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소
김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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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 때문에 빠듯하게 짠 일정 안에서 각 나라의 수도와 국립박물관, 유적지를 찍고 다니느라 무슨 서바이벌 게임을 치르는 것 같았다. 단 한 군데라도 빼먹으면 '유럽일주'를 하지 않은 게 될까 봐 몸살기가 있어도 일정을 조정하지 못했다. '가봤다'를 증명할 일이라도 생길 줄 알고 입장권과 안내서 따위를 악착같이 챙겼고 매일 다른 옷을 입고 셀카를 찍어댄 뒤 곧장 페이스북에 전시했다. 친구들은 내가 게시한 사진과 글에 별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철저한 무반응이 부러움과 시샘의 메아리라 해석하고 더 많은 사진과 글을 올렸다. 여행은 그렇게 일상과 마찬가지로 관성으로 진행됐다.

세계 곳곳의 역사 지리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의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취합되어 있고 따라잡기 불가능한 속도로 매일 업데이트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여행은 철저히 이미 체험한 이미지와 관념의 재생이다. 여행자들이 쏟아내는 안내서는 투입한 금액과 시간에 비해 매우 큰 수확을 건졌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환상을 강요한다. 필연에 거만해지고 우연에 환호하는 게 여행기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혈에 나오시는 분은 이렇게 건장하시진 않으나 치료받으러 오시는 여성 분의 포즈는 구체적으로 이렇지 않을까 상상된단 말이다.


0. 그래도 직접 해보지도 않고 부정하기는 싫으니 해보겠다는 주인공의 자세가 나오긴 하다. 그렇지만 나도 이 작가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 의견에 찬성이다. 첫째로 나는 여행가서도 책을 가져가서 읽는 타입이니 (그래서 사막은 못 갈듯. 땀이 책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 나같은 놈이 해외여행을 가봤자 돈만 날리지 싶다. 두번째로 항상까진 아니지만 경치가 좋다 해서 여행갔다가 생각보다 별로인 곳들이 종종 있고, 몇번이나 이 파라다이스 같다는 곳이 눈앞에 있는 저곳인가를 확인해본 적도 있다. 해외를 간다고 그렇지 않을까? 진짜로?

1. 전복에서는 남자주인공이 좀 뚱한 동네 삼촌 같은 편인데 악스트에서 본 김덕희 단편에서도 비슷한 성격이 주인공이다. 이 사람도 말라죽은 앵두나무 이하생략 시집을 낸 분처럼 비슷한 의미에서 마음에 든다. 내용은 좀 올바른 면이 있으나 그를 표현하는 주인공도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세상은 주인공보다도 더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느낌이랄까?

여성들은 대부분 소작농같은 신세이고 남성들은 대부분 건물주가 된 유리천장(?)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병정은 아니지만 을인 아버지의 비애, 주인공의 따분함 등은 약간 소설의 주제와 어긋나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짤막한 사건과 주인공의 소소한 행동의 변화로 마지막에 겉돌았던 주제를 깔끔히 통일시킨다. 여전히 찝찝함은 지울 수 없지만.

2. 급소는 왠지 장과 주인공을 엮으면 BL물 같기도 해서 좋았다 헤윽 커플로 맺어주고 싶다 되려 핏줄이 이어졌을 것 같기도 해서 더 금지된 커플같은 냄새가 나 저 둘이 커플이라고 작가가 공식 인정해주면 나 마구마구 핥아댈 자신 있는데(아냐)

3. 아니 진짜 방심하고 봤다가 빵 터진 절차가 있습니다 소설 ㅋㅋㅋ 90년대 판타지 소설 때 왠지 독자가 배꼽을 잡고 웃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불태워질 듯이 모든 걸 걸고 개그를 추구하는 유행이 있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 잔해를 보는 듯하다. 어쩌다가 화장실에서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키들거린 적은 오랜만이라 왠지 화장실을 나오니 아랫집 윗집에서 초인종을 누를 것 같은 불안이 스며나왔다. 왠지 뒤로 가면서 갑자기 반전(?)이 뜨지만 그것도 매력있다. 어쩌면 전복처럼 뜬금포 결말이 작가만의 컨셉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맘에 드는 작가라서 그런가 해외여행에 대한 견해도 나랑 많이 비슷하다. 이거 반드시 독서모임에서 엄청 까일 거 같은데(...)
그리고 이 단편소설을 읽은 그 날 난 출근했다가 갑자기 유니폼을 두고 오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원래 걸어서 50분 걸리는 거리를 30분 만에 주파했다 한다;;

4. 흙에 그린 개는 짖지 못한다는 대사는 흙수저의 조선시대 버전 표현인 듯하다. 여기선 노비인 주인공이 글을 베껴쓰다가 양반에게 들키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임기응변을 쓰는 거지만 어느 정도 맞는 듯하다.

