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최재천/효형출판 / 267쪽
(2017. 11. 25.) 



  제아무리 대원군이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더 이상 타 문명의 유입을 막을 길은 없다. 어떤 문명들은 서로 만났을 때 충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어떤 것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게 될 것이다. 결코 일반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스스로 아끼지 못한 문명은 외래 문명에 텃밭을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예측을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싶다. 내가 당당해야 남을 수용할 수 있다.​
(P.48)


  종교가 스스로 모래판에 내려와 과학을 붙들고 씨름을 하려 할 때 나는 참 서글프다. 과학은 이른바 형이하학이지만 종교는 형이상학 중에도 으뜸이
아니던가. 과학은 모든 걸 증명해야하는 멍에를 지고 있지만 종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믿음은 증명보다 훨씬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P.64)


  사실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망측한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한번쯤《삼국지》에 그려진 후한말과 삼국시대의 세태를 연상하게 된다. 어제의 적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 이불 속에서 뒹굴기를 밥 먹듯 하며 전 국민을 상대로 공언한 맹세를 한 점 부끄럼도 없이 순식간에 뒤집는 우리네 정치인들. 연인이나 친구에게는 불륜과 배반의 흔적만 보여도 가차없이 절교를 선언하지만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져야 할 정치 지도자들의 부도덕에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깨끗한 한 표를 건네는 우리 유권자들. 이 엄청난 모순 앞에서 나는 종종 동물들의 사회를 떠올린다.
(P.85)


  나는 “선(善)과 악(惡)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고 한 공자님 말씀을 늘 선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간혹 벌어지는 악도 선한 눈으로 바라보면 배울 것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그런데 악행이 선행보다 더 만연되어 있고 악을 행하더라도 성공만 하면 별 문제 없이 칭송받는 요즘 같은 세상에 악에서 선을 끌어내리는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사실 조금은 걱정스럽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삼국지》를 읽으며 마키아벨리식 권모술수를 자칫 삶의 지혜로 배울까 염려하는 이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P.88)


  요즘은 우리 음식이 세계 각국에 잘 소개되어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식사대접히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우리
음식을 거리낌없이 덥석덥석 집어 먹는다. 그런데 그들이 기겁을 하며 못 먹 는 게 두 가지 있다. 길모퉁이 수레에서 파는 번데기가 하나고 산 낙지가 다른
하나다. 분명히 살아 꿈틀거리는 낙지의 다리를 토막쳐 입 안에 넣으면 빨판이 입 천장에 들러붙어 살겠다고 온통 난리다.
(P.107)


  이런 점으로 보면 식물은 동물에 비해 성적으로 더 대담한 면이 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꽃을 찾아가 대신 잠자리 를 같이 해줄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그들은 온 천하에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놓고 산다 꽃이란 다름 아닌 식물의 성기다. 그걸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의 코 밑에 바친다. 원색적인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그리는 꽃을 보며 그 강렬한 성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없으리라.
(P.171)


  작은 규모의 집단에서는 세습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 꾸려야 하는 대기업들은 투명한 전문경영인이 아니고는 더 이상 이끌어갈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아마도 그래서 대부분의 국기들도 더 이상 군주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국왕을 모시고 사는 영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도 왕은 그저 상징적 존재일 뿐 실권을 쥐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훌륭한 군주가 나리를 통치하던 시절만큼 태평성대가 없었다 자비롭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리를 맡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군왕정치보다 더 좋은 정치체제가 없다는 사실은 정치학자가 아니라도 짐작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율적인 제도가 결코 아니다. 다만 가장 공평하고 합리적인 제도일 뿐이다.
(P.198)


