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알베르 카뮈 / 김화영 / 민음사 / 508쪽​
​(2017. 11. 8.)


절망이나 고난, 시련에 처했을때 인간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행동의 양식은 시대.공간을 초월하는것 같다.
시대나 환경에 좌절하여 순응적인 인간으로 남는 가 하면
반대로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들이 존재하며 이들이 사회를 탱해왔던것 같다
문제는 그런 사람 인간들이 그 시대의 지도자나 상위계층이라기 보다는 주로 시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실인가?
인간 본연의 본능인가?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메르스 사태를 생각나게 한다.
전염병에 대한 국가의 대처 능력이라든지 대자본이 운영하는 병원의 업무처리 안일함을 운운하기보다는
전염병이라는 거대한 두려움에 앞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인간 본연의 두려움들과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의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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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도시에서 보다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에 이르러 겪는 어려움이다. 사실 어려움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못 된다. 불편함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병을 앓는 것이 기분 좋을 적은 결코 없지만 어떤 도시나 고장은 병을 앓는 동안에 의지가 되어서, 거기서는 이를테면 마음을 푹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병자란 부드러움을 필요로 하며 무엇엔가 기대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랑에서는 지나치게 거센 기후, 거기서 거래하는 사업의 중요성,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황혼, 쾌락의 특질 등 모든 것이 한결같이 건강한 몸을 요구한다. 이곳에서 병을 앓는 사람은 아주 외롭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시간에 전화를 붙잡고서, 혹은 카페에 앉아서 어음이니 선하증권이니 할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더위로 불꽃이 튀기는 듯한 수많은 벽들 뒤에서 덫에 걸린 채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비록 현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메마른 고장에 죽음이 그처럼 들이닥칠 때 그 불편함이 어떠할 것일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P.13)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우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당장에는 특별한 주의도 하지않은 채 그 동물을 발로 밀어 치우고 층계를 내려왔다. 그러나 거리에 나서자 쥐가 나올 곳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발길을 돌려 수위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 미셸 영감의 반응을 보자 자기가 발견한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더한층 실감했다. 쥐가 죽어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저 괴이하게 보였을 뿐이지만
수위에게는 빈 축을 살 만한 난리였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수위의 입장은 단호한 것이어서 이 건물 안에는 절대로 쥐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층 층계참에 한 마리가 있는데 필경 죽은 것 같다고 의사가 분명히 말했지만 아무 소용 없이 미셸 씨의 신념은 조금 도 흔들리지 않았다. 건물 안에는 쥐가 없으니, 그렇다면 누가 밖에서 그 쥐를 가져왔을 것이다. 요컨대 이건 누군가의 장난이라는 것이었다.
(P.17)


  '물음: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 시간의 길이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것. 방법: 치과 병원 대기실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여러 나절을 보낼 것. 일요일 오후를 자기 방 앞의 발코니에서 보낼 것.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하는 강연을 경청할 것. 가장 길고 가장 불편한 철도의 코스를 골라 가지고 물론 입석으로 여행할 것. 공연장 의 매표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오면 표를 사지 말 것 등등.' 그러나 이러한 언어 혹은 사색의 일탈에 바로 이어서 수첩은 우리들 도시의 전차, 그것의 조각배 같은 형상, 그 어정쩡한 색깔, 일관된 불결함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로 시작해 아무런 설명도 되지 못하는 '그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라는 말로 관찰을 끝맺고 있다.
(P.40)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
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P.54)
​​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 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P.55)


  담배 가게 여주인이 있는 데서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한참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여자가 알제에서 한창 떠들썩하던 당시의 어떤 체포 사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어떤 상사의 젊은 사무원이 바닷가에서 한 아랍인을 죽인 사건이었다.
(P.79)


  그때부터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때까지는 그 이상한 사건들이 빚어 놓은 놀라움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각자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맡은 자리에서 그럭저럭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상태는 그대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시의 문들이 폐쇄되자 그들은 모두(서술자 자신도 포함해) 같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 으며 거기에 그냥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령 사랑 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개인적인 감정도, 처음 몇 주일부터 당장 모든 사람들 전체의 감정이 되었고, 공포심이 가세하면서 저 오랜 귀양살이 시절의 주된 고통거리가 되었다.
(P.93)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죠.”
  리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렇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타루는 잠시 의사를 보고 있다가 일어서서 무거운 걸음으로 문 앞까지 갔다. 리유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의사가 이미 그의 곁에까지 갔을 때 자기 발등을 보고 있는 것 같던 타루가 리유에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니짰다.
  “가난입니다”
(P.172)
​​

