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연수, 읽고 답하다 _2015년 11월 25일



오늘 홍대 레드빅 스페이스에서 열린 김연수 작가님 북토크에 다녀왔어요.^^

오늘의 주인공은 물론 김연수 작가님이시지만, 또 다른 주인공'들'이 있었지요. ^^


아참, 그전에,

※ 스크롤 압박 대박 주의....;;;;;

(쓰고 보니 겁내 기네요. 민망합니다...;;;;)

 

바로 이 아이들! 이번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온 개정판 삼종 세트! ^_^


스무 살

사랑이라니, 선영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개정판이 나와준 것만으로도 기쁜데, 이렇게 기념하는 자리까지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작가님도 그동안 서점에서 책을 구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고 하셨는데, 우어어, 독자들은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요! >.<


 

"시간이 갔다는 걸 재확인하는 기회였어요. 좋기도 하고, 시간이 언제 이렇게 갔지... 좋고 착잡한 그런 기분.

책이라는 걸 서점에서 없어지게 하면 안 되겠구나를 깨달았어요. 다시 내지 않도록."


세 권의 개정판을 바라보는 기분은 작가님과 독자들 모두에게 특별했을 테죠.

저는 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과거의 나'가 쓴 문장들을 마주하는 기분이 어떠실지,

고치고 싶은 문장을 만나면 그대로 두신 편이었는지, 고치신 편이었는지도 궁금했는데,

마침 작가님이 개정판에 대한 소감을 밝히시며 제가 궁금해한 것에 대한 답변이 될 이야기도 들려주셨어요.^^


다시 펴내다 보니 시간 차가 있는데, 2000년에 쓰인 <스무 살>은 당시 나이에 맞는 문장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때의 나'를 존중하기는 하지만 좀 고쳐야겠다 싶어서 고쳐서 내셨다고 해요.

언젠가, '옛 스무 살'과 '새 스무 살'을 함께 펼쳐놓고 읽어봐야겠어요. <스무 살>을 만나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듯요!

 

 

 

우와아아!!! 저멀리(ㅋㅋ) 일본에서 날아오신 김연수 작가님!! 아아, 어쩐지.... 욘사마...라고.... 불러드려야 할 것 같은....

 

오늘의 사회는 김슬기 기자님! 알고 보니... 저와 덕심이 통할 것 같은, 연빠셨습디다...?!

그런데, 김연수 작가님과 고향도 같고 스무 살 이후 7년을 보낸 곳도 명륜동으로 같다고...

(아, 여기서 몹시 부러워지더라고요... 부러우면 지는 건데, 저는 진 거 맞습니다, 맞고요, 맞지요...

왜 나는 김천에서 안 태어났고, 왜 나는 스무 살 이후 명륜동에서도 안 살아봤을까나...)

그런 공통점들 덕분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공감하는 지점이 많아서 '쫓아다니고' 계신다며,

'덕심 고백'으로 자기소개를 하시었습니다.*-_-*

오랜만에 뵙는 욘사마, 아니 김연수 작가님 모습에 일단 기념 사진부터 찍고 있는데, 작가님은 웬 '매'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멀티 플레이가 안 돼서, 사진 찍느라 제대로 못 들었는데(-_-;;),

요즘 나가사키 대학 연구실에 계시는데, 창밖으로 매가 한 마리 날아다닌다고...

그 매는 늘 오른쪽으로 도는데 한 번씩은 왼쪽으로 돌기도 하더라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네? 제가 들은 내용이 맞나요...?;;)

그렇게, '매 이야기'로 첫 인사를 열어주시었습니다..........(??)

갑자기 웬 매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오른쪽으로 돌던 매가, 왜 갑자기 왼쪽으로 도는 걸까요...

궁금하긴 하네요, 녀석의 이야기가... 


이번 행사는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함께한 만큼, 알라디너들의 질문들 위주로 채워졌는데요,

김슬기 기자님이 독자들의 질문을 대신 해주셨어요.


'기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식상한 질문'(^^) 1, 2를 먼저 해주셨는데,

그 질문 1은, 언제 어떤 계기로 작가를 꿈꾸셨나요.

그 질문 2는, 글 쓰는 데 영향을 주신 분은 누군가요.


