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팀 버튼 지음, 윤태영 옮김 / 새터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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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팀 버튼을 좋아하지만 아무에게도 나와 같이 팀 버튼을 좋아하자고 조르진 않겠다. 웁, 이 책을 보고 나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서점의 모든 책들은 사놓고 보면 갑자기 재미가 없어지고 신비하지도 않은 건지. 처음 서점에서 얼핏 이 책을 보고 사고 싶다, 사고 싶다 중얼거리다 결국 알라딘에서 사놓고 보니 갑자기 무덤덤하고 평범해져 버린다. 어쨌든 팀 버튼은 팀 버튼이다.

사실 난해하다기보다도 너무 팀 버튼스러운 내용과 그림 덕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흡사 '크리스마스 악몽'의 박사처럼 살짝쿵 머리 뚜껑을 열고 '내 뇌에 뭐가 있는지 볼래?' 하는 듯한 팀 버튼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아들이 굴인 건 너무하잖아.ㅠ_ㅠ 내가 압권이라고 느낀 것은 주방 기구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깡통 로봇을 낳은 아내의 이야기. 코드를 꽂아야 아이는 살아 있는 듯 보이고 간혹 쓰레기통으로 오해를 받는다.

그는 비참한 것들을 유쾌하게 상상하고 그로 인해 자유로워진다.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은 팀 버튼의 보조날개 같은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해내는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책의 완성도나 내용의 깊이를 따지는 사람이라면 그냥 서점에 서서 읽으시길. 그러나 어쨌든 팀 버튼의 팬이라면 그를 따라 자신만의 보조 날개를 달아볼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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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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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박완서 선생은 갈수록 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목>에서 <오래된 농담>까지, 읽어가면 갈수록 문체는 스타카토처럼 톡톡 튀어가고 스토리는 발랄하며 때로 뒤통수를 칠만큼 아찔하고, 배우는 나이를 이름 뒤 괄호와 같이 끌고 가는 게 가장 불리한 직업이라지만 박완서 선생을 보면 그건 배우뿐이 아닌 듯 싶다.

세상에 책을 읽자고 TV에서 떠드는 나라도 흔치않을 테지만, 어쩜 그렇게 말들을 잘 듣는지 그 프로그램의 권장도서 목록이 베스트 셀러 목록과 판박이 스티커 같은 것을 보면 기절할 노릇이다. <그 많던 싱아..> 앞에도 스티커 같은 '낙인'이 찍혔을 때 얼마나 서러웠던지. 그것은 '천의무봉'의 경지에 이르른 선생의 품격 자체를 깎아먹는 짓만 같아서 민망하고 죄스럽고 못할 노릇이었다(내가 한 것도 아니면서).

박완서 선생은 비평가들이 참 안 좋아할 만한 작가이다. 그래도 문학 비평을 하려면 연관없는 사건들이 좀 나열되어 있어야 하고, 인물들이 왜인지 모를 행동들을 해야 하며, 그래야 비평가는 잘난 척 하면서 그게 왜 그런지 알아? 라고 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선생은 도대체가 막히는 곳이 없다. 마치 퇴고라고는 생각도 없는 양 날것 그대로의 문장들을 착착착 회치듯이 종이 위에 얹어 놓는다. 그런데 이게 또 기막힐 노릇, 이 선도 높은 글자들은 독자의 눈과 머릿속에 쏙쏙 박혀 달짝지근하게 흡수된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가 하나 둘 꺼내주던 곶감같이 환장하게 이끌리는 맛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퇴고 따위는 필요가 없었던 거다.

작가는 영혼의 상처를 파먹어가며 글을 쓴다던데, 선생의 글은 괴롭지도 노여웁지도 않고 그저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손가락을 물고 곰곰히 생각에 잠긴 듯한 선생의 어린 시절처럼. 작가 신경숙은 '세상 시시한 이야기는 (박완서)선생이 있어서 기쁠 것이다' 했지만, 시시한 삶을 사는 우리들이야말로 기쁘다. 사는 거 별 거 아니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듯한 선생의 목소리는 시시한 세상에 시시하지 않게 살아나갈 힘이 되어주고 시시한 삶을 흘깃 돌아보며 픽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글을 쓰리라는 예감으로 책을 맺는 박완서 선생, 그것은 생의 예감이다. 아아, 정말 시시한데 왜 이리 웃음이 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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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2004-08-0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선생에 대한 예찬인지, 박완서 선생의 책에 대한 리뷰인지?

셰헤라자데 2004-08-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리뷰를 쓰라고 되어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예찬이 되어 버렸나 봅니다. 기가 찰 노릇이지요. 리뷰가 맞는지도 아리송한 글이 '이주의 마이리뷰'로 선정되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삿포로에서 맥주를 마시다 - 쾌락주의자 전여옥의 일본 즐기기
전여옥 지음 / 해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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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나는 몸이 비비 꼬이기 시작했다. 전여옥은 글을 맛깔나게 쓰지는 못해도 입에 쩍쩍 달라붙게 쓰는 사람이다. 수많은 비난의 화살은, 반대로 생각하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대목이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책을 들었다. <일본은 없다>가 비록 걸작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화제작이었고, 전여옥의 성향은 아주 걸맞지는 않더라도 나와 교차하는 지점이 있었으며, 한 4년쯤 지나고 나서 <일본은 없다>를 다시 읽어보니 허술한 문체와 너무 직설적이고 몰아붙이는 말투가 싫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재미는 있었다. 나는 전여옥을 믿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다. 쾌락주의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싶었다면 더욱 감각적으로 더욱 매혹적으로 글을 꾸몄어야 했다. 작가의 식성이 까다롭든, 작가의 먹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든, 그것은 독자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우리가 읽고 싶은 것은 그러한 미각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묘하고 쌉싸름한 스시 속 와사비의 맛에 대한 표현이며, 차라리 일본 곳곳 명소에 대한 세심하고 자상한 설명이며, 그것도 안될 바에야 어디 가면 뭐가 맛있다는 철저히 정보 위주의 여행 가이드 정도 수준이나 되어라, 하는 것이다.

