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도 꽃이다 1
조정래 / 해냄 / 400쪽
(2017. 7. 23.)


  온갖 꽃이란 꽃은 다 피워놓고 4월은 이울고, 꽃과 함께 유록색 새싹들을 돋아 올리며 5월이 오고 있었따. 학교 울타리에도 개나리도 샛노랗게 물들었던 꽃들이 지고 어린 새잎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잎 먼저 피운 덩굴장미는 진초록 잎들을 떠받치며 새빨간 꽃들을 송이송이 피워내고 있었다. 그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과 잎 들은 아름다움의 극치였고 생명감 넘치는 악동이고 환희였다. 봄은 그렇게 찬란하고 황홀하게 온 천지를 수놓고 있었다.
  그런데 바깥의 눈부신 봄 풍경과는 반대로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복도는 분위기를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P.11)


  교육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자기들이 머리 좋게 타고난 공부를 수월하게 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할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내심에는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시하는 의식까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애들을 무조건 편애하고......, 그건 교육자로서의 바른 뱡심일 수가 없습니다.
(P.20)


  이제 대한민국 국민은 6.25 직후의 폐허의 가난 속에서 미국의 원조에 그저 감읍하고, 동물 사료용 가루우유마저 서로 많이 받아먹으려고 허겁지겁했던 거지 군상이 아니었다. 40~50년 동안 밤낮없이 뼛골 빠지게 일해서 1인당 GDP 2만 5천 불대의 배부름을 향유하고 있는 자존심 제대로 갖춘 존재들이었다. 그런 대상들에게 '광우병에 걸리든 말든 값싸니까 먹어라'하는 식으로 말을 해댔으니 그게 통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트라우마(상처)를 열등감으로 심층 깊이 감추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리는 얼마나 난해하고 복잡한가. 우리 한국 사람들은 거지꼴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먹어야 했던 아픈 과거를 공도의 부끄러움과 열등감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미국을 대할 때는 그 부끄러움과 열등감이 미국에 대한 선망과 같은 비중으로 엇갈리는 것이다. 대통령의 그 말은 바로 그런 열등감을 정통으로 찔러버린 것이었다.
(P.26)


  이 세상에서 문제아는 없다. 문제 가정, 문제 학교, 문제 사회가 있을 뿐이다.
  <영국 교육자 알렉산 닐>
(P.46)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 중에 하나는 나와 남을 비교해 가며 불행을 키우는 것이다.
(P.48)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박노해)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봄녀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정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다'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것을
  뼉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을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P.77)


  그 1점의 경쟁은 같은 수준에 있는 애들끼리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는 수많은 아이들까지 동원되고 괜히 고통당해 가며 체력을 소모하고, 막대한 재력을 탕진해 댄다는 사실입니다.
(P.133)


  왕따와 학교 폭력은 초,중,고등 학교에서 발생하는 2대 사건인데, 왕따는 80퍼센트 이상이 여학교나 여학생 사이에서, 학교 폭력은 80퍼센트 이상이 남학교나 남학생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어. 이 문제들은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서 나타나는 병적 증상이야. 아마도 제일 큰 게 과도한 공부 스트레스 인 것 같도, 그다음이 약자를 괴롭혀 자기 힘을 과시하는 인간의 악한 지배욕의 발동 같고, 한 공간을 자기네 세계로 장악하고자 하는 패거리 의식이 또 하나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의 고통스러움을 보면서 점점 승리감과 쾌감이 커져가는 악마적 가해 의식,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는게 아닌가 싶어
(P.245)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100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미국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그걸 따지자면 복잡해지고,부정확해진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주 미안한 얘기지만, 쉽고 정확하게 따지는 방법이 하나 있다. 미국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무관심을 따져보는 것이다. 그건 얼마나 될까? 한국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무관심은 100이다.
  한국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무관심은 저 아프리카의 가봉이나 잠비아 같은 나라에 대해 무관심한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안쓰러운 것은 한국 사람들은 결코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일반은 그렇다하더라도 식견있는 지식인들까지도 그런 사실을 사실대로 파악하지 않고 한국적 착각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진단했다.
  "치유 불가능한 열등감과 선망." "분단 상황이 야기한 의존성."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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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에 관하여
데이비드 흄 / 이태하 / 책세상 / 150
(2017. 7. 12.)



