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황동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허연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동작으로 서 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
얼굴도장 찍으러 간 게 잘못이었다. 나의 자세에는 간밤에 들은 단어가 남아 있었고 고양이의 자세에는 오래전 사바나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녀석이 한쪽 발을 살며시 들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고. 나는 골목을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선 나직이 쓰레기봉투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와 나는 평범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 p. 211

결국 화자도 고양이도 '평범'하게 먹고살기 위해 했던 일이 아니던가.
- p. 212

  

페친이 널리 퍼뜨리고 있는 꼰대나치 사진. 농담이 아니야. 방심하면 나도 저렇게 된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우리는 1분 1초마다 지속적으로 늙어간다.

 

젊은 날의 한때 시인이 방문했던 동해 낙산사와 바닷가에서 겪은 체험을 기술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자연과 인간, 대우주와 소우주가 만나 교응하며 소통하는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을 보여준다. "북 치고 피리 불고. 달이 높이 뜨고, 혼자 환하고 적막"한 순간은 하룻밤 사이 화자가 거치는 여정, 의상대와 홍련암과 동해 일출 광경을 볼 때마다 되풀이된다. "이건 또 뭐냐"라는 화자의 반복되는 영탄엔 자아의 협소한 틀에서 벗어나 우주와 합일하는 순간의 황홀에 대한 화자의 해학적 반응이 담겨 있다.
{무굴일기2(황동규) 해설 남진우}

 이런 좋은 평론을 쓴 사람이 어째서 '세상의 변화에 의해 말의 판, 즉 문학이나 문단도 판이해져버렸다.' 라는 평론을 쓸 수밖에 없는 작품을 좋은시라고 추천한 것일까.

 나는 솔직히 어떤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천양희의 마들시편이 좋은 시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시라 치더라도 타는 말과 말하는 말을 이중적인 의미로 쓰는 방식은 너무 진부하다. 나에겐 당신들이 좋은 시라고 말하는 옛날 시들이 훨씬 어렵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불평들은 문인들 중 신인(특히 여성)을 밀어내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시들은 전부 2000년 이후의 것들이다.

 전기철 시 '아내는 늘 돈이 모자라다'도 역시 의뭉스럽다. 아내가 남자를 좀 사람답게 만들려고 분투하는데 어째서 싫어하지? 아내가 없었으면 평생 당신은 후줄근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변화를 거부하는 꼰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가 싶다. 하긴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배용제의 시도 좋다고 올렸으니. 마찬가지로 악명이 높다는 이준규 시인은 분할 정도로 실력이 좋은데, 배용제는 실력이 그 반도 못 미치는 것도 재미있다.

 

 

연관성 전혀 없는 사진 죄송. 다만 싸이코패스라는 애니 중 이게 작화팀 능력 다 갈아 쳐넣은 신의 한 장면이란 말을 꼭 한 번 하고 싶었다...

 

최근 나만 고양이 없어라는 말이 유행 중이다.
 누구나 고양이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는 고양이가 만만해보인다는 것 아닐까.
 고양이는 개에게도 물려 죽는 약한 존재라고 한다. 개가 대낮에 로드킬 당하는 모습은 본 적 있지만, 고양이의 로드킬 당한 시신은 밤늦은 귀가길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목격한 적이 있다.
 우리 집 개를 산책하다보면 고양이를 마주치는 순간이 최근 잦아지는데, 우리 집 개가 짖을 때 내가 꾸짖지 않으면 고양이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다. 하긴 개보다 크게 짖을 수도 없고 공격 수단은 발톱밖에 없으니까.
 그런 걸 보면 사실 개와 고양이는 대등한 원수지간은 아닌지도 모른다. 카카오 캐릭터에서는 개가 남자로, 고양이가 여자로 묘사된다. 시에서 고양이가 많이 나오면 유독 눈길이 가게 된다.  

그녀의 육체는 그녀의 것이 아니며, 머리카락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른다(최원준) 해설 이광호}

최원준 시인인가? 시집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나서 찾아봤는데 시 하나 외에 없다. 아쉽네.


 이 대한민국에 평론가가 너무 많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평론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서평을 올릴 수 있는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다. 그런 상황은 문학계에선 김소월같은 꽃같은 인물을 탄생시키기도 하지만, 다들 힘든 격랑을 헤쳐나가는 와중에 점점 깡다구는 강해져서 책 내용 중 뭐 하나 잘못된 게 있으면 출판사에 전화해서 말도 안 되는 악을 써 대는 못된 인물들을 탄생시키기도 하다. 일단 나도 사람인지라 인간의 성격과 재능은 별도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 약한 사람을 괴롭히던 문인들이 정의 운운하며 작품을 써 나갔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마에 핏줄이 서고 눈이 까뒤집어져 욕설을 마구 써대곤 한다. 자기 세력만 믿고서 개인의 취향이 대중의 취향인 마냥 으스대는 사람들도 한 몫한다. 그런 때 사람들의 격한 감정을 가라앉혀줄 평론가가 필요하다. 중립은 바라지 않지만, 자신은 왜 이 작품이 좋은지, 이 작품은 세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문학계에 어떤 흐름을 가져다줄지 담담히 이야기해줄 평론가 말이다. 남진우는 별로 와닿지 않았지만 이광호는 무난하게 괜찮았고 허혜정은 너무나 훌륭했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뛰어넘는 유려함까지 선보였는데, 알멩이보다 더 아름다운 포장지가 9년 동안 평론계에 어떤 바람을 불어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한국 사이버대(현재 숭실 사이버대)에 근무했다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활동을 할까. 그녀가 등장한 책들을 검색해봤는데 파시즘을 포함하여 다루는 주제와 제목부터 범상치 않았다. 터무니없이 엄청난 인물을 이렇게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인해 접하게 되니 감격스럽다.

 

나는 만화책이다 중에서

최금진

내 나이 열아홉에
순정만화 여주인공의 벗은 몸과
천로역정 만화판 버전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을 두루 통달했다
(...)
서른둘
뒤늦은 첫사랑처럼 뜬금없이 직장을 때려치우고야 깨달았다

 

진정한 덕업일치다.
존경스럽다.
역시 덕후의 길은 멀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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