'식상한 질문'들에 <청춘의 문장들>의 한 꼭지 같은 답변을 들려주신 작가님...!


다른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해서(감사합니다!!! 천문학자가 되셨으면 우리 곁에 이 아름다운 책들이 찾아오지 않았겠지요...! 아니면... '천문학계의 시인' 같은 호칭으로, 별을 닮을 시들을 써내셨으려나요... 그도 아니면... 제가 별을 좋아하여 천문학자의 팬이 되는 새로운 운명이 개척되었으려나요... 뭐래;;;;),

여튼 흠흠,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키를 놓친 기분으로 방황하며 지내던 날들 속에서, 술도 마시고 종일 놀기도 하고 길거리를 걷기도 하다가 결국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셨다지요.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에 가기를 반복하는 나날 속에서, 책을 계속 읽다 보니 뭔갈 쓰고 싶어지셨다는데, 이것이 '천생 작가'와 '천생 독자'의 차이인가 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시 같은 걸' 쓰고, 다음엔 '소설 같은 거', 그러니까 따옴표가 들어가는 거, 그런 거를 쓰다가, 아주 긴 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그 소설이 상을 받아서 그때부터 '작가가 되어버렸다'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작가가 된 저를 발견한 거죠."


이렇게 훈훈하게 '청춘의 문장들'이 구두로 펼쳐지는 가운데, 김슬기 기자님이 슬쩍 '김연수 디스'(ㅋㅋㅋ)를 시도하였으나,

멋진 솜씨로 맞받아넘긴 김연수 선수.ㅋㅋㅋㅋ


_ <스무 살>이 가장 솔직한 소설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좋아해요.

   실패한 주인공들이 좋아요. 자신의 찌질한 모습 다 보여주고 사랑에 실패하고. 솔직하게 자전적인 이야기여서.

_ 김슬기 기자가 사회를 봐주길 원한 건, 나와 굉장히 비슷한 사람이어서요. 동질감을 느껴서.



 

<스무 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작가님의 스무 살 시절은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스무 살의 첫 문장은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나온 것 같아요.

멋있고 싶었습니다만 멋있지 않았던 스무 살."

        



하아... '멋있고 싶었으나 멋있지 않았던 스무 살'이 이런 멋진 문장을 남겼다니...

작가님의 '찌질한 스무 살'(...제가 한 말 아니에요;;; 작가님이 직접 쓰신 표현^^;;)에도 감사를!!


그래도,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집을 떠나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면서 느꼈던 짙은 외로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그 시절이 그립다는 김연수 작가님은, 지금 일본 나가사키에서 바로 그런 '외로운' 생활을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놀러갈게요!!!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작가님의 '외로움'을 방해하면 안 되므로...!(?!))


* '글 쓰는 데 영향을 주신 분'에 대한 답변은, <청춘의 문장들>192~195쪽에도 나오니, 궁금하신 분들은 펼쳐 읽어보시길~! ^^

 

 

"여기 흙을 걷어봐."

거기, 엄마가 가리키는 곳에 흙과 낙엽들 사이로 뭔가가 보인다.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두 손으로 바닥에 쌓인 것들을 걷어냈다. 잔돌들은 차가웠다. 내 손은 금방 식었다. 누렇게 말라버린 잎들과 부서진 나뭇가지와 검은 흙들 사이로 묘지석이 보였다. 거기에는 'Alice McLean 1933~1939'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 글자가 보이자, 지은이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여기에 앨리스의 묘지석이 있다는 사실은 엄마와 나밖에 몰라. 엄마는 이 묘지석 때문에 이 집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어. 앨리스를 지켜야 한다며."

"여기 희망이 숨어 있네요."

지은이 묘지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매클레인 목사 부부가 낯선 땅에서 죽은 어린 딸을 위해 새긴 에밀리 디킨슨의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라는 시가 있었다. 우리는 함께 그 시를 읽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280~283쪽 낭독해주셨어요.


이어서, 독자들의 질문.

 

 

 

<스무 살>은 이 책을 내고 다음 책을 낼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이십 대에는 문학을 매우 좋아했었고 이런 소설을 썼다' 하고, 이십 대를 기념하기 위해 '스무 살'로.

