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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ㅣ 한나래 시네마 10
슬라보예 지젝 / 한나래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부제는 [할리우드의 정신분석]으로 되어 있다. 제목 자체에 이미 정신 분석의 중요한 용어 중 하나인 징후가 등장한데 이어 부제는 이 책의 목적을 간결하고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영화 서적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멋 모르고 이 책을 집어든 사람들이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할리우드 그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할리우드는 정신분석 강의를 효과적으로, 그러니까 선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참고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할리우드 영화를 가장 비할리우드적으로 읽어 내는 영화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 중에는 영화와는 전혀 무관한 장도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자체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난해하다. 칸트의 형이상학, 인식론, 도덕론의 기본 바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자, 그리고 프로이트와 라깡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자는 아예 읽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이 책이 여러 모로 기만적이고 일탈적이긴 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지젝은 영화를 자신의 정신분석적 가르침의 효과적인 예시 정도로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채플린의 <시티라이트>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삼부작에 대한 분석, 그리고 필름느와르에 대한 설명은 그만의 독보적인 경지를 잘 보여주는 탁견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창적이다.
라깡과 더불어 지젝은 현실을 구성하는 위치로서의 주체에 관심을 가지고 실재라는 무시무시한 공백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의미화된 메시지로서 징후를 상징적인 질서내로의 인입을 강조하지만 지젝은 이와는 반대로 징후 그 자체를 즐기는 비타협적인 태도로서의 윤리, 그러니까 칸트가 말하는 근본적인 악을 실천하는 행위야말로 실재의 심연을 건너 이데올로기의 존재태를 직시할 수 있는 태도라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라는 지젝의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는 할리우드 고전 필름느와르의 위상을 새삼 확증한다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의 표지는 히치콕의 <이창>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이 건너편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근심과 불안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야말로 징후를 즐기는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