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선이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2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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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스팩타클해지는 사건 속 해미시는, 과연?!



『허풍선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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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인공 해미시의 본거지답게 로흐두는 더이상 평화롭기만한 마을이 아니다. 미스터리 소설 속 주인공이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사건이 발생되어야 하기 때문에, 로흐두는 어떠한 스펙타클함이 전제된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어부 아치나 목청 크신 웰링턴 부인 등 마을 주민들이 익숙하게 느껴져 사이사이 시트콤 같은 케미에 반가운 마음마저 든다.  


어쨌거나 전 편에서 해미시는 관계의 상실을 비롯하여 소중한 가족 타우저를 잃었으며, 해결한 사건의 결말도 씁쓸하기만 했다. 로흐두 밖은 위험하다는 해미시에게 로흐두가 더 위험한 곳이 되는 건 또 다른 전복이라 흥미롭긴 하지만, 그래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건 역시 프리실라와의 관계이다. 불편하지만 또 서로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닌, 마치 연인이 되기전 친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의 관계. 그러나 그 둘이 연인이었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그저 약혼을 했다고 말했을 뿐. 친구사이로 애매한 썸의 기류만 흐를 때가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기도. 서로에게 미련이 없는 듯 보이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향한 미련과 새로운 데이트 상대에 대한 질투, 관심이 너무 보인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미시에게는 일종의 조력자같은 인물이 없다. 마을 주민이야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일 뿐이고, 좀더 가까운 일대일 관계에서 사건을 해결하기 앞서 막히는 구간에서 논의할 수 있는 사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되레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애정전선의 상대로 등장하는 프리실라뿐이다. 그러니 사실상 이 두 사람을 완전히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여러 편을 걸쳐 그런 관계성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설이 길었던 건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쯤에서 마치고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  

자신을 모험가이자 도전 정신이 투철한 레슬링 선수 출신이라 주장하는 랜디 두건의 별명은 자칭 마초맨이다. 키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에 짧은 몸통, 곳곳에 새긴 문신, 좁은 이마와 떡이 진 곱슬머리와 가죽재킷, 가로 줄이 있는 이상한 선글라스를 끼고서 밝은 색 모자까지 쓰고 다닌다는 게 이 마초맨의 외관에 대한 묘사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새로운 인물이 주는 신선함, 화려한 무용담에 적극 호응한다. 시리즈 내내 말해왔던 고지 사람들의 특성을 보면 대략 짐작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워낙에 느긋한 성향 탓일지도 모르고, 그들 자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짓말쟁이일 뿐 아니라 이야기를 지어내는 실력도 출중한 까닭, 또는 누구의 이야기 속에서도, 특히 그들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도 허점 같은 걸 찾아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까닭이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고지 사람들은 랜디 두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6쪽


그러나 흔히 그렇듯 과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처럼 랜디의 목청만 큰, MSG만 있는 무용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 할 기회가 박탈당하기 시작하자 슬슬 질려하기 시작한다. 안 취한 날이 없을 정도로 그의 강력한 추종자와 같았던 어부 아치 매클래인은 새로운 주민인 조르디 영감이 랜디로부터 망신을 당하자 빈정이 상하게 된다. 때마침 마주친 해미시는 그들에게 청중이 사라져야 좀 사그라들 것이라며 당분간 마을 술집이 아닌 토멜성 호텔 바를 이용하라고 하고, 이로 인해 해미시와 마주치기 불편해하던 프리실라는 결국 그와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금 마을 주민들이 단골술집으로 모여들게끔 했지만, 그건 랜디 두건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의 허풍을 지적하는 조르디에게 폭력을 쓰려 했던 랜디를 저지하자, 그 상대가 되어버린 해미시는 얼결에 결투신청을 하게 되고, 곧 자신의 무모함을 후회하며 자책하게 된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관중은 늘어나고, 비웃음과 조롱만 앞두고 있던 해미시에게 전해져온 소식은 다름 아닌 결투의 날 사망한 채로 발견된 마초맨의 소식이었다.  


여기서 다시금 되짚어 보자. 해미시는 야망은 없지만 정의감은 있는 인물이다. 정이 많고, 심술궂지만 다정하기도 하다. 의도된 건지 모르겠지만 미남계가 썩 잘 먹혀들기에 일말의 바람기마저 의심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공직자답지 않게 규정은 밥 말아먹듯 어기지만,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과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해미시는 마초맨의 죽음에 한 편으론 안도하면서 한 편으론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한 순간의 호기로 인한 결투신청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조롱과 비웃음은 안 당해도 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터전 로흐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는 블레어 경감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해미시에게는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프리실라가 있으며, 해미시 역시 뛰어난 거짓말쟁이로 결투가 아닌 경고를 하려 했을 것뿐이라는 해명을 하고 일단 해고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수사에서 제외된 해미시지만,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마을 사람들을 만나며 하나씩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또다른 이주민인 로맨스 소설 작가 로지 드랄리였고, 그녀와 일종의 삼각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 어부 아치과 산림 인부 앤디를 통해 로지가 랜디로부터 모욕을 받았다는 상황을 전해듣게 된다. 직접 로지와 마주하게 된 해미시는 그녀의 경계심은 일단 해소시켰지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해선 알아내진 못한다. 


헤미시는 블레어 경감 부하 앤더슨으로부터 능숙하게 수사 경과를 전해듣는 중에 블레어에게 시달리고 있는 가여운 여인 애니 퍼거슨을 도와달라는 웰링턴 목사 부인의 청을 듣게 된다. 이미 전해들은 수사에 대한 내용으로 마을 내 독실한 신자인 애니 퍼거슨이 랜디와 내연관계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은 터였다. 애니를 만나 얘기를 듣고 마을 사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해미시.  


애니가 문을 열어주었을 때, 그는 놀랍고 경이로운 심정으로 그녀를 찬찬히 바라봤다. 누군가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그 사람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코르셋으로 몸을 단단히 여미고 잿빛 머리를 뽀글거리게 파마한 애니 퍼거슨이 두건처럼 거친 사람에게 격정적인 감정을 꼈다고 하면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98쪽 


한편 프리실라는 큰 관심은 없었지만, 일단 데이트 중이던 존 글로버라는 글래스고 은행장에게 베티라는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해미시 역시 질투에 눈이 멀어 베티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인지, 각자 마음이 있는 상대를 두고 일부러 다른 데에 눈을 돌리다니. 이런 관계의 엇갈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의 큰 오해의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해미시는 부검 결과 수면제를 먹고 잠든 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통해 범인은 랜디보다 힘이 약한 인물일 수도 있다는 추리를 해본다. 마음에 걸리는 궁금증이 있으면 반드시 해소해야 직성이 풀리는 해미시는 자신의 작전에 꼭 프리실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럴 만한 인물 (대범하면서도 센스있는)이 프리실라 뿐이기도 하지만.  


애니 퍼거슨의 집을 탐색한 결과 그녀는 결코 명예를 훼손당한 게 아니고 랜디와의 관계도 자발적인 동시에 적극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뭔가 수상한 로맨스 작가 로지의 집을 탐색해보려 꾀를 쓰는 해미시와 그에게 동조한 프리실라는 또다른 살인사건의 목격자이자 증인이 되고만다. 


