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이윤기 / 열린책들

(2012. 12. 08.)

 

 

★ 대지의 배꼽에서 탯줄을 잘라내지 않은 사나이

철학이 담겨져 있지 않은 소설은 고전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
(p. 13)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p. 22)

 

 

  조르바는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시답잖은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확실히 그에게 전신 기술, 증기선, 엔진, 당대의 도덕과 종교는 녹슨 고물 총과 다름없었다. 그의 정신은 세상을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p. 27)

 

 

  나는 그제야 그의 왼손 집게손가락이 반 이상 잘려 나간걸 알았다. 나는 그쪽으로 갔지만 속이 역겨웠다.
  “손가락은 어떻게 된 겁니까. 조르바”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도”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계 만지다 잘렸어요?”
  “뭘 안다고 기계 어쩌고 하시오? 내 손으로 잘랐소”
  “당신 손으로, 왜요?”
  “안 해본 짓이 없다고 했지요? 한때 도자기를 만들었지요. 그 놀음에 미쳤더랬어요. 흙덩이를 가지고 만들어 싶은 거 아무거나 만든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오? 프르르! 녹로를 돌리면 진흙 덩이가 동그랗게 되는 겁니다. 흡사 당신의 이런 말을 알아들은 듯이 말입니다. <항아리를 만들어야지, 접시를 만들어야지. 아니 램프를 만들까, 귀신도 모를 물건을 만들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름지기 이런 게 아닐까요, 자유 말이오.”
  “그래서요?” “손가락은 어떻게 되었느냐니까?”
  “참, 그게 녹로 돌리는 데 자꾸 거치적거리더란 말입니다. 이게 끼어들어 글쎄 내가 만들려던 걸 뭉개어 놓지 뭡니까> 그래서 어느 날 손도끼를 들어……>
  “아프지 않던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쓰러진 나무 그루터기는 아니오. 나도 사람입니다. 물론 아팠지요. 하지만 이게 자꾸 거치적거리며 신경을 돋우었어요. 그래서 잘라 버렸지요.”
(p. 28-29)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은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 버리다니……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p. 38-39)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p. 98)

 

 

  “두목 나를 신용하십니까요?”
  “물론 하지요, 조르바. 조르바라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그르칠 턱이 없어요. 그르치려고 해봐야 그렇게는 안 될 겝니다. 당신은 사자나 이리 같다고나 할까. 그런 맹수에게 양이나 나귀 같은 처신을 해봐야 안 됩니다. 천성이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은 머리끝에서 손톱 끝까지 조르바라는 겁니다.”
(p. 103)

 

 

  그는 갑자기 자연의 법칙을 정복하고 날아가려는 듯이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늙은 육신 속에 그 몸을 들어다 어둠 속에 유성처럼 던져 버리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영혼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오래는 공중에 머물 수 없어서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의 몸은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몸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더 높이 뛰어올랐다. 뛰어올랐지만 그의 불쌍한 육신은 쉴 새 없이 다시 땅에 떨어졌다.
(p. 104)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은 채 깡그리 낭비하고 만 내 인생을 생각했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별빛으로 조르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밤새처럼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부러웠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조르바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p. 111)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물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으로 까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p. 174)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 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p. 178)

 

 

  나는 한동안 화살에 꿰뚫린 심장이 그려진, 향긋한 편지를 쥔 채, 그와 함께 보냈던, 그의 존재감으로 가득 찼던 나날들을 생각했다. 시간은 조르바와의 만남에 새로운 흥취를 더했다. 조르바와의 만남은 외부 사건의 수학적인 연속도, 내부의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결이 고운, 따뜻한 모래 같은 것이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모래를 감촉할 수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조르바에게 복이 있을진저. 조르바는 내 내부에서 떨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육체를 부여했다. 조르바가 없으면 나는 다시 떨게 되리라.”
(p. 226)

 

 

  세계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 한순간의 목숨이 어떻게 하여 세상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을 높여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염원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짧디짧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는 데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까?
(p. 389)

 

 

  꺼져 가는 불가에 홀로 앉아 나는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p. 400)

 

 

  행복이란 의무를 행하는 것. 의무가 무거운면 무거울수록 행복은 그만큼 더 큰법
(p. 420)

 

 

  재수 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에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면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p.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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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서미싯 몸 / 송무 / 민음사
(2012. 10. 21.)

