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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 1부 1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혹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조지 오웰과 신경숙,카프카와 김승옥 등을 장황하게 오가며 길게 늘어지는 대답을 할 것이다.그러나 누군가 혹시라도 당신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은 목이 메어옴을 느끼며 대답할 것이다.내 인생의 책은 <토지>이며 나는 그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참 행복했다,라고.<토지>는 불가사의한 작품이다.글이 도저히 써지지 않을 때 펜을 가만히 원고지에 대고 있으면 다시 글자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는 박경리 선생의 이야기는 차라리 경이로운 전설이다.몇 권의 몇 페이지를 펼쳐들듯 바로 그 순간 책은 엄청난 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그렇다,다름아닌 소리인 것이다.
삶이 지치고 고단하다고 느껴질 때,나의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제멋대로 얽매여져 있다고 느껴질 때 나는 언제나 흐리멍텅한 머리로 <토지>를 편다.그러면 순식간에 그 수많은 사람들의 오래된 이야기가 엄청난 삶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일제 치하의 한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가 없지는 않았고,광복의 가슴 먹먹한 감동은 수없이 재생산되어 우리에게 아로새겨졌다.그러나 그 누가 그 모든 것을 '삶'으로 끌어 들었으랴.혹자는 말한다. <토지>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민족의 처참함에서 조금 많이 비껴나 있다고. 그리고 어떤 이들은 주요 등장인물만 6백 명이 된다는 이 거대한 소설에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돌려 버리기도 한다.그렇게 긴 이야기를 써냈으니 문학사적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려니,하는 어색한 짐작으로.나는 감히 얘기한다. 당신들은 잘못 알고 있다고.
처음 내가 이 책을 접한 것은 중학생때였다. 중학 입학 선물로 이모가 토지 전집을 한 질 들여주셨고,나는 약간은 누렇게 빛이 바랜 듯한,게다가 각 권마다 양도 일정치 않은 솔출판사의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발췌독이었다.최참판댁 애기씨 최서희의 아름답고 기품있고 고집센 모습,그리고 그녀의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길상을 사랑했고,용이에게서 따뜻함을 느꼈으며,월선을 보며 울었고,환이와 강쇠와 휘를 보며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복잡한 정세 얘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책은 몇 장씩이나 한꺼번에 넘어가 버렸고 그러면서도 나는 21권짜리 <토지>를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침대에서 안고 뒹굴며,결국은 몰려드는 잠을 내쫓아가며 새벽 4시,5시까지 그 속에서 살다 나오곤 했다.그렇게,이제는 10년이 지나버린 것이다.
기생 기화가 된 봉순이의 자살도,의지박약처럼 보였던 임명희의 운명도,좋아할 수 없었던 이상현도,이제는 그들의 나이 가까운 내가 이해할 수 있다.그 끈질긴 삶의 질곡들과 숨결 숨결들을 어떻게,이제는 감히 어떻게 말할 수조차 없다.그토록 몸서리쳐지던 임이네조차 이제는 나도 그녀의 죽음을 매번 접할 때면 홍이처럼 가슴이 아프다.얼마나 죽기 싫었을까,하며.편한 대로 대하 소설이니 역사 소설이니 여러 수식어가 <토지>앞에 붙지만,나는 '소설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가장 위대한 답변으로 우뚝 선 이 작품에 대해 아무런 수식어도 붙일 수가 없다.
나는 아무에게도 <토지>를 권해본 일이 없다.그것은 내 주제에 넘치는 일이 될 것이며,사뭇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그러나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병법을 논하지 말라 했듯, <토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어쩌면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토지>는 약동하는 우리 자신의 생명에 대한 본질적인 꿰뚫음이므로,그 긴긴 역사를 가슴에 담을 정도의 사람이라면,어쩌면 나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 사랑을 느낄 것 같다.그 모든 아픔과 슬픔을 고이 접어 가슴에 담을 정도의 사람이라면,사랑하는 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수 있을 것이므로.나는 아무에게도 <토지>를 권하지 못하지만,그것은 내 자신의 인생을 벌거벗겨 내놓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지만,그러나 나는 <토지>를 읽어본 적이 있다고 나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혈맥을 따라 맥맥히 흐르는 우리의 역사와,삶과,사랑과 미움의 역사로 인하여 어느 혈연보다도 짙은 정을 느끼게 되리라.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