  훌륭한 행동에다 너무나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악의 힘에 대해 간접적이며 강렬한 찬사를 바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 행위들이 아주 드문 것이고, 인간 행위에 있어서 악의와 무관심이 훨씬 더 빈번하게 원동력이 되기 때문 이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것은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다. 세계의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총명한 지혜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 많은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러다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을 다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
(P.176)


  이번 이 유행병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당신들 편에 서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 대 리유.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다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해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P.329)


  사실상 페스트는 그다음 날로 당장 끝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겉보기에 의당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는 더 빨리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정월 초순에는 추위가 보통이 아닌 맹위를 떨치며 버티고 있어서, 도시의 하늘은 그대로 얼어 붙은 성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때만큼 하늘이 푸르렀던 적은 없었다. 며칠 동안을 두고 내내 싸늘하면서도 활짝 갠 채 요지부동인 찬란한 하늘이 계속적으로 쏟아붓는 광선으로 온 도시가 가득했다. 페스트는 그 깨끗해진 대기 속에서 삼 주일 동안 계속적인 하강 상태에 있었다. 페스트로 말미암은 시체의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페스트는 힘을 잃어 가는 듯싶었다. 수개 월 동안 축적해 놓았던 힘을 단시일 안에 거의 전부 잃고 있 었다. 그랑이나 리유가 돌보았던 그 처녀처럼 완전히 점찍었던 미끼를 놓쳐 버린다든지, 또 어떤 동네에서는 이삼일간 병세가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또 다른 동네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든지, 월요일에는 희생자의 수를 부쩍 늘려 놓았다가 수요일에는 거의 대부분의 한자를 다시 살려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처럼 숨을 몰아쉬거나 허둥지둥 서둘러 대는 꼴을 보면 마치 페스트는 신경질과 싫증으로 붕괴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으며, 그것 자체에 대한 자제력과 동시에 그의 힘의 바탕이었던 그 수학적이며 위풍당당한 효율성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듯싶었다. 카스텔의 혈청은 갑자기 여태껏 한 번도 거둘 수 없었던 성공을 여러 차례 이루게 되었다. 전에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 했던, 의사들의 몇몇 조치들 하나하나가 갑자기 확실한 효과 를 거두는 듯도했다. 이번에는 페스트 쪽에서 몰리게 되었고, 갑작스럽게 힘이 약해진 그 덕에 여태껏 그것을 향해 겨누었던 무던 칼날에 힘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다만 가끔가다가 병세가 완강해지면서 일종의 맹목적인 폭발을 일으키는 가운데 들림없이 완쾌할 것으로 기대했던 환자를 서너 명씩 앗아가곤 했을 뿐이다. 그들은 페스트에 운이 나쁜 사람들, 희망에 가득 찼을 때 살해당한 사람들이다. 격리 수용소에서 나은 오통 판사가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사실 타루는 그에 대해서 운 이 나빴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판사의 죽음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판사가 살았을 때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알 길이 없었다.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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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저널리즘
정철운 / 메디치미디어 / 280쪽
(2017. 11. 1.)


  손석희는 지위와 명예가 보장된 교수직을 관두고, 모두의 비난과 의심을 한 몸에 받으며 수년간 살얼음판을 걷는 길을 선 택했다. 그리고 불의의 시대에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다 손석희로 인해 한국의 저널리즘을 논하는 우리의 수준은 높아졌다. 물론 그의 저널리즘이 완벽했디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 나 그가 완벽을 추구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손석희는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그는 공평하게 공격적이었다.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불편부당한 언론인이자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세월호 참사와 박근해-최순실 국정농단 국면에서는 정의로운 저널리즘에 대한 시민들의 갈증을 해소시 켰다. 그는 저널리즘의 이론과 현실을 절묘하게 조합해〈뉴스 룸〉의 진회를 이뤄내고 대중적 인기까지 거머쥔, 어찌 보면 한국 언론사(史)에서 유일무이한 캐릭터다.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한국의 언론환경에 비춰보면 그는 더욱 특별한 존재다.
(P.8)


