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후지사키 사오리 지음, 이소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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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쌍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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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4인조 밴드 SEKAI NO OWAR의 멤버로 피아노 연주와 라이브 연출 전반을 담당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같은 밴드 멤버가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하는데서 작품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데뷔 소설인 이 작품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밴드의 결성 과정을 비롯한 불안하기만 했던 영혼의 소년, 소녀의 성장과 관계성을 그리고 있다. 평소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한 그였지만 막상 글을 쓰려니 완전 동떨어진 것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것 같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기에 같이 괴로워하고 울면서 힘들게 5년에 걸쳐 써 왔다고 하니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화자는 니시야마 나쓰코,  열네 살 소녀이다.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한 학년 선배 남학생 쓰키시마에게 충동적으로 이끌리듯 말을 건네던 이 소녀는 앞으로 닥칠 수많은 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그들의 관계성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가 어떻게 휘둘리게 되는지, 얼마나 비틀거리면서 울고 웃게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시작된다.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고 낯설었던 이 소녀는 피아노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그에게 무기력하고 쓸쓸해보이는 쓰키시마가 자신을 '쌍둥이'라고 명명한데서 상처받고 아파하며, 어떤 자리에 서 있을지 몰라 헤매이게 된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블랙홀 속에 빨려들어간 소행성처럼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간다. 


떨어져나가지 않기 위해 간절하게 매달리듯 견뎌내었다가, 변해가는 쓰키시마의 모습에 두려워하며 밀어내버리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주면서도 상처를 주는, 뭐라 정의내릴 수 없고 알 수 없는 이상한 관계성이 1부와 2부를 가득 메운다. 그리고 마침내 스무 살 성인이 되기까지 힘겹게 버텨왔던 시간들을 지나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밴드를 결성하기까지, 나아가 밴드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되찾아가게 되었는지를 그려낸다.


 

대체로 충동적이며 불안정했고,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그 시절을 유독 힘겹게 자각했던 쓰키시마라는 인물이 바깥에서 들어왔던 말처럼 사치스러운 어리광처럼 느껴졌다. 정해진 시간만큼, 분량만큼 자신이 이루고자 했기에 열심히 피아노 연습에 매진하는 나쓰코를 책망하는 쓰키시마. 정작 그 곁에서 자신이 어떠한 안도나 평온을 얻었는지 끝까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아픈 생채기만 내기 바쁘다. 


큰 열병을 앓는 듯 이기적인 쓰키시마의 심리가 잘 와닿지가 않았다. 힘겹게 그의 유학길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나쓰코에게 얼마 되지 않아 쓰키시마는 돌아가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온다. 발작을 하고 정신을 잃는다. 속내를 드러내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쓰키시마에게 돌아오지 말라며 밀어내는 나쓰코의 단호한 모습은,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듯한 구간이었다. 세상사 풍파를 감당하기엔 너무 여리고 약한 영혼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한 위악을 일삼았지만 뜻대로 잘 되진 않았다. 결국은 자신의 병명을 받아들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소년에게 그닥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나쓰코가 왜 그리 휘둘려지기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나쓰코는 자신만의 중심이 있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게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어서라니.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 세상에 회의적이었던 소년의 표현방식이었을지라도.  그런 폭언은 되레 반발감만 들게 했다. 나쓰코의 시선으로만 모든 상황과 인물 묘사가 집중되기에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쓰키시마의 내면의 면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글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솔직히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그 시절엔 무언가 명명할 수 없는 기분과 충동에 휘말리곤 한다. 알 수 없으니 불안하고 무턱대고 부딪히기엔 두려운, 스스로도 잘 제어가 되지 않는 그런 상태. 그 부분의 묘사는 한없이 비틀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소설 구석구석 아주 잘 표현된 것 같다. 그러니 읽고 나서도 개운치 않고 뭔가 찝찝하며 어지럽기만 하다.