 


  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러한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 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그 비밀은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않는 수수께끼 같다.
(p. 8)
 

 

  인간은 신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타고난다. 그래서 보통 사람과 조금이라도 다른 인간이 있으면 그들의 생애에서 놀랍고 신기한 사건들을 열심히 찾아내서 전설을 지어낸 다음, 그것을 광적으로 믿어버린다. 범상한 삶에 대한 낭만적 정신의 저항이라고나 할까. 전설적인 사건들은 주인공을 불멸의 세계로 들여 보내는 가장 확실한 입장권이 되어준다.
(p. 10)
 

 

  말하는 당사자에게는 자못 새롭게 여겨지는 용감한 말도 알고 보면 그 이전에 똑같은 어조로 백 번도 되풀이되었던 말이다. 추는 항상 좌우로 흔들리고, 사람들은 같은 원을 늘 새롭게 돈다.
(p. 17)
 

 

  나는 남들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에서 오는 허세이다. 그것은 남들이 자신의 조그만 잘못들을 비난할 때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들은 아무도 그 잘못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p. 76)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이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p. 77)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p. 85)

 

  습관이 오래되면 감각도 무뎌지게 마련이지만 그러기 전까지 작가는 자신의 작가적 본능이 인간성의 기이한 특성들에 너무 몰두하는 나머지 때로 도덕의식까지 마비됨을 깨닫고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악을 관조하면서 예술적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작가는 논리를 갖춘 철저한 악한을 창조해 놓고 그 악한에게 매혹당한다. 비록 그것이 법과 질서를 능력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렇다. 작가는 악당을 만들어내면서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본능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에 살과 뼈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다른 식으로는 방출될 수 없는 자신의 본능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만족이란 하나의 해방감인 것이다.
(p. 197)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 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 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 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p. 207)
 

 

  이래서 소설은 비현실적이 된다. 남자에게 사랑이란 일상적인 여러 일의 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데도 소설에서 그것을 강조하다보니 실제와는 다른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남자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그런 남자들은 별 재미가 없다. 사랑을 지상(至上)의 관심사로 삼는 여자들도 그런 남자를 경멸한다. 하기야 그런 남자들 덕분에 여자들은 기분이 우쭐해지고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이 좀 덜 떨어진 인간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짧은 기간에도 남자는 다른 일들을 하며 그 일들에 신경을 쓴다. 남녀가 똑같이 사랑에 빠져 있다하더라도 다른 점은, 여자가 하루 온종일 사랑할 수 있는 데 비해 남자는 이따금씩 밖에 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p. 219-220)
 

 

  나는 예술이란 성적 본능이 구현된 것이라고 본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나 밝은 달빛을 받은 나폴리 항구, 티티언이 그런 <매장(埋葬)>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다 한가지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스트릭랜드가 보통 방식으로 성욕을 방출하기 싫어했던 것은 예술적 창조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에 비해 그것이 야비하게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 220)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p.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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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조지 오웰 / 도정일 / 민음사
(2012. 10. 12.)
 


과거는 현재를 반영한다. 1940년에 쓰여진 이 소설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여진다. 1943년에 쓰여지고 1945 출판된 이 소설은 소비에트를 풍자하기 위한 소설 이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역사적 실체가 소멸하고 없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동물농장』이 강한 적절성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정치사회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오웰이 그린 동물농장은 지금의 세계에도 있고 미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계속 이 비참한 조건 속에 살아야 하는 겁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들이 몽땅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동무들, 우리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거기 있소.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오. 인간은 우리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을 몰아내기만 하면 우리의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근본 원인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오.
  인간은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동물의 주인입니다. 그는 동물들을 부려먹고는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먹이만 주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가 챙깁니다.
(p. 11)

 

 

  동무 여러분, 우리 삶의 이 모든 불행이 인간의 횡포 때문이라는 게 너무도 명백하지 않소? 인간을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의 노동 생산물은 모두 우리 것이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부자가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온 신명을 바쳐 인간이라는 종자를 뒤집어엎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p. 12)

 

 

  동무들, 여러분의 결의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하시오. 헛된 얘기에 솔깃해서 길 읽고 헤매면 안 됩니다. 인간과 동물은 다같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한쪽의 번영이 곧 다른쪽의 번영이기도 하다 따위의 말을 인간들이 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마시오. 그건 모두 거짓말이오. 인간은 인간말고는 그 어떤 동물의 이익에도 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물들에게 완벽한 단결과 투쟁을 통한 완벽한 동지애가 필요하오. 모든 인간은 우리의 적이며 모든 동물은 우리의 동지입니다.
(p. 13)

 

 

  <동물주의 원리 일곱 계명>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p. 26)

 

 