뜻밖의 위기로 인해 일명 동지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 프리실라는 살인사건을 목격한 마음을 추스리며, 해미시에게 아침을 가져다 주러 간 그의 숙소에서 그와 나란히 누워있는 베티를 목격하게 된다. 그것도 해미시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웰링턴 부인과 커리 자매와 함께 말이다. 해미시는 피곤함을 핑계로 잠든 자신을 탓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오해를 풀고 싶지만, 해명하는 일도 짜증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성인이고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부도덕한 행실을 보인 것으로 마을은 금방 해미시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이 상황을 잊기 위해 더욱더 수사에 몰두하는 해미시. 


뛰어난 직관력과 집념, 그리고 뻔뻔하고도 자연스러운 거짓말쟁이 해미시는 로지 드랄리 살인사건에 범인을 훌륭히 밝혀내지만(이로 인해 그의 과오는 모두 잊혀진 듯 했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 앞에서 알 수 없는 찝찝함에 마을 사람들에게 랜디 사건의 범인은 또 따로 있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한다.


해미시의 얼굴에서 평소의 게으른 표정이 사라지고 날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제가 스트래스베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마을의 사소한 범죄에는 설렁설렁 넘어가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살인 사건은 반드시 정의가 실현되어야만 하는 범죄예요. 그리고 정의는 편리하게 자백을 해 버리는 사람에겐 절대 찾아가지 않는 법입니다. 전 계속해서 사건을 파헤칠 겁니다. 어르신, 진범을 찾을 때까지요. 진범은 누구라도 될 수 있어요." 225-226쪽


 서로를 의심하며 힘들어했던 부부 윌리와 루차 뿐 아니라, 여러 인물들에게 아직 범인은 따로 있다고 말하는 해미시는 부족한 수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노선에서 열리는 언덕 달리기에 참여해 1천 파운드의 상금을 얻기 위한 도전을 한다. 로흐두 사람들은 또 이런 구경거리에는 빠질 수 없기에 유력 우승후보와 해미시를 두고 내기를 한다. 창피를 당할까봐 걱정이었던 해미시는 뜻밖에도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총알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이런 절박함으로 목표를 달성했지만, 증거도 범인도 찾지 못한 채 강제휴가를 받고 글래스고로 향한다.  


해미시는 로지 드랄리의 전남편을 만나고 난 후 일이 더 꼬이기 시작하는데, 무심코 기자인 그 사람에게 사건을 대하는 자신의 현재 심경을 그대로 이야기 해버렸기 때문이다. 해미시가 살해위협을 받았던 사건을 무시했던 블레어 경감은 일간지에 실린 기사 때문에 현재 심리중인 사건에 대해 알려지는 것에 대해 당황한 데이비엇 총경의 명대로 해미시를 긴급수배하기에 이른다. 실종상태가 된 해미시. 경찰에 잡히기 전에 꼭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변장을 하고, 대담하게 경찰서 내부로 들어가 자료를 살펴보기까지 하며 결국 진실에 다다르게 된다. 


한편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진범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 프리실라는 곧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를 감지한 해미시는 다급하게 프리실라를 구하기 위해 내달리고, 마침내 그 위기에서 무사히 그녀를 구출해낸다. 하지만 여러 사건을 같이 겪었다해도 실제로 목숨이 위협박은 적이 처음이었던 프리실라는 그 충격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지만, 해미시를 보고 안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건 해미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건은 해결하고 프리실라도 무사히 구해냈지만,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지친 발걸음으로 프리실라를 만나고, 둘은 같은 위험을 겪어냄으로써 다시금 애정을 느끼는 듯 했다.


그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경찰이 나한테 아예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급도 원치 않고 여행도 싫어하는 걸 보면 난 어디가 굉장히 잘못된 사람이 아닐까요?" 

 프리실라는 갑작스럽게 애정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그를 바라봤다. "아, 해미시, 지금까지 난 당신이 제발 빈둥거리지 말고 자기 인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뭐라도 해 보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 왔어요! 하지만 어쩌면 당신은 우리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뭔가를 가졌는지도 몰라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자라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였죠?"  331쪽 


그리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로흐두 마을 풍경 묘사


또 하루가 밝은 태양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서리가 살짝 끼어 있는 맑은 날이었다. 산등성이의 고사리는 황금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고, 마가목은 주홍색 열매로 무거웠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문 앞에 마가목이 한 그루씩 서 있었다. 귀신을 쫓아 준다고 알려진 나무였는데, 다들 귀신 같은 건 안 믿는다고 큰 소리를 펑펑 쳐 댔지만, 속으로는 혹시 모르니 만약에 대비해서 집 밖에 마가목 한 그루가 서 있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337-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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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여기까지, 마을 사람들의 애정인듯 애정아닌 관심 덕분에 해고의 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또 다시 엇갈린 타이밍으로 두 사람은 어긋나버린다. 이건 꼭 작가님의 농간 같다. 반드시 두 사람이 이루어질 것처럼, 특별한 관계성을 보여주면서도 결코 이어주지 않는. 한 편 한 편 지날수록 사건은 점차 커져가고 긴장감이 한층 더해지는 것 같아 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기능은 아주 충실히 해내는 것 같아 정말 이건 꼭 소장하여 두고두고 읽을 시리즈라고 단언하고 싶다. 특히 프리실라가 범인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을 때, 해미시가 그녀를 구하기 위한 필사적인 움직임은 영상으로 보는 듯 생생하게 잘 그려졌기 때문이다.  


올해 해미시 맥베스의 출간예정인 작품 수는 두 편이 더 남아 있다니 너무 설레고 기쁜 마음이다. 다음 편은 아마 '치과의사의 죽음'이 될까, 이건 또 로흐두마을에서일까, 아님 해미시의 독단적이고, 야망은 없지만 사건 해결의 의지는 강력한 능력을 깊이 산 다른 지역으로의 발령에서 비롯될까. 상상하는 기다림도 좋다. 하지만 이제 좀 한 사람한테만 잘하면 좋겠다는 소소한 기대를 해본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해미시 맥베스 순경 독자단 3기' 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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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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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는 불신자에게 가고 믿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죽은 자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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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의 새로운 '핀' 시리즈는 해당 출판사 문예잡지의 기획으로부터 시작된 듯 하다. 시와 소설 분야 모두 라인업이 워낙 짱짱하니 이건 작가이름만 보고도 당연히 읽어봐야 할 것으로 정의해도 무방하다. (※ 다음 이미지 출처 : 현대문학 블로그 )





그리하여 핀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 작품의 주인공은 편혜영 작가이다. 예전에 선배로부터 여러 책을 물려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편혜영 작가의 『아오이 가든』도 함께 있었다. 좋은 선배를 두었지만, 게으른 후배인지라 관심 있는 시집은 다 읽었지만 소설은 잘 찾지 않았다. 이제야 인연이 닿아 편혜영 작가님의 소설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너무 늦게 안 게 한탄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핀 시리즈의 판형도 한 손에 잡히는 사이즈라 좋다. 무엇보다 새 책, 그 종이의 냄새가 너무 좋았다. 그게 묘하게도 이번 작품의 성질과도 잘 어울리는 듯 했다. 뭐든 안 어울릴까 싶지만, 그렇게 의미부여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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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불미스런 일로 인해 이인시 선도병원으로 내려오게 된다. 직속상관은 아니지만 비슷한 업무를 해온 이석은 병원 내 평판이 좋은 편이지만, 뒷말이 많은 직원이다. 무주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전임자인 이름으로 부르는 송에게 무시당하는 듯해 기분이 상하지만(물론 송이 예의 없는 방식으로 무주를 대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다), 이석의 여러가지 도움 덕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된다. 