가독성은 좋지만 부분부분 일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나쓰코라는 인물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담은 일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누군가에겐 사소하게 느껴지지만 당사자에겐 실존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는 부분이라면 더더욱이. 내면의 담금질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될수록 어쩌면 작가의 모습이 투영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고, 객관화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이를 군데군데 많이 덜어내고 또 다시 다듬고 했을 것 같다. 작가가 만든 세계 속 그 인물과 함께 울고 힘겨워했다니 거리 유지가 퍽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유의 사소설적 특징을 배제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소설을 통해 위안과 희망을 얻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음악을 하는 작가의 본업과 더불어 듣고 읽으며 함께 치유해나갔던 게 아닐까. 그리하여 지금 자신이  왜 그토록 힘겨운건지 정의내릴 수 없었던 시기의 아이들이 그 안에서 흔들린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건 아닐까.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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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타임워프 -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를 기억하는 방법
김신현경.김주희.박차민정 지음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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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트스 타임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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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타임워프』 는 버닝썬, 강남역 살인 사건, 낙태죄, 유영철, 88올림픽, 박근혜, KTX 등등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현재 뜨거운 화두로 충격과 경악스러운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들까지, 기억의 '병치'를 통해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다각도로 바라보고 있다. 


저자들은 성 산업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학을 전공하며 가르치고 있는 교수와 연구자이다. 다수의 연구와 논문, 강의을 통해 여성학 문제를 다뤄왔던 사람들이다. 생각보다는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어서 여성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하게 된 사람에게도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 같다. 일단 큰 틀에서 다루고 있는 사례(사건들)가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부분 알만한 주요 사건들을 다뤘기 때문이다. 


작금의 여혐 전쟁과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목소리가 하나 둘씩 터져 나오는게 한편으로는 조금 생경하고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고 변화는 어려운 것이며, 아주 멀고 희박한 지점에 있을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점차 모여 외치는 목소리가 반갑기만 하다. 물론 이와중엔 본질을 오염시키는 종자들 때문에 애꿎은 피해자와 편견이 더해지고 폄훼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지만 신념과 소신으로 무게 중심을 잘 가지고 가는 이들이 있기에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저자들이 다루는 주제에 관해서도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젠더, 군대내 동성애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뤄왔는지에 대한 지점 역시 흥미로웠다. 이는 사실 크게 의식하지 않고 관심두지 않았던 부분이기에 폐쇄적인 조직내 엄격한 규율이 존재할 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그렇게 폭력적인 방식과 단순화로 행해졌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또한 방송계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폐는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손에 쥔 권력을 내려놓지 못하고 마치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검찰세력과 언론, 소위 윗선들이 행하는 부조리, 행패에 분노가 치민다. 성범죄자들은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집행유예를 받고 사회에 나와 있으며,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들에겐 온갖 조작과 가설로 함부로 씌운 프레임에 가둬두려 하고 있다. 이런 행태가 길거리의 시장 잡배의 폭력과 무엇이 다른지 모를 정도이다. 왜 가해자에게 가야 할 화살이 오로지 피해자로 향하는 것인지, 피해 입은 사실을 왜 스스로 증명해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지러운 판결의 여러 사례 중 황당한 것 중 하나가 왜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거부하지 못했고, 피하지 못했냐는 지적이다. 무지몽매함에서 오는 답답한 벽을 어떻게 깨부셔야 하는지 막막할 뿐이다. 


지금도 해결되지 못하고 어영부영 흩어져 있는 사건들은 현재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있어 알고 있었지만, 과거 88올림픽이나 변소에 대한 이야기, 유영철 사건에서 그가 했던 발언들에게 대해서는 새롭게 알아가는 부분이 있었다. 또한 양공주에서 원정녀라 칭하며 혐오하는 발언을 일삼는 그들이 성매매 자체를 소비하는 자들이라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여성은 땀을 흘리며 뛰는 모습도, 단장이 덜 된 모습도 보이면 안 됐으며, 미적인 요소로 존재해야 했다. 또다른 신분사회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여성 인권이 이제와 제자리를 찾아보려는게  왜 불만과 혐오로만 받아들이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러하다. 그동안은 민족주의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잘못을 지적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자국 내에서도 피해를 입은 사실 자체가 족쇄처럼, 주홍글씨처럼 여겨져 바깥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감추고 또 감춰야만 했기 때문이다. 