(하지만 그 뒤로는 계속 소설을 쓸 것 같아서 '서른 살' 같은 건 안 내신다고.^^)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당시 티저 광고로 유행하던 '사랑해 선영아'를 패러디한 건데,

그 광고는, 이삼십 대 여성의 구매에 관해 조사를 해보니 '선영'이란 이름이 제일 많아서, '선영'이란 이름을 넣어 만든 거였다고.

그래서 작가님도, '나도 이렇게 하면 선영이들이 다 살까? 십만 부는 팔리지 않을까? 선영이가 그렇게 많다니까' 하시었다고요...

전국의 '선영'아~~~!! <사랑이라니, 선영아> 구입하자, 구입하자! (개콘 '호불호' 버전으로 외칩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연재 당시 제목은 '희재'였고, 후에 '가장 차가운 땅'으로 하려고 했더니 스릴러 같다고 하여 제목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글을 계속 찾다보니 이렇게 '훌륭한' 문장이 있었다고요.ㅎㅎㅎ '훌륭' 인정!!!

 

 

<스무 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소설을 쓰고 난 뒤에 정한 제목이라고 하셨어요.

 

 

 

2003년에 <밤은 노래한다>를 집필하기 위해 연변에 머물렀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어요.

 

어려운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이미지 덕에, 마음대로, 원없이 쓰신 시기였던가봐요.

쓰긴 힘들었는데 마음에 들 때까지 써보자는 생각이 있어서 쓰고 처음부터 고치고를 반복했던,

그렇게 해서 끝내고 나면 이상한 쾌감이 있던, 그것을 잊을 수 없는 연변의 밤들.


"왜 소설을 쓰느냐고 하면, 이야기를 만들어 보이고픈 것도 있지만, 뭔가 확 빠지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예요.

그렇게 글을 썼던 밤들이 내게는 오랫동안 인상적이었어요."


 

쓰는데 잘 안 되고, 쓰면 쓸 수록 알 수가 없고, 결국에 그걸 모르게 되는 과정,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게 소설 쓰기의 80프로라고 하시며,

그래서, 결론은, 겸허하게.

자료 찾아보고 맞으면 맞는 부분만 쓰는 거, 정도이지, 자세히 성찰은 못 하신다고... (겸손....)


"다른 사람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성찰이라고 한다면,

내가 당신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최대의 성찰이에요."

 


 

"늙어보세요. 다 같이 늙으니까 참 좋아요."


요즘 대학에서 젊은 친구들과 있다 보니, 에너지 가득한 이십 대 초반 아이들은 누군가를 알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차 있는 게 느껴지는데, 젊었을 때에 비해 '관심을 갈구하는 욕망'을 잃어서 좋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다 보니,

어, 저도 좀 그런 거 같아요...! >.<


 


아아, 제가 김연수 작가님의 글에 푹 빠진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단어들 때문이었는데요,

"소설 읽는데 왜 사전을 뒤져야 합니까?"라는 독자 '항의'를 종종 받으셨다죠......

요즘은, 작가님 글에서 이런 단어들 많이 볼 수 없어서 아쉬운 1인.


처음에는 소설가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글을 쓰다가 나중에는 '말을 굉장히 잘 다뤄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셨다고요.

우리말을 잘 쓰는 것.(제가 김연수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어떤 책에서 '우리말을 굉장히 잘 쓰는 작가'로 소개되어서였어요.^^) 

정확한 단어를 쓰지 않으면 설명을 해야 해서 문장이 길어지고 비경제적이니까, 그러면 '그 단어'를 쓰자, 사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하고  이런 단어를 썼는데, 독자들에게 심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덜 쓰게 되셨다고요.

저로서는 아쉬운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단어들이 등장하든 하지 않든, 작가님의 문장은 한없이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우니까요...!


 


 

이성복.

토머스 핀천 <느리게 배우는 사람>. (...어디선가 작가님 추천의 글을 보고 샀다가, 저는 아직 완독을 못 하였..;;;;)

리처드 브라우티건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잔디밭의 복수'가 원제라고 하시며 번역서 제목은 금방 못 떠올리시는 걸 보니, 원서로 읽으셨는가봉가... 하는 생각을 잠시...)