  “방송 시작 3분 전. 스튜디오의 내 자리에 앉아 주머니 속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뉴스 타이틀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고방송 몇 개가 나가고 나면 내 얼굴이 잡힐 것이다. 적어도 문 화방송의 모든 사람들이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리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최대의 수치스럽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그 리본 을 양복 것에 달지 않고 옷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 위에 달았던 것이다.”
  그날은 결국 리본을 달지 못한 셈이었다.
  “나는 뉴스를 시작하는게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자기합리화의 싸움이었다. 화면 밖의 사람들은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고 나는 붉어지는 내 얼굴을 느낄수록 더한 당혹감에 빠졌다. 뉴스시간 내내 양복 깃에 가려 반쯤 보일락 말락 했던 리본은 그대로 썩어빠진 내 양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행동에 손석희가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손석희는 이날 밤 한잠도 못 잤다고 적었다. 그는 “내 자신에게 책임져야 할 지극히 '인간적' 양심의 문제였던” 일에 대해 괴로워했다.
  그렇게 일요일이 왔다. 그리고 일요일 밤,〈뉴스데스크〉에서 '공정방송 쟁취'리본을 달았다.
(P.34)


“대한민국 청년들은 군대에서부터 졸속과 전시와 무사안일주의를 강요받고 또 배운다. 그들이 사회로 나와도 그런 식의 획일화되고 비생산적인 군사문회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임을 자랑 삼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기형적으로 맞물려 존재한다.”

“이 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경제구조적 모순이 불로소득을 최선의 덕목으로 정당화해주고 그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손꼽아주는데, 거기서 생겨난 눈먼 돈들은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서 부정한 유착과 비극적 이반을 부채질하여 결국엔 그 구조적 모순을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계속 반복시키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경제적 잉여가치는 그것을 '생산해낸 사람들'에게 분배되도록 해야 한다. 그 생산과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불로소득으로 그것을 독점하고 세습해가는 경제구조 속에서는 결국 사회성을 잃은 무뇌아 같은 개인만이 자라날 뿐이다.”

“미국에서 독립운동 비슷한 걸 하고 돌아온 사람이 영웅이 되어 반쪽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그 밑으로는 친일파라는 독버섯들이 어이없게도 되살아나 기득권을 형성해 오늘 이때까지 잘도 사는 나라. 심지어는 일본군에 있던 사람이 대통령까지 지낸 나라. ... 그 외에도 예로 들 말은 얼마나 기습이 터지도록 많은가.”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의 급속한 확대, 그에 따른 텔레비전 매체의 막강해진 영향력, 그리고 그 영향력을 이용한 군사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 전파와 우민화 정책, 순서의 착오는 있을지언 정 우리 텔레비전 문화의 역사와 현상은 그렇다.”
(P.40)


  손석희 저널리즘의 출발은 공정보도 파업과 공영방송 노동 조합 활동에서 비롯된 언론노동자로서의 각성, 이에 따라 생성된 강한 언론윤리의식, 저널리즘에 대한 사명감이라 볼 수 있다. 최장기 파업을 마친 뒤 1992년 월간《별지 12월호 인터뷰 에서 손석희는 노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왜 노조를 하는가,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노조를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습니다. 직업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식, 소시민적 도덕성을 지키려고만 해도 노조 활동은 불가피합니다. 이게 우리 방송 현실의 비극인데, 거기에 국민의 눈과 귀를 대신한다는 우리 직업의 특수성이 더해집니다. 노조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선택이지요.”
(P.45)


  손석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인터뷰였다. 그리고 그 무기가 강력할 수 있었던 건 '이 인터뷰로 출세나 이득을 바라지 않는 다는 전제가 있어서였다. 그가
대중이 원하는 진실을 공급할 수 있었던 힘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양심'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얻으려하지 않음으로써 언론인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얻었다. 이것이 저널리스트로서 손석희가 가진 카리스마의 원천이다.
  손석희는 2006년〈100분 토론〉300회 기념 인터뷰에서도 “좁은 인간관계가 오히려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관계가 쌓이기 시작하면 굴레가 된다. 내 방식의 인터뷰를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공격적 인터뷰를 위해 인터뷰이와의 인간관계나 방송 진행자로서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접고 자신을 고립시킨 셈이었다. 이와 관련해 언론학자 강준만은 자신의 책 《손석희 현상》에서 “그에겐 하늘을 찌를 정도의 강한 자부심이 있고, 이게 그의 고독을 지켜주는 동력”이라고 적었다.
(P.56)
​​

