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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 광주 ㅣ 걸어본다 9
김형중 지음 / 난다 / 2016년 10월
평점 :
광주에 사는 평론가 K를 따라 걷기,
평론가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평론가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이 책은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것이 다름 없는데, 우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나왔고, 평론가 K씨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기 때문이다. 태어나 지금까지 이 도시를 벗어나 본 적이 없으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평론가 K처럼 고향이라는 개념이 마냥 낯설기만 하기도 해서. 민주화 항쟁에 대한 것을 뺀다면 도무지 큰 특징이랄 것도 없어서. 문화예술의 도시라는 수식어와는 무색하게, 문화예술이 그렇게 잘 살아남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에. 이 도시에 대해선 그냥 나고 자란 곳이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K는 글 쓰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 같다. 서문에서 이미 자기고백을 통해 말하고 있다. '광주'에 대한 글쓰기 제의가 들어 왔으나, 거절할 수도 있으면서 글 욕심에 무조건 한다고 한 후, 후회할 자신에 대해. 그리고 K라는 이름 뒤에, 익명성 아닌 익명성을 담보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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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태어난다는 것>
K가 나고 자란 곳은 송정리 도산동 쪽이다. K는 무척 염세적인 사람인데, 그런 유형의 인간이 되기까지 주변 환경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새벽녘 집을 지나가는 기차 고동소리라든지, 아버지의 영화 취향이라든지, 상상과 물려받은 듯한 감성 유전자, 동네 골목 분위기, 아픈 형 등. 차례로 훑어나가기 시작한다. 익숙한 지명이 처음부터 나와서 반가웠다. 송정리에는 내가 다닌 학교가 있고, 나의 친한 친구가 살고 있다.
K는 자신의 정체성? 존재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머인지, 위트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길을 돌고 돌아 겨우 건네는 듯한 말로 덤덤하게. 그리고 피식거리게 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태어남 이전에 '나' 따위는 있었을 리 없으니까. 따라서 저 문장이 정확해지려면 '송정리라 불리는 곳에서 우연하게 발생에 성공한 어떤 단백질 합성물이 20년을 경과하는 동안 K라 불리는 한 존재로 되어갔다' 라고 정정되어야 맞다. 23쪽
고향이란 그런 것이다. 시쳇말로 고향은 항상 내 안에 있는 법이다. 송정리는 자신의 형질을 나누어 많은 '나'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K였다. 송정리는 아무리 부인해도 K의 일부였다. 24쪽
1980년 학생운동, K는 송정리를 '식반자(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촌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몰랐던 옛 광주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광주 공항 근처 공군부대에는 미군이 주둔해 있었고, 그들 부대 주변은 클럽촌과 유흥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미군이 빠져나간 자리에 대신 들어선 외국인 노동자들, '명동'이라 불리는 번화가 이야기도 등장한다. 1003번지 골목의 변화. 지금은 다문화먹거리가 형성된 골목. 황룡강은 K의 친구를 앗아간 무서운 공간의 이미지에서 자전거 길이 확보되며 활기찬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뭐랄까, K는 송정리가 이제 '식반자촌'이 아니라 '주변부다문화촌'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자라던 때나 지금이나 송정리는 어딘가 보편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논리적 비약을 무릅 쓴다면, 송정리는 항상 한국이었다. 아니, 한국식 근대화의 이면이었다. 39쪽
<2부 구도심에서>
송정역도 많이 변화하였다. 그 몸집도 커졌다 작아졌다, 지금은 다시 커졌다. 호남선의 노선이 송정역과 이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변시설을 확대시키기 위해 1913 송정역시장도 개설되었다. 지하철의 노선은 하나이고, 이는 금남로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지역 주민들을 위한 노선이라기도 애매하다. 금남로는 여러 상징적 특성을 지닌 곳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번화가인 충장로와 예술의 거리 사이 대로일 뿐이다. 지하엔 지하철이 다니고, 지상엔 버스와 택시가 다닌다. 추억이 깃든 과거의 상점들 이야기도 흥미롭다. 나의 대학생활에는 그런 곳이 없었다. 모두 사라지고 프랜차이즈 상점들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난 낭만 또는 사회와의 치열한 싸움이 있기 이전에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정말 우습게도 그랬다. 학교와 집만을 오갔기 때문에 추억의 장소랄 것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학교 중앙도서관 뿐이었다. 많은 장서들을 보면 괜히 든든했었다.
