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L'etranger (1942)
알베르 카뮈 / 김화영 / 책세상 / 248쪽
(2017. 6. 9.)



(미국판 서문)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그에게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뇌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하게 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선고를 받게 된다.
(P.7)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은 알제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마랑고에 있다. 2시에 버스를 타면, 오후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밤샘을 할 수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나는 사장에게이틀 동안의 휴가를 청했는데 그는 이유가 이유이니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네 탓이 아닙니다." 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변명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조의를 표해주는 쪽이 오히려 마땅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모레, 내가 상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조문을 할 것이다. 지금은 어쩐지 어머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별다름이 없는 듯한 상태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 만사가 다 공인된 격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P.21)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며, 어둠 속에 떠오른던 첫 별빛들을 희미하게 했다. 그처럼 온갖 사람들과 빛이 가득한 보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눈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로동은 젖은 보도를 비추고, 전차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빛나는 머리털, 웃음을 딘 얼굴, 혹은 은팔찌 위에 불및을 던지는 것이었다. 조금 뒤에 전차들이 점점 뜸해지고, 벌써 캄캄해진 밤이 나무들과 가로등 위에 내려 앉게 되면서 거리는 어느 틈엔가 인기척이 없어지고, 마침내 다시 쓸쓸해진 길을 고양이가 천천히 가로질러 가는 시각이 되었다. 그때에야 나는 저녁을 먹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었기 때문에 목이 좀 아팠다. 나는빵과 밀가루 식료품을 사가지고 올라와서, 요리를 해 가지고 선 채로 먹었다. 창 앞으로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려 했으나, 공기가 서늘해서 좀 추웠다. 나는 창문을 닫았고, 방 안으로 돌아오다가 거울 속에 알코올 램프와 빵조각이 나란히 놓여 있는 테이블 한 끝이 비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P.44)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햇볕에 진동하는 해변이 내 뒤에서 죄어들고 있었다. 나는 샘으로 향하여 몇 걸음 나섰다. 아랍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얼굴 위에 덮인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87)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P.88)


  재판장이 잔기침을 하고 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덧붙여 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므로 일어서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그건 하나의 주장이라고 대답하고, 지금까지 자기는 나의 변호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명확히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빠른 어조로 좀 더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의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곧 뒤이어 그는 발언권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도 늦었고, 자기의 진술은 여러 시간을 요할 것이니까 오후로 미루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법정은 이에 동의했다.
(P.136)


  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갑자기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했다. 내게 무슨 일이든 생길 때면 거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마침내 낮에만 조금 자두었다가 밤에는 꼬박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올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게끔 되었다. 가장 괴로운 때는,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 오는때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던, 그 분간하기 어려운 시각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귀가 그처럼 많은 소리,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바자국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으니, 어떻게 보면 그 시기 동안 줄곧 나는 어지간히 운수가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어머니는 가끔 말했었다. 하늘이 빛을 띠고 새로운 하루가 나의 감방으로 새어들 때, 형무소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서 내 심장이 터지고 말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 판자에 귀를 대고 제정신이 아닌 듯이 기다리노라면, 나중에는 나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나중에는 마치 헐떡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짝 놀라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결국 나의 심장은 터지지 않았고, 나는 다시 한 번 24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었다.
(P.148)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 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보리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너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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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 <리바이어던>
(Leviathan) (1996)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13호)
진병운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228쪽
(2017. 6. 7.)




  한국과 세계 근대사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조성한 전쟁과 전쟁을 통해서, 근대의 인류와 한국인은 무엇이 인간인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전쟁이란 국가의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이 자신의 모든 지식, 도덕, 명예, 부, 아니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절대 가치라는 절대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절대 가치를 그것의 절대적인 적으로부터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전쟁 상태에서 인간적인 힘으로선 최대의 힘이 다수의 인간이 동의하여 단 하나의 자연적 또는 사회적 인격에 그들의 모든 힘을 집결시킴으로써 탄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는 지상의 신, 토마스 홉스의 국가이다.
(P.ii)