J. D. 샐린저 <아홉 가지 이야기>.

박태원 <천변풍경>.


김슬기 기자님 왈: 아, 이십 대 때 그런 책들을.....



 

 

 

"핍진성이 있다 치면 이야기 자체가 스스로 결말이 난다는 믿음이 있어요.

한 문장을 핍진하게 쓰면 이야기가 절로 결론을 내릴 것이다.

끝이 날지 안 날지 알 수 없는데 어쨌든 끝에 가면 끝이 나요. 이야기가 가는 대로."


설계를 하기는 하지만, 쓰다보면 의도와 다르게 소설이 나아가기 때문에, 더 두 가지 방식이 공존한다고요.

설계를 하면 '이번 소설은 잘 쓸 거야' 하는 착각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설계도 꼭 필요한 과정이긴 하겠어요!



 


어린 시절을 써서 글 뒤에 붙였는데, 그걸 보고 애들이 웃었다는 '흑역사'(^^;;)를 풀어주시며,

글로는 솔직히 쓰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나눠주시었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쓰고 싶은데 쓸 수 있는 게 '내 얘기'밖에 없으니까 결국 자기 얘기를 쓰게 되는데, 

두번째부터는 '내 얘기'는 더이상 쓸 수 없어서 다른 사람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쓰게 되고,

그때부터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시작된다고요.


 


아. ㅋㅋㅋㅋ 김천시에 '김천문학서'(??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가 있다네요.

오늘날 훌륭하신 '김천 문인 3인방'이 있기 전에는,

상고시대 누구, 고려시대 누구, 조선시대 몇 분은 시 쓰시고, 육이오 때 동인 결성하고, 이런 '옛날' 기록이었는데,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가 나온 뒤, '김천문학서'가 재정비되었다고요.


"드디어 김천인이 김천을 배경으로 한 본격 김천 소설을 썼다."


다른 두 분은 수록 안 되었다고,는 절대 강조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김천은 저한테 아주 좋은 곳이에요."

김천역 바로 앞, '다운타운'에서 성장하며, 그곳에서 본 자영업자들의 삶의 태도가 글 쓰는 데 굉장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요.

매일 일을 해야 한다, 빚을 지면 안 된다, 폐 끼치면 안 된다.

이것은, 글 쓰기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철칙으로도 삼을 만하네요!


 

 

 

"어려울수록 시도할 이유가 생기는 거예요."


날 때부터 뛰어난 소설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뭔가를 배워가야 된다는 생각,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하시며 '여성 캐릭터 도전기'를 들려주시었습니다...ㅎㅎㅎ


이게 마지막 질문이었네요.ㅎㅎㅎ

이제 낭독 타임~!



 


 

책을 몇 권 사든 진우는 한국통신 앞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면서 맞은편 세종문화회관의 디지털시계를 골똘히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미국대사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 진우는 경상남도 거제군 일운면 선창리 지심도에 피어날 동백과 전라남도 광양군 다압면 섬진리 매화마을에 피어날 매화와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상위마을에 피어날 산수유를 차례로 생각했다. 진우에게 봄은 그 순서대로 찾아왔다. 진우는 과연 봄이 어디까지 온 것인지 궁금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130~133쪽.


 


 

공중전화박스에서 나와 천천히 길을 걸었다. 합정역을 지나 절두산기념관으로 향했다. 은행잎들이 햇살을 받아 노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스무 살의 가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스무 살의 가을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스무 살의 겨울이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관련도 없는, 전혀 다르고 낯선 계절이 찾아온다. 그때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스무 살의 가을을 생각할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 여자애와의 우스꽝스러운 이별, 무겁게 내려놓은 공중전화 수화기, 영영 닫히게 된 마음 등으로 기억하게 될 내 스무 살의 가을을.


<스무 살>, 28~30쪽.



 


정말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시간이었음에도, 객석에서 또 쏟아져 나온 질문들~!

독자들은 아직도 김연수가 궁금하다!!! 흐흐흣.


_ 지금 쓰고 계신 소설은

_ 계획대로라면 내년 가을. 아마도 모든 일이 잘 풀리면...