  그 여름 내내 농장 일은 시계처럼 돌아갔다. 동물들은 일찍이 상상도 못했을 만큼 행복했다. 입에 넣는 먹거리는 그지없이 달콤했다. 그것은 과거 인색한 주인이 마지못해 동냥주듯 던져 주던 그런 먹이가 아니라 동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위해 생산한 먹이, 진정한 그들 자신의 먹이였기 때문이다.
(p. 29)

 

 

  그해 내내 동물들은 노예처럼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이 행복했다. 그들은 노동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그들 자신의, 그리고 다음에 올 후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게으른 도둑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p. 56)

 


  일은 더 많이 하면서도 먹는 것은 존즈 시절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일요일 아침이면 스퀄러가 길다란 두루마리 통계 숫자 목록을 펴놓고 그간 농장의 각종 식량 생산량이 200퍼센트, 300퍼센트, 혹은 500퍼센트식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동물들로선 <반란> 이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스퀄러의 발표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동물들은 통계 숫자보다는 먹을 것이나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때가 자주 있었다.
(p. 82)

 

 

  4월이 되자 동물농장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대통령 선출이 필요해졌다. 후보는 오로지 나폴레용 하나뿐이었고 그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같은 날, 스노볼과 존즈 사이의 공모 내용을 더 자세히 밝혀주는 새로운 문서들이 도 발견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p. 102)

 

 

  그들의 삶이 고되고 모든 희망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동물들은 자기네가 여타 농장의 동물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배를 주린다면 그건 인간 독재자들을 먹여살리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고달프게 일한다 해도 그 노동은 최소한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 중에 아무도 두 발로 걷는 동물은 없었다. 어느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했다.
(p. 115)
 

 

  일곱 계명은 오간 데 없고 단 하나의 계명만이 거기 적혀 있었다. 그 계명은 이러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p. 117)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 맞고함질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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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세익스피어 / 김재남 / 하서

(2012. 10. 06.)

 

  늘 아버지께 매달리곤 하시던 어머니, 애정을 먹으면 먹을수록 욕심이 늘어가듯이. 그러던 것이 채 한달도 못 돼서. 아예 생각지 말자. 여자란 할 수 없군! 겨우 한 달. 니오베 여신처럼 온통 눈물 속에 아버지 영구를 따라가던 신발이 닳기도 전에, 아, 어머니가, 도대체 우리 어머니가 저 숙부의 품에 안기다니. 사리를 분간 못 하는 짐승이라도 그보다는 슬퍼했을 게 아닌가. 한 형제라곤 해도 나와 헤르쿨레스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자하고, 한 달도 못 가서 거짓 눈물의 벌게진 눈에서 소금기가 가시기도 전에 결혼을 하다니. 야, 더럽게도 빠르구나. 어떻게 그처럼 재빨리 더러운 이부자리로 달려간담! 좋지 못해, 절대로 좋지 못할거다.
(p. 19)

 

 

  오필리어야, 부디 명심해야 한다. 아무튼 애정 뒤에 물러서서 정욕의 화살을 피하는 거다. 정숙한 처녀는 달님 앞에 얼굴을 내놓는 것조차 망측스게 여긴다잖니. 열녀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험담이란다. 봄날의 새싹은 움트기도 전에 벌레한테 먹히며, 이슬 어린 청춘의 아침엔 독기 찬 해독을 입기가 쉽다잖니. 그러니 조심해라.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청춘이란 상대자가 없어도 저절로 욕정이 얼어난단 말이야.
(p. 26)

 

 

  몇 마디 훈계를 해줄 테니, 단단히 명심해 두어라. 알겠지? 마음속의 생각을 함부로 입밖에 내지 말며, 엉뚱한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잡스러워선 안 되고, 일단 사귄 친구라면 쇠사슬로 마음속에 매두어라. 그렇지만 새파란 햇병아리 새끼들과 악수를 일삼다간 손바닥만 두꺼워진다. 싸움을 하지 말 것이며, 일단 하게 되면 상대방이 앞으로 너를경계할 정도로 철저히 해둬라. 누구의 말에나 귀를 기울이되 네 의견은 삼가라. 즉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 판단은 감가란 말이다. 옷엔 지갑이 허락하는 데까지 돈을 써도 좋지만 괴상하게 치장해선 안 되며, 값지되 화려해선 안 돼. 그리고 옷이 날개라잖니. 프랑스에선 상류계급이나 세련된 인사들은 이 방면에 탁월하다더라. 그리고 빚을 지지도 말고 돈을 꾸어 주지도 마라. 돈을 꾸어 주면 돈과 사람을 둘 다 잃고, 빚을 지면 절약하는 마음이 무디어진다. 무엇보다도 네 자신에게 충실해라.
(p. 27)

