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지음 / 이레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지선 씨를 처음 본 것은 다른 많은 이들이 그렇듯, KBS <인간극장>에서였다. 인터넷에서 몇몇은 '꿈에 나올까 무서워요,엽기에요' 했다던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귀여운 느낌이 들어 채널을 고정시켰었다.
원래 즐겨보던 프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더 심한 화상 환자는 본 적이 없노라고 인정하는 '화상 1등' 지선 씨는, 전신의 피부가 다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부자연스러워 보였고 등이 굽어 있었다. 많이 나아진 거다, 예전에는 가만히 있어도 침이 질질 흘렀고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조차 없었다, 말하는 지선 씨는 피부가 너무 가렵고 땡기기 때문에 밤에 쓰고 자야 하는 빠듯한 마스크를 쓰고도 엄마에게 '마스크 맨~' 하며 장난을 치는 내 또래의 해사한 여대생이었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성공기가 너무 흔하게 나돌아다니는 요즘 세상에, 나를 찡하게 한 것은 그녀의 투둘투둘한 피부도,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졸업반으로 아이들을 좋아했다던 그녀의 경력 탓도 아닌, 바로 그 유머 감각이었다. 책 속의 그녀는 예상과는 달리 사진을 몇 장 끼워넣지 않았다. 자꾸 before 와 after 를 비춰주던 카메라의 시선과는 달리(그 정도로 그녀는 예뻤다), 그녀는 단 두어 장의 사진만 끼워놨을 뿐, 책 속에서 줄곧 그녀의 일관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고 있었다. 읽는 동안 몇 번 나는 눈물이 글썽,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하나씩 하나씩 옆 침대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자신은 살아 나가야겠다고 다짐하던 그녀, 이것은 '덤'으로 받은 인생이기 때문에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뿐이라는 그녀 앞에서 '내가 만약 저렇게 되면 죽고 말지.' 라는 말은 얼마나 그 말을 한 자신의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발언인지 모르겠다. 뭐든지 경계를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애인, 혹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하는 값싸고 얕은 동정과 연민으로 그녀를 대하기 십상일 테지만, 그리고 나 역시 이전에는 그런 부류 속 뻔한 인간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정말 향긋한 사람 냄새를 오랜만에 맡으며 감사할 수 있었다. 하나님도 안 믿고 상투적인 감동 스토리라면 질색하는 내가 말이다.
산다는 것,그게 무엇일까.백화점이 무너져도 빗물에 젖은 박스를 뜯어먹으며 보름을 버티고 살아나는 것이 사람이듯, 온몸이 불에 타서 죽을 줄만 알았던 상황에서도 살아나는 것이 사람이다. 지선 씨는 스스로 그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으나 신에게 선택됨으로써 그 누구보다 고귀하고 향기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높은 산을 넘은 사람은 낮은 산을 수월하게 넘는다. 그녀는, 고만고만한 둔덕에서 신경질을 내며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들 위에서 날개를 펴고 두둥실 날아올라 있을 것이다.
'신의 맷돌은 비록 느리지만 아무리 작은 낟알도 빼놓지 않는다'라는 서양 속담이 생각난다. 불합리하다, 불공평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말을 내뱉는 우리에게 신은 얼마만큼의 경사진 언덕을 건너라, 바라고 계실까. 지선 씨의 글들은 매우 유쾌하다. '괴물'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격상된 것을 기뻐하는 그녀의 글 속에서는 문장마다 볼록볼록 삶의 의지와 경쾌한 리듬이 살아 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이렇게 큰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받음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구나.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라고 수백 번씩 똑같은 억양으로 지껄이지 않고도 이처럼 명료하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것은 감동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경건하고도 살가운 어떤 것이었다.
이 별 다섯 개는 그녀의 문장력이나 글의 구성력에 주는 점수가 아니다(그녀의 글솜씨도 물론 충분히 별 다섯 개를 바칠 가치가 있지만). 연일 자살 소식이 들려오던 어떤 날, 스스로의 삶을 향기있는 것으로 또 가치있는 것으로 가꿀 수 있는 방법은 어느 곳에나 숨어있는 법이라고, 그렇게 따뜻하게 충고해줄 수 있는 내가 아는 최고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