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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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과 같은 책의 리뷰를 쓰기까지는 참 많은 망설임이 전제된다. 그리고 한참을 빙빙 돌다가 결국에는 시시한 결심 하나를 하고 열나게 키보드를 두드리곤, 쓱 지워버리고 도망치듯 창을 닫아버리고 만다. 내가 감히 평할 수 없는 높이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가타부타 지껄여대는 것은 나 자신의 무식함과 지적 빈곤감만 적나라하게 노출할 뿐이고, 그렇다고 '사실 난 이 책을 읽어도 잘 모르겠소' 라고 고백한다면 또 그건 내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질 않는다. 모르겠다. 이번 리뷰는 등록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데미안>은 어렵고 쉽고, 훌륭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내가 사랑하는 책이므로.

내 서재에 있는 책을 가득 늘어놓고 뒷표지에 붙어있는 정가와 관계없이 내 맘대로 가격을 매긴다면 <데미안>에는 얼마 정도가 좋을까? 글쎄, 아마 가장 높은 값을 매겨야 하지 않을까. 절대적인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 내가 읽은 책 중에 데미안보다 비싼 책은 없었으니.

한 권의 책을 탁, 덮는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대곤 한다. 아, 책값이 아깝다 내지는 딱 책값 만큼이구나. 그리고 드물게는 도저히 한 번에 책을 다 읽을 수 없어서 잠시 덮고 떨리는 심장을 꼭꼭 눌러야 할 때도 있다. 이성복의 아포리즘을 읽을 때라든가,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 <백년동안의 고독>을 백년동안 읽고 싶다고 생각한 그런 때. <데미안>을 처음 읽었던 것은 열네 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는 참 정신이 없었다. 그 소중한 책을 탁, 덮고 쭐레 쭐레 학급문고로 갖다 냈으니. 그러나 책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데미안>은 내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내 손에 쥐어졌을 때, 나는 쿵 쿵 뛰는 가슴을 꾹꾹 눌러야 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아서.

책을 한 권 읽을 때마다 내 영혼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책의 가격만큼, 혹은 그 이상(아주 가끔은 나를 더 부박하게 하는 책도 있지만). 세상에는 많고많은 고전이 있고 그런 책들을 단지 '읽는다'고 해서 저저히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데미안>은 이해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나처럼 주먹구구식으로 간신히 읽어내려가는 사람에게도 범치 못할 위엄과 감동으로 자리잡는다. <데미안>을 읽고 나서 당신의 영혼은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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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032da 2004-05-10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검색(문학)을 통해서 셰헤라제데님의 서재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책'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더군요...전 서양 고전을 많이 접해보지 못해서 역시 데미안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님의 리뷰를 보고서 한번쯤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책이 재미있고 감동적이면 그자리에서 읽어버리는 스타일이지만(10권짜리 장편소설이라면 하루에 1~2권 정를 읽어버림) 어떤 책은 읽다가 그것을 다 읽어 버리는 게 두려워서 한 챕터만 읽고 다음날 또 한 챕터를 읽고...그렇게 오랜시간에 걸쳐 읽어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꺼내서, 이제는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때 기분을 떠올리며 읽곤 한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세상에서 가장 읽기 싫은 책'이 되겠군요..^^
암튼 리뷰 잘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읽으세요~~
 
파라다이스 키스 Paradise Kiss 5 - 완결
야자와 아이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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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파라키스'가 끝났다. 드디어, 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정말이지 시원섭섭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결말은 시원하기 그지없고 질질질 끌다가 만화 자체가 초라해지는 우를 범하지 않고 제때 상큼하게 끝낸 아이 야자와의 솜씨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요새는 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리는 만화라고는 달랑 '파라키스'와 <홍차왕자> 뿐이었고, 그나마 얼마 전 나온 <홍차왕자> 21권을 보고 난 후 '역시 파라키스 뿐이야' 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었는데, 이렇게 끝나 버리다니. 이건 섭섭함 이상이다. 어쩌면 조금 슬프기가까지 하다.

