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모든 퍼즐이 맞춰졌을 때의 희열이란!




『화이트 래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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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황당하게도 자칭 유괴 전문 프로 우사기타 다카노리의 인질 농성 사건 한 달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시작한다. 그렇다.  우사기타 디카노리는 수상한  유괴전문 벤처기업에서 인질 매입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여느 때와 같이 파트너인 이노다 마사루와 무사히 일을 마치고 사랑하는 아내 와타코를 떠올리던 그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오게 된다. 


바로 "네 아내를 유괴했다"는 전화. 우사기타가 다니는 벤처기업의 젊은 대표 이나바는 공감능력 상실에 타고난 재능을 기이한 폭력성으로 환산하여 돈을 버는 작자로 악질 중의 악질로 등장한다. 여기서 문제란 우사기타의 파트너 이노다가 잠깐 언급했듯이 컨설턴트 '오리오오리오'라는 작자가 회사의 경리 직원에게 접근해 회사 돈을 가로 챘다는 것이었다. 당장 내일 거래를 위한 송금을 위해선 컨설턴트라는 자를 찾아 돈을 되찾아야 하지만, 본디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뛰는 건 대표의 본질이 맞지 않으니, 절실함을 빌미로 직원인 우시가타를 지목, 그의 소중한 약점이 된 와타코를 유괴해 오리오의 행방을 찾기에 이른다.



주식을 대량으로 구입한다. 법안을 통과시킨다. 법률을 위반한다. 법률을 엄수한다. 수술을 하지 않는다. 수술을 한다. 사고를 일으킨다. 물건을 훔친다. 예술가를 후원한다. 예술가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인질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그런 일을 부탁한다. 15쪽 


이에 우시기타는 다급히 오리오오리오 가방에 넣어둔 GPS로 위치를 확인한 후, 그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센다이시의 어느 단독주택으로 침입한다.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이는 이 집엔 젊은 청년과 그의 어머니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무언가를 감추듯 한 수상한 분위기와 2층에 숨어 있어 잡히게 된 아버지라는 사람을 낯설어 하는 이들에게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 그리고 인질교환, 교섭을 위한 달려온 경찰들에게 방송을 통해 오리오오리오를 찾아내라며 농성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 잠깐 생뚱맞게 등장하는 빈집털이 삼인방이 등장하는데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리하기를 좋아하는 구로사와, 갖가지 제복을 수집하는 나카무라, 그의 부하 많이 엉뚱한 이마무라가 있다. 이들의 범행 수칙도 독특하지만 무엇보다 대화법이 진짜 독특했다.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핑퐁처럼 톡톡 튀는 대화 방식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우사기타는 아내를 탈환하기 위한 농성을 벌이게 되지만 일은 이미 그가 오리오오리오의 GPS를 따라 한 가정집에 침입한 순간부터 모든 게 꼬이게 된다. 그래서 일은 무사히 해결되냐,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맞다. 다행히 권선징악의 법칙은 무사히 수행되고, 일이 해결되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관계가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짐작한 것들이 하나씩 맞아 떨어질 때의 재미도 있었지만, 저 사람 대체 왜 저런 걸까, 했던 인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는 정말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름이 돋았다.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 날아가는 듯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서문에 스스로를 미스터리 소설 작가로 정의하며, 깜짝 놀랄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목표에는 아주 성공적으로 도달한 듯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초반에는 진입 장벽이 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서사가 진행되며 서술하는 방식이 낯설게도 작가가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작가의 개입을,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하지만 점차 이야기를 풀어갈수록 중요한 순간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있기도 했다. 마치 그 극 속에 우리를 끌어들여 놓고는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해 보시죠, 하고... 유인할 땐 언제고 유유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지만, 너무 헤매지는 말라는 듯 사건 개요에 대해 친절하게 이것 저것 떡밥과 배경 설명을 해줬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설 초반을 읽어나가는 독자는 이리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놈의 오리온자리, 지긋지긋한 오리온자리, 레 미제라블 같으니, 하고.

그래서 흰 토끼 사건이란 뭔데? 하고.

(우사기타의 이름에써 따온 건지 알 수 없지만, 오리온자리와 토끼 이야기는 또다른 유머포인트일까?! 흰 토끼 사건이라 불리는 데의 배경은 이야기 속의 깜짝 포인트처럼 등장한다.)


중간중간 샛길로 새는 구성 방식이 조금 산만하게 느껴져도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이후의 전개에서 하나씩 차근히 밝혀지는 진실이, 그저 짐작하고 예상한 것들이 맞아 떨어지기도, 또는 완전히 다른 진실로 드러나게 되니 말이다. 