조선업의 발달로 성장해나가던 이인시는 조선업의 몰락과 함께 점점 황량한 도시로 변해가고, 이에 병원은 존폐 위기에 닥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병원은 새로운 수익원을 찾고자 프로젝트 팀을 꾸리게 되고, 이석의 추천 등으로 새 팀에 투입된 무주는 생각지 못한 데서 이석의 비리를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이석에게는  아픈 아이가 있고, 기계에 의존하여 겨우 생명을 연장하는 아이를 위해 애쓰고 있는 이석을 보며 무주는 갈등하게 된다.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세계는 애초 구球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40-41쪽

  

아이는 엄마와 함께 규칙적이고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파도나 바람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전적인 생의 의지로 뛰었다. 가만히 지켜보면 꽤나 믿음직한 속도와 간격이었다. 뭉클했다. 가냘프지만 끈질기게 아내와 더불어 숨 쉬는 아기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랬다. 50쪽

  

아이를 둘러싼 불안정한 물결의 흔들림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미래에 아이가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면 이석의 일을 모른 체했을 것이다. 이석의 아이를 떠올리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57쪽

  

장부를 보자마자 무주는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들은 다 똑같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거로부터 온 목소리였다. 무주는 그 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였고,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리라 쉽게 단정했다. 짐작이 맞았을 때는 자못 통쾌했다. 거의 모든 구매 건에서 리베이트를 찾아내어 몹시 흥분했다. 잘못된 것을 적시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자신만 비리를 저지른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84-85쪽

  

그러나 이내 이석의 비리가 아이가 아프기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무주에게도 기적처럼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 앞에 결심하게 된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는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무주는 '정의'라는 선택으로, 내부고발을 하게 된다.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반응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길 때쯤, 죄책감에 시달리는 무주에게 더 큰 시련이 다가오게 된다. 


갑작스럽게 그만 둔 이석은, 전날 원장과 큰 다툼을 했으며, 무엇보다 무주가 작성했던 이석에 대한 글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석의 뒤에서 좋지 않은 말을 내뱉던 직원들은 어느새 그 화살을 무주에게 돌리며, 이석의 갑작스러운 사직의 이유를 무주의 배신으로 비롯된 것이라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한다.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게 된 무주는 자신이 맡았던 일에서도 밀려나게 되고, 복잡한 심경으로 힘들어하는 무주에게 차마 유산 소식을 알리지 못한 아내 역시 무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무주는 그 모든 가능성을 지닌 아이를 잃었다. 질서와 명분을 잃었다. 선하고 바르려는 의지를 잃었다. 이석도 아이를 잃었다. 삶을 다 바쳐 살리려던 아이를 잃었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병원은 차라리 거대한 장례식장이었다. 가족을 잃게 되리라는 소식을 듣는 곳이었다. 사무장 말이 맞았다. 병원에서는 누군가 죽기 마련이었다. 93쪽


그때쯤 병원에는 의문의 의료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때마침 이석의 아이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과 함께 무주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거세지자, 무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터뜨리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경고를 하며, 점점 더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고립되어 간다.  



몸은 힘들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무주보다 상황이 나쁜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유령 같은 도시를 배회하느니 아픈 사람이 가득 들어찬 병원 창구에 앉아 있는 게 나았다. 적어도 병원은 바깥 거리처럼 황량하거나 적막하지 않았다. 몸이 아픈 것보다 가책을 느끼거나 외로운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책은 아무리 심해도 육체적 통증을 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기도 했다. 117-118쪽


무주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알아서 나가라는 병원에서 꿋꿋하게 버티며 야간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이석에게 향했던 감정 또한 처음엔 당혹스러움, 그다음엔 미안함과 죄책감이었으나, 이내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자 이석의 비리를 알고 있다면 자신을 이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석의 아이를 생각하면 여전히 자신의 선택이 고통스러웠지만, 이석의 사직 이후, 무주에게 벌어진 일들로 인해 원망만 쌓이게 된다.  


야간 근무를 서며 가까워진 보안 직원 효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다시금 겪게 되는 무주. 자살 시도한 아들을 병원에 데려올 때 차비를 아끼고자 버스를 타고 온 검소한 노부부부터, 자신의 부모이지만 다 죽어가는 노인을 왜 살려냈냐며 치료비를 낼 수 없다는 자식들 등. 씁쓸하고 아픈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근무 시간대가 바뀌자 아내와의 대화가 더 어려워진 무주는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 채 주저하게 되고, 지친 아내는 친정을 가는 일이 잦아지다, 서울로 직장을 잡고 이사를 하여 무주와는 떨어져 살기 시작한다. 



울음을 삼키려고 말없이 뜨거운 국물을 입에 넣는데 돌연 그런 감정이 자연스러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항상 어리숙하다는 평가를 받고 계속 미안해하고 용서받은 걸 감사해야 하는 관계 말이다. 133쪽

  

“(…) 『마태복음』 8장에 이런 구절이 있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계속 곱씹었어. 예수는 인자하고 자비롭다면서 죽은 사람한테 왜 이러나, 사람이 죽었는데 이렇게 야박해도 되나…… 이해할 수 없었지. 한참 새기니까 조금 알 것도 같더라고.” 

“무슨 뜻인데요?”

“영혼이 죽은 자는 내게 필요 없다, 불신자는 불신자에게 가고 믿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건 믿는 자로 충분하다는 뜻이려나.” 140쪽


이때쯤 병원 원장은 비리 등으로 퇴출 당하고, 새로운 원장과 더불어 이석의 복직이 결정된다. 기존의 직책보다 더 높은 위치로. 그러나 다시 돌아온 이석이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한 무주. 병원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처럼, 무주는 야간근무에서 본래 근무시간대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번엔 미납 병원비 추징의 업무를 맡게 된다.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같이 터뜨리자는 박 앞에서 아무말 할 수 없던 무주는 미납 병원비를 받기 위해 다소 강압적인 태도로 환자와 보호자를 대하게 된다.


이석 또한 무주에게 알고 있는 것을 알려 달라고 하지만, 무주는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고통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를 통해 무주는 또다른 진실의 이면을 알게 된다. 이석의 그만두게 된 사유도 자신이 짐작하고 죄책감을 가졌던 일과 전혀 다르다는 것, 그 이면에는 이석과 효와의 관계성과 이석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다는 것과 더불어 다른 직원들을 몰아붙이기 일쑤였던 사무장의 이기적인 속내 또한 알게 된다. 무주는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자신을 언제고 다시 부르겠다는 옛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간다. 별 소득 없는 말만 계속 늘어놓다, 전화를 핑계로 뒤돌아서 가는 과장의 뒷모습을 보며 뒤따르던 무주는 이내 우뚝 멈춰선다. 무심결에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 만나게 되었지만, 역시나 전하고 싶은 마음은 잘 전하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된다. 