'사랑은 정말' 이라는 제목으로 투니버스에서 방영되던 만화를 얼핏 보고, 참 유치찬란하고 비현실적인 그림체다, 하면서 비웃었는데, 친구가 추천해준 <파라다이스 키스>를 손에 들고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길쭉하고 밋밋한 실루엣에 콩나물처럼 큰 머리를 가졌던 인물들은 디자이너를 꿈꾸는 삼류(=_=;)학교 학생들로 바삐 살아가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건 공부밖에 없는데, 힘들여 겨우 명문고를 온 덕분에 열등생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유카리가 그들에게 모델로 스카웃되며, 얘기는 시작된다.

만화가라는 직업 자체가 더 아름다운 그림, 더 예쁜 화면들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보니, 패션계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아주 현명한 일이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아이 야자와는 만약 그녀가 디자이너였다면 건드릴 수 없었을 분야들을 자신의 만화 안에서 아주 자유롭고 화려하게 표현해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드레스의 색채를 비록 흰 종이 위의 검은 선의 만화로 직접적으로 표현해낼 수는 없을지라도, 그녀가 그려낸 것은 그 이상을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게 했으니.

그리고 처음에는 왠지 뜬금없다고 느껴졌던 죠지와의 로맨스 때문에 나는 코끝이 찡했다. '여자는 위험한 남자에게 끌리지만, 착한 남자를 선택하지.' 만고의 진리다. 이 만화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죠지는 위험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듯 냉정하고 차가우며, 그런데도 멋지고 따스하다. 모순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이런 남자에게 유카리가 끌리지 않을 재간은 없고(만화를 읽는 우리가 그렇듯), 그들의 연애는 위태위태하다. 야자와가 뛰어난 이유는 그 다음에 있다.

대개의 순수한(혹은 순진한) 만화가들은 각종 고난과 역경을 그 커플이 함께 맞닥뜨려나가게 하고, 결국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는 것쯤으로 결말을 맺는다. 혹시, 이 만화가도 그런 안이하고 평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는 결말로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했지만 역시 야자와는 달랐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게다가 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창조해야 하는-광기를 내부에 숨긴 멋진 디자이너 지망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이지만 가슴이 따뜻하고 똑똑한 모델 지망생이라면, 그들은 사랑은 할 수 있으되 연애를 지속시키기란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무튼 결국 이 무서운 만화가는, 그닥 길지도 않은 대사에서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핵심을 짚으며, 내 평생 처음으로 온몸으로 공감하는 연애를 하나 내놓고 만화를 끝맺었다. 그래서, 너무 말이 되고,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가슴으로는 공감이 간다. 슬프고 행복한 이야기다.

덧붙여 히로유키-미와코-아라시 간의 삼각관계 역시 행복한 결말이 됐다는 것에 안도하며, 아무래도 <내 남자친구 이야기>('사랑은 정말'의 원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다섯 권의 만화로도 흐뭇한 마음으로 내 지난 이야기에 안녕을 고하기엔 충분하니까. 참 고마운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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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맘 2004-04-2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정말'은 [내남자친구이야기]인데.. 물론 보셨겠지만..
[파라키스]도 [내남자..]도 제 책상에 꽂아두고 가끔씩 꺼내보고 있는 책이죠 ^^
 
은비가 내리는 나라 1
이미라 지음 / 시공사(만화)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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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순정만화를 읽겠다, 라고 다짐한 이상 이미라라는 이름을 피해가기는 힘들 것이다. 좋은 혹은 훌륭한 순정만화의 요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가장 요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그림체'일 것이며, 가장 정석대로 사람을 예쁘게 그렸던 만화가 이미라의 최고 전성기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은비가 내리는 나라>일 것이기 때문이다(문하생을 시킨다는 소문이 맞는 것인지, 그녀 후기의 작품의 그림체는 어설프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도 간혹 눈에 띄어 팬의 입장에서는 슬프다).

물론 반론은 있겠지만 작품의 배경 자체를 도깨비 나라로 설정한 것, 유니콘 왕자가 나오는 것은 좀 더 새롭고 미학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는지. 이미라의 히로인 '이슬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비밀을 많이 갖고 있고, 많이 고생하며, 늘 라이벌로 등장하는 '백장미'의 얼굴을 가진 '가시찔레', 그리고 역시나 빠질 수 없는 아름다운 남자 주인공들. 사실 이 작품의 시리우스는 너무나 헌신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유니콘의 왕자 역할에 적격인 듯 싶다. 대마왕님의 팬도 만만치 않겠지만.