  저는 어려서 반성문을 많이 썼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덕에 제가 글줄이라도 몇 줄 꿸 줄 알 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책에 담긴 많은 글들은 제가 자연에게 써 올린 반성문들입니다.
  제가 감히 인류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함께 무릎을 꿇게 해드렸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저 일부라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길 빕니다.
  그런데 반성문치곤 제 글의 대부분에 이렇다 할 결론이 없습니다. '동물농장'도 아닌데 동물들의 눈으로 감히 인간을 훈계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삶을 뒤집어보려 했을 뿐입니다.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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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드보통 / 정영목 / 143쪽
(2017. 11. 18.)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런 범주에 드는 다른 분야의 예술가로는 바흐나 레너드 코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호퍼 예술의 중심 주제는 외로움이다. 호퍼의 인물들은 집에서 멀리 떠니온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호텔 침대 가장자리에 서서 편지를 읽거나 바에서 술을 마신다. 창밖의 움직이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호텔 로비에서 책을 읽는다. 상처받은 듯 자기 내부를 응시하는 표정이다. 방금 누군가를 떠나왔거나 떠나보낸 것 같다. 그들은 일이나 벗을 찾으며 오래 머물지 않을 곳을 떠돌고 있다. 시간은 주로 밤이다. 창문으로는 어둠이 다가오고, 넓은 시골 또는 낯선 도시의 위협이 그 뒤에 도사리고 있다.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P.9)

​​
  위대한 화가와 만나서 얻을 수 있는 부수입은 그들의 그림 덕분에 이 세상에서 화가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을 만한 곳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호퍼 적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민감해진다. 이제는 호퍼 자신이 돌아다녔던 북미의 여러 곳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든 모텔과 휴게소, 도로변 식당과 공항, 버스 정류장과 심야 슈퍼마켓이 있는 데서는 호퍼적인 곳을 찾을 수 있다. 호퍼는 '주변적인' 장소들, 집과 사무실 너머에 있는 건물들, 특별한 종류의 소외된 시정詩情을 느끼며 지나치게 되는 곳들을 제재로 삼는 미술 유파의 아버지다. 우리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와 해너 스타키의 사진들, 빔 벤더스의 영화와 토머스 베른하르트의 책 이면에서 호퍼의 존재 를 느낄 수 있다.
(P.12)


  어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다다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 그림이 담긴 엽서를 사서 책상 위의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놓기도 한다(내가 호퍼의 그림들을 여러 번 그렇게 했듯이). 그 그림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 마음 깊은 곳에서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감정적 질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눈앞에 존재하는 견고한 상징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 그 림을 보면서 그 특질이 조금씩 벗겨져서 우리에게로 오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 그림에서 반기는 것은 제재라기보다는 분위기다. 색과 형태를 통하여 전달되는 감정적 태도다. 우리는 물론 그런 감정으로부터 곧 멀리 쓸려 내려 갈 것임을 안다. 그림이 전하는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여러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대담한 의견을 내기도 하고, 확신을 품기도 하고, 가벼운 재치를 보이기도 하고, 부모로서 권위를 세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망록으로서, 닻으로서 그 그림을 환영하는것이다.
(P.15)


  공항의 매력이 집중된 곳은 터미널 천장에 줄줄이 매 달려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텔레비전 화면들이다. 미학적 자의식이 전혀 없는 그 모습. 노동자 같은 상자와 보행자 같은 활자는 아무런 위장 없이 자신의 감정적 긴장 상태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을 드러낸다. 도쿄,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바르샤바, 시애틀, 리우. 이 화면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마지막 줄의 시적 울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마지막 줄은 소설을 쓴 곳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똑같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쓰는 행위의 바탕이 된 세계주의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 화면들에 쉬지 않고 나타나는 안내문, 가끔 커서의 초조한 박동을 수반하 기도하는 안내문은 일견 단단하게 굳어버린 듯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냥 복도를 따라 내려가 비행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착륙할 것이다. 오후 세 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 감정에 깊은 크레바스들이 파여 있을 때, 늘 어딘가로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P.32)

​​
  이런 이륙에는 심리적인 쾌감도 있다.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형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점視點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한다. 도로는 산을 피하느라 곡선을 그리고, 강은 호수로 항하는 길을 따르고, 고압선 철탑은 발전소에서
도시로 이어 지고, 땅에서 보면 제멋대로인 것 같은 도로들은 잘 짜인 격자로 드러난다.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일치시키려 한다. 익숙한 책을 새로운 언어로 판독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P.35)


  비행기에서 구름을 보면 고요가 찾아는다. 저 밑에는 적과 동료가 있고, 우리의 공포나 비애가 얽힌 장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지금은 이주 작다. 땅 위의 긁힌 자국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유서 깊은 원근법의 교훈은 전부터 잘 알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비행기 창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을 때만큼 이것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드물기에,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심오 한 철학을 가르치는 스승이라 부를 만하다.
(P.38)