  ‘리바이어던’이란 이름의 출처는 다름 아닌 기독교의 성서이다. 성서에서 리바이어던은 여호와의 적이며 혼돈의 원리로서 제시되고 있으며 또 때로는 악어나 고래의 형상이 부여되고 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신화적 상상의 소산으로서 추정된다. 홉스의 경우, 만일 그가 리바이어던을 악과 연상하여 생각했다면 이 이름을 그의 대작의 제명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부여한 책의 본문 17장 13절에서 “우리 시민이 평화와 안전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불멸의 영원한 신 하나님 아래서 우리를 통치하는 유한한 신, 곧 리바이어던의 덕분이다.”고 명기하고 있는 저자 홉스에게는 리바이어던이란 시민의 생명을 지상의 폭력적인 죽음으로부터 보호하는 국가통치권자로서의 정부를 지시하는 이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홉스가 통치권자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명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은 그들의 자연 본
성에서 오는 자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서로 협력하여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한 피조물이기에 그들의 순조로운 사회생활을 위해선, 스스로가 본문 28장 27절에서 천명하고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들의 온갖 자만과 교만을 압도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진 리바이어던을 불러내어 이를 다시 거만(pride)의 왕이라고 명명했던 것”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데에 있기도 하다.
(P.32)


  홉스의 이 저서가 이렇게 세계사적 리바이어던의 위상을 점하게 된 연유는 고대·중세·근대로 분절된 세계사의 결론부인 근대를 그 방법과 내용에 의해 가장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는 데에 있다. 근대의 으뜸가는 특징인 자연 과학의 대두로 한편 전통 철학과 종교의 권위가 근저부터 뒤흔들리면서 다른 한편 인간은 우주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전대미문의 미궁에 빠지게 되는데, 홉스는 그의 <리바이어던>에서 이와 같은 근대적 현실을 철학·종교·과학·정치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하나의 웅대한 시스템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홉스는 동 저서에서 전통 세계의 와해 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하여 최초의 자연과 인간 질서를 드러내고 이 자연 질서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리바이어던으로 대표되는 정치공동체를 창출할 수밖에 없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철학서로서 분류되는 <리바이어던>은 근대라고 하는 세계 속에서 인류가 생존하기를 원하는 한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정치체제, 곧 근대국가의 설계도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모든 종교와 철학의 근본적 인 문제였던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도 과학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해답을 가져올 것을 자임하고 있다.
(P.39)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상존하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연 이성의 명령인 자연법에 따라 맺게 되는 ‘사회계약’의 결과 통치권을 부여받은(authorization) 인공적 인격체(artificial person)로서 우리 시민이 ‘평화와 안전’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불멸의 영원한 신아래서 우리를 통치하는 유한한(mortal) 신, 곧 <리바이어던>의 덕분이다. 홉스에서 리바이어던이라고 칭하는 국가 통치자는 압도적인, 인간으로선 어느 누구도 저항 불가능한 힘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유한한(finite)존재로서 무한한(infinite)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incomprehensible)신과는 엄격히 구별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이 사회계약이란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존재로서 이해되고 있는 만큼 그것의 존재 이유나 힘의 성질 따위가 피통치자 백성이 [자신의 자연 이성에 따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만큼 홉스는 그의 <리바이어던>을 통해 ‘절대주의’의 대명사로 간주되면서도 동시에 ‘사회계약’을 리바이어던 곧 국가통치권자의 구성 원리로서 제시함으로써 ‘근대성’(modernity)의 성격을 규정하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네 가지 이념을 설파하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명실상부한 원조로서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P.41)


  근대 국가의 역사적 해체나 이론적 분석 과정에서 드러나는 <리바이어던>의 현실화로서의 국가 통치 체제의 절대화 경향은, 근대의 대표적인 부르주아 국가 영국에서, 그것도 다름 아닌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시조 로크에 의해서도, 이미 그 위험이 경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로크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맞서 이보다 29년 후에 발간된 자
신의 <시민통치론>에서 실제로 [절대주의 통치체제 대신에] 대의 정치체제(representative government) 및 시민 저항권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홉스에 비해 로크에 이르러 지대한 이론적 발전을 본 것은 사실이며, 이는 후자가 동일 저서에서 주장한 재산권 이론이 오늘날 자본주의 정당화 이론의 골자인 점을 헤아릴 때 더더욱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로크의 시민이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이며, 그러므로 ‘시민 통치론’은 ‘부르주아 통치론’에 지나지 않고 ‘대의 민주주의’란 ‘형식적 민주주의’에 다름 아님을 지적한 루소를 비롯한 마르크스, 레닌의 비평을 고려할 때, 그의 <시민통치론>이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지우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 또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시민통치론>이 <리바이어던>을 벗어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이유는 전자의 구성 원리 중 하나로서 정치 공동체[국가, commonwealth]의 성립 이전에 사람들은 자연적인 권리로서 생명·자유·재산이란 소위 불가양도의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로크 자신의 자연권 이론 자체에 있다.
(P.45)