  이 책에서 소개하는 <기적에 관하여>는 종교 개혁론자로서 영국 이신론자들으 자연 종교와 기독교라는 기성 종교 사이에서 중용을 찾고자 했던 흄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 글로서 사이비 종교아 참된 종교를 구분 짓는 시금석을 마련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를 엿보게 해준다. 이 글이 처음 발표되었던 18세기에는 수많은 학자와 성직자들이 이 글을 기독교의 토대를 파괴하는 반기독교적인 글로 간주해 비판이 줄을 이었다 이 비판들은 주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이성적 관점의 비판으로 흄이 전개한 논변상의 논리적인 결함을 지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 관점의 비판으로 기적에 관한 종교적 담론이 흄의 불신앙에서 비롯된 편견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P.9)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유행처럼 번진 반이성적, 탈토대주의적 성격의 탈 근대성의 사조는 그것이 주장하는 다원성과 다양성을 종교의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면서 오늘날 규범적 종교다원주의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 결과 탈 근대성의 담론은 종래 이단과 미신 등 사교로 간주되었던 많은 사이비 종교를 포함하여 그 사회적 유익성을 아직 검증되지 않은 많은 유사 종교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근대 종교 철학의 효시이자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기적에 관한 흄의 종교 철학적 논의는 참된 종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할 뿐 아니라 삶의 긴장과 불안 가운데서 그 어느 때보다 기적을 바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참된 기적의 의미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P.10)


  어떤 사실이 진기하다는 사실이 곧 추론의 규칙을 전복시킬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는 증거에 대해 좀더 조심스러운 검토를 요구할 뿐이다. 우리는 단지 고려되는 사실 그 자체와 관련된 문제점으로 인해 증거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내리거나 증거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문제점이 경험적인 확실성에 이르기 위한 증거를 무효화 시킬 수는 없다. 사태에 관한 증거는 논증의 모든 단계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진리를 탐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에는 경험적 확실성에, 후자의 경우에는 절대적 확실성에 이른다. 어떤 사실에 대해 불신을 가정하는 것은 그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를 고려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들이 기적의 신뢰성을 부인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장애물은 전적으로, 사실을 고려할 때부터 생겨난다. 마음이 불신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에 어떤 증거에 대한 공정한 경청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들이 처해 있는 곤경이다.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지지 않는 한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63)


  흄은 "모든  학문은 다소간 인간 본성과 연관을 갖는다"는 전제하에,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학을 세울 때 비로소 학문의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바로 이러한 인간학의 이념에 따라 인간 본성에 관한 실험적 탐구에 착수하고 있다.
(P.80)


  흄에 따르면 '모든 관념은 인상의 복사'라는 경험주의의 원리를 따를 때 우리는 사태에 관한 모든 추리가 의존하는 인과 관념이 어떤 인상에 근거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들로부터 우리는 단지 그들 간의 공간적인 인접성과 시간적 연속성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비이락의 경우와 같이 원인과 결과 간의 인접성이나 연속성만으로는 완벽한 인과 관념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참된 인과율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를 한데 묶는 필연적 연관성을 경험을 통해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과율의 원리를 주장함에 있어서 공간적 인접성이나 시간적 연속성 외에, 필연적 연관의 관념이 어떤 인상에서 유래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필연적 연관의 관념을 야기한다고 생각되는 어떠한 인상도 물체들의 작용에 대한 개별적 사례들에 대한 경험에서 발견할 수가 업서다. 결국 지각을 기초로 그것의 원인이 되는 물리적 실체를 가정하고 있는 로크의 표상적 실재론은 경험에 의해 확증되지 않은 하나의 독단적 원리라 할 수 있는 인과율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P.83)


  나는 이미 수학의 토대를 검토하면서 노를 저어가는 배가 일시적으로 노를 젓지 않아도 움직이듯이 상상이 일련의 사유 가운데서 대상이 부재할 때 계속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지속되는 물체의 존재에 대한 생각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대상은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경우에서도 확실한 일관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일관성은 대상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더욱 커진다. 일단 대상들간에 일양성이 연이어 관찰되면 지속되는 존재에 대한 가정은 가능한 한 완벽한 일양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존재에 대한 계속되는 가정은 이러한 일양성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한편 우리에게 감각이 증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대상들간의 규칙성에 대한 관념을 준다.
(P.88)