  근대 작업장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컴퓨터, 자동화, 세계화 등괴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 특징은 우리의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디는 널리 퍼진 믿음이다. 어느 사회나 일을 그 중심에 두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처음으로 일이 벌이나 고행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처음으로 정신이 멀찡한 인간이 경제적 압박을 받지 않아도 일을 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 어떤 일을 선택하느냐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받는디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사람에게 묻는 핵심적인 질문은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가 아니라 하는 일이 무어냐다. 마치 오직 이 사실만이 인간 생활의 독특한 특징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P.71)
​​

  만일 일에서 행복을 얻기가 그렇게 힘들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내세우는 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일자리에서 프로이트나 루스벨트가 맛보았던 만족감의 일부라도 맛볼 수 있기 를 기대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기대하는 대신 마르 크스를 읽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마르크스는 더 나은 세상에 관한 처방에서는 들렸지만, 왜 일이 그렇게 괴로울 때가 많은지 진단할 때는 지금 보아도 상당히 날카롭다.
(P.78)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의 기초>(1785)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들을 부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로" 존중한니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칸트를 참조하여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새로운 과학인 경제학이 대규모로 “부도덕"을 자행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경제학은] 노동자를 일하는 동물로 밖에 알지 못한다-최소한의 육체적 요구만 남은 짐승으로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피고용인에게 주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돌아가도록 칠하는 윤활유와 같다. 일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
   마르크스가 역사가로서 능력이 떨어져 산업화 이전의 과거를 별나게 이상화하고 부르주아지를 지나치게 혹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을 포착하고 극화했다는 점에서 여전치 가치가 있다.
(P.79)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프루스트)
(P.122)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 더 많이 알 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세계는 어떠 한지 돌아보게 된다.
(P.126)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 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 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 는 것이다.
(P.126)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여지면 도덕적 의미를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는 방법,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 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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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 유영미 / 갈라파고스 / 201쪽
(2017. 11. 14.) 



  이 책은 전체적으로 지글러가 어린이 무덤에 바치는 참회록이라고 할수 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랑 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 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수 있는 전 세계적 식량 과잉의 시대에 수많은 어린이 무덤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제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지도자를 만나고, 그것을 참회록의 느낌으로 써 내려간 이 책은 현재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항을 제시하고 있다.
(P.16)


  1990년에는8억 2,200만 명, 그 후 1999년에는 8억 2,800만 명 (2005년에는8억 5,000만 명)이 기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어. 이런 수치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 첫 째는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가 특히 남반구에서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극심한 영양실조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수를 인구증가율과 비교하면 기아 인구의 비율이 약간 줄어들었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지 .​
  1990년에는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렸는데, 1999년에는 19퍼센트로 비율상으로는 줄어 들었단다.
(P.32)


  서구의 부자 나라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신화가 있어 그것은 바로 자연도태설이지. 이것은 정말 가혹한 신화가 아닐 수 없단다. 이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의 6분의 1 이 기아에 희생당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해. 하지만 일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장점도 있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니까 점점 높아지는 지구의 인구밀도를 기근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고 보는 거야. 너무 많은 인구가 살아가고 소비하고 활동하다 보면 지구는 점차 질식사의 길을 걷게 될텐데,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적당하게 조절되고 있다고 믿는 것 이지. 그런 사람들은 기아를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로 여긴단다. 산소부족과 과잉 인구에 따른 치명적인 영향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죽지 않도록 자연 스스로 주기적으로 과잉의 생물을 제거한디는 거야.
  이런 설명은 전형적인 유럽적,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 란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지. 지신들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거리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영양실조로 팔다리가 비쩍 마른 아이를 안고 있는 벵골이나 소말리아, 수단의 엄미들이 그 아이들의 죽음과의 싸움이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니?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은 엉터리 신화, 즉 기근이 지구의 과잉 인구를 조절하는 작용 을 한다고 믿고 있단다.
(P.38)