새 프로젝트의 다른 팀원이었던 권에게서 전화가 오고, 병원에는 재차 큰일이 발생됐는데, 문득 자신의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고 무단결근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병원에 닥친 큰일이란, 사무장의 그동안 저질렀던 수많은 비리와 함께 현재 진행중인 요양시설 투자금을 가지고 달아났다는 것과 이석이 이전 무주가 한 내부고발로 인해 횡령 혐의로 고발됐다는 것, 무단 결근한 자신이 같은 한 패로 엮여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주는 되레 이런 상황들이 무언가 완결되었다 느껴졌고, 완전히 빈손이 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본다. 자신과 아내에게 소중했던 작고 여린 아이를 지키고자 복부에 손을 포개며 조심히 걷던 아내의 모습, 그 모습을 기대어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무주. 이번만큼은 자신의 할 말이 무엇인지, 뭘 전달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다.



무언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기분도 들었다. 아직도 남은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였다. 같은 일이 반복될 줄 알면서도 다른 사무장이나 인수자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

무주는 자신에게 남은 것을 애써 생각했다. 태내 아이를 보호하려고 두 손을 복부에 포개고 어색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내가 떠올랐다. 의지가 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기대어 간절히 무슨 말인가 시작하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대학병원에서 있었던 일부터 모두 털어놓을 작정이었다.그런 다음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번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225-226쪽



**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 속에 많은 사건들과 불편한 진실들이 교차되어 펼쳐진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대개 비슷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에도 처음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치부하다, 결국 그 유혹에 서서히 물들어 가고 익숙해져 간다는 것, 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보며 안도한다는 것, 나의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을 보며 위안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은 그렇게 이기적인 동물이다.


큰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되는 것에 반해 소설 속 분위기는 고요하게만 느껴진다. 아마 덤덤한 표현과 문장들로 자연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것 싶다. 한때는 발전과 부흥을 이뤘으나, 이제는 황폐함과 생의 의지를 잃은 사람들만 남은 도시에서 병원은 마치 장례식장과 같다는 무주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병원은 사람이 살아나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죽는 곳이기도 하다. 죽는 게 별다른 일이 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병원이라는 공간은 늘 일말의 두려움과 불편함이 함께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내게 병원은 그런 곳이었다. 가야 할 곳이지만, 가기 두려운 곳, 보고 싶지 않은 죽음을 목도해야만 하는 곳. 새하얗고 시린, 시퍼렇고 서늘한 이미지가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무주의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 처음 정의를 향한 것이었대도, 결국 또 다른 자신을 찌른 격으로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을 향하게 되는 결과 남기게 된다. 실질적인 죄를 행한 중심인물 즉, 그런 죄를 행한 자들은 번듯이 잘 살아가고 있다. 혼자 끌어안고 가야 할 짐을 떠안은 것은 모두어설픈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 역시 이를 통해 얻은 '권력'이라는 힘에 취하기도 했으니, 그 무거움을 아주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돌아간 무주가 아주 실패한 인생이라고만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다시 노력해볼 여지가 있는 관계도 있고 의지도 남아 있다. 차리리 해소되지 못했던 지난 잘못을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계기와 발판이 되어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무주가 머물렀고, 잠시간의 기쁨과 고통, 힘든 선택과 죄책감,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의 심신을 지치게 했던 이인시는 황폐한 도시의 전형 같았다. 한때는 빛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젠 모든 게 무너지고 남은 게 없는 황량한 공간.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곳. 이인시는 무주와 이석의 관계성은 물론 여러 인물 군상들 속 내면을 대변해주는 듯한 공간이다. 감추고 싶었으나 드러날 수밖에 없는 치부나 더럽게 여겨지는 욕망, 그러나 진실, 어두움으로 치환되는 내면의 여러 얼굴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가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렇게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무용지물의 존재로 그저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정말이지 난감하기만 하다. 편혜영 작가님의 소설 『죽은 자로 하여금』은 그러한 어둡고 도망치고 싶은 내면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 작품 같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판 첫 작품인 이 소설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만은 않다. 그러나 다음이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낯선 충격이, 묘하게 이는 파동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진실은 아픈 것이지만 아니 볼 수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삶은 진창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것이므로, 그 무거운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조금만 덜 물러서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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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맨
슈테판 보너.안네 바이스 지음, 함미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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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리얼리즘, 지독한 현실의 극치!




『베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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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맨』을 읽은 소감은 한마디로 골 때린다, 라고 말하고 싶은 동시에 끝내 지독한 현실을 마주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책 표지 상단에 '소설인 척 소설이 아닌 하이퍼 리얼리즘의 끝판왕'이라는 문장은 이 작품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다. 그래서 하이퍼 리얼리즘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고 찾아보니...극사실주의적 표현 예술양식이라고 한다.

 

** 하이퍼리얼리즘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주의적 화면구성을 추구하는 예술양식. (출처:문학비평용어사전) 


** 베타맨 

확고한 역할 모델의 부재로 인해 갈피를 못 잡는 현대의 남성을 일컫는 말 


이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하며 당황했던 점 첫 번째는 역시 저자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한 두 주인공이었다. 그럼 이름만 차용해 온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다 읽고 난 후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되 몇몇 인물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수정된 부분이 있다고 하니, 대체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렇게  적나라했고, 읽는 내내 불통 터지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게 모두 설명이 된다. 


안네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결국 헤어지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미래가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찰나에 직장에서 만나게 된 새로운 인물, 슈테판을 보며 첫 눈에 자신의 이상형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여자친구 마야를 소개하는 그를 보며 유감이라며 마음을 접는 안네. 보통의 소설이었다면 이 둘의 관계성으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얽히고설킨 서사가 진행되는지 약간의 말미라도 주었을 텐데. 단 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이 싹을 딱 잘라 시작한다. 왜냐, 이 작품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매와도 같은 사이로 때로는 짜증유발 직장 동료인 두 사람의 각각의 이야기로, 크게 두 갈래의 이야기가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형식이다. 모두 스물네 개의 챕터에서 서로 번갈아가며 시점이 바뀐다. 처음엔 산만하고 너무 흩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이내 곧 내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귀결되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본격적인 재미가 시작되는 건 아무래도 안네와 슈테판 이들의 성격이라든지, 성향을 일부 파악하고서였다. 


제목처럼, 슈테판은 외할머니와 어머니 손에서 자라 자신의 보고 배울 남성성에 대한 갈망을 가지며, 상남자를 꿈꾸는 여린 인간이다. 그런 그에게는 여러 친구들이 있고, 그중에는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마르코가 있다. 어느 날 마르코는 자신이 아이 아빠가 된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이야기만 들어도 아찔한 슈테판에게 마야는 울며 말한다. 이 둔한 인간아, 나 임신했어, 당신도 이제 아이 아빠가 된다고! 라며 갑작스러운 책임감과 남자다움에 대해 강요받게 된다. 


그러나 슈테판은 아버지 없이 자라왔고, 늘 강인한 남성성에 대한 열망과 갈증을 가지고 있지만 해소되지 않은 채로 살아온 인물이다.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빠 되기, 남자 되기의 길을 찾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이어진다. 우습게도 본성만 선한 전형적인 찌질남의 선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기에 읽는 내내 울화통이 치민 기분을 간만에 느껴보게 됐다. 