  흄이 종교 철학에서 관심을 갖는 문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종교의 토대를 규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이다. <종교의 자연사>에서 흄은 인간의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풍요와 빈곤 같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희망과 공포의 긴장 가운데 놓여 있다고 말한다. 흄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이러한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긴장을 조성한다고 생각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원인을 물상화하고 의인화하여 신으로 숭배함으로써 종교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숭배되는 신이 인간과 같은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지닌 감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기도나 타원, 재물 등에 마음이 움직이는 지극히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점이다. 이처럼 의인화된 유신론에 기초한 기성 종교는 기적이나 계시를 통해 신이 언제든지 자연사에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주장은 자연의 규칙성과 일양성을 약화시킴으로써 그것에 기초한 우리의 경험이나 관습이나 도덕 등과 같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는 안 될 삶의 견고한 원리들을 약화시키거나 붕괴시키는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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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748)
(철학사상 별책 제5권 제5호)
윤선구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226쪽
(2017. 7. 11.)



  데이비드 흄은 근대경험론의 완성자이자 현대 영미철학의 선구자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경험론과 현대 영미철학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철학이다. 그러나 흄의 철학은 칸트의 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칸트가 합리론의 완성자인 라이프니츠의 철학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것도 흄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흄의 철학은 칸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상인 것이다. 흄의 주저는 <인성론>이다. 그러나 그 자신
이, 그 책이 너무 어렵게 쓰여져서 사람들이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까 걱정하였을 정도로 이 책은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흄이 <인성론>의 내용을 쉽고 체계적으로 재구성하여 새로 쓴 책이 바로 <인간지성의 탐구>이다. 이 책은 매우 체계적이고 간결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특히 흄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인성론> 보다 <인간지성의탐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P.i)


  흄의 철학은 근대 시민 사회이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계약론적 윤리설뿐 만 아니라 공리주의의 형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아담스미스와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스미스와 함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의 이론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아직 성숙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 제체제로의 발전이 필요한 우리 사회는 철학 전공자뿐 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흄 자신이 <인간지성의 탐구> 1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철학은 정밀하고 난해한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를 탐구하여 사회적인 이득이 되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P.ii)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는 <인성론> 제1권인 “지성에 관하여”를 재구성하여 서술하고, 여기에 기적에 관한 문제와 신 존재 논증 등 종교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경험론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을 덧붙인 책이다. 이 책의 핵심 과제는 사실과 존재에 관한 추론의 원리 및 필연적 연결 관념의 근원을 규명하는 것이다. 흄은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대상은 이미지일 뿐 실재가 아니라고 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를 지각이라 명하고 지각을 생생함의 차이에 따라 생생한 인상과 그의 모사인 관념으로 나눈다. 필연적 연결 및 의지 자유의 문제를 비롯하여 대개 철학적인 문제들은 관념이 모호하거나 개념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 흄은 이들 문제가 다루는 관념의 근원이 되는 인상을 규명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기 때문에 때로 모호하기도 하지만 인상은 생생하기 때문에 명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11)


  흄은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거의 반복적인 경험으로부터 미래에도 동일한 관계가 발생하리란 추론을 하는 이유를 탐구하여, 이러한 추리는 이성에 근거한 추론이 아니라 습관에 의한 추리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은 동물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므로 더욱 진리임이 입증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검토하여, 대상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경험이 반복되면 습관에 의해 관념들 사이에 연결이 형성되고 이로부터 필연적 연결의 인상이 발생한다고 본다. 이에 따라 의지자유는 불가능하고, 이 문제는 단지 개념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본다. 그리고 흄은 이러한 입장을 종교철학적 문제에 적용하여 기적에 대한 증언은 기적을 증거할 수 없고, 결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신을 추론하는 신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P.11)

  
흄은 외부 물체세계에 대하여 데카르트 및 로크의 실재론적 입장과 라이프니츠 및 버클리의 관념론적 입장 모두 입장 부정한다. 그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정신 외부에 물체 세계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 경험으로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감각의 대상은 정신 안에 있는 인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 대상은 이성으로도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성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단지 관념 사이의 관계만을 탐구할 수 있는 능력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P.13)