FAO는 원인에 따라 '경제적 기아' 와 '구조적 기아'로 구분하고 있어. 대략 설명하자면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를 말한단다. 이를 테면 가뭄이나 허리케인이 덮쳐 마을과 경작지, 도로, 수원지가 파괴되거나, 혹은 전쟁으로 집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상점들이 파괴되고, 다리가 폭파되기도 하지. 그러면 갑작스럽게 식량이 바닥나고 수백만의 인구가 다음 날이면 금세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거야. 국제적인 도움의 손길이 재빨리 미치지 않으면 많은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지.
  그리고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를 말해. 그 나라의 경제발전이 더딘데 따른 생산력 저조, 급수설비나 도로 같은 인프라의 미정비, 혹은 주민 다수의 극도의 빈곤 등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단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비타민 결핍이나 단백질 부족에 따른 소아 영양 실조 등의 다양한 질병을 앓으며 서서히 죽어가게되지.
  그러니까 구조적 기아 는 간단히 말해서 외부적인 재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 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란다.
(P.48)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약 20년 전부터 일종의 패러다임의 변회를 경험하고 있다. 1991년 8월 소련이 무너지기 전까지 3분의 1정도의 인류가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잘못 불렸던 부패한 국가자본주의체제 아래 있었다. 냉전체제가 국제 사회를 지배했다. 다국적성과 독점성에 대한 충동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 충동은 양극구도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다. 거기에 내재하는 논리에 따라 자본은 단기간에 지구를 정복했다.
  또 한 가지 패러다임의 변회는 바로 글로벌화한 자본주의 내부에서 한 가지 자본, 즉 금융자본이 산업, 무역, 서비스 등의 자본들을 제치고 주된 자본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금융자본의 이윤극대화법칙은 오늘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P.159)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이런 패러다임 변화-사회적 양극구도의 몰락과 숨막히는 기술혁신-는 금융자본의 거의 완전한 글로벌화로 이어졌다.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99년에 유통된 금융지본은 이 해에 전 세계적으로 생산된 재화와서비스의 가치보다 63배나더 많았다.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힘은 막강하다. 이제 사람들은 그 기동성을 꾸준히 강화하여 투자의 결정과정을 단축하는 한 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금융수단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금융자본은 결코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증시는 매일 24시간 돌아간다. 증시를 돌아가게 하는 엔진은 이윤극대화, 손실에 대한 공포, 파산 리스크에 따르는 신경전, 그리고 정신착란과 황홀경을 되풀이하는 무제한의 이윤추구 등이다.
  1919년에 막스 베버는 “부란 일하는 사람들이 산출한 가치가 이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오늘날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 즉 경제력은 다혈질적인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이다.
(P.160)

​​
  브레히트는 “분노하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했다. 제네바의 은행가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규범도 가라, 규제도 가라, 국민국가도 가라 장애만 될 뿐이다. 선거도 가라, 일치도 가라, 정권교체도 가라, 민족주체성도 가라. 자유! 자본을 위한 자유, 서비스를 위한 자유, 특허를 위한 자유만 남아라. 그것은 관료제나 모든 종류의 제한에 반대하는 것이다. 오직 '완전하게 리버럴 한 시장'을 추구하는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정의를 논할 것인가? 이제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 세계시장밖에는...... 신자유주의 원리는 자본의 흐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그 유동성이 완전하게 용인되면 이윤이 가장 많은 쪽으로 자본이 집중된다는 것, 즉 자유로운 세계시장에 맡기면 진정으로 공평한사회가 실현된디는
것이다. ​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그런 주장의 자세히 검토되지도 않은 채 세계에 침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 무엇이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따지지 않은 채, 그저 '경제 합리성' 이라는 구호만이 난무하고 있다.
(P.162)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존속할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 한세계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누리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기 전에는 지상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 이다. 서로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수는 없을 것이다!."​
​(P.171)


  산업혁명 이후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해진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런 방임적 '자유주의' 논리는 처음에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자유주의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지배담론이자 하나의 도그마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방임적 자유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런 자유주의는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자유를 빙자한 자본의 횡포와 독점이 발생하고 빈부격차가 커짐에 따라 서민의 구매력이 감소하여 경기가 침체하는 등 많은 부작용이 빚어진 것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와 역할에 회의를 느끼며 방임적 자유보다 정부의 적극적 관리와 개입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그런 흐름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수정되는 길을 걸었다.
(P.187)


