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련하듯 떨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외줄타기

물의 정거장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그녀,전경린의 소설을 읽다보면 내 몸 어느 한 부분이 나도 모르게 경련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왜,그럴 때 있잖아요.하고 싶은 말을 참을 때 눈 바로 밑의 근육이 푸들푸들 떨린다든지 하는 일이요.그런데 이 책을 읽고는 역시 그녀는 써커스의 외줄타기 곡예사였더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긴 봉을 들고 단지 온 몸의 평형 감각을 이용해서 줄 위를 걷고 때로는 그 위에서 자전거도 타는 곡예사 말이에요.

이청준 선생은 이 소설을 '좋게 보면 문학은 결국 받아들이는 것인데,이 작품도 '싸우다가 슬그머니 받아들이듯' 세계를 포용하고 있다'고 하셨다지요.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시일이 지날수록 그 말씀이 전경린의 문장 곳곳에 스며들어 어느덧 제 삶에 받아들여지고 있더군요.역시 대가의 안목은 흔히 꿰뚫어볼 수 없는 말해지지 않는 것들까지 말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메리고라운드 써커스 여인]의 제목이 아직도 계속 입 속에 맴돌지만 사실 처음에 제 마음을 빼앗았던 것은 [달의 신부]였습니다.늑대의 영혼을 지닌 여자,자유로운 방랑자로서의 기억을 모두 잃고 자신만을 위하는 남편을 만나 시어머니와 오손도손 살림을 꾸려나가는 여자,그러나 만월이 뜨면 영혼 깊은 곳에서의 부름을 어쩌지 못해 힘겨워하는 여자는 같이 가자는 늑대 언니들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대가로 하루하루 엷어지는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어쩌면 전경린의 모든 여자들은 달의 신부인지도 모르지요.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도,왠지 자신의 뒷배경과 이질감을 느끼게 하던 그 여자는 결국 염소를 몰고 떠나버리지 않습니까.그러나 [부인내실의 철학]의 희우는 매일 자신을 죽이며 공무원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죠.자신을 '때려야만 다리를 벌릴 수 있'는 남편과,그 남편의 아이를 키우며,기윤이라는 남자와의 관계를 숨긴 채 가정은 유지됩니다.그러나 왠지,그 여자 희우도 위태롭지 않습니까.그녀는 끝까지 살아 남으리라,남편도 기윤도 죽고 아이도 자신을 잊을 때쯤 버려진 폐가처럼 시들어 가리라,생각하지만 이미 그녀는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욕망과 현실은 늘 상충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경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느 하나를 선택해 버리기 일쑤입니다.'스무 살을 삶으로 끌어들이지 마라'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래요. 외줄타기는 외로운 일입니다.밑에 아무리 안전한 그물망을 쳐놓았다 하더라도요.그 줄 위에 서는 것은 온전히 자신 혼자이며,의지할 것은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지탱하는 균형 감각뿐입니다.떨어지면 그것으로 야유를 받고 말죠. 이 곳 아닌 다른 곳에 영혼을 두고 온 사람들은 중력을 무시하듯,몸이 제멋대로 떠올라 외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는지도 모릅니다.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설 수 없는 사람들,욕망의 부름에 공명하는 사람들은요.

전경린은 여전히 경련하듯,의지와는 무관한 움직임을 담았습니다.책을 펴들자마자 처음 나오는 작품의 제목대로,겨울 바다에는 정말 젖은 가방들이 떠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삶을 산다는 것,그리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비슷할 테니까요.어쩌면 저도 이번 겨울에는 바다에 가서 오랜만에 가방 하나를 버리고 와야할 것 같습니다.그러나 제가 바다에 가게 될지,그것은 알 수가 없군요.늘 그렇듯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대개 절반 정도니까요.흐르는 물,멈춰서는 정거장,그 역설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진 전경린의 <물의 정거장>은 知와 未知 사이의 그토록 매혹적인 떨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