  그는 자신의 주관을 밝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신중했다. 2005년 1월 8일 손석희는 <시선집중>에서 말했다. “전 지도층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지도층은 없으니까요.” 이 말은 '손석희 어록'이란 이름으로 퍼졌다. 그가 방송에서 주관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는 발언이었다. 2005년 10월 21일자《한겨레》 인터뷰에서 손석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과 관련해 이렇게 답했다.
  “개인적인 생각은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가치괸에 따라 공적 영역인 방송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의 의견이 투영된다면 프로그램의 생명력을 잃는 것이죠. 진행자는 균형을 잡고 가능하면 많은 의견들을 다양하게 담아 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P.67)


  언론은 바른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았고, 권력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했다. 우리가 그런 언론에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유가족들은 박근혜를 불신하는 만큼 언론을 불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 만큼, 정말 믿을 수 있는 언론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20세기에서 송건호와 리영희라는 걸출한 언론인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뤄놓은 언론민주화의 토양에서 성장한 손석희는 건강한 시민 사회의 편에서 정론을 보도하고자 노력하며 '의지'를 계승했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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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행복
(루소 사상의 현대성에 관한 시론)​
츠베탕 토도로프 / 고봉만 / 문학과 지성사 / 169쪽
​(2017. 10. 27.)



  과거의 위대한 작가들 가운데 루소가 가장 매력적이라거나 가장 현명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강력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루소가, 특히 프랑스에서 근대성 발견하고 또 발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발견했다고 한 이유는, 근대사회는 루소 이전에 이미 존재했지만
그때까지 그것을 통찰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명했다고한 이유는 루소가 이백 년 전부터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는 개념과 주제를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루소를 읽으면, 우리는 그의 예언적인 통찰력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루소의 반대자들조차 우리가 아직까지 루소가 만든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P.9)
​​

  우선 루소는 스스로 자신의 사상 체계의 근본 원리로 보았던 이 대립에 대해 인간은 본원적으로 선(善)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첫번째 논문 『학문 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이 불러일으킨 논쟁 속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행히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본래 선하다”. 루소는 말년까지도 그것을 자신의 '대(大)원fl'라고 했으며, “자연은 인간을 행복하고 선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연의 인간이 선하다고 한다면, 인간의 인간은 선하지 않다. 또는 루소가 종종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선하지만, 인간들은 악하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인간들은 타락했고, 동시에 불행하다. 이러한 반전(결과)은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제도나 사회 질서,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이다.
(P.18)
​​

  “자기애는 자연적인 감정으로 모든 동물들이 자기 보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성에 의해 안내되고 동정심에 의해 변화되어 인간애와 미덕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이기심은 사회 속에서만 생겨나는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각 개인으로 하여금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존중하게 하여 인간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악을 야기한다. 그것은 명성이라는 것의 진정한 동기이다.”
(P.21)


  인간은 두 가지 상반된 이상을 가진다. 그런데 인간은 그 둘의 조화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이러한 삼단 논법의 결론은 논의 과정 중에 내려진다. 인간이 불행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 다. 그리하여 새로운 불행이 밝혀짐으로써 가까스로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희망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검토한 두 가지 길. 즉 '시민의 길'과 '개인의 길'은 사회 상태로 추락해서 인간이 겪게 된 불행에서 인간이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가야 하는데도 그럴 수 없으니, 인간은 불행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P.38)