이 책을 처음 보고 꼭 사리라, 다짐했던 것은 정말 커터칼로 조심스레 잘라서 액자에라도 넣고 싶은 그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차마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은 책방의 만화책을 그럴 수는 없었고, 언젠가는 이 책을 다 사려니, 늘 희망만 품고 있었었다. '하얀 천사'와 이슬비의 관계, 조종인과의 인연, 결국 다시 문제의 시초가 되는 도깨비 대마왕의 비밀 등 어찌보면 억지스러운 듯한 설정도 간혹 거슬리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미라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지닌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세심한 캐릭터, 유치함을 남발하지 않는 절제된 슬픔, 이것이야말로 순정만화의 필수 핵심 요소이고, 박희정이든 강경옥이든 황미나든 원수연이든, 자신의 취향에 맞는 만화가들은 백인백색이겠지만 이미라가 그려내는 아름다움은 그 모든 취향과는 무관하게,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이 조금 품격있고 절제된 미학을 담은 순정만화를 보고 싶다면, 그리고 너무 가슴이 저리고 복잡한 심리 묘사에 지쳤다면, 그냥 이 책을 펼쳐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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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왕자 21
야마다 난페이 지음, 최미애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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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순정 만화의 '오버'로 범벅된 눈물 질질짜는 애정 스토리가 지겨워졌다면, 이 만화로 눈을 돌려봐도 좋겠다. 홍차 속에서 홍차 나라 왕자님이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데다가 이 왕자님들이 또 외모와 몸매 역시 어디에도 안 빠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눈요깃감과 즐거움을 선사해줄 것 아닌가. 무엇보다 이 만화의 강점은 캐릭터의 생생함에 있다. 너무 자주 본 듯한 -털털하고 씩씩하나 마음 속은 여린 귀여운-승아가 주인공인 것은 좀 마땅찮지만, 예쁘장하고 몸매도 탱탱(!)하지만 약간 머리가 빈 듯한(그러나 20권부터 훌쩍 성숙해졌으니 기대하시라) 미경이, 늘 그렇듯 오랫동안 승아와 함께한 단짝친구이지만 홀로 가슴앓이 하는 남호(미경이는 '나무'라 불렀었다-_-;), 그리고 홍차왕자도 각자의 홍차에 따라-얼 그레이,세일론,아삼,오렌지 피코 등으로 나뉘어 있다. 다정다감한 얼 그레이, 냉소적이지만 뛰어난 미모를 갖춘 세일론, 화끈하고 남자다운 아삼, 깜찍하고 발랄한 피코,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비밀을 간직한 다즐링 왕자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이 만화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일단 여자의 수가 적은데다가 작가가 남자보다 무신경하게 그린 듯 외모가 너무 수수하다는 것이 첫째고, 뒤로 갈수록 야마다 난페이 역시 '등장인물 얼굴 다 똑같아지기'의 함정에 빠져 버린 것 같아 아쉽다. 특히 최근 나온 21권을 보면 애들이 다 똑같이 생긴데다가 책의 구성도 정신없어져서 실망스럽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껏 읽어오는 동안 아주 순수한 웃음과 두근거림을 준 기특한 만화책이다. 특히나 홍차왕자들이 2등신으로 변신했을 때의 캐릭터는 어찌나 귀여운지 깨물어주고 싶다. 앗!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홍목단을 빼먹었군. 홍목단의 2등신은 멋지면서도 앙증맞기 이를 데 없다. ㅎㅎ 아직 안 읽어봤다면 반드시 읽어볼 것. 그러나 사실 홍차 이야기는 별로 없고, 대신 어디 가서 홍차 주문하기에 수월해지는 장점은 있다. 그 홍차를 마실 때마다 피식피식, 홍차왕자들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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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맘 2004-04-28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홍차왕자]덕에 홍차를 사랑하게 되었죠 ^^

... 2008-01-12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뇽......................................

몰라도되............ 2008-01-12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사람입니다.용치......................................................