생명 존중과 사회의 성문란이란 잣대로 낙태의 선택과 권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죄라 칭하였다. 판단하기 무척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나, 왜 이런 문제를 다루는 주체가 당사자가 아닌 그 고통을 알지 못할 완전한 타인인 것인지도 황망한 현실이다. 묻지마 살인, 사이코패스 등 매체에서 다루는 이유 모를 범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나, 유독 성범죄 관련해서 많이 갖다붙이는 논제이기도 하다. 그저 여성과 약자이기에 살인과 폭력을 행한 범죄가 있었음에도 묻지마 살인이었다며, 정신감정을 통한 감형 등 병증에 집착하며 그에 따른 합당한 사유를 찾으려는 방식도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진다. 


읽는 내내 분노하고 안타까웠으며 때론 공감하기도 또,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어떤 텍스트를 읽어도, 아주 잘 읽어내야 한다는 주의문이 붙어도 '박근혜'를 말하는 텍스트에서는 역시나 거부감이 든다. 그가 '여성' 대통령으로 실패가 아닌 여성 '대통령'으로서 실패했다고 말하는 부분에는 공감하지만, 여성이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어떠한 여지라도 주는 부분에서는 공감할 수가 없다. 물론 이 책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라는 더러운 권력 아래 편안히 살아온 생에서 '여성'이라고 무얼 더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게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일 따름이다.


핸디북 같은 작은 책자 속에 다루는 내용은 거대하고 깊으며 무궁무진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나에게 여성학 입문서처럼 다가왔다. 그것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를 살펴봤기 때문에 더더욱이 그러하다. 페미니즘이라고 말할 때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아주 많다. 관련된 서적도 조금 읽어보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상상을 더해 재탄생된 문학작품도 읽어보았으나, 아직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부분도 있다. 중심을 잡기 어려울 때도 더러 있다. 자꾸만 '나'의 자리로 겹쳐보여 아프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게 더 큰 게 사실이다. 우선 이렇게 점차 모이는 목소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해갈 수 있다는 그 시작점이 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고통을 끊어낼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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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병치시킨 사건들에 현재 진행형인 사건들을 창조적으로 병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최근 헌법재판소의 낙태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명랑한 수술'과 겹쳐 본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 권리에 대한 언어와 세계가 더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서울올림픽에서 수행된 여성들의 환대 역할은 평창동계올림픽에서의 북한 여성들에 대한 집중적인 재현과 은밀한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은가? 10 · 26의 여성연예인들이 고 장자연 사건뿐 아니라 김학의 사건과 버닝썬 사건을 해석하는 새로운 단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일본군 '위안부' 기억 활동을 현재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성폭력 부정의 담론장과 병치시킨다면 앞선 기억 활동은 낯설게 응시될 수 있을 것이다.   202-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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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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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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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회피형 인간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나 기억에서 도망치고 외면하기 바쁘다. 그게 나에게는 일종의 생존방식이었던 것 같다. 모른 척 덮어두면 시간이 지나 쌓인 두꺼운 먼지 속에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보지 않아도 됐고, 그러면 그럭저럭 살만해진 듯 했다. 찌질하고 창피한 지난 날의 나는 그렇게 어두운 구멍 속에 쳐 넣어두면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사회성이 부족했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으며 수동적이기만 했다. 지금이라고 많은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나아진 듯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희석되어 괜찮아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제목에서부터 나를 콕콕 찌르는 이 책과 담고 있는 주제에서 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나의 상처와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왕따"라는 문제는 복합적인 측면이 있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절실하지만 여기엔 같은 반 학생들부터 선생님까지 방관자가 존재하고 이미 형성된 깨트릴 수 없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이를 깨고서라도 용기내 손을 내밀어 줄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했다면, 피해를 당한 학생들은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지도, 무기력하게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거란 말에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게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할 거란 말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가정을 덧붙이게 되지만.


왕따를 당한 기억을 인터뷰로 풀어내, 여자반 남자반 나눠 이야기를 한다. 언어폭력부터 물리적인 폭력까지. 그 범위와 정도는 지나치고 유해하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자각이 없는 게 태반이다. 가해자들에겐 가해자들이란 인식이 없고, 이를 오로지 피해입는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이다. 학창시절 학교는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 즉 전부와도 같다. 그곳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하게 되는 순간 손발이 묶인 듯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보면 그토록 힘든 시간에 반드시 학교에 가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를 깨닫고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도움을 청할 어른도 없고, 부모님께도 말할 수 없어 혼자서 끙끙 앓아야 하는 것뿐 세뇌당하듯 들어온 폭력적인 말에 갇혀 자신의 잘못으로 몰고 가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할 수밖에 없기도 한 것이다. 