_ 독자들 만나는 시간 내는 게 쉽지 않고 귀찮을 듯도 한데, 어떤 마음으로 오시는지

_ 전혀 귀찮지 않습니다. 이렇게 만나뵈면, 뵙고 나서 돌아가는 때의 어떤 느낌이 있어요. 어떤 느낌이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뭔가 연결되어 있는 느낌. 그걸 느끼고 가는 게 좋아요.


_ '시 같은 거' 쓰셨다고 했는데, 시집 내실 의향은

_ 나랑 고향이 같은 大시인이 내 자존심을 짓밟았어요.(ㅋㅋ 이것에 대해서는... 문*준 시인께 항의라도 해야할까요?!)

  내 생각에는 내가 쓰면 자기가... 라이벌........ 워낙 대시인이어서 그 말 듣고 시는 자제하기로.


_ 착한 글 쓰는 작가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_ 어떤 얘기를 다루든 사람에 대해 계속 이해해야 해요. 악인은 어려워요. 근본적인 악에 아직 동의를 못하고 있어요. 악인을 다루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연민 같은 게 존재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어서 하는 행위. 안 할 수 있으면 안 했을 상황.


_ 작가의 말은 소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기분으로 쓰는지

_ 작가의 말을 쓸 때는 아주 해피한 상태예요. 소설 다 쓰고 나서 교정도 거의 다 보고 일이 거의 다 끝났을 때 쓰는 거니까 아주 행복한 상태에서 아주 자신감도 넘쳐요. 책 나오기 직전이니까. 책 한 권을 다 썼다는 포만감에 작가의 말은 일필휘지, 청산유수죠. 그 포만감과 능청. 시간이 지나고 보면 건방진 거 아닌가 싶어지지만요.



 



이렇게 해서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행사가 끝나고,

'작가의 말'대신 '행사의 말'을 부탁하신 김센스 기자님, 아니 김슬기 기자님.^^


연구 활동을 하는 사무실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항구, 거기의 건물까지 걸어서 다녀오신 경험을 이야기해주시며,

이렇게 마무리.

 

 

"걷고 나면 피곤해 쉬고 싶어요. 모든 일이 다 그래요, 반드시 피곤할 수밖에 없어요. 피곤함을 피할 수 없으니, 피곤함을 즐기자 생각해요. 여기 오신 분들도, 대단히 힘든 일을 하셨기 때문에 집에 가면 피곤할 거예요. 푹 쉬시면 돼요. 하루가 끝날 때마다 되게 좋은 건 쉴 수 있다는 거거든요. 잠을 잘 수 있다는 거. 그 피곤함의 대부분은 내가 어떤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푹 쉬세요."


자, 이제 사인을 받습니다~! *-_-*


 


사인 받을 때마다 느끼지만, 손과 글씨도 정말 아름다우신....*-_-*


사람이 많아서(+대부분의 독자들이 세 권을 가져왔을 것이기에!ㅋㅋ)

사인 도서는 1인당 1권으로 제한되었어요.

저는 세 권 중 어디에 받을까 하다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꺼내었습니다.


평소에는, 사인하느라 손 아프실 작가님을 생각하여, 특별한 멘트 같은 거 부탁드리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저멀리(^^;;) 일본에서 오셨기도 하고, 제가 굉장히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작가님 뵈러 간지라,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다음 문장 완성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포스트잇에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써서.


 


그랬더니, 이렇게 감동적으로 완성해주셨습니다....ㅠ_ㅠ

지금까지 받았던 김연수 작가님 사인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노원구에서 받은 '여러번, 계속, 끊임없이 반가워요' 사인이었는데,

오늘부터 이 사인!! *-_-*

스캔+프린트 해서 액자 넣어두고 싶네요.ㅋㅋㅋㅋ



 

행사는 두 시간 다녀왔는데, 후기는 왜 때문에 다섯 시간 썼죠....?-_-a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사심 만땅 후기를 쓰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밖에는 눈이 소복이 내렸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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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5-11-2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어어억~~ 엄청 길지만,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원주 2015-11-26 15:07   좋아요 0 | URL
어제 행사 다녀오고 덕심이 다시 한번 불타오르는 바람에... 쓰다보니 넘 길어졌지 뭐여요...^^;; 하하핫.

blanca 2015-11-26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원주 2015-11-26 15: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목나무 2015-11-2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의 감동이 새삼~~~~ 원주님 잘 읽었습니다. ^^

원주 2015-11-27 13:39   좋아요 0 | URL
정말 멋진 시간이었지 말입니다!
 
