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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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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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그렇게 고생하며 회사에 다니는 것도 예순부터 여든까지 좀 편히 살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런데 사실 은퇴를 늦게 하면 늦게 할수록 돈이 더 들어.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몸이 이곳저곳 고장 나니까. 병원도 가야 하고 물리치료도 받아야 하고. 은퇴를 앞당기면 그런 자유로운 생활을 건강한 상태에서 할 수 있어.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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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는 매일 울면서 다녔어. 회사 일보다는 출퇴근 때문에. 아침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 거쳐서 가 본 적 있어?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신도림에서 사당까지는 몸이 끼이다 못해 쇄골이 다 아플 지경이야. 사람들에 눌려서. 그렇게 2호선을 탈 때마다 생각하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나? 보험 사기라도 저질렀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도 생각해. 너희들은 무슨 죄를 지었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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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초여름이 정말 좋아. 햇빛이 쨍쨍하고,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하지만 공기는 아직 후텁지근하지 않고…… 그런 날에는 해가 지면 할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밖으로 나오게 돼.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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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인한테 너는 호주에 왜 온 거냐고 물었지.

"군대 가기 싫어서."

답변 참 당당하데.

"그렇게 자랑스럽게 할 이야기는 아닐 텐데?"

"아니, 난 괜찮아. 난 군대 못 가는 사람이야. 내가 군대 가면 아마 총으로 부대원 다 쏴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그러는 것보다야 그냥 나 혼자 군대 안 가는 게 낫잖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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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은, 얼핏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전에 비해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다는 거야. 아궁이를 없애고 기름 보일러를 들여놓고, 쥐도 안 나오고.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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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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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봤어. 나는 먹는 거에 관심이 많아서 맛있는 음식이랑 과자를 좋아하지. 또 술도 좋아해. 그러니까 식재료랑 술값이 싼 곳에서 사는 게 좋아. 그리고 공기가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동네가 좋아. 또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게 전부야. 그 외에는 딱히 이걸 꼭 하고 싶다든가 그런 건 없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던가, 자전거를 탄다던가, 바다를 본다던가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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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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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는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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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 거랑 똑같지 뭐. (185~186)




**


내게는 낯선 작가 이름, 기자 출신의 남자 작가, 강한 느낌의 제목.

왠지 딱딱하고 차갑고 냉정하고(?) 그런 소설일 것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더랬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는 내가 모으고 있는 시리즈였음에도.


그러다가 기사를 통해서였던가, 위의 밑줄 중 16쪽에 있는 문장을 읽게 되고, "나! 나! 나!!" 외치며 당장 구입한 책..;;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하아.......

일단, 정말 재밌다...!

단순히 재미면에서만도, 내게는, 올 상반기 최고의 소설!

남자 작가가 그린 여자 주인공... 캬...! 어쩜, 작가의 성별을 착각할 정도였다.

여자 주인공의 서술로 이루어지는데, 뭐랄까, '수다스러운 기지배'를 어쩜 그리 잘 그려내셨는지...

(생리 묘사한 부분에서는 '으으으, 이거 진짜 싫어!!' 하면서, 막 공감... 아, 근데 남자 작가가 썼단 말이지...ㅎㅎㅎ)

공감 가는 부분 또한 엄청 많다...!

공감면에서도, 내게는, 올 상반기 최고의 소설!!



나도 한국에서 경쟁력이 없는 생명체 같...

아, 근데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뭐 그냥... 지구에서......>.<

우리 조카가 다섯 살 때던가 여섯 살 때, 어린이집에서 이런 대사를 외쳤다던데...

"아, 지구를 떠나고 싶다!"

..........그 말을 서른여섯 이모가 종종 떠올리고 있는 것인데...

여튼.... 지구를 떠나고 싶은 이 철없는 서른여섯 이모는,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계나의 이야기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아 근데 계나는, 홍대 나왔어...