  일반 의지는 루소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일반 의지는 공동체를 지도하는 최고의 원리이다. 이 최고 원리는 개인의 자유 의지 안에 존재한다. 루소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달성하려는 사적 의지를 지니고 있 으며, 사적 이익 가운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지인 일반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일반 의지는 개인이 가진 사적 의지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일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자유 의지를 따르는 것이 된다. 일반 의지는 자기 입법의 원리이다. 일반 의지 속에서 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전체의 자유가 일치하며, 일반 의지에 의해 개인의 자유는 절대화된다. 일반 의지 에 따라 행동할 때 나도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남도 똑같이 자유롭고, 또한 나와 남 사이에 평등한 관계가 성립된다. 일반 의지는 항상 옳지만, 한 개인이 계몽이 안 되었을 경우 사리시욕을 추구하는 충동에 억눌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 의지가 자연스럽게 발현되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와 이성의 계몽이 결합될 필요가 있다(김용민,『루소의 정치철학』, 인간사랑,2005,
(P.51)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루소가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리 할 수 있다. 즉 공동체 생활에 도움을 주는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잠재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침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평등의 원리를 무시하므로, 인류에게도 피해를 준다. 그러므로 이 길을 선택하게 될 경우, 그 선택이 초래하는 희생을 받아들여야 한다. 루소는 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 순서가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과중하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원시적인-그리스도교 이전의-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이다.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지 않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원시시대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용인될 수 없는 불관용intolérance을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P.62)


  생프뢰saintPreux는 파리 도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마음속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공포를 품고서 세상이라는 이 광대한 사막에 들어왔다. 이러한 혼돈은 나에게 암울한 침묵이 지배하는 끔찍한 고독만을 선사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만큼 고독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군중
속에 있을 때만 고독하다'(『신 엘로이즈』, Ⅱ, 231). 고독은 늘 비참한 것이다. 그러나 고독의 최악의 형태는 군중 한가운데서 느끼는 것이다. 세계는 사막이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숨 막히는 침묵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키케로3)가 말한 것처럼, 표면적이면서 순수하게 물리적인 고독은 실제로는 진심이 담긴 의사소통이다.(P.67)
​​

  루소는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코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은, 가능한 한 인간 사회와 관계를 맺지 말라는 교훈을 포함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 상태에서는 한 사람의 행복은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불행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사물의 본질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어떤 것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사회적 인간과 고독한 인간 중
어느 쪽이 더 좋은가를 탐구해보게 하라. 어떤 유명한 작가[디드로를 말한다- 옮긴이〕는 악인만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선한 사람만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명제는 비록 격언까지는 아니었지만, 앞의 것보다 더 진실하고 이치에 맞다. 만일 악인이 혼자 있디편, 그는 어떤 짓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악인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그의 계략을 꾸미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 속에서인 것이다"(『에 밀』, Ⅳ, 341).
(P.70)


  루소가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의 긴장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발견한 수단은 결국 이주 간단한 것이다. 루소는 교육의 두 가지 큰 단계를 상정한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에서는 상반된 두 가지 항 가운데 하나를 강조한다. 첫번째 단계를 루소는 '소극적 교육'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개인 교육'이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 한다. 이 단계는 탄생에서 '철드는 시기'인 열다섯 살 무렵까지다. 두번째 단계인 사회 교육의 단계는 이 무렵에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첫번째 단계의 목적은 우리안에 있는 자연인의 발달을 도와주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의 목적 은 다른 인간들과의 생활에 우리를 적응시키는 것이다.
(P.116)


  루소에 따르면 대략 15세부터 사춘기가 시작되며 사춘기를 경계로 아동과 성인의 시기가 구별된다. 아동은 육체적 존재이고 사회적 감정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존재이며 외적 자연, 즉 사물과의 관계로만 맺어져 있다. 인생에서 가장 비판적 시기인 사춘기를 지나면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알게 되는 정신적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은 변화를 루소는 제2의 탄생이라고 부른다. 에밀은 이 시기부터 문학을 접하면서 세계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를 넓히고, 사회관계를 연구하고 사회 조직과 제도를 학습한다.
(P.122)


  뒤몽Louis Dumont이 말한 것처럼, 외부에서 인간에게 강제한 어떤 질서가 있다는 생각이 전체론에 입각한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계속 존재한다. 그런 질서를 강제하는 것이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건 우주에 내재한 질서, 자연 자체이다. 이런 질서에 대한 지식이 바로 전통을 이루며, 그 지식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새로운 점은, 이제부터 인간 스스로가 세계를 해독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임무를 띠게 된다는 것이다. 오컴과 몇몇 다른 철학자 들이 벌려놓은 틈새로, 종교 및 윤리의 영향력으로부터 근대 과학을 해방시키고,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생각이 맹렬하게 침투해 들어가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근대성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의 법칙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의 자유, 판단의 자유, 의지의 자율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해방은 다양 한 층위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는 생각 이, 그러니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듯이 인간은 창조주가 마음대로 주무르는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 힘을 얻는다. 그 뒤를 이어 과학 혁 명이 일어난다. 베이컨Francis Bacon,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데카르트Rene Descartes를 생각해보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반드시 세계에 관한 진리일 수는 없으며, 진리는 차라리 나의 경험과 나의 이성에 의해 내가 알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P.137)