1912년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선 월슨은 무분별한 부당 경쟁을 통해 경제의 독점현상이 나타나고 부작용이 만연하는 것을 억제하고자, 새로운 방식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 로운 자유' (New Freedom) 정책을 제시하며 당선되었다. 1930년대 세계경제공횡을 극복하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 정책'도 '새로운 자유'정책의 흐름으로 꼽힌다. 이때 이야기되는 '새로운 자유 정책'(New Freedom policy)을 가끔 '신자유주의'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오늘날 세계화 담론과 결부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앞에서 말하는 '새로운 자유' 정책은 정부가 나서서 경제문제를 챙기는 것이고, 뒤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정부는 가급적 나서지 말고 민간자본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와 후자를 구별하기 위해 전자를 '새로운 자유주의' (New Liberalism)라 부르고 후지를 요즘 부르는 용어 그대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부르면 좋을 듯하다.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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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김훈 / 학고재 / 384쪽
(2017.11.12.)


영화가 유명해져서 책을 선택했는데..
막상 영화는 반쯤 보다 갑자기 일이 있어 보기를 중단했었는데
아직 다 보지 못하고 있다.
책마다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면 이 책은 추운 겨울에 읽기를 추천하고 싶다.
날이 너무 추워 밖에 나가기 조차 싫은 날
집안에 틀어밖혀서 다시 한번 꼭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를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 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P.9)


  ......네가 기어이 나를 동쪽으로 부르는구나. 너희가 산성에 진을 치고 있다 하나, 나는 대로를 따라 너에게로 갈 것이니 너희들의 깊은 산성은 편안할 것이다. 너는 또 강화도로 가려느냐. 너의 강토를 다 내주고 바다 건너 작은 섬에 숨어서 한 조각 방석 위에 화로를 끼고 앉아 임금 노릇을 하려느냐. 너희 나라가 유신儒臣들을 길러서 그 뜻이 개결하고 몸이 청아하고 말이 준절하다 하나 너희가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 하느냐.
(P.28)


  눈 덮인 행궁 골기와 위에서 초저녁 어둠이 새파랬다. 내 행전 구들을 달구는 장작불 연기가 퍼졌다. 푸른 연기가 흐린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삭정이 타는 냄새가 향기로웠고 침소 방바닥은 따스했다. 임금이 옷을 벗느라 비느적거리는 소리가 마루까지 들렸다. 사관이 붓을 들이서 하루를 정리했다.​
  안팎이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 아침에 내행전 마루에서 정이품 이상이 문안을 드렸다. 안에서, 알았다, 마루가 차니 물러가라••••••는 대답이 있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P.37)


  - 경들이 박복하구나. 어찌하라. 내가 비를 맞으라랴
  임금이 내행전 마당으로 내려섰다. 버선발이었다. 마당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임금은 젖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이 이마로 땅을 찧었다. 구부린 임금의 저고리 위로 등뼈가 드러났다. 비가 등뼈를 적셨다. 임금의 어깨가 흔들렸고, 임금은 오래 울었다. 막히고 갇혔다가 겨우 터져 나오는 울음이 었다. 눈물이 흘러서 빗물에 섞였다. 임금은 깊이 젖었다. 바람이 불어서 젖은 옷이 몸에 감겼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세자가 달려 나와 임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승지들은 마루에서 뛰어내려 왔지만, 임금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임금 이 젖은 옷소매를 들어서 세자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임금이 울음 사이로 말했다
  - 우리 부자의 죄가 크다. 하나 군병들이 무슨 죄가 있어 젖고 어는가.
  세자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임금의 울음소리는 행각에까지 들렸다. 신료들이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영의정 김류가 울먹였다.
  - 전하, 옥체가 상하시면 사직이 또한 위태로우니...... 김류의 말은 임금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임금은 오래 울었고 깊이 젖었다. 마루 위에서, 서안 앞에 앉은 젊은 사관이 벼루에 먹을 갈며 마당에 쓰러져 우는 임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관이 뜻을 들어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사관은 울지 않았다. 낮에 비가 그쳤다.
(P.66)