  흄은 정신 외부에 관념에 대응하는 물체세계가 존재하는가 여부를 탐구하는 대신, 정신 안의 지각을 관념과 인상으로 구분하고 관념에 대응하는 인상을 탐구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삼는다. 인상은 원초적이고 생생한 지각이다. 이에 대해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며 덜 생생하다. 흄은 인상을 알 수 없는 근원에서 발생하여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감각인상과 관념이나 인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반성인상으로 구분한다. 감각인상의 근원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근원을 탐구할 수 없고, 반성인상의 근원은 탐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흄은 모든 관념은 단순관념으로 분해될 수 있고, 단순관념은 그에 대응하는 인상의 모사라고 본다. 즉 인상을 모사함으로써만 관념은 발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흄이 본유관념의 존재를 부정하며 경험론적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P.13)


  흄에 의하면,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할 때는, 결과를 산출하기에 꼭 필요한 정도의 능력만을 원인에 부여해야지 그보다 더 큰 능력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경험으로 인식하는 원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정도의 능력밖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에서는 악과 무질서로 가득 찬 이 세계로부터 그것을 창조한 원인이 선하고 전능하다고 추론한다, 이것은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인에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추론이라는 것이다.
(P.16)


  흄은 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라고 본다. 인상은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정신 안에 존재하며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일종의 관념이다. 그러나 보다 생생하다는 사실에 의해 흄이 의미하는 인상의 모사로서의 관념과 구별된다. 관념을 다루는 학문은 관념의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인상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인상을 다루는 탐구는 오류에 빠질 수 없다. 따라서 관념을 다루는 탐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 탐구에서 다루는 관념이 어떤 인상으로부터 기인하는 가를 밝히면 된다. 만일 관념의 원상에 해당하는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관념은 허구에 불과하다. 흄은 신 존재나 영혼불멸과 같은 전통 형이상학은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다루는 철학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을 다루게 되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은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흄에게 있어 참된 형이상학과 폐기해야할 형이상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다루는 관념이 기원하는 인상이 존재하는가 여부이다. 그가 부정하는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이란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다루는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P.30)


  일반인들은 우리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것이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대철학자들은 우리의 감각기관 앞에 나타나는 물체 세계가 실재가 아니라 정신 안에 존
재하는 일종의 관념 또는 표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실재로서의 외부 대상은 우리의 태도와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 지각에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P.32)


  흄은 보다 생생한 지각을 인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인상이란 용어는 일상 언어에서의 인상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 언어에서의 지각이 흄이 인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흄뿐만 아니라 근대철학자들에게서 지각은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정신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상이다. 그들이 지각대상을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로 여기지 않고, 정신 내의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이 관념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관념이란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에 대하여 정신 안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에게서의 인상도 정신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대철학의 일반적인 용어에 따른다면 관념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흄에게 있어 인상이나 관념은 정신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생생한 정도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인상은 관념의 원상이므로 보다 더 생생하고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기 때문에 인상 보다 덜 생생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상과 관념 사이의 차이는 단지 생생함의 정도 차이만은 아니다. 관념이 인상의 모사이며, 주관에 의해 다양하게 변형이 가능한데 비해 인상은 관념의 원형이며,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수동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P.32)


  기적이란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사건인 까닭에 우연적인 사건이다. 물론 그 원인이 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신에게 조차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적적인 사건도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세계에서 기적의 원인과의 관계는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흄은 우연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것은 원인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어떤 사건의 원인을 잘 알지 못할 때 그 사건을 우연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적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의가 가능하다. 기적이란 자연 세계 안에서는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건인데. 우리가 원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흄은 구체적으로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논의는 나를 포함하여 누군가가 기적을 경험하였다고 증언한다면, 그 증언이 과연 기적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P.37)


  흄의 <인간지성의 탐구>는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밀한 추리를 시도하기는 하지만, 탐구과정이 고통스럽고 사람을 지치게 할 뿐만 아니라, 불확실하고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흄은 형이상학이 불확실하고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형이상학적 탐구를 중단하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적 탐구가 대중적인 견해와 모순되는 결과에 이른다 하더라도 결과가 오류가 아니라 대중의 견해가 오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앞선 철학자들의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은 성공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은 인간 지성의 능력을 탐구하여 인간에게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탐구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흄은 모든 형이상학적 탐구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본성의 탐구를 통하여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탐구할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구분하고 단지 우리가 탐구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한 탐구만을 배제하였을 뿐이다.
(P.58)