한없이 서툴기만 한 슈테판. 그러나 상남자란 무엇이며, 그가 추구하며 되고 싶은 그 남성성의 본질은 무엇인지 오리무중하다. 그것도 잘 하려고 노력할수록 안좋은 방향과 결과로 이어진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묻고 싶기도 하다. 과하지만 않으면 부족하지 않게 잘 마칠 수 있을 것들도 결국엔 회피성에 불과하며, 실패를 거듭한다. 마치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 실험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마야가 언뜻 언뜻 던져주는 기회에 장인과의 관계를 개선해보려 자리를 갖지만, 독주를 피하기 위한 꼼수, 못질 노동을 피하기 위한 술수는 잘 넘어갈 수 있었던 기회를 모조리 날려버리는 동시에 더 깎일 점수도 없을 정도로 마이너스 굴을 파 내려 가기 일쑤다. 마야의 태도 역시 슈테판의 서툰 행보에 더 불을 붙이는 격이 된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것들 모두 그의 경쟁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랬지만...글쎄...굳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 비로소 이 인물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부 빌렘을 만나는 과정도 너무 허무하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이런 막장 스토리가 다 있나 싶지만, 종국엔 해피엔딩이니 이 또한 괜찮은 삶 아닌가 싶고. 


슈테판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건 어느 시대, 어떤 나라건 비슷한 편견과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집안 일은 여자가 하는 게 당연한 거며, 육아는 공동이 아닌 도와준다는 식의 표현, 이에 공감하고 주체적으로 실행하는 건 게이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은 반발심을 불러 일으키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구나, 거기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를 실감하게 한다. 


그래서 슈테판이 찌질하기만 한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실패했지만, 그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얻었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전달하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평생을 약속했다. 은근 진국인 인물같기도 하고.


반면 안네는 이렇게도 운이 없을까 싶을 정도로 남자 복이 없다. 마치 넌 이 세상에 어차피 홀로 와 홀로 떠나는 것임을 명시하며 살라는 운명의 계시라도 새겨진 듯, 만나는 남자마다, 꿈꿔왔던 이성마다 하나같이 안네를 지치게 하고 실망시키기 바쁘다. 그건 아주 어릴 적부터 지속된 경험이라는 게 더 서글프다. 선망했던 대상으로부터 린치를 당하기도 하며, 좋아하는 일의 연장선에서 직업적으로 만난 상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것도 모자라, 운명처럼 다시 만난 인물이 염치불구한 부탁을 하거나, 바람이 나거나. 정말 인내심의 경지에 다다라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만 같은 안네이다. 예전 룸메이트 산드라는 자유로운 연애사상을 추구하는 여성으로 여러 만남 끝에 한 사람에게 정착하게 되는데, 그 과정도 뜻밖으로 보인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랬는데, 산드라는 그 기적을 행한 셈이다. 


소개팅도 실패, 과거의 인연과의 만남도 실패, 소개팅 사이트의 주선 만남도 실패. 이상한 남자들과 엮이는 안네는 지치기만 했는데, 자신을 위기로부터 구해준 인물과 뜻밖의 재회 끝에, 심지어 사랑에 빠져 이제야 행복해지나 싶었는데...역시 지독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안네. 


출산하고 아이를 키워나가는 경험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처럼 종용하는 카챠의 말에 흔들리는 안네는 커리어보다 가정이 우선시 될 수도 있음을 감내하려고 하지만, 경력단절은 무슨, 계속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전업주부의 삶을 꿈꾼다면서 집안을 개차반으로 어질러 놓고도 도움이라곤 1도 안되는 볼프강의 뒤치닥꺼리까지 해야 했다. 심지어 연봉 협상을 시도하며 승진을 꿈꾸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슈테판과는 다르게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데도 그 중압감과 책임감이 부담스럽다며 복에 겨운 소리를 하시는 볼프강은 진상밉상말세의 끝을 보여준다. 승진의 기회도 그의 바깥으로 보여지는 매력으로 인한 것이었을 뿐. 겉만 번지르르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룸메이트의 진상 짓도 받아들여 줬고, 그동안의 악연도 모두 끊어내고 드디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나 싶었는데 좌절과 더불어 더 큰 상처만 주고 떠난 것도 모자라 다시 질척대는 꼴이라니, 마지막 한방이 없었다면 숨이 막혔을 것 같다. 솔로 라이프를 즐기는 결론으로 안네의 지리멸렬한 연애스토리는 일단 종지부를 맺는 듯 싶지만. 안네의 이상형이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를 꿈꾼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연달아 좌절되는 걸 보면, 그것 또한 환상이 아닌가 싶다. 그래, 현실엔 멋지고 좋은 남자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게 내 남자가 아닐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짚어 준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 안네에게도 좋은 인연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




성별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둔 것 같지만, 결국엔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무의식에 박힌, 나도 모르게 머릿 속에 새겨진 편견에 대해 다시 한번 심도 있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인 것 같다. 웃픈 현실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래서 대체 남성성이란 무엇이고, 여성성이란 무엇일까. 이것 모두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어떻게 정의하는 게 맞는 걸까. 확실한 답을 하기엔 어려운 논제기 아닌가 싶다. 하지만 늘 염두해두고 생각해 볼 만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그래, 일단 소설. 이 작품에는 두 중심 인물 외에도 매력적인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내가 느끼기에 인간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은 마르코오 패티 아버지 요한 두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두 사람을 고르게 되었지만, 두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다. 서툰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따뜻한 품을 가진 사람들.


이러한 인물들의 매력을 잘 살려주는 데에는 좋은 번역이 뒷받침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원서를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르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읽어나갈 때 어려움이 덜 했고, 무엇보다 맛깔난 지방 사투리와 술 취해 혀 꼬인 말투가 잘 전달됐다.


독특한 시작점도 그러하거니와 구성 방식도 한 몫 든든히 했는데, 중간 중간 등장하는 기사나 인용구들은 이어지는 이야기들에 좋은 양념이 되어 주었다. 장수는 부담스러웠지만, 초중반만 잘 넘기면 이 골 때리는 극현실스토리 웃으면서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말했지.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자신이 관심을 기울였던 어떤 일을 했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겠지. 그런 비딱하고 구태의연한 가족 부양자로서의 역할 모델이니, 요즘 남자는 이러저러 해야 한다며 성별에 국한해 떠드는 헛소리들은 모두 잊어버려라. 너 생긴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 그리고 네가 정말로 즐거워하는 걸 해." 444쪽



우리는 모두 개별체입니다. 이 개개의 '우리'가 빚어내는 차별성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흥미로워지고, 우리의 사회는 다양해지고 생존력을 더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등과 정의는 삶에 대한 극도로 다양한 생각들을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남자니, 여자니 하는 성별 문제는 아마도 부차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505쪽





  (이 리뷰는 소담출판사 '꼼꼼평가단7기' 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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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모든 퍼즐이 맞춰졌을 때의 희열이란!




『화이트 래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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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황당하게도 자칭 유괴 전문 프로 우사기타 다카노리의 인질 농성 사건 한 달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시작한다. 그렇다.  우사기타 디카노리는 수상한  유괴전문 벤처기업에서 인질 매입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여느 때와 같이 파트너인 이노다 마사루와 무사히 일을 마치고 사랑하는 아내 와타코를 떠올리던 그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오게 된다. 