  너희가 선비의 나라라더니 손님을 대하여 어찌 이리 무례하나. 내가 군마를 이끌고 의주에 당도했을 때 너희 관아는 비어 있었고, 지방 수령이나 군장 중에 나와서 맞는 자가 없었다. 안주, 평양, 개성을 지날 때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간의 뜻을 전할 길이 없어 거듭 강을 건너 이처럼 멀리 내려오게 되었다. 너희가 니를 깊이 불러들여서 결국 너희의 마지막 성까지 이르렀으니, 너희 신료들 중에서 물정을 알고 말귀가 터진 자가 마땅히 나와서 나를 맞이야하지 않겠느냐. 나의 말이 예禮에 비추어 어긋나는 것이나. 너희 군신이 그 춥고 궁벽한 토굴 속으로 들어가 한사코 웅크리고 내다보지 않으니 답답하다.
(P.77)


  내행전 마루에서 말들은 부딪치고 뒤엉키며 솟구쳐 오르다가 가라앉았다. 말들이 가라앉는 침묵 속에서 신료들은 목젖을 떨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김상헌은 미룻바닥에 시선을 박고 최명길의 말을 기다렸다. 최명길은 말하는 자들의 입을 ㅏ번갈아 쳐다보며 아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금이 팔을 뒤로 돌려 아픈 허리를
두들겼다. 임금 옆자리에서 세자가 콧물을 훌쩍였다.
(P.190)


  송파강의 여울은 빨랐다. 지저귀는 물 위로 물비늘이 튀었다. 풀리는 강을 바라보면서 간은 망월봉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조선 행궁의 망궐례를 생각했다. 홍이포의 사정거리 안에서 명을 향해 영신의 춤을 추던 조선 왕의 모습은 칸의 마음에 깊이 박혀들었다. ...난해한 나리로구나....... 아주 으깨지는 말자....... 부수기보다는 스스로 부서져야 새로워질 수 있겠구나•••
(P.276)


  조선 왕이 말에서 내렸다. 조선 왕은 구층 단 위의 황색 일산을 향해 읍했다. 멀어서 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단 위에서 칸이 말했다. 말은 들리지 않았다.
  정명수가 계단을 내려와 칸의 말을 조선 왕에게 전했다.
  - 내 앞으로 나오니 어여쁘다. 지난 일을 말하지 않겠다. 나는 너와 더불어 앞일을 말하고자 한다. 조선 왕이 말했다. ​
  -황은이 망극하오이다.
  정명수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 조선 왕의 말을 전했다. 청의 사령이 목청을 빼어 길게 소리쳤다.
  -일 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항해 절했다.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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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박웅현 / 북하우스 / 204쪽
(2017. 11. 9.) 



  “팀장님,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아이가 행복해질수 있을까요?"
  어느 날 다섯 살 아들을 둔 여자 후배가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묻더군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글쎄”라고 답은 해놓고 술잔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해봤죠. 어떤 것을 가르쳐야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다행히 그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제 자신도 납득할 만한 답이 떠올랐습니다. 행복한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자존(自尊)'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후배에게 이야기해줬습니다.
(P.15)


남과 다르면 알수 없는불안감이 밀려드는 환경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살려면 스스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자존감이 없으면 서울대를 다닌다고 해도 행복할 수 없이요. 백 억을 번다고 다 행복하기만 하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건 일 마나 좋은 학벌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비느냐가 아닙니다. 기준점을 바깥에 두고 남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안에 두고 나를 존중하느나일 겁니다.
(P.21)


결국 그는 미국 교육은 '네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한다 면 한국 교육은 '네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했습니다. 바깥에 기준점을 세워놓고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아ㄴ에 있는 고유의 무엇을 끌어내는 교육을 이야기한 것이죠.
  제가 뉴욕에서 공부할 때 느낀 것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집어 넣으려 하지 않고 뽑아내려고 애썼습니다. 서른여섯에 사회생활을 하던 아저씨가 책상에 앉아 처음으로 디자인을 배우는데 주뼛댈 틈도 없이 교수의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해온 숙제를 벽에 쭉 붙여놓고 좋은 점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교수는 마치 칭찬을 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
​  그런데 우리 교육은 과연 어떤가요? 내 안에 있는 걸 존중하게 해주는 교육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우리는 늘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해 지적 받고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교육 받아왔어요.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데, 가진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합니다. 중심점을 바깥에 놓고 눈치 보며 바깥을 살핍니다. 지존은 중심점을 안에 찍고 그것을 항해 나아가는 겁니다.
(P.26)