  루소에 의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타인의 존재를, 우리에게 머무는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아직 완전하게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도덕morale'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타인에게 선 혹은 악을 행할 수 있는데, 이 두 개념은 개인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또한 '자유liberte'의 세계로 들어 서게 된다. 왜냐하면 선 혹은 악의 실천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다를 바 없는 타인들과 공유하는 언어와 문화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다. 루소에게 있어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의식이 없는 개인, 윤리도 자유도 없는, 언어도 문화도 없는 개인은, 간단히 말해 서 사회적인 삶이 없는 개인은 진정한 의미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P.152)


  이 책의 제목인 '덧없는 행복'에는 루소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루소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의 행복은 타인에게 달려 있기에 우리는 결코 행복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충만한 행복이 자연의 질서에만 달려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늘 변함이 없기에 그에 맞추기 위해서는 자연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된다. 만약 신에게 달린 문제라면, 그 또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무한한 관대함을 보이며, 그곳에 있을 테니까. 만약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면 그 또한 문제없을 것이다. '자기애amourdesoi,' 즉 자기 존재 방어의 필연성이 들림없이 개인을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쪽으로 이끌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필요로 하고, 이 타고난 불완전함이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규정한다. 루소는, 우리가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 각자가 타인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타인과 합일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은 우연적일 수 밖에 없거나, 혹은 루소가 결론짓듯이, 이리하여 “우리 자신의 나약함infirmite으로부터 우리의 덧없는 행복은 생겨”나는 것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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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청소년문학 20년
박상률 / (주)학교도서관저널 / 212쪽

(2107.10.20.)
​ 


    책 읽기가 진즉에 `운동`이 되었다. 예전엔 독서가 이력서의 취미 란을 많이 채웠다. 이제 독서는 취미 수준도 못 된다. 예전엔 “밥이 육체의 살을 찌운다면 독서는 영혼의 살을찌 운다” 리는 말도 곧잘했다. 이제 독서는 영혼의 살을 찌우지 못한다. 영혼은 모두 `외출 중`이고 저마다 밥벌이에만 목을 매단다. 그러면서 언제 시간이 나서 책을 읽겠느냐고 비명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독서는 영혼의 살을 찌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 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
(P.6)
​  ​  ​
​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에서 “나는 집에다 크고 작은 장난감을 많이 모아 놓고 있다. 모두 내가 소중히 여기는 장난감이다.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지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고 했다.(『피블로 네루다 자서전』, 민음사, 2008)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란다.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있는 아이를 잃고 산단다. 노는 건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중요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물리학자는 피터팬이어야 한다. 더 이상 자라선 안 된다”라고. 시인이고 물리학자고 다 '아이'를 강조한다 이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높이 사기 때문일 것이다.
(P.46)
​   ​  ​
​ 
  내가 어른들에게 청소년 소설을 권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른의 문제가 곧 아이들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 이다. 부모가 이혼하면 아이들은 어찌해야 할까? 집안이 경제적으로 고만하여 가족이 흩어져야 한다면 아이들은 자유로울까? 게다가 살인적인 대학 입시 경쟁은 아이들을 원초적으로 주눅 들게 하고 있다. 이래저래 압박을 받고 방황하는 아이들.그런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현상적인 청소년 문제보다도 내 안에 공존하고 있는 청소년에게 더붙들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내가 완전히 떠나 보내지 못한 청소년이 내안에 같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 시절을 완전히 태워 버렸으면 나도 그 시절에 붙들리지 않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그게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청소년문학에 꽂히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또래 어른들은 곧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잊어 버린다. 물론 자기 안에 있는 청소년도 떠올리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청소년만 바라본다. 그러니 잔소리만 하게 된 다. “우리 클 때는 안 그랬는데”하면서......
   나는 내 안의 청소년을 잘 다독여야 내 밖의 청소년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어른들이 우선은 자신의 밖에 있는 청소년이라도 잘 이해해야 한디는 생각에 그런 책을 썼다 오로지 꼰대 같은 잔소리만 하는 어른이 되지 않기를 바리는 미음에서 말이다.
  (P.102)

