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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다이스 키스 Paradise Kiss 5 - 완결
야자와 아이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드디어 '파라키스'가 끝났다. 드디어, 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정말이지 시원섭섭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결말은 시원하기 그지없고 질질질 끌다가 만화 자체가 초라해지는 우를 범하지 않고 제때 상큼하게 끝낸 아이 야자와의 솜씨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요새는 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리는 만화라고는 달랑 '파라키스'와 <홍차왕자> 뿐이었고, 그나마 얼마 전 나온 <홍차왕자> 21권을 보고 난 후 '역시 파라키스 뿐이야' 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었는데, 이렇게 끝나 버리다니. 이건 섭섭함 이상이다. 어쩌면 조금 슬프기가까지 하다.
'사랑은 정말' 이라는 제목으로 투니버스에서 방영되던 만화를 얼핏 보고, 참 유치찬란하고 비현실적인 그림체다, 하면서 비웃었는데, 친구가 추천해준 <파라다이스 키스>를 손에 들고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길쭉하고 밋밋한 실루엣에 콩나물처럼 큰 머리를 가졌던 인물들은 디자이너를 꿈꾸는 삼류(=_=;)학교 학생들로 바삐 살아가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건 공부밖에 없는데, 힘들여 겨우 명문고를 온 덕분에 열등생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유카리가 그들에게 모델로 스카웃되며, 얘기는 시작된다.
만화가라는 직업 자체가 더 아름다운 그림, 더 예쁜 화면들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보니, 패션계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아주 현명한 일이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아이 야자와는 만약 그녀가 디자이너였다면 건드릴 수 없었을 분야들을 자신의 만화 안에서 아주 자유롭고 화려하게 표현해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드레스의 색채를 비록 흰 종이 위의 검은 선의 만화로 직접적으로 표현해낼 수는 없을지라도, 그녀가 그려낸 것은 그 이상을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게 했으니.
그리고 처음에는 왠지 뜬금없다고 느껴졌던 죠지와의 로맨스 때문에 나는 코끝이 찡했다. '여자는 위험한 남자에게 끌리지만, 착한 남자를 선택하지.' 만고의 진리다. 이 만화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죠지는 위험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듯 냉정하고 차가우며, 그런데도 멋지고 따스하다. 모순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이런 남자에게 유카리가 끌리지 않을 재간은 없고(만화를 읽는 우리가 그렇듯), 그들의 연애는 위태위태하다. 야자와가 뛰어난 이유는 그 다음에 있다.
대개의 순수한(혹은 순진한) 만화가들은 각종 고난과 역경을 그 커플이 함께 맞닥뜨려나가게 하고, 결국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는 것쯤으로 결말을 맺는다. 혹시, 이 만화가도 그런 안이하고 평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는 결말로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했지만 역시 야자와는 달랐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게다가 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창조해야 하는-광기를 내부에 숨긴 멋진 디자이너 지망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이지만 가슴이 따뜻하고 똑똑한 모델 지망생이라면, 그들은 사랑은 할 수 있으되 연애를 지속시키기란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무튼 결국 이 무서운 만화가는, 그닥 길지도 않은 대사에서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핵심을 짚으며, 내 평생 처음으로 온몸으로 공감하는 연애를 하나 내놓고 만화를 끝맺었다. 그래서, 너무 말이 되고,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가슴으로는 공감이 간다. 슬프고 행복한 이야기다.
덧붙여 히로유키-미와코-아라시 간의 삼각관계 역시 행복한 결말이 됐다는 것에 안도하며, 아무래도 <내 남자친구 이야기>('사랑은 정말'의 원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다섯 권의 만화로도 흐뭇한 마음으로 내 지난 이야기에 안녕을 고하기엔 충분하니까. 참 고마운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