강인한 사람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신체적으로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닌 강한 멘탈과 자존감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학교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가정폭력에 노출되기도 쉽다. 그러니 그 시간을 견디고 버텨내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인터뷰를 한 어른이 된 왕따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읽고 보며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당했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종종 스스로를 혐오하며 파괴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도 사는 것이라 믿었는데, 사실은 용기가 부족했던 것만 같다. 지나친 엄살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되돌아보면 난 왜 그토록 유리멘탈이었고, 강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원망스러웠다. 내가 당한 고통보다 나의 가족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더 괴로웠었다. 나만 당하면 그만이지 싶은 고통이 다른 부분에서 나의 형제도 같이 겪고 있었구나 싶으면 속이 너무 상했다. 밝은 빛만 전해주고 싶었는데 필요없는 어둠까지 떠안고 있었구나 싶어서. 



그래서 이들이 용기를 내어 왕따를 당했던 과거의 기억, 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그 전엔 어떤 학생이었는지, 방관자와 가해자에 대한 생각 등 고백하고 이야기하는게 지금도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이들에게, 혹은 겪었던 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는 듯했다. 



그저 텍스트로만 봤을 때도 가슴이 너무 아팠는데, 육성으로 말하는 걸 보고 들으니 울컥한 심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은 이렇게 선동과 같은 정치질에 휩쓸리지 않을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고, 솔직한 속내를 들어줄 이가 필요하다.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도 견뎌낼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그건 꼭 행운과도 같다.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오히려 그저 무난하게 학교생활을 잘 지냈을 것이고, 오히려 밝고 쾌할하게 보냈을 수도 있었다. 자존감이 바닥치지 않았을 것이고 무기력하게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이 덕분에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는 이는 정말 심지가 굳건한 사람같아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해보다는 인정이란 말이 있다. 어차피 나와는 다른, 완전한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나조차도 스스로의 본질의 근원과 어디서오는지 알 수 없는 의식, 생각들을 일일이 짚어보기 힘든데,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 하는 수밖에. 아직 가해자들까지 이해할 수 있는 관용을 가지기엔 속이 너무 좁아서. 그저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튜브라는 매체가 새로운 소통의 창구가 되어  시간이 지난 뒤에 다양한 반응이 오고 있다는 후기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꿈꿔보게 된다. 불안정하고 알 수 없기에 더욱 잔혹하고 정도를 모르는 폭력이 난무한 그 시절에 대해. 어떤 부분에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의 흔적들에 대해.



 때문에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 같다.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버텨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참고 견디면 시간은 지나가겠지만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으니, 도움을 청하고 소리쳐야 한다고. 너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트라우마란 결국 스스로를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는 일이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아직도 용기가 부족한 내겐 다소 버거운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던하게 지나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잊고 싶으니까 조금씩 흐려지는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해지는 건 기질 탓이 크지만. 



어쨌든 개인적인 얘기를 제외하고서 리뷰를 써야 하는데 그저 감정만 나열한 부끄러운 글만 남기게 되어 부끄럽지만...


상처받은 모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본다. 그래서 소중한 그들의 삶이 더욱더 찬란히 빛나고, 아름다운 기억들만 새겨지길 바란다.









(이 리뷰는 RHK 북클럽1기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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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김연경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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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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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작가가 정리한 고전문학 읽기에 대하여-



이 책은 각각의 작품속 특화된 주제나 성격에 따라 총 7개의 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근대, 야망을 다루거나 문학 이상의 역할을 한다거나 소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거나, 일상을 속속들이 보여준다거나 성장과 청춘을 말한다거나, 실존과 부조리를 다룬다거나, 문학과 정치,메타픽션을 분석한다거나 해서 말이다.