  홉스 정치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로 정의하는 데 있다. 전쟁 상태라 하면 우선 사생결단의 물리적 충돌을 의미하나 홉스는 여기에다 일종의 냉전이라 할 수 있는 적대 관계도 포함시키고 있다. 즉 홉스에게선 쌍방 중 어느 쪽이나 타방을 공격할 의도가 상존하고 따라서 어느 쪽이나 자기를 지키기 위해선 타방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적대 관계 역시 전쟁 상태로 규정되고 있다.
  “만인이 만인에게적인 전쟁 상태에 수반되는 온갖 사태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창의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장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상태에 수반되는 사태와 동일하다. 이런 상태에선 근로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근로의 과실이 불확실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토지의 경작도 항해도 있을 수 없으며, 해로로 수입되는 물자의 이용, 편리한 건물, 다대한 힘을 요하는 물건의 운반이나 이동을 위한 도구, 지표면에 관한 지식, 시간의 계산, 기술, 문자, 사회 등 그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쁜 일은 끊임없는 공포와 폭력에 의한 죽음의 위험이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빈궁하고 더럽고
잔인하면서도 짧다.”
(P.54)


  데카르트의 경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반면, 홉스는 물체[물질] 일원론의 입장에서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물체의 운동이란 유물론적 기계론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홉스의 철학은 데카르트와는 달리 우선 서양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 철학과는 분명한 단절을 선언하면서 당시 케플러의 지동설이나 갈릴레오의 관성의 법칙에 의해 확립되고 있었던 자연 과학을 자신의 방법론이나 존재론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홉스에게서 초자연적 절대자인 신과는 관계없이 가톨릭 교권을 배제하고 오로지 자연 이성에 따라 리바이어던이라고 하는 인공 인간을 지상의 최고 권위로서 구상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일원론적 기계론 철학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P.86)


  일종의 인공 인간으로 생각되고 있는 <리바이어던>의 소재인 인간이 형식적으론 흡사 자연과학의 대상인 ‘자연 상태에서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질 내용에 있어선 이는 어디까지나 자연 상태가 아니고 사회 상태에 들어와서 타락하여 그 본래의 모습[본성]을 상실한 인간을 기술하고 있음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홉스가 ‘자연 상태’라는 이름[개념] 하에서 기술하고 있는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실은 중세의 질서를 받치고 있던 기독교의 권위와 스콜라 철학의 붕괴와 더불어 생존하기 위해선 자신의 이기적인 힘과 지략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근대인이었고, 따라서 이는 홉스가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역사적 현실로서의 인간을 기술, 분석하고 일반화했던 결과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귀납적 방법을 거친 결과이기에, 리바이어던이라는 명칭을 갖게 될 인공 인간의 ‘소재’이며 ‘제작자’인 ‘인간’을 독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마음을 읽어보기만 하면 자명한 진리로서 승인하게 될 것이라고 홉스는 권두언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P.93)


  루소의 자연인은 고도의 추상 작업(abstraction)의 결과로서 본인 스스로가 말한 대로 [이성에게만 존재하는] 이성 상의 존재(et̂ re de raison)인 반면, 홉스의 자연인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성찰(introspection)하는 경험적 심리학(empirical psychology)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양자의 정치학 내지 국가론은 공히 자연
인 곧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는 만큼, 자연인 파악에서의 이와 같은 방법론상의 차이는 결국 루소의 국가를 이상주의 국가로 홉스의 국가를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국가로 규정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P.101)


  홉스의 <리바이어던> 창조 내지 저술 목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로서 규정되는 자연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결과하는 죽음의 공포라고 하는 보편적인 정념을 해결하는 데에 있다. 전쟁 상태나 죽음의 공포가 철학자 홉스의 지적 전유물이 아니고 17세기 인간 일반이 실제로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담고 있었기에 지상에 평화를 확립할 수 있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근대 국가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감각 기능과 무관한 정념은 없으며” “인간 이성 안에 있는 모든 개념은 최초엔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감각기관에 의해 포착되었던 것이다.”는 인식론 원칙에 입각했던 홉스는 실제로 그 생애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내외의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았고 따라서 전쟁과 죽음의 공포와 평화라는 것을 두뇌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감성을 통해서도 알고 있었다.
(P.108)