여튼간에 광주 지하철은 아직 하나의 노선 밖에 없다. 이에 K는 말한다. 전남 도민이 공정인 용무를 보기 위해 거쳐갔으므로, 금남로는 완전히 공정인 거리라고.
1987년 6월 중순의 어는 날은 그보다 더 선명히 기억한다. (…) 금남로1가 광주은행 본점 사거리에서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네 방향에서 전진해도 군중들이 서로 만났던 순가, 누군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고작 <아리랑>과 <애국가>였다.
방석복과 투구를 빼앗긴 전경들이 군중들 앞에 무뤂 꿇어 않아 있었고, 멀리 도청이 보였고, 이것도 '승리'란 생각이 들었고, '역사'란 단어가 자꾸 떠올랐고, 그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고, 인간이란 종이 대단해 보였고,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내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
합쳐지는 것의 위대함이 K의 몸속에 일종의 '획득형질'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K는 사람들이 합쳐지는 장면, 목소리가 더해지는 장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장면을 보면 어김없이 콧날이 시큰해진다.
(…) 그게 다 금남로에서 얻은 K의 획득형질이다. 49쪽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획득하고 계급이 없고 죽음의 공포도 없는 시공, 인간의 유한성이 극복되고 따라서 시간이 의미를 갖지 않는 시공, 어떤 희귀한 열정이 있어 일단 그것이 주체들을 장악해버리고 나면 그 어떤 세속적 감각과 번뇌도 사라지게 되는 시공, 그것을 최정운은 '절대공동체'라고 명명한다. 51-52쪽
K가 말하는 광주란 '틈'이다. 순간적이었던 절대공동체의 경험자 이후의 긴 상실감 사이에 벌어진 틈. 때문에 광주 사람들이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매달린 것들에 대한 분석이 이어지는데, 꽤나 흥미롭다. '광주는 무엇인가' 가 특히.
광주는 '자신 안의 더 자신같은 어떤 것', 1980년 5월의 그 하루 자신들이 겪었거나 겪었따고 여겼던 그 '무엇', 그것을 다른 것들에 투사하면서 지금의 광주가 되었던 것이다. 53쪽
K가 광주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거리 곳곳을 걷는 것이 주요 테마이기에, 이야기 말미에는 그 거리를 걸으며 들었던 음악도 제시되어 있다. 읽으면서 궁금한 곡들은 찾아 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란 소모하는 것이라는 K의 말에 공감한다. 산업의 생산과는 다른 차원의 양상을 띠고 있다. K는 문화에 관한 생각들을 바디우의 이론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꽤나 직설적인 어조로.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본능을 넘어선 소비행위를 통해 문화가 생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문화란 필요적 소비를 제외한 잉여적 소비 행위에서 시작한다. 아무런 대가나 재상산에 대한 기대 없이 내가 가진 자산과 시간과 에너지의 일부를 사유와 아름다움을 위해 기꺼이 탕진할 때만 진정한 문화로 탄생한다. 71쪽
이에 문화와 광주가 겉돌고 있다는 K의 의견에 적극 공감했다. 문화적 바탕이 될만한 것들이 미처 형성되기도 전에 과도한 공간만 들어섰을 뿐, 이게 진정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너무 고요하고 미로 같은 공간이 말이다. 그럴 듯한 수식어를 붙인 사업 속에 실속이 있는지도 의문스럽고, 문화와 산업이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 온통 의문투성이다. 안타깝기도 하다. 나 역시 그 공간의 역할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장로에서 광주천을 지나 사직동 인근에 다다르면 낙후된 한 동네가 나온다. 양림동이다. 최근 양림동은 되레 낙후되었기에 훗날 명소가 될 요소를 갖추게 되었다. 관광자원화 사업을 통해 그 시대의 향수와 가난도 상품화된 것이다. 양림동은 그런 묘한 구석이 있는 곳이다. 선교활동으로 종교가 전파되기도 했으며, 가난을 품고 있었다고도 하니 더욱 그렇다. 1930년의 그 시절을 재현하는 양림살롱, 문화가 있는 날의 행사는 특히 흥미롭다. 참여해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광주에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극장이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광주 시내에 있던 무등시네마도 사라진 지 오래고, 그나마 구관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광주극장'뿐이다. 독립예술영화관. 1935년 10월에 개장한 곳. 마치 극장이라기 보다, 공연장 같은 상영관에 커다란 스크린, 손으로 그린 영화 입간판, 낡은 건물 특유의 먼지 냄새. 교차 상영이란 없고 시간별로 한 편씩만 상영되는 단일상영관. 광주극장의 대표라는 사람도 K가 아는 인물인 듯 하다. 물욕 없이 그저 자리만 지키는 사람인 듯 하다. 이처럼 K가 좋아하는 인물들이 꾸려가는 광주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3부 일요일에>
