에 대한 순수함과 열정에 새롭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성'의 코드로 정체성을 찾아간다

 "성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가장 본질적인 코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성 불능은 곧 억눌린 무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결국 억눌린 무의식은 분열된 자아로 나타나고 짐짓 욕망하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자신을 기만하고 만다.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결핍의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 사랑의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상처와 갈등을 만들어 내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상실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주인공인 세진과 인혜가 과거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그 안에 억눌려 있던 자아를 마침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은 억눌렸던 욕망의 이면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과정인 동시에 그동안 잊어왔던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동전의 양면은 서로에게 어떤 위협이나 억압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존재하고 있잖아요. 표면적으로는 여성의 정체성과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모두를 포용하는 보다 큰 인간의 문제로 다가서고 있는 셈이지요."
이제 제목이 담고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비로소 드러난 셈이다.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그 무엇, 내면에 엄연히 도사리고 있지만 결코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사랑을 갈구하는 대상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바로 선택을 결정하는 '특별한 기준'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 그 작용이 원활할 때 비로소 결핍의 충족과 함께 정체성에 대한 완결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 이제야 비로소 '나를 숙일 수 있는 마음으로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김형경씨는 자신의 법명이 '현소심(玄素心)'이라고 귀뜸한다. 한자의 뜻 그대로를 옮겨 보면 '검고 흰 마음'이 된다. 하나의 마음 안에 검고 흰 두 가지 속성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다. 결국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상반된 양면성을 고스란히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이어가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작별하고 돌아서는 순간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언뜻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 하나가 스쳐지나간다. 짐짓 모른척 발길을 돌려보지만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영하의 체감온도를 기록한 비오는 오늘. 그 낯설고 익숙한 얼굴의 또 다른 '나'는 어느 동네 어느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1,000매의 처방전을 읽고 난 지금도 그 낯설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내 안의 억눌린 욕망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일까?

 

- 웹진 부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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