5. 작가가 본래 편집자 출신이라 그런지 편집 일에 대한 애환의 글이 하울링에서 좌르륵 펼쳐진다. 하기사 나도 무슨 웹진에서 편집을 맡았다는 사람의 SNS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떠나 너무 문장 성분이 엉망진창이라 지적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웹진 편집일 하시며 잘 살고 계시리라. 여기다 내 연휴 내가 쓰는 데도 눈치를 본다거나 갑자기 사직을 당하는 상황 등 직장인 독자가 문득 공포로 소스라치게 되는 요소가 잘 섞여 있다.
그나저나 걍 연차 내고 쉬겠다는데 직원들끼리 같이 좋은 데 나가자니 ㅋㅋㅋ 사장 양심있냐?

6. 여자한테 대쉬하되 시도하지 말아야 할 게 세 가지 있음.
첫째, 밤중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지켜주겠다느니 쇼하지 말 것.
둘째, 아무리 친한 척했더라도 여자가 좋아하는지는 꼭 물어볼 것. 아무리 여자가 튕기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자리 깔고 진지하게 물어보면 튕길 자리 안 튕길 자리 지가 다 알아본다.
셋째, 서프라이즈 하지 말 것. 의외로 싫어하는 사람 많다. 눈치라도 고단수던가.
여자한테 대쉬하기 위해선 배려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소설에서 고 주임이 하듯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식사를 하러 좌식에 앉을 때 모포를 가지고 와 하체에 둘러주기, 인도를 걷고 있으면 여자가 차 다니는 쪽으로 걷지 않게 끌어당겨주기 등. 사실 기본적인 매너인데 그런 것도 못하는 남자들 많더라. 물론 배려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때 고 주임 같은 사람이 가장 부담스럽게 대시해대서 곤란스럽긴 하지만 ㅎ..
철학서와 시집을 같이 보는 중인데 난 철학자보단 시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하울링에서는 가상세계에서의 일이지만 시인이 교수에게 굽신굽신거리는 장면이 나오니 꼭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난에 쫓기는 시인만 있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 또래의 유명한 시인도 아버지가 목사라고 하니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것 같고. 시인 몰까.

7. 가장 별로였던 소설은 코뮈니케이터. 소설 제목으로 상당한 기대가 있었는데 내용이 너무 발랄해서 따로 노는 게 문제였다. 전적으로 신예 작가답지 않게 묵직한 기술이 많은 김덕희의 작품을 생각해보면 뜻밖의 작품이고 가볍게 쓰려고 노력한 게 돋보였으나, 요즘 제법 심각한 문제인 게 개에 대한 이슈인데 너무 가볍게 치고 나가지 않았나 싶다.
다음으로 혈. 가시 자국ㅡ혈2보다 훨씬 더 뒷부분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순서가 멀어진 것에 대해서 직접 이유를 물어보고는 싶었지만 하필 저자가 한무숙 상을 타는 날이 독서모임 있는 날인지라; 근데 퀄리티는 가시 자국ㅡ혈2보단 못하단 느낌이다. 가시 자국ㅡ혈2가 시원스레 결말을 냈다면 혈은 어딘가 자꾸 겉돌고 있단 느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서울에 살던 때 쓰지도 않을 송곳을 비상용이라 고집하며 자꾸 가방에 넣고 다녔을 때처럼, 남자도 한번쯤 그런 날카로운 뭔갈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는 기분이 있구나' 정도의 인상?
김형중 씨의 평론은 별로였다. 물론 나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본 적 있지만 김덕희의 작품에 비교하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현실을 반영했다기엔 몽환적인 부분들이 상당히 많아서 말이다. 자망이 좀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배경이 비 오는 강이다 보니 악몽같은 느낌이 배후에 깔려 있다. 그래서 한 소설이 끝날 때까지 손에서 뗄 수 없는 게 이 책의 매력인데 평론 끝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더라. 굳이 이 책을 영화에 비유하자면 인셉션에 정치 이야기를 어중간하게 섞은 듯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급소는 한국의 보통 마초물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성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게 힘든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받았지만 여성들의 결을 파악하려 작가가 더 노력한다면 마초물이란 비난은 받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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