여러 시대를 걸쳐 고전문학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데는 일단 가장 먼저 작품성을 들 수 있겠다. 몇 세기가 지나도 읽히는 작품이라면 읽는 이로 하여금 매혹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게 분명하며, 마음을 잡아 끌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신뢰가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시대에 쓰인게 신통방통할 정도로 지금 현실에서의 고민을 담고 있을 때도 있으니 결국은 삶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이렇듯 여러 특장점에도 불구하고, 고전문학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이유 또한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로 번역의 문제가 들 수 있다. 작품이 써진 언어의 뉘앙스나 행간을 번역을 통해 전부 전달받기에 한계가 있으며, 특유의 번역체 문장이 가독성을 갖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번역 작업을 통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지만 현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작품이 써진 배경이 되는 나라나 문화 등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특히 길게 나열된 이름이나 복잡한 명칭, 사회적 분위기 등이 걸린다면 소화시키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전문학에 대한 입문서, 안내서 같은 설명이나 감상이 담긴 에세이나 산문집이 참 다양한 것 같다. 고전문학을 읽고 싶지만 이에 어려움을 겪는 나와 같은 일반독자라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해설보다는 부드럽고 친절한 안내서들을 통해 도움을 얻기 좋을 것이다. 그것도 직접 번역하고 공부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가 쓴 글이라면 더더욱이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 김연경은 소설가이자 문학과 창작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했고, 관련 러시아 문학 작품 여럿을 번역한 경력이 있다. 앞선 서문에서 느낀 인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쉽게 전달해주는 발화 방식에서 일단 신뢰가 간다. 단정하고 성실한 느낌을 준다. 더 넓은 문학을 읽기 위한 노력을 했고, 이 책은 이러한 자신만의 독법과 생각을 정리한 독서에세이로 보면 될 것 같다. 책이 써진 배경, 주전부리같은 지식과 어떻게, 어떤 지점을 중점적으로 짚어 가며 읽어냈는지에 대한 포인트를 삼아 공략하듯 읽어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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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독법을 서술한 이 독서에세이는 고전문학을 읽을 때 겪고 느꼈던 것들에 큰 도움을 준다. 작가의 성장배경이나 그가 삶속에서 추구하려 했던 가치나 열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요소들은 물론, 작품을 읽으면서도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이나 물음에 대해 나 혼자만 갖던 호기심은 아니었구나, 이런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 더 알기 위해 읽었던 것이구나, 이런 갈증은 당연한 것이었구나, 하는 공감도 얻게 된다.


이를테면 괴테의 대표적인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파우스트』 를 보며 가졌던 의문이 다소 해결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인간의 끊임없는 방황과 갈구, 욕망 등이 그의 인생 자체에서 드러났다는 걸 새삼 그의 삶의 배경에서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대 문학가들이 문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에 대해 갖는 견해가 각기 다른게 매우 흥미로웠다. 꼭 자신의 작품세계와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해석하였다는 걸 보는 게 또 다른 재미였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 을 두고 논하는 부분이 그러했다. 이전까지 햄릿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진 어렴풋한 인상도 다소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해석을 읽는 묘미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문학사에서도 워낙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이고, 지금까지도 당연스럽게 회자되는 작품을 쓴 주역인데 글을 잘 쓴 것도 모자라,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대중적 인지도와 풍요로운 삶으로 백년해로까지 했다니 너무 부러운 삶이라 배가 다 아플 정도였다.


반복되는 표현이지만, 어쩜 그렇게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의 성향이랄까, 특성이 맞닿아 있는지 새삼 글은 곧 창작을 하는 작가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신으로 평생 살았지만 여성의 삶은 곧 결혼이라는 명제하에서만 존중받을 수 있었던 시절 속에서 구혼에 관한 소설을 써왔던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의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창작된 작품들 속 인물의 성격과 특징, 동화의 위치를 굳건히 했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자 열과 성을 다해 아부하는 삶을 살았던 안데르센, 빅토리아 시대 하층 계급에서 시작해 전형적인 신사의 삶을 이어갔던 동화같은 디킨스의 삶, 어설프고 촌스러운 매력의 체호프처럼 말이다.