  Be Yourself, 너 자신이 되어라. 제가 딸에게 자주하던 말입니다. 지금 대학생이 된 딸이 어렸을 때에는 숫기가 너무 없어서 다른 사람과 말도 잘못했어요. 그 시절에 딸아이에게 매일 이야기해줬습니다. "Be Yourself, 너는 너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이 되라고 말이죠. 여러분은 모두 폭탄입니다. 아직 뇌관이 발견되지 않는폭탄이에요. 뇌관이 발견되는순간, 어마어마한폭발력을 가질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즉 자존을 찾고 자신만의 뇌관을 찾으세요.
(P.34)


  저는 딸에게도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싶으면 스펙 관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시간에 네 본질을 쌓아놓으라고 하죠. “기준점을 밖에 찍지 말고 안에 찍어,
실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별을 만들어낼 수 있어. 강판권을 봐, 언젠가 기회가 온다니까. 그러니 본질적인 것을 열심히 쌓아둬.”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이 다 본질이나? 고스톱이나 에니팡 같은 게임을 진짜 잘하는데 그럼 이게 내 본질일까?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5년 후의 나에게 긍정적인 체력이 될 것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치는 고스톱이, 에니팡이 당장의 내 스트레스는 풀어주겠지만 5년 후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본질은 결국 자기 판단입니다. 나한테 진짜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봐야 합니다.
​(P.60)


  복잡한 사물의 핵심이 무엇인지 보려는 노력, 어떤 것을 보고 달려가느냐가 세상과의 씨움에서 이길 수 있는 커다란 무기입니다. 기타를 만든다고 했던 클래식 기타 회시는 다 망했고, 음을 만든다고 했던 클래식 기타 회시는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본질은 삶을 대하는데 있어 잊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 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이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경험상 돈을 따라가면 재미도 없고 재미를 따라가면 돈도 따라오더군요. 그런 경험에 따른 제 생각을 말씀 드리자면 돈은 본질이 아닙니다. 돈을 따라가지 말고 내가 월하고 싶은지 내 실력은 무엇인지 어떤 것을 할수 있는지를 고민해보고 그것을 따라가세요.
(P.68)
​​

  진짜 알려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궁금해질 겁니다. 그 대상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알기 전에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단순히 비발디 좋지. 바로크 알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그거 영화〈엘비라 마디간〉에 나오는 건데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보는 인터넷으로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옵니다. 알려고 하기 전에 우선 느끼세요. 우리는 모두 유기체잖아요? 고전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느껴야 해요. 그러다 보면 문이 열려요. 그 다음에는 막힘 없이 몸과 영혼을 타고 흐를 겁니다.
(P.86)


 존 러스킨이라는 미국의 시인은 “네가 창의적이 되고 싶다면 말로 그림을 그려라"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뭘 봤니?"라고 물었을 때 그저 “루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풀"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고, 잎이 몇 개 있 었는데 길이는 어느 정도였고. 햇살은 어떻게 받고 있었으며 앞과 뒤의 색깔은 어땠고, 줄기와 잎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등 자세하고 소상히 그림 그리듯 말하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즉, 들여다보라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도「지상의 양식』에서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라고 했습니다.
(P.113)


  〈아메리칸 뷰티〉의 비닐봉지처럼 만들어진 것들을 보면 내 주변에 다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見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처음 창의력 강의를 위해 창의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고민하다 見을 발견했고, 그 이후 나와 같은 생각들을 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 기를 통해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다른 사람 들이 본 것들을 배우고 스스로 들여다보면서 見을 실천하려고 하고 있어요. 지금의 저를 돌아보면 見을 알고 난 뒤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P.121)


萬物 皆備於我矣 (만물 개비어아의)
反身而誠 樂莫大焉 (반신이성 낙막대언)