  홉스에서 ‘사회계약론’은 로크나 루소에서처럼 반드시 민주정체에 이르는 절차가 아니고 민주정체, 귀족정체, 군주정체 중 그 어느 정체에로도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리바이어던>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홉스의 ‘주제’는 “통치 형태의 여하를 불문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데 충분하기만 하면 모든 권력은 마찬가지이다.”라는 점을 증명하고 “어떻게 사회계약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의 권력으로서의 주권이 탄생하는가를 논증”하는 것이었다. 즉 홉스에서 사회계약론 ‘국가의 종류’나 ‘정부 형태’에 관한 논의를 넘어서 그의 ‘절대주권론’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학자들이 <리바이어던>의 저자에서 굳이 민주주의자의 면모를 찾아내는 것은 어쩌면 근대사를 민주주의 이념의 실현사로 보는 역사관의 필연적인 소산일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이 몸소 군주정에 대한 의회주의자들의 도전과 후자의 전자에 대한 승리를 목격했었기에 근대와 더불어 대두한 민주주의 이념의 혁명적 기세를 실감하고 있던 홉스 자신은, 정작 정치와 국가를 민주주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당대의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 “그것이 군주정체든 민주정체든 이유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못하는 것은 자기들로선 참가의 희망이 없는 군주 정체보다도 그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민주적 합의체에 호의를 품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의 야심이 그 까닭이다.”(18장 4절, p.117) 이렇게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원천인 사회계약론을 공유하면서도 그 결과가 도무지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홉스의 독창성이고 그의 대작 <리바이어던>의 특징이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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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리바이어던
(서울대선정 인문고전 50선 11)
손기화(글) / 주경훈(그림) / 주니어김영사 / 211쪽
(2017. 6. 5.)




  리바이어던(Leviathan)이 뭘까? 이름에서 뭔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 않아? 원래 리바이어던은 구약 성경의 <이사야서>와 <욥기>에 나오는 하느님의저주를 받은 뱀, 악어 혹은 용으로 묘사되는 짐승의 이름이야. 욥기 41장에서 리바이어던은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창이나 작살로 찔러도 아무 소용이 없고, 철을 지푸라기같이 다루는 동물로 묘사되어 있어. 그래서 땅 위에 그 어떤 것도 리바이어던만큼 무서운 것이 없고 온갖 자만한 것과 교만한 것을 압도하는 짐승으로 나오지. 이 짐승은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하면서 하느님과 대적하는 것으로 자주 등장하곤 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홉스는 리바이어던의 막강한 힘을 높이 평가했어. 리바이어던의 힘에 의해 안전과 질서가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힘을 가진 통치자, 이것이 홉스가 생각하는 리바이어던이야.
성경에서는 모든 전쟁과 혼란이 인간의 통ㅈ되지 않는 열정과 교만함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지. 그래서 홉스는 인간의 열정과 교만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리바이어던이 있어야 한다고 본 거야.
(P. 12)


  과학자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분석하듯이 홉스는 국가를 통치하는 데 근본이 되는 힘을 분석하고 있어. 그는 가장 위대한 힘이 국가의 힘이라고 보았고 그 힘은 사람들 간의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고 보았어. 그리고 통치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은 그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동의로 통치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란 거지. 더구나 홉스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 사람의 가치를 비유하고 있어.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가격을 결정하듯이
(P.57)


  종교는 사람에게만 존재해. 신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그리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생각은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야. 사람들은 행운과 불운의 원인을 탐구하는 일에 아주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미래에 대한 지속적인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필요롷 하지. 그래서 무한하고 전능한 신을 쉽게 인정하게 만들어. 홉스는 사람들의 환상이나 환영, 그리고 꿈 따위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고 했어. 무지한 사람들은 마녀, 유령 등의 마력이 재난을 가져온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 그걸 아는 악한 사람들은 마녀나 유령들이 실재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이런 무지한 사람들의 약점을 잡고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지.
(P.63)