나는 지방대... 계나보다도 경쟁력 더 떨어지는 생명체......



이 책이 좋았던 점 또 한 가지는, 계나가, 한국을 떠나 선택한 나라가 호주라는 것.

나는 '호주'라면 헬렐레 벨렐레.... 그냥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막 간질간질하고 아련아련하고 뭉클뭉클(??)하고, 뭐 여튼, 그런 애틋함을 품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 소설의 주 무대가 호주라는 점도 좋았다.

읽는 내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풍경들, 피부에 생생하게 느껴질 것 같은 그 공기의 감촉...

하아......




그래서, 계나야, 한국을 떠나서 행복하니...?

나도 계나처럼 한국을 떠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마지막에 그녀는 한국에서 출국해 호주로 귀국하며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라고 다짐한다. 이쯤에서 계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겠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 뭔가를 성취한 기억으로 조금씩 오랫동안 행복감을 느끼는 '자산성 행복'이든, 어떤 순간 짜릿한 행복감을 느끼는 '현금흐름성 행복'이든,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한 계나는 행복할 수 없다. (허희, '작품해설' 중에서, 200쪽)



허희 평론가의 말을 곰곰 되새기며, '행복'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으로, 나는 이 책을 덮었다.

언제고 다시 펼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 지구를 떠나고 싶다!"는 조카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날, 아마도 이 책 생각도 함께 나지 않을까...

여튼, 이 책을 읽는 동안 유쾌했고 뭉클했고 공감했고 시원했고 가슴 아팠고 대리만족했고, 끝에는 그냥 나였다. (?)

뭔가 이상한데, 여튼, 그냥 나였다.

지구를 떠나고 싶다면서도 그냥 지구에 두 발 딛고 살아가는, 그냥 나.

계나처럼 호주로 떠날 수도 없는, 그냥 나.






+ 한국인 계나가 호주를 처음 방문하던 입국 장면과, 호주인 계나가 호주로 처음 돌아가는 귀국 장면의 대비가 왠지, 마음에 깊이 남는다.


스트레스 때문에 생리가 일찍 시작됐나 봐. 사실 비행기 안에서부터 이미 마음이 위축돼 있었어. "우드 유 라이크 섬씽 투 드링크?"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거든. 스튜어디스가 같은 질문 세 번 하더니 그냥 콜라를 주고 가더라.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문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나라에는 처음입니까 같은 질문에 대비했는데 이민국 직원은 아무것도 안 묻더라. 여권 사진 한 번, 내 얼굴 한 번 보고 무성의하게 땡큐, 그리고 여권을 돌려줄 뿐. 여권을 받고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간 뒤에야 "웰컴"이라고 하거나 "해브 어 나이스 데이"라고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나 자신에게.

"해브 어 나이스 데이." (12~13)


백인 승무원이 옆에서 식사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어. 뭐가 있느냐고 물어보고 닭고기 요리로 하겠다고, 혹시 맥주도 줄 수 있으면 달라고 요청했지.

(……)

입국 심사대 직원은 무표정하게 내 여권을 받아서 슬쩍 보고 도장을 찍었어.

"해브 어 나이스 데이."

여권을 돌려받을 때 내가 말했지. 이민국 직원이 고개를 까딱하며 살짝 웃더라. 난 이제 "해브 어 나이스 데이"가 어떤 때에는 냉소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걸 알아. 미국에서 점원들이 주로 쓰는 인사라 영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이 말이 좀 웃긴다고 여기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날부터 이 인사를 좋아하게 됐어. 그날그날의 현금흐름성 행복을 강조하는 말 같아서.

공항을 나오니까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 불어. 햇빛이 짱짱해서 난 또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선글라스를 끼면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나 자신에게.

"해브 어 나이스 데이."

그리고 속으로 결심의 말을 덧붙였어.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184~188)





......말이 너무 길어진다. 이만 하자........................

이 책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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