일개 독자에겐 작품의 성격에 맞닿아 있는 작가의 삶의 형태가 재밌는 배경지식처럼 느껴져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곁들여진 저자의 생각이 구절구절 공감가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부분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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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숭고의 절정을 맛본다. 죄악을 비껴 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조롱하는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는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52-53쪽



과연,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난해한 작품을 읽고 또 읽는 이유,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정복의 쾌감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74쪽



“꺼져라, 짧은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84쪽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신의 존재, 선악의 무게,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그 무게를 거부하며 자유를 쟁취한 후 '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위해 표효했던 '사자'는 곧 니체가 아니었을까.  94쪽



우리는 모두 마지못해, 적어도 엉겹결에 태어난다. 이것도 억울한데, 태어나는 순가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죽는 순간도 알지 못한다. ( …) 고전들이 경고하듯 문제는 단순히 창조가 아니라 창조 이후, 즉 조물주(신/아비)와 피조물(인간/아들)의 관계이다. 자연-신의 입이 적어질수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도 커질 것임을 명심해야겠다.  101쪽



이 소설의 사상을 대변하는 이반은‘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입장에서 출발, 만약 신이 인간을 자신의 닮은꼴로 창조했다면 왜 이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3차원(유클리드)’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모순 앞에서 그는‘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아이들의 고통과 희생을 근거로‘반역’을 선언한다.“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23쪽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암컷의 삶을 통해서만 인간일 수 있었다. 간단히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이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단, 그녀에게는 그럴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치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148쪽



작가는 작기이기에 앞서 현실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둔 생활인이라는 것, 문학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전제이다.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게는 물질적 토대, 즉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166쪽



마땅히 우화도, 그림 동화도, 그렇다고 소설도 아닌 이 매력적인 책의 장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분명하다.『어린왕자』는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장르다. 247쪽



이렇듯『변신』은 장밋빛 진보를 약속한 근대의 몽상에 , 안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물음표를 찍고 진화 대신 퇴화(인간에서 동물, 심지어 벌레로!), 상승 대신 전락, 성공 대신 실패, 축조 대신 해체를 얘기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이 조망되듯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이 밝혀진다. 266쪽



눅눅한 농담(희극)과 찝찝한 진담(비극), 즉‘체포’와‘처형’, 그사이에 위치한‘소송’은 물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덧붙여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이다. 271쪽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글쓰기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무력한 행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인간의 산물’이다. 이보다 더 숭고한 실존이 있을까. 

306-307쪽



이 세상의 눈물과 웃음의 총합은 동일하다는 식의 말도 덧붙인다. 과연 웃지 않고서야 이 당연한 부조리를 어떻게 견뎌 내랴. 311쪽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따라서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학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불한당들의 세계사』) 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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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생뚱맞지만, 지금 이토록 어지럽지만 혼란한 이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게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여전히 부와 계급 차이는 존재하지만, 과거 모든 유구한 역사를 지나 빛났던 작품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빛을 내며 생명력을 가지며, 많은 이들이 찾아 읽고 또 사유思하게 한다. 문학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당장 밥 벌어 먹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데 갖는 물음과 생각에 아주 작은 실마리만 제공해주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와중에 내 삶은 여전히 퍽퍽하고 나아지는게 하나 없는 것 같을지라도. 이와중에 문학마저 몰랐다면 더 회의적인 태도와 허무함에 몸서리 쳤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흥미로운 것들이 참으로 많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잘 쓰는 것도 참 중요하다. 그러나 돈을 버는 주체인 나는 과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의문이 과연 무의미하고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것일까.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무지하기도 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의문을 갖고 방황하며 욕망도 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바로 그런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다른 작품보다 우선적으로 셰익스피어 작품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읽고 싶은 작품이 더 많아졌다. 막연히 가졌던 어려움도 다소 해소되었다. 마냥 어려운 것이 아닌거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생각들은 이전에 했던 숱한 다짐들에 묻혀 사라질 수도 있다. 실행력은 매우 더디겠지만. 일단 실천에 옮기는 걸로, 가지고 있는 텍스트 먼저 일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이 리뷰는 출판사 민음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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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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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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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브렉시트, 폴린보티, 의식의 흐름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인 앨리 스미스의 글쓰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 인물의 기억 속을 오가는 장면 전환이 차분한 어조로 서술되지만, 때론 연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때론 모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계절 4부작 중 첫 번째로 출간된 이 작품은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십대 소녀 엘리자베스와 그 이웃인 팔십 노인 대니얼과의 특별한 우정을 다루는데 등장하는 현실의 면면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이 곳곳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 여백의 틈으로 현실이 등장할 때면 차가운 바람을 맞은 듯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여권을 재발급 받는 것 하나에도 쓸데없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행정 절차가 소모적인 관행처럼 불편함만 남기며, 혼란스러운 사회의 맨얼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니얼에 대해 혐오와 편견을 일삼던 엘리자베스의 엄마가 마지막엔 자신이 사회의 차별과 소외를 받게 된 입장에서 그에 따른 변화를 이룬 것이 생각치 못한 반전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이웃을 인터뷰해야 하는 숙제를 통해 시작된 대니얼과의 우정으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서른두 살의 미술사 강사가 되었고, 대니얼은 백한 살이 넘어 요양원에 누워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과거의 그들의 우정이 시작된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고 가는 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로 인해 피어나는 창의성과 온정이 잘 드러나게 표현되고 있다. 깊고 너른 사고 방식을 심어주듯이. 