​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첫째, 벌거벗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동심을 갖추는 것이다(현상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것). 둘째로는 절대자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너나 잘하세요). 그리고 셋째로는 자기 꼬라지를 아는 것이다(너 자신을 알라). 그런게 인 문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엔 아무데나 인문학을 갖다 붙인다. 책 좀 보면, 말 좀 잘하면, 학력이나 세상의 지위가 높으면 저절로 인문학 수준도 높아질까?
  괴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니는 인문학人文學에서 문文의 뜻을 단순히 '글월 문'만이 아니고, '무늬'나 '조화'의 뜻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사람人의 무늬'이거나 '사람 사이의 조화'이다. 근데 개나 소나 말이나 다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인문학은 사람의 무늬도 아니고 조회는 더더욱 아니다. 물론 개나 소나 말이 사람이 아닌 까닭도 있겠지만.
  하여간 나는 인문학의 첫 걸음은 무엇보다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말하려면 아무 선입견도 없고,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 어린이는 아무런 선입견이 없으며, 어린이 마음을 가진 이는 이해관계가 없다.​
​(P.120)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없어지는 것일 게다. 경이로움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생기는 것이니깨 어른들은 절대로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호기심도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배우는 말은 “엄마”이고 그 다음은 “왜?”란다. 난로에서 주전자 물이 끊고 있다 아이는 쉬익쉬익 소리를 내며 주전자 뚜껑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신기해서 그걸 만지려 한다 이른들은 기겁을 하며 말린다. 그때 아이는 는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왜?”
  어린이는 이처럼 질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나 일일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천천히 자신의 성장 수준에 맞게 세상을 알아갈 것이므로. 그럼에도 어른들은 조바심을 내며 답을 가르쳐 주려 한다. 그게 치맛바람이 되어 쓸고 간 뒤 이제는 선행학습을 한다. 미리 답을 가르쳐 주고자 하는, 자상하기 그지없는 어른들의 배려일까?
​(P.123)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생의 80퍼센트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의 대중화가 실현되었다. 그런데 누구나 다 가는 대학, 오히려 안 가면 안 될까? 개나 소나 다 가니까 다녀 두어야 한다고? 그러면 스스로 개나 소가 되는 격이다 내 생각엔 중고등학교 때 일찌감치 재능을 발견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면 굳이 대학 을 안 가도 무방할 것 같다. 대학을 기는 목적이 직업을 얻기 위해서라면그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에선 학번 때문에 대학을 다녀야 할 성싶다. 대학 입학년도가 나이를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하기도 하니 대학을 안 다닐 수 있겠는가.
(P.136) ​
​​

  책을 하찮게 여기는 시대이기에, 역설적으로 그러기에 더욱더 책을 읽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가정 독서 모임을 비롯 이런 저런 독서 모임이 많다. 중학교에선 자유학기제가 실시되어 교과서 밖의 책을 읽을 기회가 더 많아졌다. 작년에 자유학기제를 시범적으로 행한 몇몇 학교와 도서관에선 이미 '진로 탐방'과 '독서 교육'을 명분으로 내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기회에 늘 하는 말은 “나쁜 책은 없다”이다. 나쁜 책은 없으니까 아무런 책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자고 말한다 나쁜 책도 최소한 '반면교사' 역할은 할 거라 여기면서!
(P.155)​


  청소년의 성장이 어느 시대, 누구의 이야기가 되든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일반소설도 살인이 나오든 대리 만족을 하든 카타르시스를 느끼든 어쨌든 영혼이 한 뼘 자라는 걸 느끼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뭐하러 읽겠습니까? 작가들이 이 시대 아이들 얘기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즘 시대 이야기는 아이들 본인들이 더 잘 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들의 이야기는 시시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고요. 오히려 엄마 아빠의 청소년기가 궁금하지요. 이거 사실 상당히 영업 비밀인데(웃음) 제가 15 년간 써 온 방법인데요. 조선 시대든 30년 전이든 아이들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쓰는게 청소년 소설이지, 요즘 아이들 이 즐겨하는 인터넷이든 게임이든 이런 걸 다룬다고 무조건 청소년 소설이 되는 게 아닙니다. 외피를 어떻게 쓰고 있든 간에 보편적인 것을
다뤄야지요. 젊은 작기들이 보편적인 핵심보다 외피만 다루려다 보니 소재주의로 가는 것 같아요.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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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책읽기
안건모 / 산지니 / 280쪽
(2107.10.17.) 