「맹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맹지를 완독한 적도 없는 제가 아는 척 할수 있는 작은 지식이지만 제게 선명한 도끼의 흔적을 남긴 구절이기 때문에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해석을 해보면 이런 의미입니다.​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하는 일에 성의를 다한다면 그 즐거움이 더없이 클 것이다.'​
  見강의 때 말씀 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냈던 아이디어들이 전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주변에 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죠. 말하자면 제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행동을 돌아보고, 그 행동이 왜 일어났는지 성의를 다해 생각해보면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깨닫고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문장이었습니다.
(P.136)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지 말고 선택을 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겁니다. 팁을 하나 드릴게요. 어떤 선택을 하고
그걸 옳게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냐, 바로 돌아 보지 않는 자세입니다.
(P.141)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행복은 삶이 끝나갈 때 쯤에나 찾게 될 겁니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의미 없는 순간들의 합이 될 테니까요. 만약 삶은 순간의 합이라는 말에 동의하신다면, 찬란한 순간을 잡으세요. 나의 선택을 옳게 만드세요. 여러분의 현재를 믿으세요. 순간순간 의미를 부여하면 내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겁니다.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불어넣으면 모든 순간이 나에게 다가와 내 인생의 꽃이 되어줄 겁니다. 당신의 현재에 답이 있고, 그 답을 옳게 만들면서 산다면 김화영의 말대로 '티 없는 희열'을 매 순간 느낄 겁니다. 티 없는 희열로 빛나는 관능적인 기쁨에 들뜨는, 예외 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가 온전히 여러 분의 인생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P.148)


​​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세련되게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주술 구조를 제대로 갖추고 문맥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기능합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처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말에 담긴 힘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생각을 디자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시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훈련이 잘 안 되어 있습 니다. 우리 문화가 논쟁의 문화가 아니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사색의 문화인 반면 서양은 논쟁의 문화죠. 서양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토론하고 논쟁합니다. 네 생각을 이야기해봐, 너의 생각은 어때? 끊임없이 묻고 답하죠. 우리는 그런게 없어요. 하지만 사색의 문화가 몸에 배어 있다 보니 좋은 시나 깊은 사유의 글들은 많죠. 이철수의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같은 문상은 사색의 힘이에요. 이런 우리의 장점은 가져가되, 소통을 위해서는 논쟁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어려서부터 그 훈련이 너무 안 되어 있으니까 말이 막히면 감정적으로 멱살부터 잡는 국회의원들이 나타나 는겁니다.
(P.199)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 말함과 동시에 어떤 문맥으로 해야 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힘을 싣기 위해서 지혜롭게, 생각을 디자인을 해서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소통을 잘하고 싶으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 합니다. 역지사지, 문맥파악,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습관. 스케치를 할 때 형태를 잡는 데생이 필요하듯 자기 생각을 데생해야 해요. 연습하고 말을 만들어보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리해보고, 어떻게 하면 내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소통은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개인생활에서도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내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싶다면 소통을 잘 하면 되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오해가 생겨서 싸움이 되고 일이 꼬여 걷잡을 수 없게 되면 그냥 포기해버리는 집들은 대부분 소통이 안 되는 집이에요.
​(P.206)
​​

  마지막으로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훈련 방법 두 가지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할리우드에는 7 Words Rule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가져오니까, 투지를 받고 싶으면 시나리오를 단 일곱 단어로 설명해보라는 건데, '결혼을 했는데 마누라가 조폭이네? 조폭 마누라' 이런 식으로 그림이 확 그려지도록 설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훈련을 한번 해보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에 다닐 때 논문을 쓰기 전에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줄로 정 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세 개의 패러그래프로 씨보고, 그걸 다시 챕터 별로 나눠서 논문을 만들죠.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일곱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직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P.207)

​​
많은 후배들이, 학생들이, 젊은이들이 정답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말씀드렸죠. 인생은 전인미답이잖아요. 어찌 알겠어요. 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할지 아닐지 아무도 모릅니다. 답을 찾지 마세요.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걸 선택하고 후회하면서 오답으로 만들죠. 후회는 또 다른 잘못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잊고 말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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