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환상동화집
헤르만 헤세 지음, 정서웅 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산 첫번째 이유는 물론 작가의 이름이 헤르만 헤세이기 때문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표지의 모습은 내 눈길을 끌었다. 흡사 목각 판화같은 담담하고 꺼끌꺼끌한 터치, 맨 밑바닥에 새겨진 여자와 난쟁이의 모습, <환상동화집>이라는 제목보다도 더 환상적으로 보이는 그 표지에 나는, 솔직히, 마음을 뺏겼던 것이다.
심심할 때면 아무데나 펼쳐서 하나씩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끔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아름답고 상큼한 동화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헤르만 헤세가 정신병원에서 썼다는 이야기에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더 '동화'스러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르헨',동화라는 뜻의 제목(아, 어렸을 적 읽기 시작해 중고생 시절까지 나를 지배하던 그 전집의 제목)이 오히려 반어적으로 느껴질 만치 복잡하고 기묘한 이야기들. 아 그래, 차라리 '기묘한 이야기'라고 이름붙여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하나 더 솔직해지자면, 이 책은 나와 코드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짧고 간결한 이야기들은 때로 너무 급하게 결론을 향해 치닫고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설익은 밥을 씹듯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헤르만 헤세인데, 대가의 이름은 나를 주눅들게 하고 동시에 탄력을 실어준다. 으흠, 더 깊은 뜻이 있을 터인데, 하고 말이다. 그렇게 어지러운 발자국을 책 위에 남기는 요즘의 내 맘이 편할 턱이 없다.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는 알겠지만 <데미안>도 <싯다르타>도 아닌 이야기들에서, 동화의 탈을 쓰고 흡사 악보에서 튀어나온 음표 몇 개인 양 뻘쭘한 이야기들에서 삶의 의미와 역경과 고난, 철학적 사유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어쨌든 나 역시 결론으로 허둥지둥 달려가자면, 웬만큼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좀, 말리고 싶은 책이다.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되 어딘가 모르게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소장하고 싶지는 않은 책에 가까운 이 <환상동화집>의 매력은, 아무래도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스며들 듯 싶다. 그로테스크, 속에서도 기꺼이 기쁨을 얻는 나이지만 이번엔 좀 아니다 싶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이 엽기에 가깝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깔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책을 펼쳐서 제일 먼저 만났던 '난쟁이'가 그래도 그나마 기꺼웠다. 표지는 날 속이지 않았던 것이다. 흉측하고 지적인 난쟁이, 자신의 존엄과 사랑하던 강아지를 잃은 후 악랄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주인의 연인에게 복수를 하는 그의 모습의 의미보다는 아름답고 고귀하고 냉정한 그의 주인과 난쟁이의 극명한 대립이 '이미지'로써 더 강하게 남아있는, 약간 음울하고 비현실적인 표지의 담담하고 꺼끌꺼끌한 인물들은 그렇게 이야기 속에서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