바로 "네 아내를 유괴했다"는 전화. 우사기타가 다니는 벤처기업의 젊은 대표 이나바는 공감능력 상실에 타고난 재능을 기이한 폭력성으로 환산하여 돈을 버는 작자로 악질 중의 악질로 등장한다. 여기서 문제란 우사기타의 파트너 이노다가 잠깐 언급했듯이 컨설턴트 '오리오오리오'라는 작자가 회사의 경리 직원에게 접근해 회사 돈을 가로 챘다는 것이었다. 당장 내일 거래를 위한 송금을 위해선 컨설턴트라는 자를 찾아 돈을 되찾아야 하지만, 본디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뛰는 건 대표의 본질이 맞지 않으니, 절실함을 빌미로 직원인 우시가타를 지목, 그의 소중한 약점이 된 와타코를 유괴해 오리오의 행방을 찾기에 이른다.



주식을 대량으로 구입한다. 법안을 통과시킨다. 법률을 위반한다. 법률을 엄수한다. 수술을 하지 않는다. 수술을 한다. 사고를 일으킨다. 물건을 훔친다. 예술가를 후원한다. 예술가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인질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그런 일을 부탁한다. 15쪽 


이에 우시기타는 다급히 오리오오리오 가방에 넣어둔 GPS로 위치를 확인한 후, 그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센다이시의 어느 단독주택으로 침입한다.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이는 이 집엔 젊은 청년과 그의 어머니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무언가를 감추듯 한 수상한 분위기와 2층에 숨어 있어 잡히게 된 아버지라는 사람을 낯설어 하는 이들에게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 그리고 인질교환, 교섭을 위한 달려온 경찰들에게 방송을 통해 오리오오리오를 찾아내라며 농성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 잠깐 생뚱맞게 등장하는 빈집털이 삼인방이 등장하는데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리하기를 좋아하는 구로사와, 갖가지 제복을 수집하는 나카무라, 그의 부하 많이 엉뚱한 이마무라가 있다. 이들의 범행 수칙도 독특하지만 무엇보다 대화법이 진짜 독특했다.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핑퐁처럼 톡톡 튀는 대화 방식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우사기타는 아내를 탈환하기 위한 농성을 벌이게 되지만 일은 이미 그가 오리오오리오의 GPS를 따라 한 가정집에 침입한 순간부터 모든 게 꼬이게 된다. 그래서 일은 무사히 해결되냐,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맞다. 다행히 권선징악의 법칙은 무사히 수행되고, 일이 해결되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관계가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짐작한 것들이 하나씩 맞아 떨어질 때의 재미도 있었지만, 저 사람 대체 왜 저런 걸까, 했던 인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는 정말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름이 돋았다.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 날아가는 듯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서문에 스스로를 미스터리 소설 작가로 정의하며, 깜짝 놀랄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목표에는 아주 성공적으로 도달한 듯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초반에는 진입 장벽이 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서사가 진행되며 서술하는 방식이 낯설게도 작가가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작가의 개입을,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하지만 점차 이야기를 풀어갈수록 중요한 순간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있기도 했다. 마치 그 극 속에 우리를 끌어들여 놓고는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해 보시죠, 하고... 유인할 땐 언제고 유유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지만, 너무 헤매지는 말라는 듯 사건 개요에 대해 친절하게 이것 저것 떡밥과 배경 설명을 해줬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설 초반을 읽어나가는 독자는 이리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놈의 오리온자리, 지긋지긋한 오리온자리, 레 미제라블 같으니, 하고.

그래서 흰 토끼 사건이란 뭔데? 하고.

(우사기타의 이름에써 따온 건지 알 수 없지만, 오리온자리와 토끼 이야기는 또다른 유머포인트일까?! 흰 토끼 사건이라 불리는 데의 배경은 이야기 속의 깜짝 포인트처럼 등장한다.)


중간중간 샛길로 새는 구성 방식이 조금 산만하게 느껴져도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이후의 전개에서 하나씩 차근히 밝혀지는 진실이, 그저 짐작하고 예상한 것들이 맞아 떨어지기도, 또는 완전히 다른 진실로 드러나게 되니 말이다. 

하나의 매듭이 풀리기 시작하면, 모든 사건이 하나씩 착착 해결되어간다. 초반에 열심히 꼬아놓고, 반복하며 설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사건 해결은 물론 이 사건을 통해 변화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교섭을 하는 경찰 중에는 사고로 인해 소중한 가족을 모두 잃고 빈 껍데기로 살아가는 나쓰노메 수사과장이 있다. 이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철저히 주변 인물을 이용하는데, 바로 그의 직속 부하인 가스카베의 시선으로 그를 설명하는 점이 그러했다. 그가 어떤 이면으로 살아가고 있건, 일단은 정의로운 경찰이었기에 그리고 빈 껍데기로 살아 기고 있었기에 일이 잘 풀리기도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괜찮은 척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었기에 의심을 하였고, 의심을 해결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해소되지 못한 자신 안의 매듭을 살짝 풀어내고 다시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나쓰노메 과장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게 아닐까.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그와 관련해서 좋은 문장과 표현들로 인해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쓰노메 과장의 내면은 그때 공백으로 변했다. 내가 상상하기에는 그렇다.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심정과 감정을 전부 버린 것 아닐까. 최악의 사태로 떡칠이 된 마음이라는 캔버스를 깎아 내어 억지로 흰색 바탕으로 되돌렸다. 

그 후로 나쓰노메 과장에게 감정이란 하얀 캔버스에 물로 그리는 그림과 다를 바 없다. 과장은 언제나 척을 한다. 즐거운 척, 슬픈 척, 살아 있는 척, 옛날의 자신인 척을. 60쪽 


그 순간 나는 주변의 주택이 싹 사라지고 온통 풀로 뒤덮인 구릉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하늘이 너무나 넓고 검어서 거대한 눈동자가 이쪽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고 작은 별을 손가락으로 이어 나가는 데 푹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저 별들을 연결해서 사냥꾼 오리온이라고 하자. 그럼 이게 오리온의 목숨을 빼앗은 전갈이다. 그런 말을 주고받는 순간, 새카만 하늘에 선으로만 그린 그림이 입체감을 지닌 실체가 되어 떠오른다.  181쪽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다. 그 말마따나 나쓰노메는 날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사건과 크고 작은 다양한 잡일에 힘쓰며, 지금은 이렇게 딸과 함께 걷고 있다. 우주를 기준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할 시간을 슬로모션처럼 늘려서 자신들의 인생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건 그것대로 득을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쓰노메 아이카는 얼마 안 되나마 주어진 '찰나'의 시간조차 제대로 다 사용하지 못하고 죽었다.  186쪽


"일은" 하고 나쓰노메 과장은 독백하듯이 말을 흘렸다. "인생의 대부분을 먹어 치우는 괴물 같아." 

"일이 없으면 인생을 계속 영위할 수 없겠죠." 

