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문학과지성 시인선 494
서효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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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찾아서 중에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는다. 단연 개라고 대답하겠다. 담배를 문다. 비가 오고 있고, 실내에는 끽연할 공간이 없다. 비와 눈 중에 무엇을 좋아하냐 묻는다. 날씨는 원래 거지 같은 거다. 그들의 눈빛을 예측할 수 없다. 연기가 빗속으로 암고양이처럼 숨어 들어간다. 오늘은 맘에 드는 시간이 없다. 인간은 모두 같은 얼굴이고,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유해하고, 너와 나는 썩고 있다.

  

문재인이 좋아 심상정이 좋아 묻는다. 

 

 언젠가 우리나라는 무덤이 너무 많다는 말을 한동안 투덜거리며 한 적이 있다. 부모님은 화장을 하겠다고 하셨고 나는 화장해서 보관함에 넣는 짓도 덧없다는 생각을 최근 하는 중이다. 내장은 모두 기증한다 치고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가 반드시 남을 텐데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어차피 구성성분은 옆나라에서 번진 방사능과 경주에서 풍길 방사능폐기물과 화학덩어리 밖에 더 있겠는가. 그걸 어린 나무들에게 영양분이랍시고 준다니 이런 맙소사 세상에 끔찍해라. 하지만 제주도를 여행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들이 나열되어 있는 산을 목격한 순간부터, 영화 자백에서 푯말 하나 없는 북한 주민의 무덤을 본 순간부터,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는 나 자신을 느낀다. 우리들이 살아남아서 보고 있는 그 무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미국 여성 과학자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 밑에 수억 개의 생명이 있다고 즐겁게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밟고 있는 대한민국 땅 속엔 개죽음당한 사람들의 피가 과연 몇 리터 정도 흐르고 있을까. 그 피를 짓뭉개버리는 콘트리트 위에서 살아있는 나는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인가.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오타쿠, 대한민국에서 가장 소외된 지방 강원도 등.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이나 쓰여 있으니 찾아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는 군대 이야기 등 야사를 중심으로 지방과 몇몇 한국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를 분석하는데, 너무 치열해서 시가 다소 지저분한 점을 제외하고는 아주 시니컬한 시들이 쓰여져 있다. 특히 이 시집의 뒷표지를 보면 정말이지 이건 사서 소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점직원에게 계산해달라고 공손히 내미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니 꼭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라.

 

남자를 찾아서 중에서

그때 나는 짝사랑하던 너와 충장로를 나란히 걸었다. 우리의 교복은 잘 어울렸지만 너는 성당 형을 사귀고 있다고 했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었으나 내가 궁금한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 형은 이제 막 군대에 갔어. 너는 편지지를 고르지만 꼭 쓰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묻히지 말아야 해. 거기는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죽을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만 같고, 방금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와 진짜 죽인다, 그래 죽이지 않니.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나란히 걷고 있으니까. (...) 너 그거 아냐? 군대에 가기 전에는 꼭 여길 온다더라. 혀로 별짓을 다 한다더라. 너 그거 모르냐? 여자들의 혀는 갈라지지도 않았다더라. 그 형의 혀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너는 아냐? 네 혀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좋은 냄새가 났다던데, 그 형이 그리 말하던데, 이야기가 끝이 없던데, 너는 그 끝을 아냐? 모르냐?

 

 

동성애자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던데 아냐? 모르냐?

 

정체성을 찾아서 중에서

팀장의 아들은 살이 쪘고 만화영화를 좋아한다. 팀장은 파티션을 높이 세우고 겸손한 자세로 일했다. 높은 사람을 만나면 90도로 허리를 숙인다. 팀장의 아들은 몸이 굽혀지지 않는다. 살이 쪄서 그렇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아들은 자주 했다. 일본에서 만든 만화영화 캐릭터를 좋아했다. 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들은 만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팀원에게 한다. 책상을 정리하는 팀원의 뒷모습을 보면 아들이 보던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구다. 긴 칼을 든 로봇이 적의 허리를 베어낸다. 시커먼 공간으로 하반신이 떠내려간다.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를 탄 팀원은 작은 점이 되어 낙하한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아들이다. 아들은 분홍색을 좋아했고, 로봇을 조종하며 눈과 가슴이 큰 피규어를 모았다. 살이 쪄서 그랬다. 운동을 해야 한다. 팀장은 골프 회동을 위해 먼저 일어난다. 아들은 피규어와 대화한다.

 

솔직히 진해에서 막 사진 찍는 사람들 정말 이해 안 가고 그랬다. 나는 볼수록 끔찍했는데.

 

 여기가 바람의 검심에서 나오는 일본 다리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가고. 우리나라는 그러니까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다. 독립국을 자청할 거였다면 다리를 다 뜯어버렸어야 했다. 비실비실한 일본 벚나무 말고 국산 벚나무를 보세요. 초등학생 때 열심히 읽었던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주인공 히무라 켄신은 나중에 영화판에서 나이가 들어서 쇠약해지고 결국 최후에 사랑했던 여인에게 안락사당한다. 그가 쇠약해진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쟁이 임진왜란이었다는 썰이 있었다. 처음엔 많이 분노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카오루에 의해 켄신이 보수화되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에겐 먹여살려야 할 아들이 있었다.

 

강릉 중에서

강릉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이었지. 게으름을 사랑하자고 오징어들이 말한다. 겨울이었고, 따뜻한 방을 잡아 정자세로 누워 따뜻하지 않은 곳을 향해 입김을 밀어내었다. 서로의 입에서 뛰쳐나온 오징어가 몸을 섞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끝이 없는 파도가 유리 바깥에서 몹시 울었다. 통유리의 안쪽, 붙잡힌 생선처럼 달라붙은 찬 서리들, 그것은 눈물도 별도 아냐. 그건 온도 자체다. (...) 기와에 써내려간 적절한 소망들처럼 우리는 영원히 이루어져 갈 것이다. 강릉에서 빌었던 소원은 사실 실패다.

 

니가 운명적으로 한국에 태어났는지 우연히 한국에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시국에 해외여행을 갈 생각이 나십니까? 이민갈 생각이 나십니까?

 

 가난하게 쪽팔리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키우신 부모님은 어떻습니까? 그분들이라고 겪고 싶어서 겪었을까요? 의식을 가지고 그걸 견뎌낸 일부 극소수의 조상들은 어떻습니까? 특별히 헬조선이라고 욕할 자격이 명시되어 있는 티켓이라도 쥐고 있습니까? 미치지 않고 살 자신이라도 있습니까?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자기성숙은 우주가 저절로 이뤄줄 거라 믿는 인간들.
동성애자 혐오가 권리인 줄 아는 인간들.
우리나라 대학에서 하는 공부가 공부라 믿는 인간들.
호랑이는 무조건 그고 간호사는 무조건 그녀라 믿는 인간들.
인간이 아닌 걸 인간적이라 하고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하는 인간들.
앞에서 대놓고 사람들이나 욕하면 자신이 솔직한 성격인 줄 아는 인간들.

 

 생각해보니 이들은 권력을 등에 업고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들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이것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일말의 고려도 없이 주류를 택한 뒤 도망가는 소수자들의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츄라이 김치! 츄라이!라고 권하는 인간들.
 동방예의지국이라고요? 우리나라가? 정신 좀 차립시다. 이게 한국의 참모습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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