말 그대로 일요일에 K가 취미로 즐길 법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야구, 동물원, 시장
여기서도 역시 광주의 예전 얼굴을 보는 일은 신기했다. 우치동물원에 이전하기 이전에 있던 곳은 사직공원이었다는 것. 대인동의 또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고, 그 부활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미술이었다는 것. 2008년 비엔날레 공공 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복덕방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실현된 장소가 사라질 위험에 처한 대인시장 일대였다는 것. 지금은 대인 야시장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다. 전시와 공연, 벽화 기념품 노점상, 예술공연장이 되기도 하며, 젊은 예술인들의 모임도 형성됐다. 먹거리도 일품이라고 한다.
<4부 죽는다는 것>
K는 광주 거리 곳곳, 먼 길을 돌아왔다. 진정 다뤄야 할 이야기들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차근차근 걸어온 것 같다. 우리는 그 죽음들에 대해 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되고, 함부로 오염되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 근간이 되었음에 함부로 떠들어선 안 되는 것이다. 전두환의 뿌리를 잇는 한 야당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자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의무적으로 들었고, 배웠던 역사에 대해 누리고 산 자들의 헛소리는 참으로 들어주기 힘들다. 감히 폭도라 부르다니. 그저 우리의 이웃이었고,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일반 시민이었을 뿐이다.
K는 아버지의 죽음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기념'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애도가 끝나지 않은 사건은 기념할 수 없다. 현재진행형이니까……. 애도가 끝난 사건만이 기념이 될 수 있다. 지난 일이니까(최근 K는 세월호 참사를 두고도 어떤 이율배반에 빠진 적이 있다. 넋이 나간 듯한 몰골의 유가족들을 보면서 그는 차마 애도는 종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다.) 5.18은 그 애도 과정을 거의 종결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국립묘지의 위용 앞에서, K의 마음은 항상 모순적이다. 163쪽
신화도 늙게 마련이고, 그 이면에는 추한 이야기들도 섞여드는 법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자들의 태도와 의지 여하에 따라서, 그 속도는 충분히 지연될 수 있는 것 아닐까.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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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가진 그 특유의 감성(염세주의 감성?)도 내력이지 않을까. 그의 아버지, 형으로부터 물려 내려온, 그래서 직설적이나 신중한 면에 공감했고, 한편으로는 살짝 뒷걸음치게 만드는 구석도 있었다. 대체로 K가 말하는 광주는 흥미로웠고, 광주의 옛 얼굴들과 흔적들을 찾아가는 길이 의미 깊은 일이었다. 평론가 특유의 어조는 이미 몸에 배인 것인지 또 다른 매력요소 같다. 시인의 쓰는 에세이와 소설가가 쓴 에세이와는 또 다른 재미를 지니고 있다. 고향의 부재에 대한 생각에 광주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더 즐거웠던 독서였다. 광주를 알고 싶다면 K의 이야기를 따라 함께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