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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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절판되었다가 다시 나오면서, 오랜만에 다시 나의 스무 살을 돌아보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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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사이즈 2 - 여섯 식구 만화가 가족의 일상 속으로!
남지은 지음, 김인호 그림 / 문예춘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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헙!! 엄마가 1권 보시고 나서 2권은 왜 안 사오냐고 하셔서 아직 2권 안 나왔다니까 아쉬워 하셨는데!! 2권 사가면 엄청 반가워하실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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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은 쓸쓸하기 마련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가 과거의 나를 찾을 것인가. 항해(航海)와 노동으로 채워졌던 이십대 후반의 시절은 기억 속에 촘촘한데, 삶의 매 시기마다 닻 주었던 자리는 이렇듯 흔적이 없다. (34)


*


섬은 푸른 바다 한가운데 익사 모면할 정도의 몇 뼘 땅.

광활한 수평의 세상을 버티고 있는 수직의 장소. 방파제를 넘어 달려드는 거대한 파도와 초속 30미터의 강풍. 어부의 죽음. 가지가 한쪽으로만 늘어나버린 팽나무. 단 한 뿌리라도 더 캐려다가 비탈에서 떨어져버린 아낙. 살아남은 자들의 깊은 주름. 급경사의 밭. 끝없이 이어지는 일. 이젠 됐다 툭, 떨어지는 동백꽃.

바다와 바람 외에는 모든 결핍의 장소. 이별과 쓸쓸함만큼은 풍족한 곳. 사람도 섬을 닮아버린다. 각자 독립된 고립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된 채 달이 가고 해가 바뀐다. 섬은 고독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다. (80)


*


썰물이 되면 조간대가 드러나며 섬은 제 영역을 키웠다. 아직 달의 인력을 몰랐던 때라 나는 밀물과 썰물이 바다가 숨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86)


*


육지에서는 바다가 그리웠지만 바다로 오면 육지가 아팠다. 그래도 나는 이곳으로 왔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나를 고독과 불편의 고장으로 끌어당기는 것인가. (103)


*


가난과 외곽을 그리는 소설이 의미를 잃는 시대에 나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 변방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쓴 소설이 나오면 으레 고색스러운 방 하나에 한꺼번에 모아놓고 체크인 해버리는 게 요즘 풍토이다. 토속적이다, 질펀하다, 한마디 내뱉어주면 된다고 여긴다. 평론가들의 모국어 기피, 근친 혐오, 그 배경 속에서 쓰고 있다. (108)


*


세상은 나쁜 것과 나쁘지 않은 것, 두 가지가 있었다. 나쁘지만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좋다, 라고 말했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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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나는 세상을 좀 앞당겨 살아버렸는데 어쨌거나 젊음이 끝나기도 전에 늙음을 기웃거려보는 것이 소설가의 팔자라고 생각하는 게 그 이유이다. (166)


*


가난이 흠 될 것 없는 나이였지만 막걸리마저 마음놓고 못 사먹을 정도의 불편이 괴로웠다.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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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은 무기력하다. 충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먼 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긴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면 그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고민은 돌아갈까 말까 부분에서 해야 한다. 세상 저만큼 간 다음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갈까를 고민하는 것, 그게 내가 말하는 여행이다. (279)


*


어쩌면 꿈꾸기 위해 내륙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꿈꾸는 곳은 늘 멀리 있는 법. 먼 곳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꿈꾸는 것. (305)


*


바다는 바람이 바뀌고 찾아오는 어종이 변하는 것에 의해 일 년이 간다. 갈치가 가고 삼치가 오듯, 참돔이 물러가고 감성돔이 방문을 하듯 그렇게 바다의 시간도 주기를 가진다. (316)


*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321)




**



책을 읽으며,

그래서, 한창훈 작가님이 왜 쓰는가 하면,

바로 이것을 위해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 참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이 문장이 가장 와 닿았다.