"괴물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 셈인가." 208쪽 


나쓰노메는 뭉게뭉게 퍼져 나가는 붉은 연기에 감싸이며 내면의 불결함이 빨려 나가는 듯한, 부스럼 딱지 같은 정신의 갑옷이 벗겨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마치 발치에서 꽃이 피어오르고, 천장에는 딸처럼 생긴 별자리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302쪽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미스터리, 추리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탐정'이고, 이 탐정의 역할을 한 '구로사와' 라는 인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던진 한 마디로 인해 한 가정이, 고통 받던 시간들을 끝내고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움츠리고 피하기만 했던 현실의 벽에 거세게 부딪힌 결과가 희망적이라 다행스러웠다. 


"정상이 아니야. 그딴 집에 살면 하루하루가 어두운 터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기분일걸. 한없이 이어지는 좁고 어두운 터널 말이야. 인생이 끝날 때나 돼서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겠지. 그럴 바에는 좀 난폭하게 터널 벽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편이 나아. 오본과 설날을 계기로." 257쪽 



**



그리고 새삼 느끼게 된 건 역시 '이사카 고타로'의 여러 정체성 중에 작가 스스로 주장하듯 미스터리 소설 작가가 맞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발칙하게도 뻔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되돌아보니 그의 작품은 몇 편 읽어 본 기억이 있고, 그것도 꽤 좋아했었다는 게 떠올랐다. 접한 작품들도 하나 같이 독특했고, 참신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웃기게도 도둑 주제에 낭만적 연설을 늘어놓는 '명랑한 갱' 시리즈도 그렇고, '사신 치바'도 그러하고. 매력적인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도 같다. 유해한 존재들이 무해하게 느껴지다니. 굉장한 장점이다.



드라마의 화면 전환하는 구성 방식, 편집점을 만들어 놓은 듯 뚝뚝 끊어 전개했기 때문에 이건 영상화로 만들어내기도 좋은 작품이다. 언젠가는 TV화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그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한 몫 든든히 했으니, 작가가 읽은 어느 작품의 소개처럼.

'누워서 읽다가 어느 부분에 다다르면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킨다.'를 경험해보고픈 독자들은 기꺼이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을 집어 들기를!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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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꾼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1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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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코지 미스터리계의 웰메이드 작품!




『잔소리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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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의 열 한 번째 작품이 출간됐다. 전편 『아도니스의 죽음』에서는 해미시의 인생의 또 한번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었다. 바라지 않았건만 얻었던 자리인 경사에서 순경으로 좌천되었고, 비공식적이지만 로흐두 마을 내 공식적인 약혼자 프리실라와도 파혼을 하게 되었다. 일과 사랑을 동시에 잃었다고 해야 하나, 원점으로 되돌아갔다고 해야 하나.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그에겐 휴식이 정말 필요했다. 

침울하기도 하지만, 주변의 눈초리에 더 불편한 해미시. 자신도 마음을 다친 건 매한가지인데, 애초에 넘볼 자리를 잘못 보고 덤볐다는 듯이 애정을 가지고 살폈던 마을 사람들 하나같이 해미시의 행동과 잘못에 대해 탓하기만 한다. 

해미시는 자신이 원하던 여행지는 아니지만, 우연히 보게 된 신문기사의 민박집 '프랜들리 하우스'의 광고를 보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전 작품에서도 활약했듯이 사기꾼으로 보이는 점쟁이 앵거스의 구설수 예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로. 그러나  이게 우연히 들어맞은 건지, 아님 정말 용한 점쟁이의 점괘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해미시는 휴가지에서 결코 평온한 휴식을 얻지 못한다. 불쌍한 해미시.



그는 썰물을 한가로이 바라보았다. 하늘은 진줏빛이었고, 아름답고 조용한 늦은 오후였다. 고요한 공기 중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머리 위를 갈매기들이 느릿느릿하게 선회했다. 81쪽 

그렇게 해미시의 영혼의 동반자와도 같은 타우저와 함께 휴가지로 떠났건만, 과장광고임에 틀림없는 프랜들리 하우스는 초라한 티타임과 부실하고 위생불량한 식사, 그냥저냥 쓸만한 숙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끊임없이 잔소리와 구박을 일삼는 밥 해리스와 부인 도리스 해리스. 단골손님 같은 화목한 가족 더모트 브렛과 아내 준 브랫 그들의 딸 해더 브랫, 일탈을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 트레이시 핑크와 셰릴 겜블, 젠틀하지만 도리스 해리스와의 정분이 날 듯한, 불화를 싫어하는 해미시의 걱정을 더해주려 듯한 퇴역군인 앤드루 버거, 전직 교사이자 해미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여인 펠리시티 거너리, 양심불량 민박집 부부 핼리 로저스와 리즈 로저스가 등장한다. 

늘 그렇듯이 우리의 주인공이 가는 길은 피곤하게도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주인공의 활약할 무대가 주어져야지만 활력을 띠는 게 미스터리 소설의 법칙과도 같기에 당연한 수순이지만.

물론 해미시는 어떠한 사건에도 끼어들 의도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건의 전조로 보이는 두 남녀의 눈맞춤이라든지, 끝없이 세상 모든 불평을 아내에게 퍼붓다 못해 폭행까지 휘두르는 밥 해리스 덕에 해미시는 결국 사건에 휘말리고야 만다. 

한밤 중에 소란을 일으키는 민페객에게 한방 시원하게 날렸다가, 조사받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당시 밥 해리스에게 폭력과 좋지 못한 언행을 그만 두라는 해미시만의 위협적 발언을 투숙객 모두가 듣고야 말았는데, 나중엔 이 잔소리꾼이 정말 죽은 채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최초 발견자가 해미시 본인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그러나 해미시는 늘 인명을 우선시하는 경찰이기에 열심히 인공호흡도 해보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인 이 사람. 밥 해리스와 오해를 풀기 위해선 영락없이 범인을 추적해야만 하는 해미시.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짖궂지만 다정한 모습도 여실히 보여주며 사건 해결에 힘쓴다.


폐소 공포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는 가려고 일어섰다. "차 한잔 마시고 가요." 그녀가 말했다. 벌겨벗겨진 외로움이 그녀의 눈에서 황급히 튀어나왔다. 외롭지 않을 리가 없지, 해미시는 생각했다. 고약하고 성가신 늙은이. 하지만 그는 다시 앉았다. 언젠가는 그도 늙고 고약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차를 마시고 그녀의 스콘이 세계 최고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그녀가 쏟아 내는 불만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108-109쪽 


"이보세요, 로저스 씨. 정도껏 하셔아죠. 이 똥 같은 거 치우고 먹을 만한 걸 내오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관광청과 보건당국에 신고할 테니까요." 125쪽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다행히 꽉 막힌 전개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의 활약을 듣게 된 담당 경찰 샌디 디컨 경감은 추후 해미시의 사건 해결능력에 의존하며, 실리의 표본을 보여준다. 그 곁엔 여자여서 차별받는 것에 대한 불만을 여자여서 할 수 있는 행동으로 기회를 얻으려는 매기 도널드가 등장한다. 우직한 여성 캐릭터가 없다는 게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해미시의 미남계는 여전히 잘 통하는 듯하고, 의도치 않았다해도... 러브 라인이 생기려나 했지만, 금방 무산되고 만다.  