  흄은 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라고 본다. 인상은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정신 안에 존재하며 그 기원을 알 수없는 일종의 관념이다. 그러나 보다 생생하다는 사실에 의해 흄이 의미하는 인상의 모사물로서의 관념과 구별된다. 관념을 다루는 학문은 관념의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인상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인상을 다루는 탐구는 오류에 빠질 수 없다. 따라서 관념을 다루는 탐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 탐구에서 다루는 관념이 어떤 인상으로부터 기인하는가를 밝히면 된다. 만일 관념의 원상에 해당하는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관념은 허구에 불과하다. 흄은 신 존재나 영혼불멸과 같은 전통 형이상학은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다루는 철학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을 다루게 되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은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흄에게 있어 참된 형이상학과 폐기해야할 형이상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다루는 관념이 기원하는 인상이 존재하는가 여부이다. 그가 부정하는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이란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다루는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P.61)


  흄이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흄은 이를 위해 인간 본성, 정확히 표현하면 인간지성의 능력을 탐구하기로 한다. 즉, 흄은 형이상학이 불확실하고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질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형이상학을 불신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이를 통하여 인간지성이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대하여 탐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인 후, 결론적으로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이다.
(P.65)


  경험론은 모든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온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로크와 버클리도 또한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은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등 경험론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흄은 경험론적 원리를 끝까지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간 최초의 철학자이다. 합리론자들은 본유관념의 존재를 인정하고 본유관념을 통하여 사실이나 존재에 대한 인식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런데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경험론의 원리는 본유관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흄도 본유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를 통하여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경험론적 원리의 가장 명확한 표현이며, 관념의 기원이 되는 인상을 조사하여 관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사실과 존재에 관한 흄 철학의 주요 방법인 것이다.
(P.69)


  일반인들의 소박한 견해는 우리의 지각 대상들이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조금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면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흄은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지각 대상이 정신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견해를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째 이유는 외부의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위치나 시각에 따라 변화하지 않고 항상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각 대상들은 지각 주체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데카르트 및 로크 같은 일부 철학자들은 물체의 성질에 대한 관념들 중 소리, 색, 맛, 냄새 등과 같은 제2성질의 관념은 우리 주관에 의해 형상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모양, 크기, 수와 같은 제1성질의 관념은 주관에 의해 임의로 형성된 것으로 간주할 수 없고, 이에 대응하는 외부사물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관념 사이에는 본질적이 차이가 없고, 따라서 제1성질의 관념도 정신 안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P.72)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것이 사물이 아니라 정신 안에 존재하는 관념이라고 해서, 이러한 견해가 바로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의 배후에는 실재로서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감각 내용이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적 사물의 표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와 엄밀히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 안에 존재하는
물체의 관념과 대응하는 외부의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세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물체의 관념에 대응하는 외부의 물체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데카르트와 로크가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이 경우에는 정신 안에 존재하는 지각은 정신 외부의 물체세계를 표현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입장은 버클리와 라이프니츠의 입장인데 정신 외부에 물체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정신 안의 관념뿐이라는 입장이다. 세 번째 입장은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정신안에 존재하는 관념 또는 지각의 존재만 알 수 있을 뿐, 정신 외부에 이에 대응하는 물체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흄과 칸트가 이러한 입장의 대표자이다.
(P.73)


흄에게서의 관념의 의미는 일상언어에서의 관념과 거의 비슷한 것이 되었다. 흄이 데카르트나 로크가 무차별적으로 관념이라고 부른 것을 관념과 인상으로 구분한 이유는, 데카르트와 로크가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하고 그에 대응하는 외부 사물의 존재여부를 탐구하는 것을 철학적 탐구의 과제로 삼은 데 대해, 흄은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외부 물체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알 수 없고 철학은 단지 정신 안에 존재하는 혼란스런 관념을 명확히 하는 것을 탐구의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관념은 인상으로부터 모사를 통하여 생겨나므로 본성 상 불확실하지만 인상은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불확실한 관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그 관념이 기원하는 인상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고, 그 인상에 대응하는 외부대상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P.87)