  통치자와 통치를 받는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이 상태에서는 오직 힘만이 정의가 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만으로 살아게게 될 거야. 홉스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평등하다고 간주하고 있어. 인간이 그 정신적, 신체적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비슷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거야. 역설적으로 이 능력의 평등이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돼. 자연적으로 타고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달려들게 되거든. 그러므로 만약 어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가지길 원한다면 둘 다를 만족시킬 수는 없게 되고 둘은 적이 되지. 결국 자기 보존의 목적이나 때로는 향락을 목적으로 서로를 파괴하게 돼.
(P.66)


  사람들이 어떤 권리를 포기하거나 양도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오는 어떤 권리나 자신이 희망하는 어떤 다른 이익을 고려하기 때문이야. 선천적으로 경쟁심이 많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잊진 않았겠지? 그런 사람들이 권리를 포기할 때에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어떤 유익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생겨. 우선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할 권리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을 수 없어.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저항권'이라는 거야. 또한 자신을 상처 입히거나 가두어 두려는 사람들에게 저항할 권리도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 이런 경우 참는 것은 어떤 이익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야.
(P.78)


  홉스가 제시한 사회 계약의 중요한 결과는 자신을 보호해 줄 공동의 힘을 세우는 것이야. 이것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자연권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양도하면서 성립돼. 이로써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은 통치권을 받게 되고 그 통치권을 이용하여 권리를 야도해준 개인들의 안전 보장을 책임지게 되는 거야. 홉스는 이런 통치자를 인격체로 보고 있어. 인격체(Person)의 라틴어 어원은 'persona'인데 이것은 연국에서 '가면'을 뜻하고 법정에서는 '대리인'을 뜻하지. 홉스가 의미하는 인격체는 통치자를 가리키고, 그는 통치를 받는 사람들을 대신하는 사람이야. 이 이론으로 홉스는 통치권에 대한 기존의 전통을 뒤바꾸게 된 거야. 위의 신이 아니라 아래의 백성들이 통치자에게 권위를 부여한 거야. 홉스의 이런 생각은 당시 왕의 통치권이 신으로부터 나왔다는 왕권신수설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통치권은 신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통치권에 대한 불복종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고 이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개인들은 통치자를 결정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행사할 수가 없었어.
(P.96)


  통치자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통치자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면 백성들은 그가 칠행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지. 결국 통치자가 자신의 명령으로 자연법을 어긴 경우에도 통치자뿐 아니라 백성들도 자연법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거야. 통치자에게 권한을 위임할 때에는 그 책임까지도 같이 지겠다는 것을 포함하는 거야. 훌륭한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은 국민들이고 국민들이 성숙하지 못하다면 자신들이 한 잘못된 선택에 대해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거야.
(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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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바이어던
(e시대의 절대사상 002)
김용환 / 홉스 / 살림 / 283쪽
(2017. 5. 27.)



  근대 시민사회의 토대들인 개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이념들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원리들이다. 이중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상의 형성에 홉스 철학이 던진 빛은 깊고도 긴 그림자를 우리 시대에까지 드리우고 있따. 홉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근대 철학, 그리고 우리 시대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 철학자이다.
(P.11)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근대 국가를 사회계약론이라는 토대 위에 새롭게 세우려는 원대한 꿈이 담긴 작품이다. 그리고 홉스는 자신의 이 작품이 현실 정치가, 특히 군주의 손에 들려져 그로 하여금 백성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해주는 현실 정치를 펴는 데 교과서가 되길 희망했다. 이 작품은 근대 시민사호의 성립과정과 정부 구성의 원리를 제공해주는 사회계약론에 관한 대표적인 고전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마키아벨리를 계승하는 홉스의 이 작품은 서양 정치 사상사의 맥을 잇는 로크의 <시민정부론>과 더불어 근대를 대표하는 정치 이론서이다.
(P.21)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은 1부 <인간에 관하여>와 2부 <국가에 관하여>에 관심을 가장 많이 보여 왔는데, 홉스의 사회, 정치 철학이 대부분 이 두 곳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리바이어던>의 전체 분량으로 보면 그 절반에 가까운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호브가 논의한 주제는 종교, 신학적인 문제들이다. 3부 <그리스도 왕국에 관하여>에서 홉스는 자신의 독특한 방식, 즉 계약론적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있으며, 4부 <어둠의 왕국에 관하여>에서는 잘못된 성서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철학이 어둠의 왕국을 지배하는 세력들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명실상부하게 홉스의대표작이다. 따라서 이 한 권의 책 속에는 그의 인간론, 도덕론, 정치론, 정교철학, 형이상학과 인식론 등이 모두 담겨 있다. 그의 전체 사상을 핵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중요 개념과 그가 취한 입장들을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일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P.44)