  저는 군대에서 제대한 뒤에도 세상은 원래 그렇고, 그런 세상 에서 그렇게 사는 게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세 상을 바로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교과서가 아닌 책, 인문사회책이었습니다. 책이 나를 캄캄한 동굴 속에서 꺼내주었습니다. 책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의 내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박사모'나 '가스통 할배' 같은 극우주의자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세월호 타령이냐고 짜증 내는 젊은이처럼 남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드가 원지, 왜 그런 걸 한국에 배치하면 안 되는지 모르는 멍청이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열다섯 명이나 나은 대통령 후보 가운데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는 바보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젊은 이들한테 세상을 가르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P.7)


  지금도 저는 책으로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삶을 위한 정치혁명』을 보고 한국의 투표 제도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을 보고 아직까지 한국의 학교 교육이 아이들을 순종, 굴종시키는 교육이리는 사실 도배웁니다.『노동의 배신』을 보고 미국 사회의 '불평등의 깊은 골'과 추악한 현실을 깨닫고, 그것은 또 바로 우리 한국 사회 모습이라는 사실도 배웁니다.『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를 보고 시민들은 국가로부터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디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또『의사 김재규』와『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를 보고 박근해의 말로를
예상하기도 했 습니다. 저는 이렇게 책을 보면서 세상을 배우고, 또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좋은 책으로 세상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P.7)


  어떤 책이 좋은 책일까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이 세상을 보여주는 책, 둘째, 이 세상을 이해하는 책, 셋째, 이 세상을 변혁하는 책입니다. 저는 한 가지 더 추가합니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책에서 세상까지 배울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소개하는 책이 그런 책입니다. 하지만 책 에 써 있는 그대로 맹목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비판적으로 읽기. 그래서 제목이 '삐딱한 책 읽기'입니다.
이 책은 제가 재미있는 책을 읽고 쓴 '세상 이야기'입니다.
(P.9)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
  이병창은 책에서 먼저 철학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철학자는 그 시대의 혁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단다. 자기 시대를 넘어서려 할 때 철학이 시작된디는 말이다. '철학이 가장 상대하기 힘든 것은 상식이다. 그 시대 생각의 기본적 들은 너무 자명하다. 아무도 그런 상식이 전제되어 있디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철학은 그런 상식적인 생각을 전복하려는 학문이다. 철학이 상식을 넘어서려 하는데 상식을 통해 보여달리는 건 철학을 배반하라는 말과 같다고 한다. 이병창은 이 책에서 경험주의 대신 변증법적 인식으로 사고하라고 권유한다. 개인주의 대신 공동체주의를, 민주주의 대신 자치의 사회를, 욕망의 자유 대신에 진정한 자유, 자주성의 길을 내세운다. 이병창은 어려운 철학을 독자에게 쉽게 전달해주려고 애를 썼다. 젊은이들이 물었던 '우리에게는 왜 꿈이 없을까?'라는 질문에 이병창은 오히려 “정말 꿈이 없는 건가요? 그 이유는 뭡니까?” 하고 묻는다. 이어 청년들에게 꿈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 아닐 거 라고 결론을 내린다. 결국 시대적 상황이 청년을 그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한다.
​(P.40)​

​​
(노동자 역사 이야기)
  자본가들은 우리 노동자들에게 역사를 잘못 이해하도록 끊임 없이 세뇌시켜왔고 노동자들의 생각을 지배해왔다. 박준성 선생은, 수많은 역사책이 “왕이나, 지도자나, 위인이나, 장군이나, 많이 가진 자들이 마치 똑똑하고 힘이 있어 역사를 움직여 온 것처럼” 나와 있지만, 그 뒷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노동의 역사』리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를 빌려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혼자 다 만들었을까”,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가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순신 장군 혼자 나무를 베어 거북선을 만들고 혼자만 나라 걱정하며 싸우다 죽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의식을 불어 넣는다. 박준성 선생은 길거리에서도 자본주의가 알게 모르게 서민들을 세뇌시킨다는 것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했다.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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