그 사이 갖가지 오해가 생겼다 풀리기도 하고, 또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사건은 아무래도 타우저의 죽음이었다. 세월의 흔적이야 비켜나갈 수 없다고는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 앞에 해미시는 모든 것을 상실한 듯  상심할 수밖에 없다. 그의 가족이었자, 친구였다. 일상은 물론 경찰로서 일할 때조차 항상 옆에 있어주었던 존재이기에, 이 모든 게 갑작스럽기만 하고 혼란스럽게만 느껴진다.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이 녀석아, 다 큰 녀석이." 해미시가 타우저에게 다가갔다. 그는 타우저의 거친 털에 손을 얹었다가 이내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는 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흔들던 손을 문득 거두었다. 크나큰 고통의 검은 파도가 그를 에워샀다.   
 타우저가 죽었다. 135쪽 


매기는 디컨 경감의 지시로 해미시가 로흐두로 돌아가 타우저를 묻어주기 위해 되돌아가는 길을 동행하게 된다. 

그들 앞에 첩첩산중이 펼쳐져 있었다. 산 위의 구름이 빛줄기로 갈라져 있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사들이 사다리로 썼을 법한 모양이었다. 딱히 감성적이지 않은 매기마저 전율이 이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마치 어떤 기이한 야만의 땅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140쪽

그를 외면하며 상처를 줬던 로흐두 마을 사람들은 해미시의 사정을 알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타우저를 보내는 엄숙한 장례식을 함께 치른다. 그것도 복장도 신경써 갖춰 입고서 온 마음으로 상실과 애도를 표한다. 다시 한번 마을의 정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는 듯 했다. 미우나 고우나 정다운 이웃이라는 것일까. 

이따금씩 타우저의 흔적과 빈 자리를 떠올리면서 수사에 집중하게 되는 해미시.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기자 친척인 로리의 정보통과 널리 퍼져 있는 해미시가 사람들과의 연락으로 차근차근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씩 찾게 된다. 그와중에 밝혀지는 곁다리 사연이랄까, 불법 식품 유통과 불륜, 그리고 시한부, 새로운 시작 등 인물간의 관계성도 묘하게 맞물려가고, 또 다시 해체되기도 한다.

워낙 여러 사연들이 등장하고, 여러 인물들이 얽혀 있기에 스피드한 전개라기보다 짜임새가 촘촘한 스토리 라인에 지루해할 틈 없이 재밌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해미시 특유의 비꼬는 듯한 익살스러운 유머가 있기에 재밌긴 했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더 읽을 거리가 많아 즐거웠다.

여전히 직관적인 추리력으로 사건을 무사히 해결해가는 해미시, 이번에는 무사히 증거도 찾았건만 범인의 사정과 마지막 결정이 너무 안타깝고, 역시 인간이란 욕망의 동물인가 싶어서 씁쓸해졌다. 그렇게 모든 걸 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안타깝기만 했다.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싶고, 사람은 모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의 기준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싶다. 사랑이 전부였기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대신 이뤄주고 싶었던 소박한 바람이 어쨌거나 한 생명을 앗아가게 됐고, 그게 공공의 적이자 인류의 해충같은 존재일지라도 그것을 함부로 판단할 권리는 타자에게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해미시의 휴가는 결국 물거품이 된 셈이다. 승진과 공로에 별 욕심없는 해미시와 블레어 경감만큼의 욕심을 가졌지만 그보다는 인정(?)이 있는 디컨 경감과 해미시의 티키타카. 모두가 윈윈하는 결말이 됐다.



"잊었습니다. '경감님'. 제가 어쩌다 보니 휴가중이어야 하는데, 라는 미친 생각을 하고 있었지 뭡니까."
"뭐, 휴가가 아니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잊자고. 자네는 겉보기와 다르게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라고 정평이 나있더군. 이 사건이 자네 관할 구역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세.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나?" 182쪽


 디컨은 다시 앉아 책상 서랍을 열고 봉투를 하나 꺼냈다. 
"내 밑에서 일하느라 휴가를 망쳤으니, 여기 동봉한 게 보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해미시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 450파운드가 들어 있었다. 감히 경찰에게 뇌물을 주다니, 하는 게 처음 든 생각이었다. 뒤이어 상관이 부하에게 주는 뇌물은 뇌물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실용적인 생각이 따랐다……그렇지 않은가?
 그는 봉투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저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경감님." 
 디컨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311쪽

이번 편에서는 프리실라의 등장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름을 언급한 것은 빼고서. 그래서 다음 편에서의 둘의 관계성을 다시 어떻게 풀어낼 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해미시의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은 치유받지 못했으며, 가족같은 타우저마저 잃었다. 온전히 혼자의 삶이 돼버린 그가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나갈 것인지. 좋은 쪽으로 풀리기를 바랄 뿐이다. 로흐두 덕후 해미시는 다시 마을 속으로 틀어박히게 된다. 해미시에게는 '이불 밖은 위험해'가 아니라,'로흐두 밖은 위험해'인 셈이다. 주로 경찰서 일로 인해 이동하여 근무하거나, 근처 마을을 돌았었는데 이번엔 휴가지라 더 색다른 스토리가 많이 나왔던 것 같다. 다음 사건이 벌어질 공간은 어디일지, 어떤 괴짜들이 등장할 것인지도 기대된다. 


 웬 인생의 낭비인가, 그것도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후 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네, 사나워진 심정으로 해미시는 생각했다. 거너리 양, 그래서 당신이 이 모든 걸 보고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책상 서랍에서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랐다. 올해는 그도 어디가 됐든 휴가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로흐두에 눌러앉아서 낚시나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로흐두 밖 세상은 사악했다. 319쪽


**


이번 작품의 서두에는 작가님의 친서와 같은 인사말이 담겨 있다.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는 건 작가님의 로흐두 마을의 배경이 된 서덜랜드에 대한 충만한 애정이 듬뿍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미시 시리즈를 읽다 보면 주변 풍경과 사람에 대한 묘사에 정성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훌륭한 필력과 다채로운 스토리가 구성되어 함께 어우러지니 재밌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지 미스터리의 '코지'는 편안함이나 안락함 등을 뜻한다고 한다. 즉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추리소설 장르인 것이다. 또한 코지 미스터리는 생각보다 오래된 장르로써, 등장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이나 가십 등이 중심이 되는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범인을 추적해나가는데 주요 실마리가 된다. 


코지 미스터리를 알게 되고 접한 뒤에 가장 많이 추천받고 읽게 되는 것은 조앤 플루크의 컵케이크 살인사건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컵케이크, 쿠키 등이 들어가는 살인사건이라니, 심지어 주인공은 쿠기가게의 주인이다. 물론 로맨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삼각관계도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 이 시리즈는 맛있는 디저트들의 잦은 등장으로 허기짐의 고통을 더해준다면,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는 정말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로흐두 마을을 관광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때론 그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상상마저 하게 된다. 


모든 걸 잃게 된 주인공의 휴가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을 보자니, 하나씩 쌓아 왔던 작가의 내공이 순간 폭발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해미시 맥베스는 코지 미스터리계의 웰메이드 작품이다라는 생각을 감히 해보았다. 이는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언제든 믿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자국에서 사랑받는 작가라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요즘과 같은 오락가락한 날씨와 미세먼지의 답답한 공기 속에서 멜랑꼴리한 기분을 해소시켜줄 훌륭한 시리즈이다.


해미시, 또 언제 만나볼 수 있는 걸까요. 다음 편이 너무 기다려집니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독자단 3기' 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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