라일락 2008-01-12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망님....저는 원래 홍차를 좋아하는 데용......................................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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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책은 더도 덜도 않고 딱 별 세개짜리 책이다. 지금 현재 책에 별점이 별 셋 반이 평균으로 매겨져 있으니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한가보다,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역시 박완서! 라고 하며 별 너댓 개를 남기는 사람과, 이게 무슨 소설이냐? 하고 냉소적으로 두세 개만 대강 던져주고 간 사람이 합심하여 이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째 이렇냐고? 바로 박완서가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박완서를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지몽매한 일이고 찝찝한 일이 될 테니, 나라도 이렇게 주절거려 놓고 가야 할 것 같다. 왜 이 책이 별 세개짜리인지.

<아주 오래된 농담>을 그냥 집어들었을 때, 나 역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의사 심영빈은 한광, 유현금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요렇게 책이 시작되더니, 그 다음부터 책 한 권 내내 이보다 긴 문장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초등학교 동창생이라더니 갑자기 한 사십 년을 훌쩍 뛰어넘어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할 건 뭔가. 야야 거리면서 '~했냐?' '~하네.' 따위의 말투를 툭툭 내뱉는 중년이라니. 참고로 이 책을 읽었을 때 난 아마 고등학생쯤이었을 것이고 박완서 글을 언어 지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책 한 권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일종의 문화적 충격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천의무봉의 작가라면서 도대체 문체는 왜 저렇게 빈약하고, 도대체 중년의 남녀가 저렇게 말하는 게 말이 돼? 그랬다, 작가는 마흔 여섯쯤의 나이는 완전히 '애송이' 취급이었다. 게다가 작중 인물에 대한 세심한 심리묘사는커녕 몇십 평생 살아온 이야기가 몇 장이면 후두둑 끝났다. 걸쭉한 입담이라고 하기에는 문장에 너무 정성이 없었다. 이게 뭐야?

그럼, 잠깐 박완서에 대해 생각해 봐야한다. 자본주의, 가족, 진실, 이런 저런 것들이 얽혀있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알다시피, 박완서는 이 소설 속 인물들보다 나이를 곱절 가까이 먹은 '할머니' 작가시다. 전쟁을 겪고, 남편과 아들을 잃고, 삶의 인생역경을 헤쳐 나오면서도 맑고 투명하고 발랄한 글을 써내는 이 노(老) 작가에게, 어차피 생이란 가벼운 농담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깊은 눈으로 보고 전해주는 이 현명한 작가에겐 말이다. <아주 오래된 농담>을 계속 읽고 있으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내 인생을 이렇게 적으면 어떻게 되려나? 별 것도 없을 게다. 매일 지치고, 짜증나고, 별별 속썩는 일에 시달리는데도, 막상 인생역정 말해보라면 그닥 자신있게 할 말이 없다. 그럼, 내 삶 역시 농담일 뿐?

가족이라는 끈끈한 매듭이 한편으로는 끈적하고 불유쾌한 굴레라는 것을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선택한 적도 없는데 다시는 돌이킬 수 없고,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 낳아 잘 기르자지만, 아직도 설문조사를 해보면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는 응답이 80%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 지레 그 사람의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것도, 거꾸로 희망을 앗지 않기 위해 사실을 숨기다가 병을 직시하지도 못하고 환자가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현실은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모순에 모순이 더해지며,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박완서는 바로 그 순간에 펜을 대고 적나라하게 전한다. 나무랄 데 없는 의학교수 영빈과 현금의 불륜, 현금과 영빈의 아내가 같이 다니는 불임 클리닉, 영빈 동생 영묘와 시댁의 갈등, 영묘의 남편 강호의 불행한 죽음과 치킨 박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자, 그러니 이제 별 셋은 단순히 별 셋이 아니다. 농담이란 극히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웃음을 유도하는 도구. 이상하게도 이 어처구니없는 소설을 읽고 나면 별 다섯짜리 어느 소설보다도 웃음 뒤의 씁쓸한 여운이 길게 남는다. 박완서를 의식하지 말고 소설을 읽되, 소설을 덮는 순간 박완서를 느끼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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