하나의 매듭이 풀리기 시작하면, 모든 사건이 하나씩 착착 해결되어간다. 초반에 열심히 꼬아놓고, 반복하며 설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사건 해결은 물론 이 사건을 통해 변화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교섭을 하는 경찰 중에는 사고로 인해 소중한 가족을 모두 잃고 빈 껍데기로 살아가는 나쓰노메 수사과장이 있다. 이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철저히 주변 인물을 이용하는데, 바로 그의 직속 부하인 가스카베의 시선으로 그를 설명하는 점이 그러했다. 그가 어떤 이면으로 살아가고 있건, 일단은 정의로운 경찰이었기에 그리고 빈 껍데기로 살아 기고 있었기에 일이 잘 풀리기도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괜찮은 척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었기에 의심을 하였고, 의심을 해결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해소되지 못한 자신 안의 매듭을 살짝 풀어내고 다시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나쓰노메 과장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게 아닐까.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그와 관련해서 좋은 문장과 표현들로 인해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쓰노메 과장의 내면은 그때 공백으로 변했다. 내가 상상하기에는 그렇다.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심정과 감정을 전부 버린 것 아닐까. 최악의 사태로 떡칠이 된 마음이라는 캔버스를 깎아 내어 억지로 흰색 바탕으로 되돌렸다. 

그 후로 나쓰노메 과장에게 감정이란 하얀 캔버스에 물로 그리는 그림과 다를 바 없다. 과장은 언제나 척을 한다. 즐거운 척, 슬픈 척, 살아 있는 척, 옛날의 자신인 척을. 60쪽 


그 순간 나는 주변의 주택이 싹 사라지고 온통 풀로 뒤덮인 구릉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하늘이 너무나 넓고 검어서 거대한 눈동자가 이쪽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고 작은 별을 손가락으로 이어 나가는 데 푹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저 별들을 연결해서 사냥꾼 오리온이라고 하자. 그럼 이게 오리온의 목숨을 빼앗은 전갈이다. 그런 말을 주고받는 순간, 새카만 하늘에 선으로만 그린 그림이 입체감을 지닌 실체가 되어 떠오른다.  181쪽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다. 그 말마따나 나쓰노메는 날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사건과 크고 작은 다양한 잡일에 힘쓰며, 지금은 이렇게 딸과 함께 걷고 있다. 우주를 기준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할 시간을 슬로모션처럼 늘려서 자신들의 인생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건 그것대로 득을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쓰노메 아이카는 얼마 안 되나마 주어진 '찰나'의 시간조차 제대로 다 사용하지 못하고 죽었다.  186쪽


"일은" 하고 나쓰노메 과장은 독백하듯이 말을 흘렸다. "인생의 대부분을 먹어 치우는 괴물 같아." 

"일이 없으면 인생을 계속 영위할 수 없겠죠." 

"괴물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 셈인가." 208쪽 


나쓰노메는 뭉게뭉게 퍼져 나가는 붉은 연기에 감싸이며 내면의 불결함이 빨려 나가는 듯한, 부스럼 딱지 같은 정신의 갑옷이 벗겨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마치 발치에서 꽃이 피어오르고, 천장에는 딸처럼 생긴 별자리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302쪽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미스터리, 추리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탐정'이고, 이 탐정의 역할을 한 '구로사와' 라는 인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던진 한 마디로 인해 한 가정이, 고통 받던 시간들을 끝내고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움츠리고 피하기만 했던 현실의 벽에 거세게 부딪힌 결과가 희망적이라 다행스러웠다. 


"정상이 아니야. 그딴 집에 살면 하루하루가 어두운 터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기분일걸. 한없이 이어지는 좁고 어두운 터널 말이야. 인생이 끝날 때나 돼서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겠지. 그럴 바에는 좀 난폭하게 터널 벽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편이 나아. 오본과 설날을 계기로."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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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삼 느끼게 된 건 역시 '이사카 고타로'의 여러 정체성 중에 작가 스스로 주장하듯 미스터리 소설 작가가 맞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발칙하게도 뻔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되돌아보니 그의 작품은 몇 편 읽어 본 기억이 있고, 그것도 꽤 좋아했었다는 게 떠올랐다. 접한 작품들도 하나 같이 독특했고, 참신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웃기게도 도둑 주제에 낭만적 연설을 늘어놓는 '명랑한 갱' 시리즈도 그렇고, '사신 치바'도 그러하고. 매력적인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도 같다. 유해한 존재들이 무해하게 느껴지다니. 굉장한 장점이다.



드라마의 화면 전환하는 구성 방식, 편집점을 만들어 놓은 듯 뚝뚝 끊어 전개했기 때문에 이건 영상화로 만들어내기도 좋은 작품이다. 언젠가는 TV화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그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한 몫 든든히 했으니, 작가가 읽은 어느 작품의 소개처럼.

'누워서 읽다가 어느 부분에 다다르면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킨다.'를 경험해보고픈 독자들은 기꺼이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을 집어 들기를!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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