상당히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표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 읽고 나서도 힘이 쭉 빠지게 한다. '글맛 아는 작가' 라던 어느 신문사 기자의 리뷰가 째려보고 싶을 정도로 짜증난다. 입에 짝짝 씹히던 일본도, 그렇다고 작고 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하다는 일본도 없다. 정말 일본이 행방불명되어버린 책이다. 가끔 자기 감정에 복받쳐서 횡설수설하는 전여옥의 글이 있다. 아직 중심을 잘 못 잡은 탓인 것인가, 때로 안쓰러울 정도로 빈약한 글들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글들에서 약간 나은 정도다. 차라리 TV 프로그램에 대해 시원하게 욕하는 작가의 글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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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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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리뷰를 얼핏, 전혜린에 대한 지독한(이라고까지 하긴 뭣하지만) 혹평이 눈에 띄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사람들은 소문을 내고 가까운 사람을 데려와 그 음식을 맛보인다. 그것은 공유한다고 해서 닳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다르다. 배타적이 된다. 소유하고 싶은 독점욕이 싹트기 시작한다. 언젠가 은희경의 소설에서 읽었던 이야기이다.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살인의 추억'에 삽입되어서 너무 많은 이들이 이 '유명하지 않은 노래'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나의 한없이 우울한 빛깔을 그려주던 이 노래가 매일 극장에서 울려퍼지는 것보다도 더욱 참을 수 없던 것은 나의 상처와, 방황과, 말하기 싫은 침묵의 퉁명스러움을 너무나도 무심한 이들이 듣고 있다는 치욕감이었다.

전혜린은 존경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오래 살지 그랬나, 하고 아쉬워할 수도 없다. 그저 그녀는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저편에서 눈동자를 빛내며 기름도 없는 등잔의 불꽃처럼 비현실적으로 타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학문적인 성과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자살한 것이 훌륭한 일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녀의 글 행간행간에서 자꾸 삐져나오려고 하는 앎에의 갈망과 삶을 살아숨쉬는 치열한 의지 때문이다. 그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선택해서 살았고,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 버리라던 카프카 못지 않게,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불태워 버림으로써 진정 영원히 남게 된 것이다.

[먼곳에의 그리움]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웃긴 일이다. 그리고 전혜린의 글이 아무나 읽을 수 있도록 서점에서 대량화되어 팔리고 있다는 것도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진실보다 무거운 신화와 전설에 묻혀버린 그녀를 나무라거나 혹은 비웃게 됐다. 그러나 나는 몰래 기쁘다. 어딘가 예전 나의 열여덟때와 같이, 전혜린의 눈빛에 이끌려 누군가 - 삶이 어떤 것인가, 생의 한가운데 서서 곧은 시선으로 죽음과 대면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또 생겨나게도 됐기 때문이다. 단 그런 사람이 너무 많지 않길 바란다. 전혜린과 그녀의 삶은 아무나 덥석 집어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짧은 생을 산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긴긴 생을 낭비하며 파먹고 사는 일이다. 이제야 전혜린은 혹자의 비웃음과 다수多數의 무관심과 나같은 이를 미치도록 매혹시키는 진실로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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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영혼의 순례 - 심영섭의 영화 일기
심영섭 지음 / 세상의창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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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심영섭이라는 이름 석자를 안다면 조금쯤 망설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심영섭'보다는 부족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아무나가 덥썩 집어들기에는 너무도 무모한 글이다. '심영섭이라고, 아줌마 같이 생긴 평론가, 실제로도 아줌만데,난 그런 스타일리스트적인 평론이 좋거든.' 대학에 입학하고 첫 학기에 들었던 연극 수업의 선생님은 이런 표현으로 한 영화평론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나는 그 선생님의 수업이 좋았고, 그 선생님의 지성도 좋았으므로, 덩달아 심영섭의 글을 읽으며 좋아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역시나 무척 만나서 기쁜 글이었지만 그러나 좋아하긴 힘들었다. 임상심리학 레지던트였던 그녀의 글은 퍽 난해했고 난처했고 때로는 짜증이 났다. 그러나 '씨네21'의 기사 중 '이 글은 뭔가 달라, 진짜야' 라는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심영섭의 글이었다. 그랬다, 심영섭은 '진짜'였다. 이 책도 '진짜'긴 한데, 무언가 미진하다. 심영섭의 또다른 책 한 권을 더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의 글은 예고없이 마주쳤을 때 가장 만족스러운 것도 같다. 그러나 어쨌든 영화를 읽어내는 그의 시각에 빠져들었거나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단 절대 영화 입문서로는 읽지 말 것. 나로서는 '씨네21'에 평론상으로 당선된 작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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