  건강하고 생산성 있는 새로운 철학은 늘 새로운 방법론을 요청한다. 마치 새 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그러하다. 근대 철학의 출발점에 서서 베이컨이 <새로운 기관>에서 우상론과 귀납론으로, 그리고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통해 새로운 철학을 위한 방법론을 모색했듯이 전통 철학에 강한 불신을 가졌던 홉스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요구 앞에 직면했다.
  홉스는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냄으로써 낡은 철학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새로운 철학을 위해 선택한 방법론의 모습을 포착하는 일은 그가 그린 학문의 나무 전체를 이해하는 밑그림이 된다.
  홉스의 방법론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여져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이 '분해와 결합의 방법' 이다. 분해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을 가장 작은 단위로 분해하여 더 이상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토대를 찾아가는 과정을 말하며, 결합이란 그 토대로부터 점차 복잡한 것으로 종합해 과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분해와 결합은 분석과 종합의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철학에서 방법은 알려진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또는 알려진 결과로부터 원인을 찾아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사물들의 원인을 알아내는 데는 분해와 결합 또는 부분적인 분해와 결합이외의 방법은 없다. 결합을 종합적이라 부르는 것처럼 분해는 보통 분석적 방법이라 부른다."
(P.48)


  세계화와 무한 경쟁 시대라고 말하는 현대 사회에서 주로 목격되는 인간관계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자(강대국)와 약자(약소국)가 한 울타리 안(세계화)에서 같이 먹이를 놓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WTO 체제)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다투는 상황이 강자들이 말하는 허울 좋은 세계확이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잔인한 경쟁체제에서 실제로는 공정하지도 않은 게임을 강요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7세기의 자연상태와 21세기의 세계화 논리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은 삶의 조건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공통성 때문이다.
(P.73)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보더라도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며 그 책임도 국민들이 져야 한다는 홉스의 말은 상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어떤 통치자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그 결정을 내리는 국민들의 정치적 역량과 관련되어 있다. 훌륭한 통치자를 택하고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국민들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홉스를 절대군주론자로만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계약론과 권위 부여하기 이론을 통해서 보면 홉스의 정치론에는 민주주의의 이론과 유사한 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P.92)

  
  홉스는 국가 또는 통치자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리바이어던'이라는 용어를 선택했을까? 이 용어의 출처는 물론 구약성서이다. 욥기 41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리바이어던 무적의 힘을 가진 바다 동물의 이름이다.
  성서에서 이 동물은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하며, 하느님의 적대자며,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홉스는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반대의 뜻으로 리바이어던을 차용하고 있다. 통치와 질서를 보장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의 소유자이며,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의 교만함을 억누리고 그들을 복종하게 할 수 있는 존재이다.
(P.97)
  

  "다수를 속이는 일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속이는 일보다 더 쉽다."
  "모든 인간은 어리석어서 더 좋은 것을 대신 세우기 전에 이미 있는 좋은 것을 파괴하고 만다."
(P.129)


  흄은 무지하고 미개한 사람들에게 종교심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의 활동(질서와 조솨)에 데한 관찰에서가 아니라 삶의 사건들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희망과 공포의 감정이 라고 보았다. 특히 이런 감정은 기적, 계시, 엄청난 자연적 변화 등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 자연 속에서 신(들)의 흔적을 느끼게 만든다. 알 수 없는 원인에 대해 추적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할 때 희망과 공포의 감정은 종교적 대상에 대해 자연스러운 복종을 하도록 만든다.
(P.141)