  흄은 모든 관념은 인상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본유관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흄의 경험론적 입장에 대한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상은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그 근원은 알 수 없다. 흄은 <인성론>에서 인상이 우리의 주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인지, 외부의 사물로부터 오는 것인지, 또는 우리를 창조한 신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인성론> 제1권, 제3부, 제5절참조). 데카르트나 로크에게서는 인상이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물로부터 온다. 버클리와 라이프니츠는 신이 우리에게 넣어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변이성에 의한 형이상학적 주장인데,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주장이다. 따라서 흄은, 우리는 인상의 근원을 밝힐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P.88)


  인상은 단순 인상이든 복합인상이든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이것을 복합하거나 변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상을 우리의 자의에 의해 변형하면 이것은 이미 관념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관념을 자의적으로 변형하거나 여러 다른 관념들을 합성할 수 있다. 이 때 우리의 상상력은 무제한의 자유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단지 주어진 자료를 합성하고 변형하는 자유뿐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관념들을 합성하거나 변형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재료들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흄은 이러한 기본적인 재료들을 단순 관념이라고 부른다. 단순관념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 낼 수 없다.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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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흄
이준호 / 살림 / 288쪽
(2016. 7. 9.)



  진리라고 것이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성은 회의주의로 귀결되고, 몽상은 진리라고 믿고 있으면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흄은 독단과 회의의 뿌리는 동일하다고 한다. 즉 이성의 필요 없는 사변 때문에 독단과 회의가 발생한다. 불완전힌 이성의 한계를 자각해야한다. 이성의 한계는 경험이다. 이성이 경험을 넘어서면 필요 없는 사변에 빠질 수밖에 없고, 독단과 몽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흄 철학의 기초이다. 근대 유럽철학은 흄에 이르러 비로소 형이상학적 몽성과 이 몽상에 바탕을 둔 독단의 잠에서 벗어난 것이다.
(P.15)


  흄은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구분한다. 인상은 감각, 정념 그리고 정서 등을 가리킨다. 흄은 이 인상들이 사라진 뒤에 남은 잔상을 관념이라고 하지만, 관념에서도 반성 인상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인상이 관념보다 먼저 발생한다는 것은 오부 대상에 대한 감각 지각으로 국한된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관념은 논리적, 수학적 개념까지 포함한다. 인상과 관념의 종류는 발생 순서, 형태, 그리고 그 원인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된다. 흄은 모든 지각의 기원을 감각 인상이라고 하지만, 감각 인상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P.36)


  진리 문제에서 철학적 관계는 사실과 논증의 두 영역으로 구분된다. 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실의 영역에서 철학적 관계는 그 관념들의 변화가 전혀 없어도 변할 수 있고, 논증의 영역에서 철학적 관계는 우리가 비교하는 관념들에 완전히 의존한다. 따라서 논증의 영역에서는 관념이 변하지 않는 한 관계도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 총리가 말로써 한국을 침탈했던 과거사를 반성한다고 강조해도, 그 말의 진위에 대한 판단은 반성했다는 사실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처럼, 사실의 영역에서 진리는 개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의존한다. 반면에 논증의 영역에서는 수학 공식에 따라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처럼 오직 개념들의 관계만 고려한다.
(P.48)


  논증의 영역에서 사실과 무관하게 개념들의 관계를 추론함으로써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추론을 사실 문제에 적용할 때에는 지식일 수 없고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대상들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 결론은 틀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논증의 영역에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실 문제에 적용할 경우에 그 지식은 신념의 단계로 전락하게 된다.
  흄이 지식을 이와 같이 구분햇던 것은 당시 라이프니츠가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분햇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두 진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은 차이가 있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궁극적으로 이성의 진리가 사실의 진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다. 반면에 흄의 경우 이성의 진리, 즉 논증을 사실 문제들에 대해 적용할 수 있지만 논증은 사실의 영역에서 대상과 판단의 불확실성 때문에 개연성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흄과 라이프니츠의 이런 차이점을 하찮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유럽 지성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P.51)