 

 

  남자의 맹세란 겉빛깔과는 달라. 수치스런 욕망을 달성하려고 말로는 신성한 체, 거룩한 체하며 여자에게 불의를 권하는 뚜쟁이 같다고나 할까. 그러기에 더 잘 속는단 말이다.
(p. 29)

 

 

  삶이냐 죽음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이 장한 것이냐, 아니면 환난의 조수를 두 손으로 막아 이를 근절시키는 것이 장한 것이냐? 죽는다, 잠잔다--- 다면 그것뿐이다. 잠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번뇌며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이며. 그렇다면 죽음, 잠,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희구할 생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잔다, 그럼 꿈도 꾸겠지. 아, 이것이 문제이다. 대체 생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잠을 잘 때 어떤 굼을 꾸게 될 것인지, 이를 생각하니 망설여질 수밖에--- 그러나 이러한 주저가 있기에 인생은 일평생 불행하게 마련이지. 결국 이러한 분별심 때문에 우리의 결심 위엔 창백한 병색이 드리워져, 의기충천하던 큰 뜻도 마침내 발길이 어긋나 실행력을 잃고 말거든.
(p. 84)

 

 

  인간이란 결심을 해놓고도 스스로 깨뜨리게 마련이오. 지기(志氣)란 결국 기억의 노예에 불과한 것, 날 때의 기세는 장하나 지속력이 약하거든. 글쎄 이건 설익은 열매 같다고나 할까, 가지에 매달려 있다가도 익으면 저절로 떨어져 버리거든. 자신의 빚을 스스로 갚기를 잊어버린다는 것도 인정의 필연. 열정에 달아 스스로 약속한 일도, 열정이 식으면 그 결심을 잊어버리오. 슬픔이나 기쁨이나, 일단 격정이 지나면 실행력은 자취를 감추고 마오. 우리의 뜻과 운명은 상반되기 때문에 마음속의 계획은 항상 뒤바뀌고 마오. 실로 뜻한 것은 자유이지만, 성과는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오.
(p. 100)

 

 

  환락 뒤에는 애상이 깃들이는 법. 사소한 이유로 희비는 엇갈리게 마련이오. 인생은 무상, 그러니 우리의 사랑이 운명의 변화와 더불어 변한다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오. 과연 사랑이 운명을 제어하느냐, 운명이 사랑을 제어하느냐, 이는 아직도 미해결의 인생 문제요.l 세도가가 몰락하면 수하 도당들도 배반하고, 미천한 자가 천운의 뜻을 이루면 어제의 원수도 친구로 변하잖소. 이는 사랑이 운명의 종이라는 증거이며, 부유한 자는 친구가 늘 주변에 모여드는 반면, 가난한 자는 부실한 친구를 떠보다가 도리어 단면에 원수가 되고 마는 법이오.
(p. 101)

 

 

  습관이라는 괴물은 악습을 씹어 삼키고 인간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반면 천사와 같은 일면도 있어, 항상 좋은 행동을 하면 처음에는 어색한 옷 같지만 어느새 몸에 꼭 어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밤을 참으시면 내일 밤엔 한결 참기가 쉬워지고, 그 다음날 밤엔 더욱 쉬워집니다. 이렇듯 습관이란 천성을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악마라도 물리쳐서 영원히 내쫓을 수 있는 비상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p. 122)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만약 인간의 주요 행위와 일생의 영위가 단지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그렇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신이 인간에게 무궁한 판단력을 부여하여 전후를 살피도록 해주심은, 그 능력과 신과 같은 이성을 쓰지 않고 곰팡이가 슬도록 하시려는 것은 아니렷다. 과연 그렇다면 짐승처럼 잊기 쉬운 탓인지, 또는 일의 결과를 너무 세심하게 염려하는 소심한자의 주저 탓인지, 아니면 사려란 4분의 1만이 지혜이고 나머지 3은 언제나 두려워하는 탓인지--- ‘이 일만은 해야겠다.’고 입에 올리면서 왜 시간만 허비하고 있느냔 말이다. 내 그 일을 실행할 만한 명분과 의지와 실력과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p.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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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 꾸리에

(2012.08.31.)