사람과 함께 태어나 함께 살다가 함께 스러져간 변방의 말[言]과 노래. (95)



'평론가들의 모국어 기피'와 '근친 혐오' 속에서도, 꿋꿋이, 맛깔나게, 힘 있게 써내려가는, 변방의 말들과 노래.

그 말들과 노래들이 담긴 한창훈 작가님의 책들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이 책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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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5-11-2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막걸리잔은 뭐예요?? 넘 갖고 싶어요!!

원주 2015-11-26 16:00   좋아요 0 | URL
이 막걸리잔 진짜 두루두루 유용하게 엄청 잘 쓰이고 있어요.^^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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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11)


*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그렇게 고생하며 회사에 다니는 것도 예순부터 여든까지 좀 편히 살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런데 사실 은퇴를 늦게 하면 늦게 할수록 돈이 더 들어.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몸이 이곳저곳 고장 나니까. 병원도 가야 하고 물리치료도 받아야 하고. 은퇴를 앞당기면 그런 자유로운 생활을 건강한 상태에서 할 수 있어. (15~16)


*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는 매일 울면서 다녔어. 회사 일보다는 출퇴근 때문에. 아침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 거쳐서 가 본 적 있어?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신도림에서 사당까지는 몸이 끼이다 못해 쇄골이 다 아플 지경이야. 사람들에 눌려서. 그렇게 2호선을 탈 때마다 생각하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나? 보험 사기라도 저질렀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도 생각해. 너희들은 무슨 죄를 지었니? (16)


*


난 초여름이 정말 좋아. 햇빛이 쨍쨍하고,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하지만 공기는 아직 후텁지근하지 않고…… 그런 날에는 해가 지면 할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밖으로 나오게 돼. (39)


*


나는 재인한테 너는 호주에 왜 온 거냐고 물었지.

"군대 가기 싫어서."

답변 참 당당하데.

"그렇게 자랑스럽게 할 이야기는 아닐 텐데?"

"아니, 난 괜찮아. 난 군대 못 가는 사람이야. 내가 군대 가면 아마 총으로 부대원 다 쏴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그러는 것보다야 그냥 나 혼자 군대 안 가는 게 낫잖아." (45)


*


내 말은, 얼핏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전에 비해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다는 거야. 아궁이를 없애고 기름 보일러를 들여놓고, 쥐도 안 나오고. (100)


*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125)


*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봤어. 나는 먹는 거에 관심이 많아서 맛있는 음식이랑 과자를 좋아하지. 또 술도 좋아해. 그러니까 식재료랑 술값이 싼 곳에서 사는 게 좋아. 그리고 공기가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동네가 좋아. 또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게 전부야. 그 외에는 딱히 이걸 꼭 하고 싶다든가 그런 건 없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던가, 자전거를 탄다던가, 바다를 본다던가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152)


*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170)


*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는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171)


*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 거랑 똑같지 뭐. (185~186)




**


내게는 낯선 작가 이름, 기자 출신의 남자 작가, 강한 느낌의 제목.

왠지 딱딱하고 차갑고 냉정하고(?) 그런 소설일 것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더랬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는 내가 모으고 있는 시리즈였음에도.


그러다가 기사를 통해서였던가, 위의 밑줄 중 16쪽에 있는 문장을 읽게 되고, "나! 나! 나!!" 외치며 당장 구입한 책..;;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하아.......

일단, 정말 재밌다...!

단순히 재미면에서만도, 내게는, 올 상반기 최고의 소설!

남자 작가가 그린 여자 주인공... 캬...! 어쩜, 작가의 성별을 착각할 정도였다.

여자 주인공의 서술로 이루어지는데, 뭐랄까, '수다스러운 기지배'를 어쩜 그리 잘 그려내셨는지...

(생리 묘사한 부분에서는 '으으으, 이거 진짜 싫어!!' 하면서, 막 공감... 아, 근데 남자 작가가 썼단 말이지...ㅎㅎㅎ)

공감 가는 부분 또한 엄청 많다...!

공감면에서도, 내게는, 올 상반기 최고의 소설!!



나도 한국에서 경쟁력이 없는 생명체 같...

아, 근데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뭐 그냥... 지구에서......>.<

우리 조카가 다섯 살 때던가 여섯 살 때, 어린이집에서 이런 대사를 외쳤다던데...