  흄의 인식론에서 감관을 통해 지각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역도 성립된다. 따라서 감각적 지각의 대상은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있지만,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유와 대상은 정확히 일치하는 대응 관계가 아니다. 즉 사유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유할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다. 사유의 원천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감각 경험은 모든 인식의 원천이다. 감각 경험의 원인으로 간주되었던 물질적 실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의 구성해 낸 창조물이며, 경험적을 정당화 될 수 없다면 이성이 독단적으로 구성한 허구이다. 이와 같은 논증은 실체로서 정신 및 신의 존재에도 적용되며, 이것이 곧 형이상학적 허구에 대한 비판이다.
(P.60)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오성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 <도덕에 관하여> 등 총 3권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에서 흄은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정념들의 작용과 사회 제도의 성립 과정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흄은 당대의 자연 과학이 구축한 방법론을 자신의 학문 체계에 차용하여 자연 과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고, 후자에 대해서 회의적 태도를 고수한다. 인간의 감각에서 직접 유래하는 감각 인상 이외의 것을 상상력이 구성한 관념이라고 여기는 흄의 인식론은 바로 자연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흄의 인식론의 방법은 인간의 갖가지 정념과 사회 제도를 설명하는 데까지 적용되며, 이 때문에 흄은 대표적인 자연주의자로 분류된다.
(P.121)


  나의 유일한 희망은 철학자들의 사변에 전환점을 제공함으로써, 또 오직 철학자들만이 확증과 확신을 기대했던 주제들을 그들에게 더욱 뚜렷이 지적해 줌으로써, 지식의 진보에 내가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에 관한 유일한 학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본성은 여태까지 가장 무시되어 왔다. 이것을 내가 조금만 더 유행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때때로 나를 억누르던 저 나태로부터 나의 기질을 드솟게 하는 데, 또 그 같은 울분에서 나의 기질을 가다듬는 데 이런 소망이 도움이 되었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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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철학 가이드북
제임스 M. 러셀 / 김우영 / 휴머니스트 / 360쪽
(2016. 7. 6.)



  나는 의도적으로 그 대상을 전통적 철학의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물론 학술서적들을 더 많이 선정했지만, 소설이나 동화, 과학 소설, 정치적 선전문도 포함했다. 나는 철학적 영감을 주는 많은 책이 엄밀하게 따지면 철학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나의 선정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중요하고 흥미로운 다수의 책이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나는 최종 목록에 포함된 책들이 시사하는 바가 많고 철학적으로 유용할 뿐만 아니라, 철학 사상이 발견될 수 있는 책들의 범위를 한눈에 보여 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P.10)


  우리를 단 한 번이라도 속인 적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르네 데카르트)
(P.16)


  그리스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철학의 역사는 다수의 서로 다른 철학적 질문을 망라하게 마련이지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지식의 문제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확실한 지식을 보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이것은 플라톤의 동굴 인간에서 데카르트의 악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를 괴롭힌 질문이다.
(P.17)


<리바이어던>
  홉스는 기계론적 우주관을 취했다. 인간의 사고를 비롯한 모든 것을 물리적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감각과사고는 그 물리적 작용을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즉 물리적 자극이 신경에 의해 정신적 반작용으로 이어지는 방식을 기술함으로써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었다. 데카르트가 심신을 병존하는 별개의 실체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을 제안했다면, 홉스는 만물이 물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는 관점에 입각한 철학을 전개했다.
(P.42)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흄은 회의론적 접근법을 자아에도 적용했다. 흄은 우리의 자아 관념이 자명한 진리라는 사실을 의심한 최초의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나는 생각하고 있다". 도는 "나는 행동하고 있다." 등) 실제로는 오직 지각과 관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나'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범위의 감각과 사고를 경험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감각과 사고를 경험하는 '내'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그는 우리가 단일한 자아를 갖고 있다는 관념이 범주 오류라고 단언하고, 사실 자아는 지각들의 다발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사고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확실한 지식이라는 데카르트의 가정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다면, 데카르트가 확실하게 제시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합리적 가정은 "행각이 있다." 정도이다.
(P.63)


<순수 이성 비판>
  칸트의 체계는 우리의 지식이 관념들의 형상 세계에 국한된다는 의미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은 헤겔과 피히테의 절대적 관념론으로 이어졌다). 칸트는 우리가 영혼의 지속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지, 우리가 인과율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존재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지도 고찰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그가 내린 결론은 우리가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P.69)


<철학의 위안> (알랭 드 보통)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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