그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폴린 보티'라는 인물이 매우 흥미롭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팝 아티스트는 당시에는 당연했을지도 모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편견과 무식하기 이를데 없는 수식어로 폄하되었기에 때때로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 스스로는 본인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지성적인 나체에 대한 언급, 크리스틴 킬러라는 여성의 스캔들을 다룬 작품, 시선의 폭력성에 맞서는 당당함이 좋았다. 어쩌면 모든 걸 다 가진 사기 캐릭터가 아닌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예술가이니 뭐 하나 흠집을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못난 이들의 어리석은 치부와 같은 공격이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우정에는 있는 그대로의 특별함을 간직한 채 두고 싶다. 대니얼이란 역할은 내게는 한 번쯤 꿈꿔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내가 엘리자베스처럼 영민하고 자신만의 감성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에게도 있었을지도 모를 특별함을 이끌어 줄 좋은 어른 사람과의 우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늘 수동적이었고, 가지고 있는 게 딱히 없었으므로 그런 인연이 없는게 당연한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들기도 한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창작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 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표현 방식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고, 여백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백을 가진 호흡은 소설보다 시적인 특성으로 표현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섬세한 묘사가 아름답다, 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여러 번 음미하듯이 반복해 읽어야 하니씩 그 의미를 아로새긴다는 느낌으로 접하기에 좋고, 오랜 여운도 남길 것 같았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두 인물간의 우정, 그 사이에 끼여든 혼란한 현실, 그리고 무의식과 기억을 오가는 지점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관계성, 계절의 변화 등 한 편의 가을 그림동화같기도 하다.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이란 나라가 배경에 있다.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휩싸인 이웃에 대해 편견과 차별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엘리자베스가 무척 사랑스러웠고, 그가 항상 무언갈 읽고 있길 바란다는 대니얼의 바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동시대성의 공감을 자아낼 거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물론 이와 같은 차별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저쪽의 낡은 행정 절차와 혼란함보단 지금의 한국 사회의 면면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사회 곳곳마다 썩은 고인 물들이 많고, 적폐는 자신이 적폐인 줄 모르고 깨인 지식인마냥 지껄이지만, 우리 사회에는 평화로운 촛불 시위를 통해 얻은 민주주의가 있으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된다.




문장이 아름다운 작품을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단순히 표현하는 방식이, 그 수식이 아름답다는 것뿐 아니라 현실 사회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기가 느껴지기에 이러한 말을 반복하게 된 것 같다.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는 표현은 묘하게 거대 장벽처럼 느껴져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들었지만, 막상 책장을 열어보니 유려한 문체와 서사를 진행하는 방식이 좋아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앨리스미스의 사계절 연작의 첫 작품이라 무척 다행이다. 다음을 기다리고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명명높은 여러 상들에 종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니 언젠가 꼭 수상 소식이 전해진다면 참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앨리 스미스라는 작가 역시 믿고 읽는 작가가 되었기에, 스스로는 결코 먼저 찾아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이 작품을 민음북클럽을 통해 알게 되어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다. 북클럽의 순기능이 아닐까.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하나씩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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