 

6월항쟁을 ‘성공한 항쟁’이라 말하는 언설의 이면에는 그 뒤 이어졌던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기억이 배제되곤 했다. 그 결과 ‘민주정보 10년’은 절자척 민주주의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기업 지배국가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슬픈 역설이 탄생했던 것이다.
오늘의 금융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지배원리는 주식회사이며, 자본의 소유권을 당연시하고 전횡을 방치하는 한 민주주의는 껍데기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왜 경영자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의 자유가 자본에 영구히 종속되는 모순을 극복하는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을 하나의 깃발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크게 세 가닥의 실로 짜여 있다. 하나의 실은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다른 실은 ‘대답’이다.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되는 경우도 있고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실은 어떤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근거’들이다.
(p. 6)

 

 

  기업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상대하더라도 원칙적으로 그것은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가 설령 어떤 기업을 운영하더라도 그것은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적 복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가 기업화되면서 국가와 기업의 이런 구별이 사라지고, 아예 국가가 기업의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략해 버렸다.
  국가가 기업의 이윤추구의 도구가 되어버리면, 우리의 삶에서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의 집은 사적 이윤이라는 염산이 섞인 빗물에 침식될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너와 나의 인격적 만남은 사사로운 이억을 위한 경쟁과 다툼 속에서 찢어지고 우리는 서로 고리되며, 결국에는 경제적으로 가난해진다. 왜냐하면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까닭은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마지막 한 사람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경제적 양극화란 국가가 기업이 될 때 일어나는 필연적 결과이다.
(p. 28)

 

 

  기업이란 국가를 모태로 하여 생겨나고 자라왔으나 이제는 국가를 넘어가 버린 새로운 사회적 주체인 것이다. 그런데 가족이 국가에 이해 규정되듯이 새로운 전체인 세계화된 시장과 초국적 기업이 낡은 전체인 국가를 규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개별국가의 주권이 초국적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규제되는 사태가 현실로써 일어나게 된다.
(p. 39)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모순은 삶을 위한 수단이어야 할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되고 그 결과 삶의 실질적 목적이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이 모순은 사라진다.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에 대한 최종적인 주권자가 되어 자기의 생산 활동을 스스로 통제하고 형성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산출된 잉여가치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면, 더 이상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p. 76)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업은 한갓 사물적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한다 하든 국가가 소유한다 하든, 기업을 소유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을 기업에 부속된 사물로서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며, 노동자는결과적으로 노예의 자리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참된 의미에서 기업의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업의 소유권을 자본가의 손에서 국가의 손으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의 지배권, 즉 경영권을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경영권은 오로지 그 기업의 노동자에게 속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인 것이다.
(p. 131)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회사의 본질상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식의 소유라는 사실로부터 기업경영의 권리가 전혀 연역될 수 없다는 것이 주식회사의 본질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조식을 전혀 소유하지 않은 사람도 주식회사의 경영을 맡을 수 있고, 반대로 모든 주식을 소유한 사람도 경영을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다.
(p. 170)

 

 

  주식회사에 주인 같은 것은 없다.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주들이 있을 뿐이고,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주들이든 이사든 경영진이든 모두 자기가 맡은 일이 있고 그 일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주식회사는 개인기어이 아니라 법인기업으로서 철저히 법적인 구성물이다. 그러므로 이 법적 구성물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개인은 철저히 법적인 근거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고 그에 대해 마찬가지로 자기의 권한행사에 따르는 법적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의 이건희는 삼성의 어떤 계열사 가운데 어떤 회사에서 주식회사 법에 규정된 어떤 직책을 정식으로 맡고 있으며, 그에 따라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며,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p. 212)

 

 

  주인이 없으므로 오직 공공성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할 주식회사가 이 땅에서는 주인이 없으므로 먼저 차지하는 자가 주인이 되고 이를 통해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가 기업에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것인 주식회사를 사사로이 지배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나라이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거대 주식회사 집단 곧 재벌 가문의 노예가 되어 있다.
(p. 235)

 

 

  노동자들이 출자한 우리사주조합이 일정기간 동안 5% 이상의 주식을 확보한다면, 자기가 일하는 기업에 대해 회계장부 열람권, 회사의 업무와 재산상태 검사 청구권, 총회소집 청구권, 이사 해임청구권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많은 불합리를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크면 클수록 노동자들이 이 정도의 지분을 공동으로 확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소극적 견제만으로는 기업이 노동자들의 자치 공동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p. 242)

 

 

  주식회사를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롤 만들기 위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주식회사의 주체성을 돌려주는 일만 남았다. 이를 위해 우리가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줄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법률조항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내가 했던 모든 말은 바로 이 한 마디를 위한 근거를 제시한 것 뿐이다.
(p.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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