"아, 지구를 떠나고 싶다!"

..........그 말을 서른여섯 이모가 종종 떠올리고 있는 것인데...

여튼.... 지구를 떠나고 싶은 이 철없는 서른여섯 이모는,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계나의 이야기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아 근데 계나는, 홍대 나왔어...

나는 지방대... 계나보다도 경쟁력 더 떨어지는 생명체......



이 책이 좋았던 점 또 한 가지는, 계나가, 한국을 떠나 선택한 나라가 호주라는 것.

나는 '호주'라면 헬렐레 벨렐레.... 그냥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막 간질간질하고 아련아련하고 뭉클뭉클(??)하고, 뭐 여튼, 그런 애틋함을 품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 소설의 주 무대가 호주라는 점도 좋았다.

읽는 내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풍경들, 피부에 생생하게 느껴질 것 같은 그 공기의 감촉...

하아......




그래서, 계나야, 한국을 떠나서 행복하니...?

나도 계나처럼 한국을 떠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마지막에 그녀는 한국에서 출국해 호주로 귀국하며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라고 다짐한다. 이쯤에서 계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겠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 뭔가를 성취한 기억으로 조금씩 오랫동안 행복감을 느끼는 '자산성 행복'이든, 어떤 순간 짜릿한 행복감을 느끼는 '현금흐름성 행복'이든,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한 계나는 행복할 수 없다. (허희, '작품해설' 중에서, 200쪽)



허희 평론가의 말을 곰곰 되새기며, '행복'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으로, 나는 이 책을 덮었다.

언제고 다시 펼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 지구를 떠나고 싶다!"는 조카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날, 아마도 이 책 생각도 함께 나지 않을까...

여튼, 이 책을 읽는 동안 유쾌했고 뭉클했고 공감했고 시원했고 가슴 아팠고 대리만족했고, 끝에는 그냥 나였다. (?)

뭔가 이상한데, 여튼, 그냥 나였다.

지구를 떠나고 싶다면서도 그냥 지구에 두 발 딛고 살아가는, 그냥 나.

계나처럼 호주로 떠날 수도 없는, 그냥 나.






+ 한국인 계나가 호주를 처음 방문하던 입국 장면과, 호주인 계나가 호주로 처음 돌아가는 귀국 장면의 대비가 왠지, 마음에 깊이 남는다.


스트레스 때문에 생리가 일찍 시작됐나 봐. 사실 비행기 안에서부터 이미 마음이 위축돼 있었어. "우드 유 라이크 섬씽 투 드링크?"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거든. 스튜어디스가 같은 질문 세 번 하더니 그냥 콜라를 주고 가더라.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문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나라에는 처음입니까 같은 질문에 대비했는데 이민국 직원은 아무것도 안 묻더라. 여권 사진 한 번, 내 얼굴 한 번 보고 무성의하게 땡큐, 그리고 여권을 돌려줄 뿐. 여권을 받고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간 뒤에야 "웰컴"이라고 하거나 "해브 어 나이스 데이"라고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나 자신에게.

"해브 어 나이스 데이." (12~13)


백인 승무원이 옆에서 식사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어. 뭐가 있느냐고 물어보고 닭고기 요리로 하겠다고, 혹시 맥주도 줄 수 있으면 달라고 요청했지.

(……)

입국 심사대 직원은 무표정하게 내 여권을 받아서 슬쩍 보고 도장을 찍었어.

"해브 어 나이스 데이."

여권을 돌려받을 때 내가 말했지. 이민국 직원이 고개를 까딱하며 살짝 웃더라. 난 이제 "해브 어 나이스 데이"가 어떤 때에는 냉소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걸 알아. 미국에서 점원들이 주로 쓰는 인사라 영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이 말이 좀 웃긴다고 여기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날부터 이 인사를 좋아하게 됐어. 그날그날의 현금흐름성 행복을 강조하는 말 같아서.

공항을 나오니까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 불어. 햇빛이 짱짱해서 난 또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선글라스를 끼면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나 자신에게.

"해브 어 나이스 데이."

그리고 속으로 결심의 말을 덧붙였어.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184~188)





......말이 너무 길어진다. 이만 하자........................

이 책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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