 
  우리는 근대인들이 물려준 문화, 기술, 사상의 빚을 많이지고 살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지식인 사회에서 근대와 탈근대에 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근대정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위상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근대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토대들인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이념들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원리들이다. 이 중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의 형성에 홉스 철학이 던진 빛은 깊고도 긴 그림자를 우리 시대에까지 드리우고 있다. 홉스는 근대 철학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시대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 철학자이다.
  "홉스는 마키아벨리보다 더 분석적이며, 보댕보다 더 간결하며, 데카르트보다 더 역사적이며, 스피노자보다 더 통찰력이 있으며, 로크보다 더 일관성이 있으며, 아마도 이들 모두보다 더 근대적이었다."
(P.184)
 

  사람의 본성 가운데에는 분쟁의 세 가지 주된 원인이 있는데, 첫째 경쟁심은 사람들을 무엇인가 얻기 위해 공격하게 만든다. 둘째, 자기 확신의 결핍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학 만들며, 셋째, 영광에 대한 명성을 얻기 의해 사람을 공격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떨게 만드는 공통의 힘이 없는 동안 사람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같은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
(P.213)


  공동의 권력을 세우는 유일한 길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부여하는 일이다. 이것은 동의나 화합 이상의 것이며, 그들 모두의 참된 통일이다.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 통일된 군중은 커먼웰스, 키비타스라 불린다. 이것은 위대한 리바이어던 또는 유한한 신의 탄생이다. 우리들이 평화를 유지하고 방어하는 것은 이 유한한 신 덕분이다 국가란 하나의 인격체로서, 다수가 상호 신약에 의해 스스로 그 인격체가 하는 행위의 본인이 되며, 그 목적은 그가 공동의 평화와 방어에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다수의 모든 힘과 수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 인격첼ㄹ 이끌고 있는 이가 통치자며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밖의 모든 사람은 그의 신민이라 부른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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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 박병덕 / 민음사 / 240쪽
(2017. 5. 26.)



  싯다르타 앞에는 한 목표, 오직 하나뿐인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었다.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소원으로부터 벗어나고, 꿈으로부터 벗어나고, 기쁨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비우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멸각시키는 것, 자아로부터 벗어나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상태로 되는 것,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평정함을 얻는 것, 자기를 초탈하는 사색을 하는 가운데 경이로움에 망므을 열어놓는 것,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만약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과 모든 충동이 침묵한다면, 틀림없이 궁극적인 것, 그러니까 존재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 이제 더 이상 자아가 이닌 것, 그 위대한 비밀이 눈뜨게 될 것이었다.
(P.27)


  나는 <인간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위하여 오랜 시간 노력하였지만 아직도 그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 친구,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뿐이며, 그것은 도처에 있고, 그것은 아트만이고, 그것은 나의 내면과 자네의 내면, 그리고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난 이렇게 믿기 시작하였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고 말이야
(P.35)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싯다르타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고 생판 모르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원인, 딱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들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P.61)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이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이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P.158)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선량하고 마음씨 좋고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며, 어쩌면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성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특성이 아니었다. 자기를 그 초라한 오두막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 아버지라는 사람이 소년에게는 지겨운 존재였다. 아들이 볼 때 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소년에게는 지겨운 존재였다. 아들이 볼 때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정말로 지겹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무례한 행동을 하여도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미소로 대하고, 자기가 아무리 막된 욕을 퍼부어도 다정하게 대하고, 자기가 아무리 악의를 보여도 선의로 대꾸하였는데,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소년의 눈으로 볼 때는, 늙고 음흉한 위선자의 가장 가증스런 교묘한 술수였던 것이다. 소년한테는 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위협을 받는 편이, 학대를 당하는 편이 오히려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P.179)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P.202)


  나는 사상들을 가졌었지. 그래, 그리고 이따금씩 인식들을 가져본 적도 있었지. 나는 가끔씩,한 시간 정도 아니면 하루 정도, 마치 사람들이 가슴 속에 생명이 고동치는 것을 느끼듯이, 나의 가슴속에서 지식이 살아 있음을 느끼곤 한 적이 있었네, 그것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었지. 그라나 그것들은 자네에게 전달하기란 나로서는 힘든 일일 것 같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업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P.205)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산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하아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P.210)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보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뜻이 언제나 약간 다랄져 버리게 되고, 약간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어 버리고, 약간 어리석게 도어버린다는 이야기야. 그래. 그렇지만 이것도 매우 좋은 일이며 그리고 내 마음에도 아주 쏙 드는 일이야. 어느 한 사람에게는 소중한 보배이자 지혜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떤 다른 사람에게는 항상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린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나는 동의하고 있어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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